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복음에 대하여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라디아서 1:6~9
.
.
.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
갈라디아서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경고한다. 위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한다:
1.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이를 떠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시는 은혜를 배반하는 행위다.
2.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변질된 것으로서 신자들의 마음을 혼동하게 한다.
3.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강력하게 경고한다. 심지어 하늘에서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마땅히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1.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무엇일까?
2. 그는 왜 이렇게 심각하게 경고할까?
3.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바른 복음이란 무엇일까?
먼저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에 대해서 알아보자.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자유를 빼앗으려고 엿보고 있다(갈 2:4).
2. 그들의 주장은, 이방인으로 살다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2:3).
3.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베드로조차도 그들의 주장에 동조해서 바울은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책망했다(갈 2:11~14).
.
.
.
사도 바울은 이들의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반박했는가?
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갈 2:16).
2. 여기서 의롭게 된다는 말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의 기업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갈 3:29).
3.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결국 죄인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갈 2:16).
4.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다시 율법에 의지하여 의롭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인이 되려는 것이며, 그런 행동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다(갈 2:17, 21).
5.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은 것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도 마찬가지다(갈 3:5).
6.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3:6).
7.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방인들까지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려고 그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열방이 복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다(3:8).
8. 결국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저주를 받고야 말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셨다(3:10~11).
9. 사실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리신 것은 우리의 저주를 대신 담당하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특히 이방인들에게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다(3:13~14).
10.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과 그런 언약을 맺으신 후에 430년이 지나 율법을 주셨는데 이는 그 율법으로 이전의 언약을 헛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날에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실 때까지 유대인들을 인도하는 가이드(초등교사)로 잠시 역할을 하게 하신 것이다(3:15~25).
11.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며 약속대로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할 것이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의 차별이 없다(3:26~29).
12. 하나님의 상속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자유자들인데 왜 종노릇을 하려는가! 율법이 정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는 것이 바로 그런 짓이다(4:1~11)!
13. 바울은 인간적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권면한다. 그들의 간절한 사랑과 자신의 진심을 그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여 그들이 이간질하는 자들에게서 돌이키기를 바란다(4:12~20).
14.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울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그의 여종 하갈을 비교하면서 성령의 약속을 따라 난 자녀들과 육체를 따라 난 자녀들을 구분한다(4:21~31). 우리는 계집 종 하갈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하는 여자인 사라의 자녀들이다!
15. 바울은 구체적으로 할례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아무 효력이 없으며,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된다고 경고한다(5:1~4).
16. 자신이 그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받은 까닭은 바로 할례를 금했기 때문이라고 다시 강조한다(5:7~12).
17. 율법에 대하여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이니 사랑으로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이다(5:6, 13).
18. 또한 온 율법을 요약하자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것임을 일깨워준다(5:14).
19. 사실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것은 육체를 좇아 사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을 좇아 살아야 한다. 그 두 삶에는 너무나 다른 열매가 맺힌다(5:16~26).
.
.
.
사도 바울은 왜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위와 같이 다른 복음을 경계하면서 여러 말로 교회를 설득하려고 애를 쓴다. 때로는 논거를 제시하고 때로는 인정에 호소하며 때로는 강한 표현으로 경고하기도 한다. 저주를 받는다 하거나 잘라버리라(?)고 하는 표현들보다 더 강한 표현이 있을까! (갈 1:8~9, 5:12)
그러면 바울은 왜 이렇게 강력한 편지를 써야 했을까? 할례를 지키고 율법에 충실한 삶이 그렇게 나쁜 일인가? 바울에 의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일이며, 바울과는 원수가 되는 일이다. 바울은 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바른 복음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바울은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율법은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다고 했다(롬 7:12). 모든 성경(율법)은 유익하여 하나님의 사람을 온전하게 만들어준다고 즐겨 배울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딤후 3:16~17). 디모데에게 말하기를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 쓰면 선하다고 했다(딤후 1:8). 시편 19편은 여호와의 율법에 대한 열렬한 예찬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사도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사랑하고 그 정신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나쁘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좇아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 하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핵심은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것이다!
.
.
.
바울과 유대인들에게 의롭게 된다는 말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하며, 동시에 그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동참하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복을 받으며, 그 기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결국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이던가? 하나님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복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복이란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아서 온 세상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에 아브라함이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지으심을 받은 목적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외아들을 보내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실 때 세상의 충만을 바라보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복을 약속하셨을 때 그들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누리는 세상을 바라보셨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을 때에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고 번영과 충만을 누리는 세상을 바라보셨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기업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가 물려받을 세상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사도 바울에게 알게 하셨다. 그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시려고 하나님이 미리 세우셨던 것이다. 그 계획이 성취되는 날에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다(엡 1:9~10).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가 되게 하시고, 종이나 자유자도 서로를 존중하며 살게 하시며, 남자와 여자도 차별하지 않는 세상을 계획하셨다. 그뿐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하듯이, 때가 차면 하늘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모든 민족과 방언과 나라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을 가로막는 것이 ‘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며, 종과 자유자를 나누며, 남자와 여자도 나눈다. 그것은 할례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담을 다시 쌓으며,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지키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차별한다. 만약 사도 바울과 제자들이 할례의 제도를 교회 안에 용인했다면 기독교는 지금까지도 유대교의 한 종파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복음을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담을 허물고 한 몸으로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이 되도록 가르치고 지도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아 서로 사랑하며 존중하는 세상을 살도록 계획하셨다. 그것이 성경 전체의 교훈이며 비전이다.
.
.
.
바른 복음, 순수한 복음?
바른 복음은 옳은 복음이며,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복음이다. 순복음은 순수한 복음을 배우고 가르친다는 자부심을 담은 말이다. 우리나라의 순복음은 개혁교회의 복음에 성령충만과 치료와 축복의 복음을 포함한 것이다. 그래야 충만한 복음이 되며 초기 교회가 전한 본래의 순수한 복음이 된다고 순복음신학은 주장한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순수한 복음은 율법주의의 가르침에 변질되지 않은 은혜의 복음이다.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이다. 바울이 다른 복음을 경계한 까닭은 그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쪼개 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대교의 울타리에 가두어 버리고 예언자들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 나라의 전망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다른 복음은 온 우주에 충만한 하나님의 성령을 인간의 육체 안에 가두어 버린다. 그 결과 부패한 행위들이 공동체와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사람들을 서로 물고 먹으며 종살이하게 만든다.
다른 복음은 에덴동산에서 나오는 네 줄기의 강물을 모두 막아버린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하신 까닭은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는 물꼬를 트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의 거치는 장애물을 놓아 그 물꼬를 막아버리는 행위는 그리스도 복음의 원수가 된다. 다른 복음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가로막는 자들이 되었다고 예수께 책망을 받은 것도 같은 이유다(마 23:13).
앤드류 팔리(Andrew Farley)는 그의 책 ‘벌거벗은 복음’(The Naked Gospel)에서 율법주의라는 허물이 덕지덕지 붙은 복음에 대하여 지적했다. 폴 엘리스(Paul Ellis)는 29년 동안 필리핀 정글에서 숨어 홀로 전쟁을 치른 일본인 히루 오노다의 실화를 소개하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주의의 정글에 갇혀 있다고 비유했다. 이미 끝난 전쟁을 아직도 벌이고 있다는 것이다(그의 책, The Gospel in Ten Words 참고). 이 두 사람은 은혜의 복음 설교자로 알려져 있다.
은혜의 복음 설교자들이 경계하는 다른 복음은 무엇인가? 그들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율법주의다. 하지만 바울이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 이유와 은혜의 복음 설교자들이 다른 복음을 경계하는 이유는 좀 다르다. 바울의 경우, 다른 복음은 천하만민을 위한 복음을 유대교에 국한하려고 하기에 나쁜 것이다. 반면에 은혜의 복음 설교자들의 경우,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와 자유를 누릴 수 없게 하기에 나쁜 것이다.
나는 위 두 사람의 책을 번역하면서 은혜의 복음 설교자들의 이야기에서 큰 위로를 얻었다. 내가 그만큼 심각하게 율법주의에 갇혀 스스로를 정죄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도 당당함도 알지 못하고 죄책감 속에 매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톰 라이트(Tom Wright)의 글을 읽으면서 1세기 초대교회와 바울이 꿈꾸던 복음의 영광이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것과 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바울이 꿈꾸는 복음의 영광은 유대인과 이방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다는 위대한 계시를 보았다. 그것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하리라는 예언자의 환상과 같다. 하지만 은혜의 복음 설교자들이 들려주는 바른 복음은 자신을 자책하고 학대하는 음울한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을 제시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기쁜 소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의 영광이 개인적인 범주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
.
.
1세기, 16세기, 그리고 21세기의 질문
톰 라이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성경을 대할 때 16세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19세기의 안경을 쓴 채로 읽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21세기의 문제에 대하여 답을 찾기 위해 1세기의 시각으로 성경을 읽을 때가 되었다.’ (톰 라이트 N. T. Wright, 칭의 Justification: God’s Plan and Paul’s Vision, p 37)
여기서 말하는 16세기는 종교개혁의 시기를 말한다. 종교개혁자들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람이 어떻게 하면 율법 아래에서 죄의 짐을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 안식을 누릴 수 있을까?’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은 이 질문을 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처절한 싸움을 실감나게 그려준다. 천로역정에 담긴 최대의 관심사는 ‘신자가 죽은 후에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진리가 온 세상에 충만하게 펼쳐질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니라 개인의 영역으로 쪼그라들어서 ‘나와 나의 구원’을 위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고 톰 라이트는 반성한다.
이처럼 16세기의 질문은 1세기의 질문과 다르다. 율법이라는 죄의 짐을 벗고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가 16세기의 신자들에게는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바울을 포함한 1세기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도리어 하나님의 선물이었다고 톰 라이트는 주장한다.
톰 라이트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관심을 가진 가장 큰 질문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지속적으로 신실하시다는 점에 부합하며, 그 결과 그의 씨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과 만물이 복을 받게 되는가?’
각 시대는 다른 문제와 씨름한다. 농경사회에서는 많은 일손이 필요했으므로 자녀가 많은 가정이 유리했다. 우리나라는 한 때 산아제한 정책을 국가적으로 장려했다. 그리고 지금은 출산을 장려하기 위하여 많은 재정을 동원하여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석탄이나 석유를 더 많이 채굴하기 위하여 경쟁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 세계는 탄소제로 사회를 만들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신앙의 영역에서 1세기 상황을 생각해 보면, 어떤 유대인들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영화를 되찾기를 간절히 바랐으며, 어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시고 마침내 열방이 한 가족처럼 연합하고 함께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는 시대가 속히 오기를 바랐다.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나라는 새롭게 창조되는 세상이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면면히 흐르는 하나님의 꿈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물려받을 영광스러운 미래였다.
하지만 16세기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이 가진 영광을 개인의 구원으로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아니면 하늘에서 계획된 하나님의 꿈이 이 땅에서 실현되는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을 갖기보다는 죽은 후에 천당에 들어가서 누릴 영광을 바라는 이야기로 복음을 왜곡할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서지 못하고 사후의 세계에 대한 것으로 미뤄버리게 될 때 기독교회는 공적인 영역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살기 어렵게 될 것이다. 오늘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다른 복음이라고 정의하고, 무엇을 바른 복음 또는 순수한 복음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순복음은 68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오늘 어떻게 새롭게 정의되어야 할까? 다종교 사회에서 교회는 진리를 어떻게 규정하고 설명해야 할까? 오늘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끝>.
.
.
.
참고 자료:
앤드류 팔리의 책, 순수한 복음(The Naked Gospel)
https://cafe.daum.net/Wellspring/V9Vm/36
폴 엘리스의 책, 열 가지 키워드로 쓴 복음(The Gospel in Ten Words)
https://cafe.daum.net/Wellspring/TxQA/14
톰 라이트의 책, 칭의(Justification)에 대한 요약과 소감은 성공회 목회자 맷 건터(Matt Gunter)가 짧으면서도 핵심적으로 잘 정리했다:
http://intotheexpectation.blogspot.com/2013/05/nt-wrights-justification.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