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싸우던 시골의 반항아가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게 됐다. 고졸 출신의 인권변호사,청문회 스타,두번의 국회의원직 사퇴 소동,6번 선거에서 4번 낙선,최초의 팬클럽 결성,국민경선 돌풍,후보단일화 등 숱한 화제와 우여곡절 끝에 당선된 노무현의 인생역정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성장과정>
노 당선자가 서른살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가난에 찌든 밑바닥 인생이었다. 40여호가 둥지를 튼 조그만 산골마을에서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한번도 학비 걱정없이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 초등학교는 그런대로 마쳤지만 학비가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할 뻔 했다. 책값만 먼저 내고 복숭아 농사지어 입학금을 나중에 내면 안되겠느냐고 통사정한 끝에 학교를 다녔지만 졸업하는데 4년이 걸렸고,고교 진학은 엄두도 못했다. 중학교 졸업 뒤 하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3년 장학금 제안을 받고서야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졸업 후 농협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졌고,삼해공업이라는 조그만 어망회사에 취직했으나 한달 반만에 그만뒀다. 쥐꼬리만한 월급이 불만이었다. 고향에 내려가 마을 건너 산자락에 흙집을 짓고 독학으로 고시공부에 도전했지만 책 살 돈이 없어 울산 공사판에서 막일을 하다 입술이 찢어지고 이 3개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적도 있다.
가난은 노 당선자에게 열등감과 반항심을 키웠다. 그는 “초등학교 다닐때 좋아하던 여학생과 사이가 틀어지자 초라한 내 행색 때문이라고 생각해 중학교 내내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중학교 1학년때 학교에서 이승만 대통령 생일을 기념해 글짓기를 제출하라고 지시하자 친구들에게 “아무 것도 쓰지 말자”며 백지동맹을 선동했다. 그는 원고지에 제목만 달랑 ‘우리 이승만 (택)통령’이라고 적어내 괘씸죄에 걸려 벌을 섰다.‘택도 없다’(어림도 없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는 말을 연상시키며 비튼 것이다. 입학금이 없어 어머니가 중학교 교감에게 울며 매달리자 “이 학교 아니면 학교가 없나”라며 입학원서를 북북 찢기도 했다. 초등학교 학적부 행동평가란을 보면 창조성,결단성,지도능력,사회성은 모두 ‘가’를 받았지만 준법성은 계속 ‘나’였다. 고교 2학년 무렵 술과 담배를 입에 댔고,기말고사때 머리를 자르러 다닌 훈육 주임을 피해 도망치기도 했다.
당선자는 숫자는 많지 않지만 깊게 친구를 사귄 편이고 의리가 강했다. 고교 3학년때 점심을 굶는 친구를 불러내 학교매점에서 사온 빵을 건네주고 자기는 몰래 물주전자를 들이키며 허기를 이긴 적도 있다. 친구인 정길상 목사는 “무현이는 가끔 형 같은 느낌을 줬다”고 평했다. 봄 소풍때 밀양가는 열차에서 좌석위 짐 싣는 선반위에 드러누워 “길 가는 영자씨의 손목을 잡고…”로 시작하는 당시 대학가 유행가를 불러제껴 학생들의 춤과 박수를 이끌어내는 등 ‘끼’도 있었다.
어려서 천재 소리를 듣고 자랐지만 가난 때문에 좌절과 방황을 많이 겪은 그였기에 늦깍이 고시 합격은 남다른 흥분과 감격을 안겨줬다. 보배를 닦는다는 뜻으로 마옥당(磨玉堂)이라 이름 붙인 공부방을 만든 지 9년만의 일이고,실업자 상태에서 결혼한 지 2년만의 합격이었다. 노 당선자는 그때 소감을 고시계 75년7월호에 게재한 합격기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형님! 지하에서도 신문을 보십니까”
그의 큰형 영현씨는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부산대 법대)을 나와 고시공부에 매달렸지만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73년 작고했다.
<법조인과 재야시절>
법관에 임용됐지만 8개월만에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했다. 1981년 그의 인생을 또한번 바꿔놓는 부림사건을 맡기전까지 그는 그저 돈 잘 벌고 성공한 변호사에 지나지 않았다.삼화나 조선견직 등 부산의 대표적 향토기업의 상속세 반환소송 등을 도맡다시피 했고,100억원대 이상 거액 소송을 맡아 승률 90% 이상을 기록하는 등 제법 부를 모았다.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역임하고 요트타기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다.
전두환 정권 초기 부산지역 운동권 예비검속 차원에서 이뤄진 시국사건인 부림사건의 변호인으로 얼떨결에 나선 36세의 노변(당시 그의 별명)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57일간이나 불법구금된 학생의 온 몸에 난 고문 흔적과 공포에 질린 눈을 보고 기가 막혔다. 그는 법정에서 고문과 조작을 폭로하며 검찰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변론을 위해 접견하던 운동권 학생들의 순수성과 열정을 접하고 그들이 읽던 책도 보면서 조금씩 사회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 노변은 점차 민주 투사로 변신했다. 고급술집 출입을 끊고 요트 취미도 버렸다.
1985년 부산민주시민협의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고,1987년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는 등 재야인사로서 명성을 쌓아갔다. 1987년2월엔 물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의 추도집회를 주도하다 최루탄을 뒤집어쓰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검찰은 노변에 대해 이례적으로 하룻밤새 4번이나 영장 청구를 반복할 정도로 노변 구속에 집착했다. 이 사건은 그해 6·10 항쟁의 도화선이 됐고,노무현의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검찰은 6·10 항쟁직후 대우조선 사건의 제3자 개입 혐의로 노변을 구속했다.
<정치입문과 대권도전>
노 당선자는 1988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의 발탁으로 부산 동구에 출마,정권 실세였던 허삼수를 꺾고 제13대 국회에 진출하면서 파란을 낳았다. 그해말 국회에서 열린 5공 청문회는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면서 노의원을 일약 스타로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유명인사가 돼 있었다.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을 차분하면서도 날카롭게 추궁하다 눈물을 쏟던 장면에 깊은 인상을 받은 강원도 삼척의 한 할머니는 14년이 지난 2002년12월 생활보조금 30만원 중 10만원을 선거자금으로 쓰라고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여당의 일방적인 불참으로 청문회가 파행으로 치닫자 의원직 수행에 깊은 회의에 빠졌다. 국회앞에서 끌려가던 상계동 철거민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보며 번민하던 그는 청문회장에서 의원직 사퇴서를 써 국회의장 앞으로 보낸 뒤 잠적해 또한번 파문을 일으켰다. 결국 상도동의 집요한 추적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열흘만에 최형우 의원 손에 이끌려 사퇴번의서에 서명했지만,그는 지금도 변명거리를 찾지 못한 사퇴 번복을 부끄러워 하고 있다.
1990년1월은 정치인 노무현의 시련이 본격화되는 시기다. 노태우 당시 대통령과 김영삼 총재,김종필 총재가 3당 합당을 선언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김영삼과 결별했다. 야당잔류를 선언했고 1년 뒤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신민당과 야권통합을 이뤘다. 그러나 3당합당 거부의 대가를 92년 총선의 낙선으로 치러야 했다. 김영삼이 부산에 내려와 노무현 대신 허삼수의 손을 번쩍 드는 것으로 선거는 끝이었다. 95년 부산시장 선거에 나섰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96년 총선때는 지역구를 서울 종로로 옮겨 출마했지만 또 고배를 마셨다. 98년 보궐선거에서 간신히 배지를 단 그는 2000년 총선을 앞두고 배지를 던지고 다시 부산에서 출마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집권당 부총재까지 오르며 어느덧 중진으로 성장했지만 이때의 낙선은 타격이 컸다. 정치를 그만둘 생각까지 할 정도로 좌절감에 사로잡혔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위로했으나 그의 정치적 성장은 한계에 부딪힌 듯했다.
노 당선자는 해양수산부 장관을 그만두면서 본격적으로 대권의 꿈을 꾸게 됐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노무현은 당내에서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이인제 대세론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다. 진보진영내에서도 그를 리더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노무현 드라마는 지난3월 국민경선에서부터 본격 전개됐다. 노풍에 힘입어 울산과 광주에서 1위로 올라섰고,이후 ‘보이지 않는 손’ 논란 속에 그는 이인제 의원을 꺾고 후보직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상도동 방문과 김대중 대통령 아들들 비리로 역풍을 만나 한때 60%까지 치솟던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잇따라 민주당이 참패하자 재경선 목소리가 높았고 때마침 월드컵 인기를 업고 부상한 정몽준 의원과 후보단일화를 하라는 압력이 거셌다. 단일화를 거부하던 그는 이대로는 당선될 수 없다고 판단,정의원이 요구한 여론조사방식의 단일화 방안을 전격 수용했다. 여론조사 결과 정의원을 따돌리고 극적으로 단일후보가 되면서 지지율은 다시 급등했고 그 여세는 대선승리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