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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엑소더스
이사야 35:3-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올해는 해방 70년을 맞는다. 빼앗겼던 땅, 강탈당했던 주권을 되찾고, 이름 그대로 다시 빛을 되찾은 날이어서 광복절이라고 부른다.
세상이 많이 바뀌어, 이젠 친일 행위, 역사왜곡조차 부끄럼 없이 활개 치는 꼴불견 시대가 되었다. 역사관과 역사교육이 점점 퇴보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전범국으로서 회개는커녕 보통국가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안보국가로 전환을 시도하는 중이다.
해방 70년이 되도록 정신대 할머니들은 여전히 힘들게 싸우신다. 광복 70년을 맞았지만, 미완의 광복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역사를 바로 새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심해야 한다.
역사학자 강만길은 <역사가의 시간>이란 자서전에서 자기가 어린 시절에 겪은 경험담을 소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그는 마산에서 국민학교 학생이었다. 당시 국민학교에는 ‘국어 상용카드’ 제도가 있었다. 국어는 일본어를 말하며, 상용제도는 학교에서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월요일 조회 때 담임이 카드 열장을 나눠주고, 만약 조선어를 사용하면 그 말을 들은 사람에게 한 장을 빼앗긴다. 요즘 말로 하면 ‘역 포인트 쌓기’다. 그래서 토요일 종회에 누가 얼마나 뺏고 빼앗겼는지 담임이 조사하여 ‘조행’이란 품행성적에 반영하였다. 어린이의 경쟁심리를 이용한 얼마나 교묘하고, 악질적인가?
우리 신앙인에게는 성경공부가 중요하듯, 역사공부와 국어공부가 참 중요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와 민족마다 철저하게 정체성 교육을 하는 까닭이다.
이슬람 사람들은 갓난아기의 귀에 처음으로 들려주는 말이 있다. “마호멧은 위대한 선지자다”. 그들은 평생 골수에 사무치도록 그 믿음을 교육받는다. 유대인은 아기를 낳으면 요람에서 맨 처음 엄마가 아기에게 들려주는 말이 있다. 아기는 물론 못 알아듣는다.
“다윗 멜렉 이스라엘 하이 하이 베카얌”. 그 뜻은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야. 지금도 살아있어. 어떤 역경도 이겨 내면서 말이야”. 모든 유대인 아기는 그런 엄마의 노래를 듣고 자란다.
1)
성경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기록을 담고 있다. 하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계획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그 형식도 다양하다. 법, 역사기록, 증언, 이야기, 체험담, 시와 노래, 잠언과 비유, 예언과 신비한 환상을 통해 말하고 있다. 수천 년이 지나도 참 생생하다. 성령의 감동과 역사하심 때문이다.
본문 이사야 35장은 한 편의 시이며, 노래이다. ‘하나님의 엑소더스’를 노래한다. ‘엑소더스’는 우리말로 출애굽이라고 번역한다. 애굽에서 탈출하던 그 밤은 히브리 노예들에게 얼마나 가슴 벅찬 해방의 경험인가?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을 엑소더스로 설명한다.
지금 사람들은 누구나 구원을 목말라 한다. ‘죄로부터 탈출, 슬픔으로부터 탈출, 가난으로부터 탈출, 고난으로부터 탈출’을 꿈꾼다. 나를 옥죄고, 가두고, 무력하게 만들고, 주저앉게 하는 실패의 현실은 내게 새로운 삶을 꿈꾸게 한다.
이사야는 장차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그런 꿈과 비전을 노래하며, 무력한 백성을 향해 너희도 그런 소명을 품도록 독려한다. 사람은 저 마다 건너야 할 구원의 강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명과 비전을 통해 그 강을 건넌다. 하나님께서 내게 그런 부르심과 희망을 주신다.
만약 우리 민족에게 해방이 되리란 꿈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독립운동을 했을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사람들은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신뢰하고, 함께 노래했을 것이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3-4).
2)
성경의 역사와 비전이란 창을 통해 우리 자신과 민족의 역사를 돌아 볼 수 있다. 일제 시대 당시 역사교사였던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지어, 성경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와 운명 그리고 희망을 살펴보려고 하였다.
예전에 우리나라는 언덕 사이 도랑에 낀 송아지 같은 신세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말이다. 도랑 양편에는 강대국들이 도사리고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와 미국이다. 120년 전, 우리나라가 식민지의 길에 들어선 것은 일본과 청나라 간의 한반도 내에서 세력다툼의 결과다.
중국은 우리나라에게 앗수르나 바벨론 같은 존재였다. 그런 중국에게 개항 후 서양의 군사제도와 무기를 갖춘 일본이 도전하였다. 결국 1894년 이 땅에서 일어난 동학농민군을 진압한다는 이유로 일본과 청나라가 이 땅에 와서 전쟁을 벌였고, 청나라에게 이긴 일본은 결국 조선을 전리품처럼 차지하였다. 겨우 120년 전 일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는가?
이사야가 예언하던 시기는 주전 736년-701년이다. 120년은커녕, 무려 2,700년 이전에 일어난 역사였다. 이사야는 40년 가까이 활동한 예언자로, 그는 당시 국제정세를 마치 120년 전 한반도를 둘러싼 역사처럼 세세히 설명한다.
당시 앗수르는 신흥제국으로 등장하여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하였다. 계속된 서진정책에 위협을 느낀 수리아와 북 이스라엘이 동맹을 맺었는데, 남 유다까지 동맹에 끌어들이려 하다 실패하였다. 유다 왕국은 처음에는 앗수르 편에 섰다가, 나중에 배신하였다. 앗수르는 수리아와 북 이스라엘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유다에 쳐들어왔다. 오늘 톨레레게 본문(사 36-39장)의 내용이다.
예언자 이사야가 활동한 시기는 북쪽 강대국 앗수르의 전성기였다. 그의 조국 유다는 내내 강대국의 횡포에 시달리는 약소국 처지였다. 현실은 참 암담하다. 남왕국 유다는 북쪽 앗수르와 남쪽 애굽 사이에 낀 도랑에 든 송아지 신세였다. 언제 누구의 희생제물이 될지 모른다. 그들은 앗수르의 침략을 겨우 피했지만, 그 뒤에는 더 무서운 호랑이 바벨론이 호시탐탐 도사리고 있었다.
본문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뛰어넘는다. 이미 바벨론에 멸망당한 유다 백성은 70년 후에 귀환의 소식을 듣는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10).
노래는 훨씬 뒤에 다가 올 사건인 바벨론 포로귀환을 내용으로 한다. 더 이상 강대국들의 횡포와 침략이 사라질 것이다. 그들은 무너지고, 멸망할 것이며, 마침내 포로로 잡혀간 백성이 해방될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실현될 메시아 왕국을 노래한다. 얼마나 위대한 비전인가? 그는 자기 백성에게 희망을 말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의 소명은 하나님의 구원선포였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눈앞의 현실을 똑똑히 보라. 영구불변할 것 같은 현실도 반드시 변한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날, 절망적인 현실은 반드시 바뀔 것이다. 좋게 바뀔 것이며, 그 끝은 구원일 것이다. 하나님이 엑소더스, 즉 위대한 탈출을 계획하신다.
본문은 메시아 왕국을 노래한다. 그 날에, 모든 사람의 고통이 회복될 것이다. 심지어 그동안 저주로 생각했던 맹인, 청각장애인, 신체 불구로 겪어 온 모든 몸의 장애가 치유를 받고, 회복된다고 한다. 말 못하던 벙어리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뜨거운 사막, 그 모래바다에서 샘이 솟고, 식물이 자라게 될 것이다. 포로를 잡아가던 그 길이 이젠 거룩한 길이 되어 포로로부터 돌아오는 자들의 길로 바뀔 것이다. 전쟁을 하던 정복자의 길이, 이젠 평화의 길로 바뀔 것이다. 이사야는 지금 비전을 보지만, 그 이상은 현실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사야 35장은 곧 이어질 40-55장의 예고편과 같다. 희망에 찬 미래의 주제들이 모두 여기 한데 어우러져있다. 마치 한 폭의 커다란 그림처럼 삼삼하게 전개되고 있다. 노래는 예언자가 먼 미래를 내다보며 희망의 징조를 보여준다. 한 마디로 새로운 출애굽이 전개될 것이다.
3)
해방된 사람들이 이용할 거룩한 길은 순례의 길이 될 것이다. 그 길은 시온의 성소로 나아가는 길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며, 구원을 감사하는 하나님 백성이 걷는 길이다.
그 거룩한 길은 하나님이 만드신 탈출로이다. 애굽에서 학대당하고, 억압받던 히브리인들이 탈출해 지나 온 광야 길이 첫 번째 출애굽이라면, 오늘 본문에서 바벨론 포로들이 돌아오는 광야 길은 두 번째 출애굽이다.
출애굽은 헬라어 ‘엑소더스’를 번역한 것이다. 성경은 진정한 출애굽, 궁극적인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짐을 고백한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사건은 인류구원을 위한 ‘궁극적인 엑소더스’였다.
빌립보서에 있는 찬가에서 초대교인들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신 하나님의 강림은 신비한 출애굽 사건이란 것이다. 영광의 자리를 비우시고 낮고 비천한 자리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 탈출은 얼마나 겸손하고 신비한가? 왕이 종이 되신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하나님의 출애굽은 영원한 하나님이 유한한 사람으로, 심판하실 자가 심판을 받는 자로, 왕의 자리에서 종의 신세로, 삶에서 죽음으로 이동한 것이다.
예수님의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하신 대화를 보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 쌔”(눅 9:31).
여기에서 ‘별세’라는 낱말은 떠남, 죽음이란 뜻인데, 헬라어로 ‘엑소더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새로운 엑소더스를 이끄신다.
다시 빌립보서의 노래를 보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어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빌 2:8).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두 번의 엑소더스를 감행하시는데, 구유탄생도 엑소더스, 십자가 죽음도 엑소더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엑소더스는 죄, 부자유, 고난, 숙명에 사로잡힌 인간을 해방, 자유, 기쁨, 구원, 치유하심을 위해서이다.
출애굽만큼 가슴 뛰게 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없다. 그래서 일제시대 때 교회를 감시하던 일본 식민당국은 출애굽에 대해 설교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희망을 노래하는 것조차, 불량한 일이었다. 사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그만큼 뜨겁고, 가슴 설레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자유를 향해 새로운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이다. 이렇듯 엑소더스는 오늘 우리에게서 계속되어야할 해방의 사건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주위 강대국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고, 식민지 상황을 겪었다. 수난과 핍박을 당했으나 그럼에도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강렬한 사명감으로 가득했고, 고난을 뛰어 넘은 희망이 있었다. 구약성경은 그런 초월적 비전으로 가득하다.
우리 한민족도 두고두고 고난과 핍박을 받았다. 침략과 식민지 지배, 분단과 독재의 폭력으로 점철되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우리 민족을 가리켜 ‘수난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경우 성경에 있는 초월적 꿈이 없다. 비전과 소명이 없음을 그는 안타까워 하였다. 그래서 한국의 예언자 함석헌은 이 민족에게 더욱 성경을 가르치려고 애쓴 것이다. 그는 식민지 시대에 그리스도인 청년들과 함께 물었다. 고난의 민족인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우리는 지난 해방과 분단 70년 동안 큰 변화를 겪었다. 준비되지 않은 해방이 얼마나 큰 재앙을 불러왔는지, 일제 식민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결과 우리 민족은 여태껏 뿌리 깊은 남남갈등을 겪고 있다.
70년을 맞은 오늘, 우리는 다시 꿈을 꿔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과 소명을 그려야 한다. 오금이 저리도록 그리워하는 남과 북의 만남을 시작하고, 눈물을 쏙 빼는 해방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 하나님의 엑소더스를 향한 경건하고 신실한 감동을 품어야 한다.
여러분의 엑소더스를 계획하라! 당신의 삶을 긍정하라. 역사에 대한 진보와 긍정은 남다른 삶을 선택하게 한다. 믿음보다 불신은 전염성이 강하다. 우리가 지닌 신앙은 엑소더스에서 시작함을 명심하라.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우리 민족에게 그런 엑소더스를 가능하게 하는 소명과 비전을 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리하여 여러분의 믿음과 삶을 통해, 교회가 지닌 평화의 능력을 통해 이 민족과 더불어 구체적으로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