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생명 말씀(2018.4.22.) 말씀/ 역대상 17:16, 신 8:2-18 나는 누구 이오며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역대상 17:16)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 하였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약동하는 계절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분초가 다릅니다. 날마다 세상이 달라집니다. 꽃들이 피고 지고, 푸른 잎들이 돋아나는 것을 보면 정신이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새 벚꽃도 다 지고, 튜울잎과 연산홍이 그 자리를 지키고 신록이 우거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세월은 정처 없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만일에 이런 생명의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아마 시간이 지나가고 있는지 어쩐지 느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지난 주 김재중 집사님 생일이 있어서 동역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20대 학창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0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해마다 생일을 기념합니까? 이미 이만큼 와서 현재에 살고 있는데 과거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까? 감사하려고요? 가까운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려고요? 관심도 받고 축하도 하기 위해서 그런가요?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 할 때 생일은 나의 원초적 과거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마르셀 프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보면 시간 개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과거란 단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완으로 남아서 언젠가 현재 시간으로 들어와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고, 또 해결되지 못했던 문제를 해결하고, 나를 구원으로 인도하기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하면 노인들이 추억하는 시간이고, 미래는 청춘이 내다보는 시간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분리된 시간이 아니라 과거도 현재 미래도 역시 현재로 중첩되고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것을 많이 느끼며 공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엔가 등산을 가고 여행을 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고 돌아오고 보면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과거도 좋았지만 현실로 돌아와서 글을 쓰고 정리하다보면 그 때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듣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난줄 알았던 과거시간이 새롭게 현실로 들어와서 더욱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삶은 더욱 완성되어지고, 감사가 되고, 더욱 더 풍요로운 미래까지 약속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현실을 충히 살아야 하지만 과거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는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멸시 천대 조롱을 받으면서 양손 양발에 못이 박히고 철저히 버림받는 고통 속에 처형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는 단지 지나간 시간 속에 슬픈 과거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잔인한 형벌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과거를 현실로 받아드리면서 저주가 아닌 날마다 하나님의 사람임을 깨달으면 그 앞에 진실로 회개하고 자복하며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도 산 기도를 하며 그 과거의 십자가를 현실로 바라보았습니다. 그것은 은총이요 선물입니다.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예수님을 처형한 백주장의 고백도 바로 과거가 현실로 완성된 것입니다. 그 때 창으로 주님을 찌를 때는 몰랐는데 새롭게 현실에서 과거가 조명된 것입니다. 생일이란 나의 원초적 과거입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어떤 자였는지 과거를 돌아보게 한다는데서 아주 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과거가 없이는 현재도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의미가 새롭게 살아야만이 오늘 현실도 더욱 풍요로어지고 감사가 넘치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젖과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고서도 앞만 바라보고 흥분하는 백성들에게 돌이켜 과거를 돌아보도록 하였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신 8:2) 광야길이 어떤 길이었습니까? 목마르고, 배고프고, 뱀과 전갈이 우글거리는 힘든 길 아니었습니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길! 전쟁을 만날 때마다 쫓기고 죽고 했던 길, 지긋했던 길,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던 길! 믿지 못해서 불신하고 우상을 만들던 길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그런 과거를 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과연 가나안의 풍요로움과 은혜를 제대로 누릴 수 있었을까요? 요즘 대한항공 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이 염려를 합니다. 유시민이 일침을 했습니다. 삼남매 다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업 1세 2세 3세로 내려오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1세는 자수성가하며 힘들게 살아온 과거가 있습니다. 바닥에서 기업을 이룬 기업가 정신이 있고, 재벌 2세는 아버지를 보고 배우면서 따라해 보려는 노력이 있는데, 3세는 금수저 물고 내려와서 유학이나 갔다 온 광야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실을 든든히 세우는 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대한항공 조현미 전무의 물컵 던진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물컵이 쓰나미가 되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것입니다. 미완의 과거가 현실을 엎어버린 것입니다. 과거가 바로 세워져야 현시로 바르게 되고 미래도 소망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한 일은 그들에게 먼저 과거를 기억하여 새로이 조명하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16을 보면 또 이렇게 말 합니다. .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과거를 충실히 살아온 사람이 현실의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누구 입니까? 사울입니다. 그 다음은 다윗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아주 확연히 다릅니다. 시작은 사울이 더 멋있었습니다. 그는 기스의 아들로 택함 받았을 때 그 가 백성들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도 어깨 위만큼 컷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모든 백성들에게 말 합니다. “여호와 게서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 할 이가 없느니라” 반면에 다윗의 경우는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 기름을 부으려고 찾아갔을 때 그는 후보 중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일곱 아들 중에 막둥이로 형들의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스스로 칼에 엎드러져 아들과 함게 죽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는 약속까지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과거를 바라보는 시간이 현저히 달랐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책망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 그가 스스로 작게 여기고 겸손 할 대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셨는데 그는 과거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교만했고 하나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습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에게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역대상 17:16) 그가 왕이 되어 궁전을 건축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할 때도 그 마음이 겸손하여 과거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양치는 목동 중에서 택함 받은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겸손함으로 왕이 될 수 있었고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정을 건축할 것이며 그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약속도 받습니다. 생일이란 현재의 나를 있게 한 과거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날 때 가지고 온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슨 힘이 있었습니까? 명예가 있었습니까? 학벌이 있었습니까? 권세가 있었습니까? 부모로부터 모든 도움을 받으며 빈손으로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생일뿐 아니라 지나온 길을 돌아보며 살아야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나의 정체성을 찾게 해주며 더욱 풍성한 삶으로 인도하고 때론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고나 마취로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사람의 경우 처음에는 시간 장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무지의식 상태에 놓이게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시간 장소를 고, 자기가 누구인지 알려고 사고 이전의 기억들을 더듬거리며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행이 기억을 찾게 되며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알아야 지금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을 다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반대로 지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곧 자기가 누구였는지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올챙이시절을 모르는 참 개구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재미 있는 sf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초반에 인간들 가운데 숨은 인조인간을 색출해내는 장면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조인간은 외모가 행동으로는 인간과 전혀 구분이 안됩니다. 구분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묻습니다. 인조인간이 과거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조인간은 대답을 포기하고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는 것입니다. 또 하나 소설가 문순태의 철죽제라는 문학 작품이 있습니다. 이 분이 제가 조선대학을 다닐 때 잠깐 국문과 강사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대강 이렇습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검사가 된 주인공이 6.25전쟁 때 아버지를 죽인 머슴 박판돌ㅇ게 복수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료공장 사장이 된 박판돌을 데리고 아버지의 유골을 수습하려 지리산으로 들어갑니다. 그가 아버지의 유골이 묻힌 곳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유골을 찾고나서 주인공은 박판돌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아버지가 박판돌의 손에 죽으면서 도리어 용서를 청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박판돌의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연인즉 이렇습니다. 지주였던 그의 할아버지 박참봉은 박쇠가 사냥나간 틈을 타서 그의 아내 곧 박판돌의 어머니를 범했습니다. 그것을 박쇠에게 들키자 자기 아들을 시켜 죽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제 삼자 박판돌을 통해서였지만 3대에 걸친 진실이 현실로 들어난 것입니다. 그러자 그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던 주인공은 그 원한을 잊고 오히려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으로 철쭉꽃을 건네며 악수를 합니다. 그러므로서 그동안의 원한과 증오와 오해로 고통하던데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만 보고 살 수 없습니다. 미래만 바라며 막연히 꿈꾸며 살 수도 없습니다. 언제던지 과거를 돌아보며 살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지금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늘 점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 때 아름다웠던 힘들었던 지난 과거들이 단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소중하고 풍성한 사건으로 다시 현실로 돌아오고 날마다 구원의 감격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전에는 과거를 돌아보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과거를 돌아보면 은혜가 됩니다. 때로 하나님 앞에 고백 합니다. 주님, 제가 무엇인기에 ...어린 시절부터 학창시절부터, 군시절도 그렇고, 개척사역도 그렇고 잘 하는 것 하나도 없고, 가난하고, 열등 컴플렉스에 사로잡히고, 비교의식으로 고통하며 행복하지 못했던 자가 아닙니까? 실패의 현장을 떠나고 싶었고, 과거를 잊고 싶었던 자가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런 자를 붙들어주셨고 믿어주셨고, 오늘에 이르게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걸어온 지난 광야의 길은 돌아보기 싫은 비참한 길이 아니라 나를 낮추시고 겸손케 하시며,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고 마침내는 복을 주려하셨던 복된 길이었음을 알게 될 때 감사하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순수한 자로 살 수 있게 되고, 행복자 되어 행복 방적식을 풀어서 나누는 삶을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언제가 겸손히 내가 누구였는지 내 집이 무엇이었는지 돌아보면 주 앞에서 형실을 충실히 사는 자들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