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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사관학교는 6월 10일(수) 개교 60주년을 맞이한다. 1949년, ‘조국의 하늘은 우리의 손으로 지키자'는 신념으로 창설된 공사는 개교 이래 57개 기수의 정예공군장교 8,700여명을 배출해 우리나라 영공수호를 위해 크게 기여해 왔다. 1949년 6월 10일, 전투조종사가 되어 조국의 하늘을 지키겠다는 꿈을 품은 97명의 청년들이 김포의 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그 해 10월 1일, 공군 창군과 함께 항공사관학교에서 ‘공군사관학교'로 개칭하고, 6 .25 전쟁 중 대구, 진해를 거쳐 제주 모슬포로 기지를 옮겼으며, 1951년 5월 1일 다시 진해기지로 이동하여 같은 해 7월, 공사 제1기생 83명이 졸업했다. 1958년 12월 12일, 공사는 서울 대방동 캠퍼스로 이전, 창설 10년만에 비로소 현대적인 교육환경을 구비하게 되었다. 1966년 박정희 대통령은 공사를 ‘성무대(星武臺)'로 명명하였고, 27년간 2,800여명의 졸업생을 이곳에서 배출한다. 1985년 12월 21일, 공사는 정부의 수도권 인구 분산 정책에 부응하여 지금의 청원군에 자리를 잡았고 항공우주시대를 열어갈 청주 캠퍼스 시대의 문을 열었다. 1997년 2월 22일,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사관생도(49기, 20명)가 입학하였으며, 그들은 2001년 3월 20일, 사관학교 출신의 첫 여군장교로 임관했다. 1988년, 비행훈련의 첫 관문인 입문과정을 담당하는 212비행교육대대가 공사로 편입되었다. 1972년부터 공군의 정예조종사 양성을 위한 입문과정 훈련기로 사용된 T-41B 항공기는 2006년 11월 퇴역하였고, 현재는 2004년 7월 5일부터 도입된 T-103 기종이 비행교육 입문과정에 운용되고 있다. 휴전 이후 생도교육과정이 4년제 평시교육과정으로 전환되고, 1955년 ‘사관학교 설치법'이 제정되면서 제4기 졸업생 102명부터 이학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1961년, 공사는 특기교육을 임관이후로 조정하여 4년간의 일반학 교육 과정을 확보하였고, 1972년 개정한 교과과정에 따라 전공제도를 강화하여 운영하였다. 이에 1976년부터 공학사, 1987년 문학사 학위를 수여하였고, 2005년 졸업생(53기) 이후 일반학사와 군사학사를 동시에 수여하고 있다. |
공사는 자타가 공인하는 인재 양성의 요람으로서 도래하는 항공우주시대를 주도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한 튼튼한 교육환경을 갖추었고 , 공사 졸업생들은 사회 각 분야에서 군과 국가발전을 위해 당당히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아 공사는 항공우주시대를 선도하며 국가발전에 헌신하는 정예공군장교 양성을 목표로 공군사관학교 특성화 교육체계 정립과 생도교육의 실질적 임무 연계를 위해 생도 비행교육을 강화하고 사관학교 재학 중 전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비행교육을 이수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공사는 세계 추세에 부응하기 위해 대외 교류 활성화를 통해 학교의 위상을 제고하고 사관생도 해외 견학 기회 확대로 생도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며, 현대식 교육시설과 환경을 구비해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젊은 보라매의 산실로 거듭날 것이다. |
1949년 입교한 공군사관학교 제1기생은 1951년 7월 83명이 졸업한 후, 6 ? 25전쟁에 투입되어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 故 임택순 대위는 공군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6 ? 25 전쟁 중이던 1953년 3월 6일 고성남방 상공에서 우리 지상군 작전엄호 중, 적 지상포화에 피격당하여 귀환이 불가능해지자 적진에 자폭함으로써 장렬히 산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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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택순 대위 |
임택순 대위 동상 |
故 김현일 대위와 故 고광수 대위는 F-51 전폭기 조종사로서 공지합동작전과 적보급로 차단 작전에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휴전직전까지 중동부전선 일대에서 유엔공군과 함께 적을 분쇄함으로써, 악전고투하던 지상군 작전을 아군에 유리하게 전환시키는데 결정적 공을 세웠다. 김 대위는 1953년 6월, 강원 고성지역 351고지 탈환 작전에서 적의 집중포화에 항공기가 파손되자 과감하게 적진으로 돌진하였고, 고 대위는 같은 해 7월 강원도 고성 시변리지구 작전 수행 중 적의 대공포에 피격당하면서도 조종간을 놓지 않고 귀환하려다 끝내 전사하였다. |
공군사관학교가 분리 창설된 1949년 10월 1일부터 공군사관학교장을 역임한 故 이근석 준장은 이듬해 5월 공군 비행단장을 맡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2일 일본에서 F-51 전폭기를 인수해왔다. 이틀 뒤 7월 4일에 출격을 감행, 안양상공에서 남진하는 적 전차 20여대를 발견하고 공격하던 중 적 대공포에 피격되자 적 전차로 기수를 틀어 장렬히 전사하였다. 지휘관이 몸소 보여준 살신성인의 리더십은 당시의 공군사관생도 뿐만 아니라 지금의 생도들에게도 큰 귀감이 되고 있다. 故 박명렬/박인철 부자는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의 정신을 대를 이어 실천한 참군인의 표상이다. F-4 전투기 조종사였던 박명렬 소령(공사 26기)은 1984년 3월 한 ? 미 연합 팀스피리트 훈련에 참가해 사격훈련을 하던 중 순직했다 . 당시 4세였던 아들 박인철 대위(공사 52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영공을 지키겠노라'고 다짐하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군사관학교를 선택했다. KF-16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한 박 대위는 안타깝게도 2007년 7월 서해안 상공에서 요격훈련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해 현충일에 부친의 묘소를 찾은 지 50여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난 6월 4일, 순직한 부자(父子) 조종사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다큐소설 ‘리턴 투 베이스(Return to Base. 기지로의 귀환)'가 출간되었고, 공사는 부자 조종사의 숭고한 위국헌신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오는 7월 20일, 이들의 흉상을 건립할 계획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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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공군사관학교 정훈공보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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