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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결정하는 두가지 선택 212
편집실
새로운 해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결심들을 합니다. 그리고 시작하는 이 해가 성공적인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해가 되면 하나님 앞에 한 해를 신앙과 믿음으로 살겠다는 새로운 서약을 하며 승리의 삶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유념해야 하는 것은 매일 매 순간 우리가 결정하는 선택의 중요성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꼴 짓고 결정해줍니다. 이제 새로운 한 해가 우리에게 주어졌고, 이 한 해는 많은 결정들을 해야 하는 순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두 가지 선택 중에 하나를 해야 하는 기로에 섭니다. 주어진 새로운 한 해를 열면서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지혜로운 선택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제1부_두 길-당신이 선택한 길은 어떤 길입니까?
사람들이 즐겨 애송하는 시 중에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시인은 노란 숲속에서 만났던 두 갈래 길과 그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그의 경험을 시로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그 선택 때문에 후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끝을 맺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두 갈래 길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우리의 인생을 표현한 이 시는,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두 갈래 길 중에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 선택한 길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완전히 다르게 결정된다는 것을 담담한 어조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우리 앞에 제시된 길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친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는 언제나 두 가지 길이 주어지고 거기서 반드시 자신이 갈 길을 선택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그 선택은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결정지어 줍니다.
1) 두 길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가지 길은, 한 길은 넓은 길, 또 다른 길은 좁은 길입니다. 넓은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고, 좁은 길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영원한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 당시에 사람들은 대개 언덕이나 산 위에 위치한 성벽으로 둘린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일몰 때 닫히는 성문이 가파른 바윗길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저녁 무렵에 집으로 가는 사람들은 밤이 되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해 힘든 오르막길을 서둘러 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하기 위해 서두르는 저문 길의 나그네는 길가에 있는 그 어떤 매력적인 것에도 한눈을 팔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성문으로 들어가는 한 가지 목적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장면을 그리스도인의 노정에 대한 인상적인 상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1.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길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앞에 제시한 길은 좁고 그 문이 들어가기에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따라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
십자가는 항상 두 길이 나누어 지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힌 경험을 해야 갈 수 있습니다. 자아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만 따를 수 있는 길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이 좁은 길이고 그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그 입구가 험합니다. 만일, 버리지 않은 어떤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길이 들어가기에 너무 좁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라가려면, 우리 자신의 길과 자신의 뜻과 자신의 악한 습관과 행동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계명 황금률이 인간의 모든 교만과 자기 본위의 마음을 제거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세상의 의견을 따르거나 세상의 표준에 맞출 수 없습니다. 하늘의 길은 높은 지위와 부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기에는 너무 좁고, 자기중심적인 야망을 불태우기에도 너무 협소하며, 안락을 즐기며 오르기에도 너무 험하고 거친 길입니다. 좁은 길을 먼저 걸어가신 그리스도의 몫은 고통, 인내, 자아 희생, 비난, 궁핍 그리고 그분을 대항하는 죄인들의 반박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한다면 이러한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한 길은 하늘로 가는 순종의 길이요, 다른 한 길은 사람들이 죄와 방종의 짐을 가지고 아무렇게나 갈 수가 있지만 필경은 파멸과 영원한 죽음에 이르는 넓은 길입니다.
2. 험한 전진의 길
만일, 영생으로 가는 길을 가려면 여러분은 계속해서 올라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생명의 길은 오르막길이기 때문입니다. 버리고 또 버리고 세상을 거슬러서 올라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진군입니다. 예수님께 순종하는 모든 행동, 그분을 위해 참은 모든 극기의 행동, 인내하며 견디어 낸 모든 시련, 유혹에서 거둔 모든 승리는 생명과 승리의 영광을 향하여 나가는 행진의 발걸음입니다.
그런데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매 순간 싸움과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장소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싹튼 이기심과 교만은 매사에 대항하여 싸우려고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려고 일어나는 육체의 세속적인 욕망과 습관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강력한 원수를 정복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우리에게 승리를 주실 수 있으십니다.
길이 험하며 오르막길이 비탈져 있고 좌우에 함정이 많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행길에서 겪는 고통을 견디어야 할 것입니다. 피곤할 때에도, 안식이 그리울 때에도 계속해서 전진해야 하고, 연약할 때에도 싸워야 하며, 낙심될 때에도 계속 희망을 품고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인도자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마침내 소망의 항구에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보다 먼저 그 험한 길을 친히 걸어가셨고, 우리의 발을 위하여 그 길을 평탄하게 하셨습니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길이 비록 가파르지만, 그 길에는 피곤한 자들에게 생기를 주는 기쁨의 샘이 있습니다.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비록 환난을 당해도 크게 기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사랑하는 구주께서 곁에서 동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위로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주님의 손길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고, 발걸음마다 더없이 밝은 영광의 빛이 앞길을 비추어 줄 것입니다.
2) 넓은 길은 저절로 찾아진다
많은 사람들은 편한 길 내리막길을 선호합니다. 자아를 부인할 일도 없고, 죄를 버려야 할 일도 없는 넓은 문과 넓은 길은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택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온갖 세속적 마음과 이기주의와 교만과 부정직과 도덕적 타락을 가지고도 갈 수 있는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견과 주장에 따라 이기적인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무엇이나 할 소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는 데에는 따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부인하는 일과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거절하게 되면 그 문과 길이 넓어 발이 사망으로 끝나는 길을 향하여 저절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올라가는 길은 힘든 길이며 내려가는 길은 쉬운 길이라고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에도 줄곧 고통과 형벌이 있고, 슬픔과 실망이 있습니다. 사단의 길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모두 기만입니다. 악의 길에는 쓰라린 후회와 점점 깊어지는 고뇌가 있습니다. 사람이 교만과 세속적 야망을 좇는 것을 즐겁게 여길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종말은 고통과 슬픔인 것을 알게 됩니다. 내리막길은 그 입구가 꽃으로 밝게 빛날지 모르나 가시가 있습니다. 입구에서 빛나던 희망의 빛이 절망의 흑암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끝없는 밤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될 것입니다.
3) 두 길을 가는 사람들의 특성과 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두 길은 서로 구별되고, 분리되고, 서로 반대됩니다. 그 길로 여행하는 사람들의 삶과 품성과 의복과 대화에서도 서로 반대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여행 끝에 가질 기쁨과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하며 소망 속에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당하는 시련과 고난으로 슬픈 빛을 띠지만, 예수님의 임재 속에서 얻는 성스러운 기쁨의 빛으로 빛납니다. 그들은 넓은 길에 있는 무리처럼 살거나 옷을 입거나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분의 모본이 주어져 있는데, 그들을 위하여 친히 앞서 그 길로 걸어가신 분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분의 발자취를 보고 위로와 기쁨을 얻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태도와 성품이 그들의 삶에 똑같이 반영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한, 그들은 안전하게 하늘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자신의 소유와 재물과 명예, 그리고 자신의 용모와 의복과 그 길에서 얻는 쾌락 등에 몰두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사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현세의 쾌락에 마음껏 몰두하고 즐기느라 그 길 끝에 있는 분명한 멸망에 대하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세의 행복이나 기쁨에 무관심하므로 영생이나 영적인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현세에 얻는 영화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평안이나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그들은 매일 멸망으로 점점 더 빨리 달려가고 있습니다.
1. 좁은 길을 간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그런데 종종 좁은 길을 간다고 공언하고 자랑하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넓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준비하라!”고 크게 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넓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얼굴에 잠깐씩 보이는 슬픔의 그림자 외에는 그들 주변에 있는 세상의 허망한 자들과 똑 같습니다. 그들의 마음과 성품과 삶과 대화는 세상 사람들과 똑 같지만, 정작 자신은 자기의 진짜 모습을 모르고 자신에 대해 매우 만족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지적하는 일들을 합니다. 그들은 넓은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좁은 길을 가고 있는 자들에게 속한다고 공언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네요. 당신의 삶이나 성품도 우리와 똑 같네요. 우리도 당신처럼 똑같이 말하고 행동합니다”라고 비웃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이라고 공언하는 자들에게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일치되는 것,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것,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하나님께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애굽을 떠난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을 취급하시고 여러 번 구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시험과 연단을 받을 때마다 매번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들은 늘 떠나온 애굽과 애굽의 파와 마늘을 갈망했습니다.
2.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마지막 시대에 진리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행하는 도중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것처럼 합니다. 그렇게 큰 빛이 분명하게 비추어지는 축복을 받았음에도, 그 큰 축복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진리로 변하지 않고 그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정결케 하는 시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때때로 시련을 자초하고, 시련을 당할 때에 너무도 쉽게 낙심하며, 너무도 쉽게 상처를 받고, 너무도 쉽게 자존심을 상하게 되므로, 자기 자신이 영적으로 손해를 당합니다. 사단이 그들의 시련을 확대시키고 마음속에 잡념을 넣어 줄 때에 많은 사람들은 이에 굴복함으로 그들의 영성과 유용성이 약해집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고 있는 길이 거친 길이요, 극기의 길이요,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길임을 명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마치 넓은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순탄하게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또한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고 참을 수 있는 순결하고 성실하고 자아 희생적인 무리들만이 마지막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될 것이며, 그 사람들이야말로 주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것이 증명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길은 어떤 길입니까?
제2부_두 면류관-당신이 선택한 면류관은 어떤 것입니까?
결승점을 막 통과한 마라톤 선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턱 끝까지 차오르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사력을 다해 마지막 결승점에 뛰어드는 선수의 표정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라톤의 묘미는 결승점에 도달할 때 극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긴 시간 동안 인내와 극기로 오르막 길과 내리막 길을 지나 거의 쓰러질 듯 기진맥진하지만, 결국 완주하여 결승점을 통과하는 선수들의 미소는 환희와 기쁨의 절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길과 인생을 마라톤 경기에 비유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에 치러야 할 대가와 싸움에 대한 상징으로서 이 경주를 언급한 바울은, 그리스도를 섬기고 따라가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확고한 결심과 엄격한 절제와 쇠하지 않는 열심이 필요한가를 생생하게 감명시켜 주기 위해 당시의 유명한 경주를 예로 들었습니다. 또한 바울 자신도 그 경주에 참가한 참가자로 표현하여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1) 마라톤 경주
바울 당시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하는 모든 경기 중에서 이 달리기 경주는 가장 인기있는 경기였습니다.
소위 “마라톤”이라고 불리는 이 경기는,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마라톤 전투 당시에 있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생겨난 경기였습니다. 당시 그리스의 전령 “페이디피데스”가 그리스군이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을 크게 무찌른 것을 알리기 위해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약 42km를 쉬지 않고 달려 '우리가 이겼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죽은 아테네 전령을 기리기 위해 생긴 경주입니다.
헬라인들과 로마인들 사이에 성행하던 이 경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출전하였는데 이 경기에 나가기 위해서는 엄격한 준비와 훈련이 필요하였습니다. 식욕의 방종이나 지적 혹은 육체적 활력을 저하시키는 어떤 것이라도 엄격히 금지되었습니다. 근육과 신경들을 잘 통제하고 체력을 최고의 수준에 도달하게 해야 했는데, 이 경기에는 큰 부담과 위험이 따랐습니다. 때때로 그 당시 어떤 경주자들은 거의 입상권에 들었을 때 넘어져 죽은 사람들도 있었고, 불구가 되는 일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승리자에게 따라오는 놀랍고 명예로운 보상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였습니다.
당시 열리던 그 경기에서, 승리자가 결승점에 도달할 때 수많은 관중들의 박수갈채는 대기를 찢고 인근 언덕과 산에 메아리쳤습니다. 관중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심판관은 승리의 표상인 월계관을 주고 그의 오른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가 온 나라 안에 들렸고 그의 부모와 사는 도시까지도 위대한 운동가를 배출한 까닭에 크게 높임을 받았습니다.
2) 승리의 월계관과 면류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 24~25).
바울은 경주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시드는 월계관을 그리스도인 경주에서 승리한 이에게 주어질 불멸의 영광의 면류관과 대조합니다. 바울은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 선언합니다. 헬라의 경주자들은 썩을 상을 얻기 위하여서도 어떤 수고나 단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무한히 귀중한 상, 곧 영생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얼마나 더 주의 깊이 노력해야 하며 얼마나 더 자발적으로 희생하며 극기해야 하겠습니까! 영원한 생명과 상급이 걸려 있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에 있어서, 식욕과 정욕을 이성과 하나님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은 얼마나 더 중요한 일이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생각, 감정, 습관과 정욕은 가장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의해 계발되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이성이 마음의 고삐를 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승리를 얻기 위해 최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고린도인의 경기에서 결승점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경주자들은 자신의 최후의 발걸음의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고통스러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우리 마지막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결승점에 가까이 이를 이때, 처음 시작할 때보다도 한층 더 단호한 결심과 열심으로 앞으로 전진해야 할 것입니다.
마라톤 경주에서 이기는 승리자는 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인 싸움에서는 누구나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주는 빠른 사람의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강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가장 강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장 약한 성도도 불멸의 영광의 면류관을 쓸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시키는 사람은 모두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매일의 삶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의 모든 행위는 생애의 승리나 패배를 결정하는 저울에 무게를 더해줍니다. 그리고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은 기울인 힘과 열심에 비례할 것입니다.
3) 두 면류관
이 세상에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두 면류관을 얻기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 한 무리는 하늘의 면류관, 영생과 생명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또 한 무리는 지상의 면류관, 세상의 보화와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 질주하고 있습니다.
1. 지상의 면류관
세상의 훨씬 더 많은 무리들이 지상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습니다. 지상의 부와 명예를 차지하기 위해 거의 이성을 잃고 달려갑니다. 서로 떼밀기도 하고, 자기보다 약한 자들을 뒤로 제쳐 놓고 급히 나아가면서 넘어진 자들을 짓밟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면류관 속에 있는 보화를 열광적으로 붙들고 그것을 단단히 잡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사람들의 머리는 희게 되고, 얼굴은 근심과 염려의 큰 주름으로 덮이게 됩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안식이나 평안이 없습니다. 연약하거나 건강하거나 무식하거나 유식하거나를 막론하고, 많은 무리들은 세상의 보화가 있는 곳으로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의 면류관에 이르려고 애를 쓰다가 죽고, 또 어떤 사람들은 면류관을 잡자마자 쓰러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면류관을 붙잡음과 동시에 넘어집니다. 지상의 면류관에 도달한 자들이 받는 몫은 그들이 쟁취한 명예와 부와 쾌락이지만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사단과 악한 천사들은 매우 만족하게 세상의 면류관을 얻으려고 투쟁하는 무리들을 바라봅니다. 사단은 세상의 없어질 것들에 열렬하게 정신을 팔도록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면류관을 찾는 자들 중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임을 공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면류관을 잡기 위하여 한편 손을 힘없이 뻗지만, 다른 손으로는 지상의 면류관을 잡기 위해 힘주어 손을 뻗고, 그것을 소유하려고 열심을 다 합니다. 그러다가 곧 세상의 면류관을 열렬하게 추구하는 중에 하늘의 면류관은 시야에서 사라집니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버려집니다.
2. 하늘 면류관
하늘의 면류관에 시선을 굳게 고정하고 무리를 헤치고 나아가는 소수의 적은 무리가 있습니다. 천사들은 그들이 지나는 험한 여정을 열심히 보호하고 그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돕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늘의 면류관에 점점 가까이 접근해 갈 때에, 거기서 나오는 영원한 하늘의 빛이 그 길의 흑암을 몰아내고, 그 빛은 점점 더 선명하고 밝아집니다. 그들은 한 번도 세상의 면류관에 미련의 눈길을 던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면류관을 좇는 자들은 그들을 조롱하고, 그들에게 검은 공들을 던집니다. 사단에 의해 선동된 사람들이 조롱과 핍박과 거짓말과 비난의 공들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이 하늘의 면류관에 고정된 동안, 그 공들은 그들을 해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검은 공들을 던지던 자들은 그것에 의하여 자신이 더럽혀집니다.
하늘 면류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히 12:1, 2)는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시기심, 악의, 악한 생각, 악한 말, 탐심, 이런 것들은 불멸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버려야 할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욕을 돌리는 모든 습관이나 행위는 어떠한 희생을 하더라도 반드시 버리려고 합니다. 그들은 마음속에 품은 한 가지 죄가 어떻게 품성을 타락시키고 다른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하늘의 보화의 가치를 세상의 어떤 것보다 더 귀중하게 여기는 그들에게 세상 보화의 빛은 퇴색되고 의미없이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예수님보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기쁨보다 가치 있거나 소중한 것이 없음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바치는 열성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깨닫고, 그것이 마음속에 결코 만족을 줄 수 없으며 영원한 행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은 매일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아 하늘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하나님의 성실한 백성들입니다. 그들의 눈에 하늘의 보화는 세상의 어떤 것보다 빛나고 귀한 것으로 보입니다. 지상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벌써 하늘의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함을 받고 거룩하게 성화되어 가고 하늘나라는 벌써 그들의 마음속에 임해있습니다.
3. 당신이 선택한 면류관은 어떤 것입니까?
이 세상의 누구든지 두 면류관 중 하나를 추구하며 삽니다. 여러분은 어떤 면류관을 얻으려고 달려가고 있습니까?
어떤 젊은이가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말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소유를 나누어 주고 영생을 얻든지, 소유를 간직함으로 영생을 잃어버리든지 선택하라고 제시하셨습니다. 그에게 있어 재물은 하늘의 보화보다 더욱 큰 가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영생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말씀은 그를 근심하게 했고 그는 결국 예수님을 등지고 돌아갔습니다. 그 청년은 계명을 즐거운 마음으로 지켰다고 자랑했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한 가지가 부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영생을 바랐으나 자신의 재산을 더 사랑했고 세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치 못하게 되는 자”(막 4:19)들은 결국 내세의 영광, 불멸의 생명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세상의 면류관을 얻기 위하여 아우성치며, 재산을 얻기 위해, 세상의 명예와 인정과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어떤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모든 생각과 정력과 힘을 세상의 부를 얻는데 쏟으며 사는 사람들은 썩을 면류관을 손에 넣지만, 그들의 결국은 멸망과 파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생의 선물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리는 것은 원치 않는 사람들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결승점에 다다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마지막 주자의 사명을 가지고 결승점을 향하여 달려갈 때에 혹 우리에게 닥쳐오는 많은 어려움이 있어도, 숨 막히는 고통과 고난이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며 달려가야 합니다. 믿음의 경주는 쉬운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여 끝까지 경주해야 합니다. 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불멸의 면류관이 있음을 기억하며… 승리의 면류관을 머리에 씌어주시는 날까지 주님 주시는 힘과 용기를 가지고 끝까지 경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부_두 회개-당신의 회개는 어떤 회개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하늘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곧 회개와 거듭남이었습니다. 회개는 우리로 거듭남과 개혁에 이르게 합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죄에 대해 슬퍼하고 죄가 너무 추하고 싫어서 다시는 같은 죄를 반복하여 짓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또한 진정한 회개는 점점 더 깊은 회개의 경험을 하도록 이끌어 거룩한 성화의 길을 걷게 합니다.
1) 두 회개
그런데 회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한 회개는 진정으로 죄를 슬퍼하고 그 죄에서 돌아서는 것이며, 마음에 온전한 변화가 생기게 하는 회개입니다. 그런 참된 회개에는 반드시 개혁이 따르고 변화된 삶이 따릅니다. 또 다른 회개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인데, 그것은 그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고 그 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드린 데 대한 아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죄가 자신의 생애와 평판에 가져올 결과와 영향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에 나오는 인물들과 사건들에서 이 두 가지 종류의 회개의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예를 같이 한번 살펴볼까요?
1. 다윗의 회개
성경에 나오는 다윗의 회개는 참된 회개의 좋은 예입니다. 다윗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께 한 기도는 죄에 대해 진정으로 슬퍼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회개는 마음 깊은 데서 우러나온 참된 회개였습니다. 죄를 변명하려는 노력도 없었고, 정하신 형벌을 피하려는 욕망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드린 회개의 기도의 동기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가 얼마나 흉악한지, 자기의 심령이 얼마나 더러워졌는지를 깨달으므로 인해 오는 심령의 고통과 아픔을 경험했고, 그리하여 자기 죄를 심히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기도한 것은 죄사함을 받기 위함만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성결의 기쁨, 곧 하나님과의 조화와 교통과 가납하심을 회복하는 것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간절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 2).
다윗의 회개 기도는 진정한 회개를 경험하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대표적인 기도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7,10).
이러한 회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하늘에서 오는 선물이며, 성령의 감화하심에 굴복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굴복하는 일조차도 성령께서 역사하신 증거인데, 회개도 용서도 거듭남도 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에 순복할 때에 양심은 새롭게 되고 각성되어, 하나님의 나라의 기초가 되는 계명의 거룩하고 깊은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늘에서 오는 빛이 심령의 구석구석을 비추어 암흑 가운데 감춰진 것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늘의 빛이 마음을 비출 때에 죄에 대한 자각이 생기게 되고, 여호와의 의를 사모하게 되며, 그래서 자기 자신의 죄악과 불결함을 버리고 회개하여 깨끗하고 순결한 심령으로 주님 앞에 나가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진정한 회개란 이런 아름다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룩하심의 미와 순결의 기쁨을 깨닫고 자기가 정결케 되어 하늘과 교통할 수 있기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유다의 회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유망한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크신 하늘의 교사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굴복하지 않은 결과, 사단의 유혹에 자신을 내주고 메시아를 배반하고 파는 무서운 죄를 짓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유다는 후회하고 회개하였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마 27:4). 그러나 그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고, 그의 자복 역시 그가 진짜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팔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부인한 일에 대해 마음을 찢는 깊은 슬픔을 느낀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만 정죄에 대한 공포심과 장차 받을 심판에 대한 두려운 생각으로 마음에 가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후회의 말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 임할 결과가 그에게 공포심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배반한 사실에 대하여 충심으로 마음을 찢는 애통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이런 회개를 합니다. 자신의 악행이 자신에게 고통을 미치게 할까 두려워 자기가 범죄한 것을 후회하고 혹은 외양적으로 변화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상 의미로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그것은 죄 자체보다도 그 고통을 슬퍼해서 하게 되는 후회일 뿐입니다. 애굽의 바로는 하나님의 형벌로 재앙을 당할 때에 형벌을 더 받지 않기 위해 자기 죄를 자복하였으나 그 재앙이 그치자마자 다시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와 형벌을 두려워한 것이지 죄 그 자체를 슬퍼한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영구히 잃어버린 것을 알았을 때에 슬퍼한 것이 그런 것입니다. 또 발람이 자기가 가는 길에 칼을 빼 들고 서 있는 천사를 보고 두려워서 자기 생명을 잃을까 염려하여 죄를 자백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지도 않았고, 목적을 바꾸지도 않았고, 악을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회개가 바로 가룟 유다가 했던 회개입니다.
2) 개혁이 따르는 참된 회개
다윗의 회개는 성실하고 깊은 회개였습니다. 다윗은 절망 중에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열렬한 회개와 자복으로 주님께 매달렸으며, 하나님께로부터 용서와 가납하심을 입었습니다. 다윗은 비록 넘어졌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제 그는 타락하기 전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이웃에게 동정과 자비를 나타내었습니다. 누구든지 다윗처럼 겸비하게 자복하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하나님의 허락들을 받아들인 자는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회개하는 영혼을 결코 버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음의 약속을 보십시오.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사 27:5).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사 55:7).
1. 회개의 열매
그런데 참된 회개에는 항상 합당한 열매가 반드시 뒤따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 생애를 시작하게 됩니다. 전에 행하던 정욕과 욕심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 자기 자신을 꼴 짓지 않으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고, 주님의 품성을 반사하며, 그분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 뒤 따릅니다. 전에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되고, 미워하던 것을 사랑하게 되며, 전에 사랑하던 것을 이제는 미워하게 됩니다. 교만하고 자기 주장만 하던 사람들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게 되고, 허영적이고 교만한 사람들이 선하고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됩니다.
회개는 새로운 마음과 신앙을 가져오고, 또한 전격적인 회개를 경험한 후에 오는 점점 더 깊어지는 회개의 경험은 신앙과 영성에 부흥을 가져옵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동정으로 특징지어진 자비로운 성품과 태도를 보이게 되고, 시험당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판하기보다는 위해서 기도하며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또한 극기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을 위해 비난과 시련받는 것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9~11).
2. 개혁이 따르는 회개
다윗과 같은 참된 회개를 한 예로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의 회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회개의 열매를 보여주었는데,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눅 19:8). 삭개오의 회개는 열매가 따르는 참된 회개의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혁이 따르지 않는 회개는 참된 회개가 아닙니다. 서약한 것을 이행하고, 도둑질한 것을 돌려주고,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사랑하게 되면, 그는 하나님과 화친한 증거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자복하지 않고 버리지 않은 죄를 덮는 외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상생활이나 사업에서 순결과 정결함을 증거해야 합니다. 모든 거래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것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성결”이란 말은 기록된 장부와 증서와 영수증과 환어음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말하면서 불의한 행동을 하는 자들은 거룩하고 의롭고 인자하신 하나님의 품성에 대해 거짓 증거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 모든 영혼은 삭개오와 같이 그의 생애에 오점을 찍은 불의한 행동을 버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들어오셨음을 뚜렷이 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불의한 상거래를 통하여 다른 사람을 속였거나 매매에서 부적당한 이득을 취했거나 어떤 사람에게라도 사기를 했으면 비록 이 일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을지라도 우리는 잘못을 자복하고 힘이 미치는 한 배상해야 합니다.
철저한 개혁은 참된 회개에 대한 명확한 증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회개를 경험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회개는 개혁과 열매가 뒤따르는 회개입니까?
여러분의 회개의 경험은 나날이 더욱 깊어지고 있습니까?
참된 회개가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제4부_두 가지 선택과 은혜
우리 앞에는 늘 두 가지 선택이 놓여있습니다. 하나님의 편과 사단의 편, 영적인 편과 육신의 편, 악의 편과 선의 편, 두 선택이 있습니다. 한번의 선택은 그 다음을 선택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고 한 번의 선택은 다음의 선택을 훨씬 쉽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편, 선한 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영적인 편을 선택하기를 그치면 자연히 악한 편을 선택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의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아의 욕망과 의지를 따라 살거나, 하나님의 뜻과 소원을 따라 살거나 하는 두 가지 선택에 따라 우리의 삶과 영생이 좌우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만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지속적이 되어야 합니다.
1) 은혜의 힘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아니면 우리는 매 순간 바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누룩의 비유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고 거룩한 감화에 동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예시해주고 있습니다. 누룩이 가루를 부풀게 하듯이,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 역사해야 죄의 편을 택하지 않고 선의 편을 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해도, 선을 택하고 그것을 행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에 작용하여 우리가 매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힘을 줍니다. 우리는 선한 편을 선택할 힘이 없지만, 그러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여 주님께 구하면, 순간적으로 그분의 은혜의 능력이 우리의 마음과 의지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편을 선택하도록 힘을 줍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한 의지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해도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편을 택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자기 스스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를 일으킬 능력을 갖지 못했습니다. 전적으로 밖에 있는 누룩을 가루에 넣어야 변화가 생기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죄인이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줄 수 있는 차원 높은 모든 교양과 교육을 가지고도 죄인을 하늘의 자녀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오로지 새롭게 하는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데, 그런 변화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2) 선택을 지속시키는 은혜의 역사
가루 속에 넣은 누룩이 속에서부터 부풀게 하는 작용을 일으켜 점차 밖으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생애를 변화시키는 역사도 먼저 마음속이 새로워짐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에 굴복하는 사람 속에는 새로운 생명소가 심어져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안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생각의 방향이나 마음이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변화되고 성화되어야 합니다. 성화되고 변화된다는 것은 매 순간 매번 바른 선택을 함으로써 자신을 하나님의 편에 굴복시키는 일이 지속된다는 의미입니다. 그 매번의 바른 선택이 하나님의 길과 뜻에 계속 순종하게 만드는 것이며 그것이 성화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성향은 보다 높은 능력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육체는 보다 높은 능력에 복종해야 합니다. 정욕은 의지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의지 그 자체는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에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화된 이성이 늘 우리의 생애를 지배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과 바른 편에 지속적으로 선택되도록 한다면, 지속적인 승리의 생애가 가능하게 됩니다.
만일 사단이 사람의 의지를 꼴 짓도록 내버려 둘 때 그는 자신의 의지를 사단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사용하게 됩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고 인간의 마음을 충동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싸우게 합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반대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보좌에서 몰아내고 인류의 본성을 사단의 기형적 형상으로 형성하는 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악의 세력을 대항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그것을 대항할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선택의 장이며 투쟁의 생애입니다. 의와 불의의 쟁투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음으로써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유한한 우리의 의지는 무한하신 분의 의지에 복종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은혜의 능력을 주시면서 싸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굴복이 지속적인 것이 될 때, 은혜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에 우리의 바른 선택은 지속적인 것이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죄를 승리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승리하는 생활이란 어떤 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의 생활에 있어서 우리의 의지로 사단의 편을 택하지 않고 하나님의 편을 택하는 것, 사단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승리하는 것이며, 이 일은 우리의 의지의 작용과 선택에 의하여 매일 매 순간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우리의 앞에는 늘 두 가지의 선택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의 옮기는 발걸음마다 열렬히 기도하며 바른 선택을 해야 우리는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우리의 목적과 욕망과 성향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감사하는 가운데 기꺼이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능력에 맡기면, 하나님께서는 매번 우리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어 주실 것인데, 그렇게 될 때우리 속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빌 2:12,13)신다는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매일 매 순간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바른 선택은 지속적인 것이 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매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받고 계십니까?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두 가지 선택이 늘 우리의 앞에 있습니다. 매번 바른 선택을 하셔서 그 선택이 여러분의 운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스도인 가정_세상의 중심인 가정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하여 부지런히 돈 벌고, 힘들여 공부를 하며, 열심히 건강을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많이 가졌으나 불행한 사람, 많이 배우고 건강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 추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일시적인 행복감을 주는 데는 약간의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러한 방법들이 행복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어떤 조건이나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사랑을 바탕으로 맺어진 따뜻하고 진실한 인간관계 속에서 얻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장소가 바로 가정이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가정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중요한 존재이지만, 짐이 되고 포부를 꺾기에 가장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역시 남편은 아내를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지만, 아내의 인격과 꿈을 산산이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들입니다. 물질문명이 절정에 이르렀는데도 사회가 이렇게 혼란스럽고 인간의 복리가 위협을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3천여 년 전에 기록된 시편은 다음과 같이 밝혀줍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편 127:1,2)
결혼과 가정 제도의 창시자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분의 교훈을 무시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보려는 인간의 모든 노력은 허사입니다. 또 그러한 가정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아무리 사람의 안정과 복리를 지켜보려고 노력하더라도 역시 허사입니다. 이처럼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불안정한 현실에서 열심히 일하여 산업과 경제를 발전시킨다 해도 결국 허사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수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시편 127:3-5)
세상의 안전과 사회의 복리는 가정에서의 자녀들의 됨됨이에 달려 있습니다. 올바른 가정에서 제대로 배출되는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실 수 있는 최선의 유산이며 최고의 보상입니다.
가정의 상태가 교회와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좋은 예가 있습니다.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교의 제1대 총장이며 부흥목사였던 죠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와 뉴욕에서 술집을 경영하여 거부가 된 마커스 슐츠(Marcus Schultz)라는 불신자의 가정이 사회에 끼친 영향을 알아보기 위하여 뉴욕시 교육위원회는 그 두 사람의 5대 자손들의 현황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에드워즈 목사의 후손은 896명인데 그중 성직자 116명, 대학총장 3명과 학장 66명을 포함한 교육자 86명, 문학가 75명, 국회의원 4명, 부통령 1명, 사업가 73명, 과학자 21명, 장로와 집사 등 모범적인 신앙인들이 286명이나 되었습니다. 반면에 슐츠의 후손은 1,062명이었는데, 그 중 평균 5년간 교도소 생활을 한 사람이 96명, 알콜 중독자와 정신질환자가 58명, 윤락여성이 65명, 극빈자 286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 때문에 지출된 국고금이 무려 1억 5천만 불이나 되었습니다. 가정과 가정교육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진리탐구_마지막 세상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144,000인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습관적인 타성에 젖어 삶의 변화 없이 형식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십자가 보혈의 능력과 은혜를 믿고 경험하며, 그 은혜로 죄를 이기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을 이기고, 죄와 상관없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인을 치실 것이고,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세상 역사를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어린양이 인도하는 데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는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것은 어느 한 교단, 한 교회, 한 민족, 한 국가가 아니며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들인 곧 예수 믿음과 계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전 초대교회 때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온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땅끝 까기 전하여 세상이 복음의 빛으로 환해진 것 같이 마지막 시대에도 하나님의 소식을 전할 백성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교회와 교파와 교리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성품과 공의로우심을 하늘과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할 사람들입니다.그들은 나아가 바벨론의 죄악을 폭로하고 그 곳에 있는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는 일들을 할 것이며, 짐승의 우상숭배와 핍박에서 사람들을 깨워서 준비시킬 사람들입니다.
곧 등장할 영광스러운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여러분은 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무리의 믿음과 함께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 마지막 시기에 성령으로 인도하셔서 세상 역사를 마무리 지을 144,000인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 144,000인은 충만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역사적 마무리 사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이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승리로 기록하는 막중한 사명을 가진 어린양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그것이 진정 144,000인에 대한 예언의 비밀의 막이 올라가고 있는 말씀의 진실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노아는 환란 때 건짐과 보호를 받은 하나님 백성의 대표자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동행”에 있습니다. 144,000인 그들도 에녹과 노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노아의 시대와 같이 말세에 죄로 인해 고통하는 오늘날 여러분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고 계십니까?
“동행”이란 말과 뜻과 행실이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하나님과 마음이 합했다는 의미입니다. 구원받았으니 교회에 모든 일에 순종하고, 전도, 봉사, 기도, 헌금. 교제 등 이러한 행위들을 잘해야 하며, 특히 전도가 신앙의 최선인 것처럼, 교세의 확장이 성령이 충만하고 교회가 살아있는 증거라며, 오늘날 사역자들이 설교하지만 그것이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외형적인 나의 모습과 교회의 모습과 발전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겉모습과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십니다. 반드시 “깊은 속”입니다. 여러분의 은밀한 생각과 행동들을 다 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마음 안부터 먼저 깨끗이 하여야 합니다.
어느 정도 깨끗이 해야 합니까? 주님의 마음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한일서 3:3)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설 수가 있습니까?
“12지파”의 이름과 “144,000인”의 신앙관을 교훈으로 삼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시는 삶을 사시기를 간구드립니다.
그리스도인 교육_참된 교육의 본래 원칙
아담이 지음을 받았을 때 그의 육체적 지능적 영적 능력은 하나님을 닮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되...”(KJV 창 1:27) 사람이 오래 살면 살수록 더욱 완전히 창조주의 형상과 영광을 충분히 반영하게 하려고 목적하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의 신비 “지식이 완전하신 그분의 경이로운 일들”(욥 37:16)은 사람의 연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창조주와 대면하여 마음을 열고 교제하는 것은 사람의 큰 특권이었습니다. 사람이 충성을 변치 않았다면, 영원히 지속적으로 새로운 지식의 보화를 얻으며, 행복의 새 샘을 찾고,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힘에 대한 더욱 밝은 개념을 갖는 특권을 가졌을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보다 완전히 성취함으로써 창조주의 영광을 더욱 잘 나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이러한 특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고 일그러져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약해진 체력, 떨어진 지능, 어두워진 영적 통찰력, 그래서 인간은 결국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망 없이 버려지지는 않았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로 구원의 경륜이 세워지고, 생명에 대한 유예의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창조주의 형상을 회복시키는 것 즉, 사람의 지적 영적 육체적 발달을 증진시켜 사람을 창조 시의 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구속 사업입니다.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며 인생의 위대한 목적입니다.
창조와 구속의 기초인 사랑은 참된 교육의 기초가 됩니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눅 10:27)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지능과 육체와 영적 능력을 균형지게 발달시켜 하나님의 형상이 전인적으로 회복되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 22:39) 하신 둘째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의 율법은 하나님과 동료 인간을 위해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하는 헌신적인 봉사를 요구합니다. 이러한 봉사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며 우리 자신에게도 큰 축복입니다. 이러한 일이 계속될 때 우리는 신성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하늘에 적합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참된 지식의 원천이시므로 교육의 첫째 목적은 우리의 마음이 그분을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며 지식을 얻었고, 그분께서 하시는 일들을 통해 그분을 배웠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처음에 완전할 당시에는 하나님의 사상을 그대로 표현했습니다. 천연계는 하나님의 지혜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범죄 때문에, 하나님과 직접적인 교제를 통해서 그분을 배우는 길이 단절되었고 그분의 일을 통하여 배우는 길도 대부분 막혀버렸습니다. 땅은 범죄로 훼손되고 더러워져 창조주의 영광을 희미하게 반영할 따름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실물 교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창조된 천연계는 여전히 창조주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분적이며 불완전합니다. 게다가 타락해 있는 연약한 사람의 지력과 통찰력으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해석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통해 주시는 주님에 대한 보다 자세한 계시가 필요합니다.
교육이라고 할 만한 가치 있는 교육을 받으려면 진리의 완전한 표준인 성경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모든 인류는 생각과 행동에 하나님과 유사한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능력을 계발시키는 사람들이 책임을 지고, 사업을 지도하며, 다른 이들에게 감화를 끼칩니다. 참 교육은 이 능력을 계발시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을 단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반영하는 자가 아닌 스스로 생각하는 자가 되도록 훈련을 시킨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말과 기록을 연구하지 말고 진리의 원천인 천연계와 말씀의 계시 속에 펼쳐져 있는 광범위한 연구 분야로 학생들의 방향을 돌려야 합니다. 사람의 본분과 목적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깊이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넓어지고 강하게 될 것입니다. 교육을 받았으나 여전히 약한 사람들이 아닌, 생각하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 의지력이 있는 사람들, 환경에 지배받기보다는 이를 지배하는 사람들, 넓은 마음과 바른 식별력과 신념에 대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배출해야 합니다. 이러한 교육은 이기적인 욕망이나 세속적인 야심에 의해 진실과 정직이 희생되지 않도록 품성을 단련시켜 줍니다. 또 정신을 강하게 하여 악에 대항하도록 만듭니다. 하나님의 품성의 완전함을 간직하게 될 때 마음은 새로워지고 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를 받게 됩니다.
“지혜는 금을 주고도 얻을 수가 없으며,
은을 달아도 그것의 값을 치를 수 없도다.
그것은 오빌의 금으로나 진귀한 얼룩마노로나 사파이어로도
값을 정할 수가 없도다.
황금과 수정이라도 그것과 비교할 수가 없으며
순금 그릇들로도 그것과 바꿀 수가 없도다.
산호나 진주들도 말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지혜의 값이 홍보석보다 더 귀하기 때문이라.”
(욥 28:15-18).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은 사람의 생각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보다도 훨씬 높습니다. 경건 곧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는 것이 도달해야 할 목표입니다. 학생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 도달해야 할 표준이 있으며, 이 목표와 표준은 선하고 순결하고 고상한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학생은 참된 지식의 각 분야에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멀리 나아가야 합니다.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지식을 나눠 주고 인간의 품성이 주님의 품성을 따라 꼴 지어지도록 하는 일에 거룩한 뜻을 따라 협력하는 사람은 귀하고 고상한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비전에 도달하려는 강한 욕구를 가질 때, 그는 하늘처럼 높고 우주처럼 넓은 교육을 하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학생에게 이 땅의 예비 학교에서 보다 높은 단계의 하늘 학교로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보장해 주는 교육을 펴게 될 것입니다.
간증_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눈부시게 맑습니다. 마음에는 감사가 조용히 흘러나옵니다. ‘하나님 감사해요. 오늘 하루도 주님과 동행하며 살기 원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송이 하나 있습니다. 부르기 시작하면 울컥하는 찬송이지요.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한이 없는 주의 사랑 어찌 이루 말하랴 자나 깨나 주의 손이 항상 살펴주시고 모든 일을 주안에서 형통하게 하시네.’ 이 찬송시를 대할 때마다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해봅니다. 아직 33년밖에 살지 않았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저의 작은 삶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10대까진 교회에서 노는 것이 좋아 교회에 다녔고 어린이 성가대, 중고등부 학생회장 등 여러 가지 활동에는 열심이었지만 정작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부모님 또한 세속화되어가는 교회제도와 진리의 선포가 없는 현실에 교회 출석을 하지 않고 계신 상황이었지요. 신앙은 교회 출석 여부와는 상관없이 말씀 속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라고, 성경 속에 모든 삶의 해결과 진리가 담겨 있다고, 성경은 손에서 놓지 않기를 부모님은 늘 당부하셨습니다. 지적인 동의는 되지만 마음까지 와 닿지 않았기에 제 꿈을 위해 바쁘게 공부하고 보통 젊은 세대들처럼 적당한 유흥도 즐기며 20대의 중반까지도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준비하던 임용고시에 연이어 실패하면서 차선책으로 선택했던 직장생활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잦은 야근과 많은 업무로 정신과 체력이 모두 지쳐갔고 스트레스, 자극적인 음식, 규칙적이지 못한 생활습관이 지속될수록 심신이 약해져 감을 느꼈습니다. 1년 내내 감기를 달고 살고, 피부트러블, 만성피로 등에 시달리며 마음에도 참 평안이 없었지요.
그러던 중 도시의 삶을 접고 시골생활을 시작하셨던 부모님을 통해 한동안 잊고 있던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참된 진리를 찾고자 갈망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SOSTV에서 전하는 몇백 편이나 되는 설교를 들으시면서 스스로 성경연구를 해오시던 내용과 부합하며 좀 더 명료하게 진리의 사슬이 맞추어지는 경험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귀한 진리를 소개해주고 싶었던 부모님은 떨어져 사는 언니와 저에게도 여러 편의 설교와 책자들을 건네시며 함께 연구해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내키지가 않았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고 바쁘고 힘든 생활에 지쳐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던 중 휴가 기간 동안 부모님 댁에 가 있게 되었고 어딘지 모르게 달라 보이는 두 분을 보면서 의아했습니다. 감사함으로 생활하시는 모습, 끊이지 않는 설교 말씀과 찬양이 흘러나오는 삶, 충분히 힘든 시골생활인데 역으로 평안해 보이는 부모님의 모습은 저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생활을 하면서, 문득 부모님이 전해주신 책자들을 읽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성경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복음서부터 읽기 시작하는데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사건으로 다가오며,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는 십자가 사건에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나를 이렇게 사랑하는 분이 계셨지, 나는 그동안 그분을 잊고 살았구나. 어쩌면 잘 알고 있고, 잘 믿고 있다고 스스로 속이며 살았구나‘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습니다. 매일 조금씩 성경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만나며 ‘이 땅에 나를 살게 하신 이유, 존재하는 이유’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시편 4:7)’ 라는 말씀이 입술의 고백으로 흘러나오는 경험을 할 때 즈음 직장생활을 접고 시골생활을 하시는 부모님이 계신 경북 상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천연계속에서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생활이 참 좋았고,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매일의 투쟁 속에서 하나님께서 승리하시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납니다. 2012년 3월경 왼쪽 가슴에 무엇인가가 만져졌고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에 동네병원에서 큰 대학병원으로 옮겨 정밀검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결과를 듣기 위해 일주일을 기다렸고 그 기간 동안 제가 하나님께 했던 기도는 ‘어떤 상황이나 결과와는 상관없이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을 주세요.’였습니다.
엄마와 함께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 의사로부터 유방암 확진을 받게 되었고 엄마는 슬피 울며 힘들어하셨습니다. 오히려 제 마음은 담담했습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을 허락하시고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은 큰 위로로 다가왔고 수술대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한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두려움과 낙망도 소망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뜻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수술 후 관례처럼 여겨지는 항암이나 방사선치료는 받지 않기로 했고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며 생활해오고 있었습니다. 그 무렵 저에게는 같은 신앙 안에서 서로 호감을 느끼고 있는 한 형제가 있었고, 투병하는 과정에서 종종 위로와 격려를 해주는 모습에 마음이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병력이 있는 상황에서 결혼을 생각한다는 것이 상대에게 미안한 일이라 여겨졌고, 그 형제도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제게 만남을 더 이상 이어가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자꾸만 제 마음 가운데 형제에 대한 서운한 마음이 올라오더군요. 마주치는 상황이 생길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기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 형제를 믿음 안에서 한 형제로 볼 수 있고 대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런 기도는 제 마음에 불편함이 올라올 때마다 반복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제 마음에서 그러한 상처들이 치유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그 형제에게 진정한 사과의 편지와 다시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제 마음은 이미 정리가 된 상태였기에 정중히 거절했고 사과는 이미 제 마음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졌다고, 자유하라는 말을 건넸습니다. 서로 헤어져 있는 동안 형제에게도 많은 사건과 마음의 투쟁으로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경험이 있었고 이번에는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만남을 이어가고 싶다는 요청이 몇 개월간 지속되었습니다. 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우리의 방법과 계획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믿음의 교제를 해 보기로 했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신앙적인 견해도 나누며 친구처럼 지내는 동안, 서로를 이어주는 것은 감정이 주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칙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 끝에 양가의 허락을 받고 결혼을 결심하게 됩니다.
결혼을 두 달 앞둔 올해 3월 정기검진에서 유방암이 재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번엔 예비신랑과 함께 말이죠. 하지만 이런 사실이 서로의 약속에 흔들림을 주기보다 오히려 굳게 해주는 끈이 되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하다는 믿음 가운데 이번에는 수술이 아닌 천연 치료로 방향을 잡게 되었습니다. 육식이나 동물성 기름이 배제된 신선한 채소와 과일, 곡류의 식단, 햇빛, 운동, 물, 절제, 무엇보다 믿음으로 감사하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천연 치유의 방법임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고, 억지로가 아닌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그 길을 가고 싶어졌습니다. 병원 치료가 필요한 상태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의 도움을 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저 또한 부분적으로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의 경우에는 병이 생긴 근본 원인을 알고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싶었습니다. 그 과정 속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신랑은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천연 치유를 집중적으로 하는 치유센터 안에서 프러포즈를 받은 신부는 흔치 않을 것 같네요.
하나님의 주관 하에 은혜롭게 올린 결혼예식 후, 9개월 차 새댁으로 하루하루를 감사 속에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연장해주신 이 생명의 시간 동안 그저 하나님께 동행하며 살고 싶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하루를 하나님과 어떤 관계 속에서 사느냐가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일련의 과정들을 지내오면서 너무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종종 자아가 그대로 살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저를 보게 됩니다. 신앙의 여정을 지나갈수록 나라는 사람은 스스로 어떠한 선도, 의도 행할 수 없는 사람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저에게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이 말씀은 참 소망이 됩니다.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사셔야만 가능한 은혜의 삶이기에 온전히 주님만 의지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이 삶의 고백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지속되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도 저의 작은 삶 이야기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질 것을 믿음으로 기대합니다.
Healing Story_우엉과 더덕
1. 우엉
잎과 줄기에 비하여 땅 속 깊숙이 뿌리를 내리는 우엉은 별다른 보온 없이도 거뜬히 겨울을 이겨내는 기특한 녀석입니다. 또한 우엉은 인삼에 많은 사포닌 성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서 모래밭에서 나는 산삼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장내 유산균에 좋은 프락토 올리고당이 풍부하여 변비 해소와 숙변 배출을 돕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 사포닌
우엉 껍질에는 인삼에 다량 함유된 사포닌이라는 성분이 아주 풍부합니다. 사포닌은 물에 녹으면서 거품을 만들어 내는 성격이 있는데, 이 성분이 혈중 콜레스테롤과 지방에 붙어서 기름기를 씻어주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주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므로 동맥경화와 뇌졸중 예방 등 성인병 치료와 예방에 좋은 성분입니다.
* 이눌린
-사람의 장은 매일 여러 가지 음식물들이 몰려 들어오는 곳이므로 면역세포들이 철통 수비를 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무려 1000여 종의 세균이 사는 반면 면역세포의 약 80%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장에는 우리 몸에 도움이 되는 유익한 균도 있고 몸에 해로운 유해균도 있습니다. 따라서 건강한 장을 유지하여 면역세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유익한 균들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엉이나 더덕의 뿌리에 풍부한 이눌린은 장에 좋은 균들의 좋은 먹이가 되어서 그들을 활성화시켜 주고 유익균들의 수를 늘려주므로 장의 기능을 향상시켜 주고 더불어 면역세포의 증식을 유도하고 각종 면역세포를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리그닌
우엉에는 이눌린과 같이 장의 기능을 향상시켜 주는 리그닌이라는 성분이 있습니다. 리그닌은 불용성 식이섬유로 우엉을 잘랐을 때 나오는 끈적거리는 성분인데 장내 발암물질을 흡착하여 몸 밖으로 배출시켜 주는 효능이 있다고 합니다.
-이눌린의 또 다른 효능은 체내에서 혈당을 낮춰 주는 호르몬인 인슐린처럼 혈당 조절 기능이 탁월하여 당뇨에 좋다고 합니다.
-신장의 기능을 향상시켜서 이뇨 작용에 도움을 주고 부기를 빼줍니다.
* 식이섬유소
우엉은 당질이 많이 함유된 알칼리 식품이며 뿌리와 줄기에 식이섬유가 아주 풍부합니다. 이 식이섬유소는 장내 독소와 장 점막의 접촉 시간을 줄여주고 정장 작용과 배변 활동을 촉진시켜 줍니다.
* 아르기닌
우엉에 든 단백질인 아르기닌 성분은 대사 작용의 부산물로 생기는 요산과 독소를 분리해 몸 밖으로 배출시켜 주므로 통풍 예방에 좋다고 합니다. 또한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주고 성장에 도움이 되는 물질을 분비하여 정신력은 물론 체력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 기타
우엉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비타민과 무기질은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며 다량 함유되어 있는 칼슘은 골다공증 예방 및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좋습니다.
* 우엉차
이토록 좋은 성분들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우엉을 쉽게 섭취하기 위하여 우엉차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엉차는 껍질을 까지 않은 상태로 우려서 마셔야 그 효능을 모두 즐길 수 있습니다.
1)껍질을 제거하지 않은 신선한 우엉을 깨끗이 씻어서 최대한 얇게 썰어줍니다.
2)1~2일 정도 우엉을 바짝 말립니다.
3)달군 팬에 말린 우엉을 넣고 타지 않도록 저어가면서 볶아줍니다. 우엉에 물기가 남아있으면 차를 우려낼 때 구수한 맛이 나지 않을 수 있으므로 5-10분간 충분히 볶아줍니다.
4)볶아낸 우엉을 뜨거운 물에 우리면 구수한 우엉차가 완성됩니다.
2. 더덕
밥상에 놓인 더덕을 외에는 실제로 더덕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모르던 시절, 산야초라면 모르는 게 없으시다는 이웃분과 함께 더덕을 캐러 뒷산을 올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까지 호미를 하나씩 쥐고서 험난한 대모험을 떠나는 심정으로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더덕 찾기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웃분이 알려주시는 더덕 잎사귀는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더덕 고유의 독특한 향기 덕에 넝쿨 지듯 길게 뻗어 있는 더덕 줄기를 발견하는 일은 쉬었습니다. 제법 통통한 것부터 엄지손가락 정도 되는 것까지 꾀 많은 양의 더덕을 캐서 뿌듯한 마음으로 첫모험을 마쳤던 것 같습니다. 더덕의 그 독특한 향기는 병충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창조주께서 뿌려주신 것이라고 하니 참 섬세하고 자상하신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덕은 옛날부터 귀한 약재로 쓰여 왔으며 식용으로는 주로 어린잎과 뿌리를 먹습니다. 새순을 살짝 데치거나 생채로 길게 썰어 비빔밥, 채소 무침 등의 반찬으로 먹어도 되고 뿌리를 꿀에 발라 구워 먹거나 고추장 양념구이로도 먹기 좋으며, 생채로 양념해 먹어도 좋습니다. 특히 더덕의 좋은 영양분이 뿌리껍질에 많으므로 껍질을 벗기지 않고 깨끗이 씻은 다음, 반으로 가르고 3∼5cm 정도로 잘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더덕은 늦가을부터 봄에 싹이 나오기 전까지가 제철인데 그 중에서도 10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약효가 가장 좋다고 합니다.
* 사포닌
더덕 뿌리에는 인삼에만 있다고 알려진 사포닌 성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더덕을 자르면 하얀색 우유처럼 보이는 끈적거리는 진액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포닌은 기관지 점막을 튼튼하게 해주어 폐 기능을 강화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도라지처럼 가래와 기침을 가라앉혀줍니다.
-해열, 거담, 소염 기능이 뛰어나므로 인후염, 기관지염에 좋습니다.
-혈중 나쁜 콜레스테롤을 배출해주는 효능이 있어 혈액순환을 개선해주기 때문에 고지혈증, 고혈압 그리고 심근경색 등과 같은 혈관성 질환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포닌 중에서도 항산화 능력이 뛰어난 성분이 바로 란세마사이드 A인데, 세포를 공격하는 활성 산소를 없애주는 항산화 작용이 우수하고 세포의 돌연변이를 막아주기 때문에 암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미국국립보건원과 강원대학교에서 연구한 바에 의하면 더덕에 함유된 사포닌이 폐암 예방과 암세포 증식을 억제한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쌉쌀한 맛을 지닌 사포닌 성분은 열에 민감하므로 조리 과정을 거치면서 증발하거나 파괴되며 쉽게 물에 용해되기 때문에 더덕의 아리고 쓴맛은 물에 충분히 우려낸 다음 생채 또는 살짝 열을 가해 조리하여 먹는 것이 좋습니다.
* 식이섬유
더덕은 100g당 55kcal로 칼로리가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포만감을 주며 장 건강에 좋고, 특히 변비 예방을 도와줍니다. 때때로 더덕구이를 하기 위해서 방망이로 더덕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은데, 너무 세게 두드리면 섬유질이 조각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 기타
고혈압을 예방하는 올레아놀릭산도 풍부하며 신경계 기능 활성화와 신진대사에 작용하는 비타민 B1·B2, 칼슘도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렇게 자상하신 걸까요? 싱그러운 푸른 잎과 울긋불긋한 예쁜 먹거리들을 볼 수 없는 겨울이지만, 추운 계절을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우엉과 더덕 속에 몸에 좋은 것들로 넘치도록 채워 두셨습니다. 이런 창조주를 신뢰하지 못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걱정으로 한 숨 지으시는 분들 계신지요? 만약 그러하시다면, 용기 내시기 바랍니다. 영원 전부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준비해 두신 하늘 아버지께서 여러분 곁에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