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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의 이론과 실재
위빠사나 수행에서 말하는 정신세계는 이론으로 밝히는 과정이 있고 실제로 체험하는 과정이 있다. 수행을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시작이 필요한데 이때 말로 하거나 글로 쓸 때는 이미 이론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이론이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수행은 경험하지 않은 정신세계에 관한 것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두 가지 문제가 서로 다르기 마련이라서 수행이 생각하는 것보다 쉽지는 않다.
만약 이론대로 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고 자동화된 기계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서 항상 두 가지가 일치할 수 없는 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래서 수행은 끊임없는 실천과 이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 이러한 간극은 면담을 통해서 극복해야 한다. 이러한 면담이 바로 붓다께서 설법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다.
정신세계는 보이지 않는 마음에 대한 영역을 밝히는 것으로 때로는 이론이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론이 필요 없기도 하다. 예를 들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 마음이 대상을 겨냥하는 과정이 분명하기도 하고 분명하지 않기도 하다. 이런 상태를 이론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체험을 통해서 자신이 직접 경험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알아차림을 실천하기 위해서 이론으로 마음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겨냥하라고 말한다. 뿐더러 이런 알아차림을 하려면 이론으로 믿음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과연 지금 믿음이 있는지 과연 지금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이론을 바탕으로 수행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이론대로 실천하고 있다고 알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항상 내가 지금 믿음을 가지고 하는지, 노력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이 순간 생각에 빠져 알아차림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론으로 믿음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수 있지만 실 수행에서는 이런 부분을 정확히 다 확인하면서 수행할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관념과 실재의 문제인 것이다. 세상에는 무엇이라고 말하는 관념과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 실재가 따로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이론으로 밝혀진 것들을 다 확인하면서 수행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확인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어느 순간에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계속 확인하면서 수행을 할 수는 없다. 미심쩍은 것이 있어도 그냥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이 집중력을 키워서 바른 수행을 하도록 한다.
만약 계속 점검을 하면서 수행을 하면 이것은 수행이 아니고 이론검증을 위한 실습에 불과해 관념에 그치고 만다. 이때 이론이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론이 있어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방향설정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수행은 이런 불가피한 두 가지 현상에 대해 지나치게 숙고할 필요가 없다. 만약 이런 문제로 의심이 나면 단지 의심이 난 것을 알아차려야지 자세하게 알고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두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 두 마리를 다 놓치게 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단지 이런 현상을 알고 마는 것이다. 어떤 일이나 알고 말면 생각에 빠지지 않아 알아차림을 지속할 수 있다.
다음으로 알아차림 뒤에 오는 집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수행은 먼저 대상을 알아차리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을 집중이라고 한다. 이처럼 이론으로 마음이 대상에 오래 머물러 있는 상태를 집중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어느 상태까지가 집중이고 어느 상태까지가 집중이 아니라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설령 집중이 되었다고 해도 이것이 집중이라고 알고 집중하기도 어렵다. 수행은 선정의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경우와 대상이 가진 성품을 아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 하는 두 가지 수행이 있다.
어느 것이나 단순하게 알아차리고 집중을 해야지 학문을 하듯 하나하나 검증을 하면서 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지식을 얻는 교학이지 선정의 고요함이나 지혜를 얻는 수행은 아니다. 그래서 이론은 이론이고 수행은 수행이라고 두 가지를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한다. 교학이 필요한 때는 교학을 해야 하지만 수행을 할 때는 단지 알아차리기만 해야 한다. 그래서 수행을 하다보면 이론과 실천이 항상 일치할 수 없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완전하게 일치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알고 넘어가기를 바란다면 걸리지 않아야 할 일에 걸려서 할 일을 못한다. 누구나 상황에 따른 집중의 지속시간도 일정하지 않아서 무엇이 더 좋은 집중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렵다. 집중을 잘 하려면 단지 오래 머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집중은 근접집중과 근본집중과 찰나집중이 있는데 이 중에 어느 집중이라고 구별하면서 수행을 하기는 어렵다. 또 집중이 잘 되었다가 순간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 있기 때문에 집중이 항상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또 선정수행의 집중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집중으로 바뀔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집중을 하고 있더라도 이것이 무슨 집중이라고 알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수행이 아닌 이론이 되고 만다. 더 중요한 사실은 집중이 필요하지만 정작 수행을 할 때는 집중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단지 알아차리는 것을 지속하면 되지 의도적으로 집중을 하려고 하면 즉시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그래서 수행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영역이다.
수행에 대한 가르침을 말할 때 먼저 알아차림을 말하고 다음에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상태의 집중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함께 작용하기 때문에 따로 어느 상태라고 규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집중을 하면서도 지금 집중을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걱정을 하는데 절대 그럴 필요가 없다. 수행을 할 때 내가 원하는 집중은 아니더라도 얼마정도의 집중은 이루어지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나는 완벽한 집중을 원하기 마련이라서 오히려 내가 하려는 집중에 대한 바람이 집중을 방해할 수 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가 미얀마 쉐우민에서 수행을 할 때 우 꼬살라 사야도께 면담을 했다. 이때 미얀마에서 수행을 시작한지 7년이 되었을 때다. 제가 사야도께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사야도께서 ‘비구는 왜 집중을 하려고 하는가?’ 라고 오히려 나에게 반문하셨다. 스승의 말씀은 단 한마디로 끝났지만 이때 나는 많은 것을 알았다. 집중은 필요하지만 집중이 잘 안 될 때는 집중이 잘 안 되는 것을 알아차리면 그만이지 이것을 가지고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누구나 원하는 집중하는 방법을 알려주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집중을 하려는 마음이 장애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의 이론과 실재의 차이다. 그래서 수행은 상황에 따른 알맞은 지도가 필요하기 때문에 무엇이 정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단지 큰 틀에서 필요한 것은 언제나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알아차림을 지속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이 중도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면 많을 때는 빼주게 되고 부족하면 채워주게 되어서 균형이 이루질 수 있도록 한다.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과 집중이 있는 상태까지가 선정수행의 영역에 속한다. 여기까지기 팔정도의 계정혜(戒定慧) 중에서 계와 정에 속한다. 계(戒)는 알아차림이고 정(定)은 집중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두 가지는 함께 붙어서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을 명확하게 구별하려고 하면 안 된다. 두 가지 수행은 그냥 좀 더 오래 알아차리는 것이면 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때 이론으로 구별하려고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집중이란 단지 알아차림의 지속이며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마음이 대상에 머무는 상태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상태를 분석하면 순간적으로 생각이 들어와 집중력이 사라진다.
다음에 팔정도의 계와 정까지가 선정수행이고 혜(慧)로 넘어가면 지혜가 계발되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때 수행에 대한 이론은 계와 정이 없으면 혜로 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수행자가 다시 이론에 걸릴 수 있다. 계와 정이 분명하지 않은데 어떻게 혜로 넘어갈 수 있는가에 대해 의아해 할 수 있다. 수행자가 계와 정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수행을 하면서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과정을 진행하면 되는 것이지 딱히 이것은 계고 이것은 정이라고 알아야할 필요는 없다.
계와 정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사라질 수도 있고 빠르게 다시 회복될 수도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마음의 빠르기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기 일쑤다. 그래서 이런 세 가지 과정을 이론으로 말할 뿐이지 실재하는 수행에서는 하나하나를 모두 알기는 어렵다. 사실 계정혜가 이루어지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나게 되어 이 조건이 성숙되었는지 되지 않았는지 알 필요도 없다. 수행은 항상 결과가 말하는 것이므로 과정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다보면 집중이 되고 적절하게 집중이 되는 순간에 조건이 성숙되면 지혜가 난다. 이 세 가지의 경계를 분명하게 알 수 없으므로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다보면 자연스럽게 조건이 성숙된다. 마지막으로 계정혜의 조건이 성숙되어 지혜가 났을 때도 이것이 무상이고 이것이 괴로움이고 이것이 무아라고 확연하게 알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확연하게 몰라도 은연중에 나도 모르게 지혜가 확립될 수도 있다. 이렇게 나도 모르게 지혜가 확립되면 어느 순간부터 화를 내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때 이미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성숙된 것이다. 이처럼 지혜를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 때 간접적으로 알 수도 있다. 그러므로 수행의 과정에서 어떤 것이 지혜인가에 대해 탐색할 필요가 없다. 조건이 성숙되면 지혜가 짧은 순간에 빠르게 일어나서 사라진다. 주석서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은 무상을 아는 지혜로부터 시작한다고 말한다. 이 단계가 현상을 바르게 아는 지혜의 단계다. 이 단계에서 벌써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가 난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이 무상의 지혜로 시작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수행자 한분이 고민을 말씀하셨다. 10년 가까이 위빠사나 수행을 했는데 아직 무상을 모르기 때문에 그간 위빠사나 수행을 한 것이냐 아니면 하지 않은 것이냐를 물었다. 책에 있는 내용 중에 위빠사나 수행이 무상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에 적지 않게 충격을 받은 것이다. 수행의 지혜는 자기만 알 수 있는 것이라서 남이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상의 지혜가 무상이라는 간판을 달고 나타나거나 무상이라는 빛을 발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수행을 하면서 경험하는 것이 똑같지 않은 것이 바로 무상이다. 여기저기서 불특정하게 통증이 일어나는 것도 무상이다. 이생각저생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바로 무상이다.
무상은 대상이 계속 변하고 무엇이나 그대로 있지 않고 바뀌는 것이다. 매번 일어나는 호흡이 같은 호흡이 아니고 새로 일어난 다른 호흡이라고 아는 것이 무상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가 무상이다. 그러므로 수행이 안 될 때 이미 무상의 법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혼란이 무상인지 모르고 특별한 지혜라고 생각하면 무상이 보이지 않는다. 이때 대상을 알아차리면 무엇이나 말끔히 정리되는 것으로 알면 위빠사나 수행이 아니고 선정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라서 대상의 혼란이 무상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미 무상을 알고 있는데 무상을 지혜라고 정의해서 알려고 하면 갑자기 특별한 것으로 생각해서 혼란이 오기 마련이다. 물론 생각으로 아는 무상과 지혜로 아는 무상은 다르다. 하지만 처음에는 생각으로 무상을 알다가 때가 되면 지혜로 무상을 안다. 그래서 설령 생각으로 무상을 알았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무엇이나 반드시 단계적 과정을 거치면서 성숙한다.
그러므로 무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관념적으로 생각하면 무상을 경험하고도 무상인지 모른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상은 출세간으로 가는 위빠사나 지혜라서 경험을 하고도 알지 못할 수 있다. 지혜는 반드시 집중이 되었을 때 오도록 되어있다. 이때의 집중은 대상과 하나가 되는 집중이 아니고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집중이다. 대상과 하나가 되는 근본집중은 오직 고요함이 목표이기 때문에 지혜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위빠사나의 집중은 찰나집중이다. 바로 이 찰나집중이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는 집중이다.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부터 순간순간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집중이라서 바로 무상을 알 수 있다.
무상은 위빠사나 수행을 시작해서 얻는 수행이지만 단지 무상으로 그치지 않는다. 무상을 경험하면 다음 단계인 괴로움의 지혜를 얻는 단계로 옮겨가도록 되어있다. 바로 모든 것이 변해서 무상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괴로움이 오도록 되어 있다. 이때 모든 겻이 변해서 오는 두려움과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괴로움에 반응해서 걸리지 않아야 고의 지혜가 성숙된다. 그러므로 고의 지혜도 이것이 고의 지혜라고 알고 얻는 지혜가 아니다. 괴로움 속에서 어느 순간에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되는 지혜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이로구나, 라고 아는 순간이 고의 지혜다. 이렇게 괴로움의 지혜를 알면 자연스럽게 괴로움의 원인이 집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지혜가 가져오는 힘이다. 물론 이때 집중력이 있는 수행자는 고의 실재를 확연하게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모든 지혜가 찰나 간에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매우 빠르게 전광석화처럼 스쳐지나가고 만다. 지혜가 났다고 해서 이 지혜를 아는 마음이 오래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경우에는 지혜가 났는지도 모르고 지나기도한다. 마음이 속도가 빠른 것처럼 지혜도 마음이 경험하는 것이라서 짧은 순간에 스쳐지나간다. 그러므로 이것이 고의 지혜구나, 라고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지혜는 보이지 않게 계속 성숙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수행자는 인식하기 어렵다. 물론 수행을 지도하는 경험이 있는 스승은 이런 과정을 알고 적절하게 지도한다.
무상으로 인해서 생긴 괴로움이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면 당연하게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이미 원인이 생긴 결과는 해결할 수 없다. 원인을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고심을 해도 괴로움이 소멸되지 않을 때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엄연한 현실에 직면한다. 이때 내가 있어서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생긴다. 이것이 존재의 마지막 특성인 바로 무아의 지혜다. 무아의 지혜가 날 때 비로소 자아가 사라져 집착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므로 무아는 가장 알기 어려운 지혜라서 마지막에 아는 지혜다. 이런 무아의 지혜를 처음부터 생각으로 알 수는 없다. 반드시 일련의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인 과정에 이르러야 알 수 있는 지혜다. 또 무아의 지혜가 났다고 해서 오래 지속되는 것도 아니다. 이 지혜도 짧은 순간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렇다고 이런 지혜가 났다고 해서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많은 무아의 지혜가 거듭되면서 차츰 아라한의 무아의 지혜에 이른다. 그러므로 이론으로 지혜라고 말하는 것이지 실재로는 지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위빠사나의 지혜를 무상, 고, 무아의 출세간의 지혜라고 하는데 사실 이런 통찰지혜를 얻는 과정은 칠정정과 16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더욱 깊게 성숙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성숙되면 처음에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다. 이때 누구나 반드시 거쳐야 하는 16단계의 지혜를 모두 알고 거치는 것은 아니다. 지혜라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서 이런 과정을 확연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성숙된다. 또 수다원이 되어서 다음에 사다함의 지혜를 향해 수행을 할 때도 수다원에 이르는 똑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지혜가 성숙된다. 다시 사다함에서 다시 아나함으로 다시 아나함에서 아라한의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을 똑같이 거친다.
이런 과정이 무쪽 자르듯이 분명하게 드러나면서 성숙되는 것은 아니다. 모두 수행자의 선업의 조건과 근기에 따라 다르게 지혜가 성숙된다. 가령 아난자 존자께서는 1차 경전결집을 위해 밤새도록 경행하다가 피곤해서 자리에 누우려고 할 때 몸이 바닥에 닿기 전에 수다원에서 사다함의 도과를 다시 사다함에서 아나함의 도과를 다시 아나함에서 아라한의 도과를 순식간에 모두 거치면서 성취했다. 이처럼 반드시 단계적 과정의 지혜가 성숙되어야 하지만 빠르게 거치는 수도 있기 때문에 지혜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단계와는 다르다. 빠르게 이런 단계를 모두 거쳤다는 것은 마음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 것인가를 알게 한다.
지혜의 종류는 많다. 많은 지혜가 있어도 한순간 짧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래서 어떤 지혜나 짧게 번쩍하고 일어났다가 즉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지혜가 났어도 숨어있어서 모르는 지혜가 있다. 지혜가 났을 때 어느 순간에 이것이 지혜인지 아는 지혜도 있다. 이때 일어난 지혜도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지혜가 났을 때 분석해서 설명할 수 있는 지혜도 있다. 지혜가 났지만 이것이 어떤 지혜라고 드러내서 설명하지 못하고 알기만 하는 지혜도 있다. 지혜가 나서 신통한 힘으로 꿰뚫어서 아는 지혜도 있다.
이런 모든 지혜가 수행자의 근기와 상태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어떤 지혜이거나 수행자가 이것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지혜는 마음이 한순간에 일어난 현상을 깊이 있게 아는 마음이라서 그대로 있지 않고 사라진다. 물론 이렇게 아는 마음이 거듭되면 잠재의식에 아는 힘이 저장되어 항상 지혜가 앞에서 이끌어 갈 수 있다. 이것을 수행에서는 지혜가 앞에서 이끌어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이때는 한순간에 일어난 지혜가 아닌 이미 일어난 지혜가 잠재의식에 저장된 상태로 있는 지혜이다. 그래서 ‘일어난 지혜’도 있고 그간에 마음에 축적되어서 ‘있는 지혜’도 있다.
제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처에서 수행을 하는 동안 처음에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해도 방법을 몰라 실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 어느 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뒤에 이제는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했다. 하지만 이 단계가 첫 번째보다 훨씬 어려웠다. 어려운 이유는 도대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의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은 비물질이라서 형상이 없고 추론적이라서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 통역을 하시는 분이 도움을 주셨는데 이 상태를 말하기를 ‘노팅(noting)하는 것을 워칭(watching)’하라고 했다. 이때 노팅(noting)은 알아차림이고 워칭(watching)은 지켜본다는 뜻이다.
영어로 설명한 말을 듣고 금방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의 뜻을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개념을 통해서 실재를 알 수 있었던 사례인 것이다. 그런 뒤에 비로소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우 꼬살라 사야도로부터 ‘나중에 생긴 마음이 앞에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라고’ 하셔서 이 말의 뜻을 좀 더 정학하게 알 수 있었다. 여기에 이런 상태를 실천하려면 “마음을 새로 내라”라고 하신 말씀이 좀 더 깊은 이해가 생기도록 했다. 하지만 이때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도 이런 상태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도 이것이 무엇이라고 이론으로 드러내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마음을 알아차리라는 말만 듣고 수행을 했지 이론으로는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한국에 와서 모곡 사야도의 책을 번역하면서 심념처 수행에 대한 내용을 보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확립할 수 있었다. 이런 경우도 모곡사야도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에 비로소 내가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 바로 이때의 상황이 ‘아는 지혜’는 있었지만 ‘설명하는 지혜’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곡 사야도의 가르침으로 내가 배운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으며 여기에 확신을 갖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에 대한 이론을 제시할 수 있었다. 이처럼 수행자가 어느 순간에는 지혜가 나서 알아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없는 때도 많다. 그렇다고 이때 지혜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분석하는 지혜가 없었을 뿐이다.
요약하자면 정신세계는 겉으로 드러나서 확인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서 이것이라고 분명하게 알고 넘어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내가 수행을 하면서 막히는 부분이 있거나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을 때는 반드시 해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막히는 부분이 있을 때는 막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으면 의심을 하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끝내야 한다. 이때 의심이 가는 부분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어도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직 그 단계의 지혜가 나지 않아서 아무리 들어도 모를 수 있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알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때가 되어 조건이 성숙되면 지혜가 저절로 드러난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자의 기본자세다. 그래서 이런 것을 볼 때는 볼 뿐이라고 한다. 들을 때는 들을 뿐이라고 한다. 이런 알아차림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보고 말고, 듣고 말고, 알고 말고, 라고 말한다. 알고 말았을 때 비로소 바르게 아는 지혜가 성숙된다. 수행은 대상이 가자고 있는 성품을 보기 위한 것이므로 어떤 것도 얻으려고 하지 말고 어떤 의심도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조건이 성숙되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런 자세는 가장 쉬운 것 같지만 사실 가장 어려운 자세다. 지금까지 누구도 이렇게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찰지혜를 얻어 괴로움을 해결하려면 반드시 이런 일관된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러한 자세가 중도며 위빠사나 수행이다. 더불어 반드시 경험이 있는 지도자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이런 수행방법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서 자기 스스로 실천하기 어렵다. 인류사에 혼자서 찾아간 분은 오직 붓다밖에 없다. 그러므로 스승의 지도를 받아서 가야 안전하게 피안에 이를 수 있다. 아울러 노력이 피안으로 인도한다는 사실도 깊게 새겨야 한다.
첫댓글 수행자님께서 계정혜에 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수행을 하시면서 이해가 되지 않으셨다는 부분에 대해 보완을 해서 설명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_()_
법사님 계정혜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렇게 정성스럽고, 그리고 수행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점들까지
보완하셔서 상세한 내용의 글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행자에게는 반드시 스승의 지도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지혜에 대한 부분을 뒤에 조금 보탰습니다. 감사합니다.
법사님을 처음 뵙고 듣던 법문부터 지금까지 일러주시는 내용이 총망라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공부가 이어지도록 이끌어 주시는 인연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