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들어보니 우리는 약소민족이라 하드군” 황동규 시인의 <삼남에 내리는 눈> 속에 실린 <태평가太平歌>의 앞 소절이다.
우크라이나의 현재와 비슷한 경우를 겪었던 때가 19세기 조선 말엽이었다.
화성시의 전곡항에서 멀지 않은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에 있던 마산포에서 조선 후기에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의 권력가인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포로로 붙잡혀갔다.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의 마산포馬山浦는 뒷산이 말처럼 생겨서 마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남양반도南陽半島 맨 서쪽 끝에 있다. 옛 시절 남양도호부가 설치되었던 시절 인천에 제물포가 개항하기 이전에 가장 번성했던 포구로 그 일대의 물산이 모여 들고나고 했던 포구였다. 마산포는 1882년 7월 초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장수 원세개袁世凱가 청군을 이끌고 상륙한 곳이다. 청군은 마산포에 상륙한 뒤 대원군大院君을 붙잡아 청국으로 데려갔다. 그때 청국의 군함은 대부도 남쪽, 즉 불도 바깥 해변에 정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때의 상황이 매천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중국이 오래도록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 위엄으로 외방을 진압해 보려고 마건충馬建忠, 정여창丁汝昌 등을 보내 해군 수천 명을 뽑아 밤낮으로 항해하여 남양 마산포를 거쳐 남대문 밖에 와서 주둔하고 진무鎭撫를 위한 것이라고 핑계 대었다. 병사들을 단속해 매우 편안하고 한가롭게 하게 하여 도성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다. 마건충 등이 대원군을 초청하였는데, 대원군은 가고 싶지 않았지만 부득이 갈수 밖에 없었다. 막상 가보니 여러 장군들이 매우 환대하였고, 두 번째 갔을 때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원군을 세 번째로 초청하였다. 대원군이 태평이 가마를 준비하라고 명하였다. 불길함을 느낀 정현덕鄭顯德이 그를 만류하면서 “대감께서 이번에 가면 필시 돌아오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지만. 대원군은 듣지 않았다. 청군 진영의 제1문에 도착하자 가마에서 내리게 하고, 제2문에서는 시종들을 따라오지 못하게 저지하였다. 전날과는 매우 달라서 비로소 변고가 있음을 깨달았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건충 등이 호령하여 대원군을 결박시키고 밀랍덩이로 입을 틀어막아 소리치지 못하게 한 다음, 가마에 밀어 넣더니, 장정 한 패가 번갈아 마주 들고 후문으로 떠메고 나가 동작나루로 번개같이 달려 남양의 마산포에 이르러 화륜선에 싣고 떠났다. 시종들이 군영 밖에 있다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을 보고 괴아하게 여겨 물으니, 그들이 거짓으로 대답하기를, “국태공은 긴급히 타협할 일이 있어 군영에서 묵고 응당 내일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날 남대문에 방榜을 걸어 도성 백성들에게 효유하기를 ‘국태공이 왕비시해에 관여했다는 소문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진위를 분변하기 어려워 황제가 한 번 물어보고자 하여 어제의 일이 있었던 것이다. 사실이 명백해지면 응당 다시 돌려보낼 것이니 백성들은 두려워 말라’고 하였다, 이에 온 나라가 크게 흔들렸다.
한나라의 주권 국가의 왕의 아버지가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서 납치되어 화물선에 실려서 가는 그러한 일이 자행되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었던 것이 그 당시 조선이라는 나라의 실체였다. 그 당시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마산포 부근에 대부도 영흥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놓이고 그리고 그 북쪽으로 시흥시와 화성시를 잇는 방조제를 만들어졌다. 그 뒤 시화호란 이름이 붙은 방조제 때문에 생긴 간척지들이 어수선하게 널려 있던 마산포에서 어디를 보아도 그 당시 대원군의 절망과 비애가 묻어 있는 포구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믿을 수밖에 없었던 며느리, 즉 민비 와의 불화와 국내외적 상황과 타의에 인해 조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대원군의 슬픔이 서린 포구는 대동여지도 속에만 남아 있다.“ 신정일의 <서해랑 기 인문기행> 중에서
언제 그러한 일을 또 겪게 될지, 그보다 더 한 일을 겪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여로, 야로 나뉘어 조선 중엽의 당파싸움처럼,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싸움이 그칠 날이 없으니, 이를 어쩐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