어제 재부 무학테니스클럽 월례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월례대회는 매월 둘째주 토요일 오후에 온천장에서 열린다.
전자공고로 들어가는 골목 중간쯤 우측편에 '이주홍 문학관'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이 길을 몇번 지나다니면서도 시간이 없어 한번 둘러보지 못했는데
어제는 허심청 결혼식장에 갔다가 조금 시간적 여유가 있어
한번 둘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주홍 선생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는데 지방신문에 가끔 기사가 실려서
그저 문학인으로 꽤나 알려진 분이구나 싶었다.
차를 길가에 세워두고 골목을 따라 들어갔더니
문학관은 일반가정집을 새로 개조하여 지은 듯한 2층구조였다.
1층에는 강연장이고 2층에는 이주홍 선생의 유품과 문학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가에 대한 소개, 작품활동, 그외 문학적 족적들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사단법인 이주홍문학재단 이사장인 강남주씨는 이주홍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 하고 있다.
"향파 이주홀 선생은 우리나라에 개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1906년에 태어나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공간, 한국전쟁, 근대화와
군사독재시기라는 고난의 한국근대사와 마주 하면서 1987년
작고하기 까지 오로지 문학과 예술과 학자의 길을 걸어온 분이다.
향파는 1928년 '신소년'이란 아동잡지에 동화 [배암색기의 무도]를 발표한 이래
60 여년 동안 아동문학, 소설, 시, 희곡, 시나리오, 수필,번역 등
문학의 전 분야에 걸쳐 오롯하게 작품활동을 해 왔을 뿐 아니라
그림, 서예, 연극, 음악 등 모든 예술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하고 정열적인 활동을 하신 작가요, 예술가이다.
향파는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우뚝 선 작가이다.
반세기가 넘는 60 여년의 작품활동과 200여권에 이르는 작품집,
그리고 우수한 문학성을 가진 작품들을 가진 대가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문학사에서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향파가 작고한지 15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향파의 생애나
문학활동에 대한 전모는 완전히 밝혀져 있지 않다.
최근에 이르러 향파의 잊혀진 자료들이 소개되고, 또한 많은 학자들과
평론가들의 연구성과에 힘입어 새롭게 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반가로운 일이다."
이주홍문학재단은 그동안 향파의 문학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부산수산대학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1980년 이주홍 아동문학상 운영위원회를 만들고, 1981년 제1회 이주홍아동문학상을 시상했다.
그후 2002년 사단법인 이주홍문학재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문학관으로 들어서자 먼저 왔던 관람자는 단 한명으로 한번 둘러보고는
문을 열고 휙 나가버렸다.
1층 넓은 강연장겸 전시장에는 벽에 기념사진과 벽쪽에는
옛날 '신소년' 아동잡지 표지화전이 호수순서대로 열지어져 있었다.
나무 계단을 거쳐 2층으로 올라가니 넓은 공간에
생전의 쓰시던 책상 안경, 모자, 만년필, 카메라 등 유품들과 장서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문학을 전공하지 않는 사람들도 한번 쯤
구경할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올 때쯤 사모님으로 보이는 노인 한분과 처녀 한 사람이
점심시간이라 내게 점심식사를 같이 하자고 인사를 했다.
모임이 있어 가야한다고 제의를 사양하고 나왔다.
문학관 운영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문학관 앞쪽 공터에 누군가 도서관을 짓겠다고 하여
사기를 치지만 않았다면 별로 어려움이 없을텐데...
말꼬리를 흐리는 것을 보면 아마 그곳에 투자손실이 조금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운영은 후원회비로(회원150여명 월회비 만원) 충당하는 것 같았다.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