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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17;39-52.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2021. 11. 28.
여러분, 사람들은 거의 익숙한 것에 눈이 가고 익숙한 것에 마음을 쓰고 그래서 가까이 있는 것만을 보고 가까운 곳의 듣는 것만 귀에 담아 둡니다. 아는 만큼만 알려고 하고 아는 만큼만 보려고 하고 아는 만큼만 들으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익숙한 것이 편하고 익숙한 것이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난주에 나누었던 말씀 중에 다윗은 익숙하지 않으므로 익숙한 것을 선택해서 행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인지 능력이라고 하는데 이 인지 능력을 더 확대 시켜주고 더 넓게 만든 것이 sns의 정보 전달입니다. 그래서 많은 정보 전달 때문에 요즈음은 다 박사고 다 전문가며 모두가 자기의 주장이 확실하고 자기의 주장이 강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과 칼과 창에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지팡이와 막대기에 익숙했습니다.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가와 양들에 대하여 익숙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익숙했고 하나님의 이름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분야만은 전문가이고 박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칼과 창에 능하고 익숙한 골리앗과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과 용사들과 사울 왕이 흔들리지 않고 이 난국을 해쳐 나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 砥柱反正(지주반정)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砥(지)는 명사로도 쓰이고 동사로도 쓰입니다. 명사로 사용되면 숫돌이고 동사로 쓰이면 갈고 닦는 뜻입니다. 지주(砥柱)는 중국 황하 중류에 있는 기둥 모양의 바위로, 위가 숫돌 같으며 격류에도 꿈쩍하지 않고 버티고 있어서 선비의 곧은 절개로도 비유가 됩니다. 그러니까? 굴곡과 지천이 수많은 세상에서 진리의 기둥이, 사실의 기둥이, 신앙의 기둥이 바위처럼 버티고 있다면 세상은 바르게 되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제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주반정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오늘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는 이스라엘과 사울 왕 앞에서 어떠한 상황과 격류에도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버티었습니다.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믿음과 신뢰의 지주반정이었고, 승리의 지주반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능력을 알리는 지주반정이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이 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1. 골리앗과 세상의 기준입니다. 41-44,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 가니라.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여러분, 이 말씀은 골리앗이 보는 승리의 관점인데 이 내용은 사실 세상이 주는 승리의 방법입니다. 골리앗은 수단으로 전쟁을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그 무엇으로 싸우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수단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신의 몸집을 거대하게 키우고, 날카롭고 치명적인 능력을 위해서 오늘도 칼을 갑니다. 골리앗은 수단으로 싸우는데 자신의 거대한 몸집과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칼과 창입니다. 이 수단을 믿었고 이 수단이면 이스라엘을 삼켜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수단인 자기 자신과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칼과 창으로 이스라엘을 40일 동안 압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다윗의 목적입니다. 사랑하고 경외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모욕과 저주의 대상이 아니고 찬양과 경배 그자체이기 때문에 목적인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서 골리앗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왜요? 시25:14,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있음이여 여호와의 언약을 경외하은 그 사람들에게 보이시리라. 보이시기 때문에 담대했습니다. 승리가 보이고 축복이 보이고 내일이 보였습니다. 골리앗이 넘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여러분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승리의 일반적인 법칙은 손자병법입니다. 손자병법이 무엇입니까?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 이기고, 군대의 많고 적음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이기고,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쪽이 이기고, 싸울 준비를 끝내고 적을 기다리는 사람이 이깁니다. 그리고 장수는 유능하고 임금은 개입하지 않는 쪽이 이깁니다. 이 것이 손자병법의 승리의 기준인데 세상과 골리앗의 기준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손자병법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1.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 이긴다는 것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이야기입니다. 계란 쥐고 바위 깨겠다고 덤비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미리 피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비아냥거림과 이야기 거리와 우스개를 감수하면서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것은 오히려 용기라고 합니다.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이기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골리앗의 기준이고 손자병법입니다. 조그만 히메지 교회에 있을 때에 많은 분들이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 때문에 계란으로 바위치기가 되더라도 이래도 은혜이고 저래도 은혜라고 했습니다.
1-2. 군대의 많고 적음을 쓸 줄 아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가지고 상대의 항복을 유도하는 것인데 아군과 적의 숫자가 비슷하다면 적의 전력을 분산시켜야 하고 아군의 숫자가 적다면 정면충돌을 피해야 합니다. 골리앗의 기준이고 세상의 기준입니다.
1-3. 상하가 일치단결해야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전력의 집중은 권력의 집중에서 비롯되고. 권력의 집중은 뜻의 집중에서 비롯된다는 것인데 지도자는 모두가 함께 나눌 수 있는 뜻과 비전을 제시해야 합니다. 비전이 없는 권력은 분할통치를 획책하고 분할은 분열을 낳고 분열은 분산을 낳습니다. 힘의 분산은 곧 싸움의 패배를 뜻합니다.
1-4. 싸울 준비를 끝내고 적을 기다리는 사람이 승리한다는 병법은 유비무환이 승리의 조건입니다. 아침에 부지런한 새가 벌레를 많이 잡는 것과 같습니다.
1-5. 장수는 유능하고 임금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병법은 명령은 하나의 통로에서 나와야 하고 명령을 내릴 때는 현장 판단이 우선이기 때문에 임금은 장수를 믿어야 합니다. 감투 내세워 목소리 내고, 고집 피우고, 잘난 척하면 집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승리의 조건입니다. 물론 이 5가지의 내용 속에는 신앙인이 담아야 할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조건이나 환경이 좋아서만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건이나 환경이 열악하기 때문에 성공하고 승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그 유명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입니다. 요즘도 너무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을 다윗과 골리앗의 전쟁이라고 비유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힘과 능력이 있는 사람과 힘과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의 차원이 아니고 옳고 그름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리의 기준은 손자병법이 아니고 다윗의 그 무엇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승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2,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은 익숙함으로 전쟁에 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익숙했던 옷과 물매 돌은 골리앗과 전쟁에서 그를 보호해 주기는 부족해 보였습니다. 거대한 채구와 갑옷과 칼과 창과 방패와 뒤에 수많은 군사들은 물매 돌 다섯 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을 향하여 온갖 저주를 퍼붓는 골리앗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선포하는데 45절,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그러면서 49-50. 손을 주머니를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려지니라.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었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다윗의 손에는 칼이 없고 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보는 승리의 관점은 그의 손에 칼이 없어도 승리할 수 있는 관점입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손자병법과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승리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골리앗을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칼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칼이라는 수단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물매돌이라는 수단으로 싸운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싸웠습니다. 다윗은 존재의 이유가 되시며 전쟁의 이유되시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싸웠습니다. 그래서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러면 싸우러 가는데 왜 다윗의 손에 칼이 없습니까?
다윗은 목적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 목적 때문에 골리앗과 전쟁을 합니다. 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다윗의 목적입니까? 다윗은 자신을 구원하신 분이 여호와임을 밝힙니다. 시27;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라. 다윗은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았고 형제들로 부터 소외되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다윗에게 비하하는 표현으로 양을 이야기하고 목장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인정했습니다. 시25;16,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로우니 내게 돌이키사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다윗은 외로웠습니다. 그 외로움의 현장이었던 울타리의 양들과 그 양들을 곰과 사자로 부터 지켜주신 분이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 부터 사랑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구원해주고 사랑해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목적이었고 그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칼과 창으로 무기를 들고 달려든다 해도 두렵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요일4;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렴을 내쫓나니.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사랑은 두렴을 내어 쫓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싸웁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모욕 받지 않도록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다윗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시30;11, 슬픔이 변하여 춤을 추게 하셨고, 베옷을 벗기고 기쁨의 띠를 띠우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싸우고, 무엇으로 승리를 누립니까? 수단입니까? 목적입니까? 하나님만이 삶의 목적이 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십니까? 47절은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있습니까? 계7;10, 구원하심은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습니다. 승리하고 싶다면 칼이라는 수단을 갈기 전에 내가 왜 싸워야 하는지 분명한 목적이 먼저이고 우선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목적 하면 그 어떤 인생의 전쟁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나에게 칼이 없고 방패가 없더라도 그렇습니다. 이것이 나를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입니다. 수단이 없고 무기가 없어도!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전쟁을 하면 승리는 예비 되어있습니다. 왜요?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하나님을 기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애가3:25. 기다리는 사람들에게와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하나님은 이런 기다리고 구하는 다윗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의 손에 칼이 없고, 수단이 없어도 물매 돌로 골리앗을 넉넉히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손에 칼이 없는 다윗이 무엇으로 골리앗을 넘어뜨립니까? 어떻게 승리를 가져 옵니까?
2-1. 다윗의 기준의 첫 번째는 믿음입니다. 47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다윗은 이 믿음의 내용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부모나 조부모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출애굽의 이야기를 듣고 가나안 정복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삶의 여러 전쟁을 통해서 아하! 모든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이기고 지는 것 역시 하나님 손에 있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명분이 옳고, 무엇보다 그 전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그 전쟁은 무조건 이긴다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명분 없는 싸움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기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거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윗은 명분이 있었습니다. 최고의 가치입니다. 무슨 가치입니까?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의 가치입니다. 지금 골리앗은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조롱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믿음의 눈으로 볼 때에 이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믿음이 다윗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46절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라. 왜 이렇게 이야기 할까요?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함께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45절에 여호와의 이름,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골리앗이 의지하는 것은 칼과 창과 단창이지만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믿었고 그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믿음으로 나서는 사람에게는 결코 혼자 두시지 않고 결코 실망을 시키지 않습니다.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믿음에 의한 승리는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분, 여호와 닛시가 무엇입니까? 승리의 깃발입니다. 어느 배경에서 나온 표현입니까? 출17:8-16,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애굽기 17장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반부인 1∼7절은 반석에서 물이 솟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인 8∼16절은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쟁 기사입니다.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두 사건을 별개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이 두 사건을 떼어 놓기보다는 같이 연결시켜서 17장 전체를 하나의 본문으로 삼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반부의 분위기는 매우 절망적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행하여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 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 여정이 자신들의 의중에 따른 것이었다면 물을 얻지 못한 것을 하나님께서 내리는 벌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대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이 날로 악화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납득하기 어려운 처지에 떨어지자 작심하여 자중지란에 빠졌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고, 출애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도 짜증석인 원망조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출17;4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서로 다투었고, 여호와 하나님이 과연 계신가의 여부를 의심할 정도로 깊은 시험에 빠졌습니다. 그때까지 그토록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가 다 불신앙의 자리에 떨어졌습니다. 이 심각한 때, 지도자를 믿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그들은 아말렉이라는 강력한 적을 만났습니다. 8절 첫 부분의 때에 라는 말은 바로 이 심각한 절망의 시간에 아말렉과의 전쟁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은 그토록 불신앙에 떨어진 백성들이었고 지도자에 대하여 원망하는 백성들이었고 소망을 잃고 절망 중에 빠져있는 백성들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아말렉과 싸울 수 있었을까? 당시 이스라엘은 한 번도 전쟁을 경험해본 적이 없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은 그들의 첫 전쟁입니다. 이미 자리를 잡고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는 아말렉 족속들과 먼 길을 가는 나그네와 같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은 싸우나마나 그 답은 나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당시에 거대한 애굽이 시나이반도를 점령할 때에 이 아말렉만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 이 것은 그들이 상당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전술에 능했다는 표현입니다. 이런 자신감과 계산이 있었기에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가는 길을 막았고 전쟁을 걸어 왔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수아를 불러 급히 젊은 사람들을 모아서 군대를 조직하여 아말렉과 대항하여 전쟁을 수행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을 따라 급히 서둘러서 싸울만한 젊은이들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전쟁터로 나가서 아말렉과 싸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말렉이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인데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크게 승리를 했습니다. 정말 예상할 수 없었던 대승이었습니다. 막강한 군사력과 무기를 가지고 있는 아말렉을 오합지졸과 같은 이스라엘 병사들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 온 진영은 큰 감격과 기쁨에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돌리며 여호와 닛시! 승리의 비석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런 승리가 가능했을까요? 어떻게 강력한 아말렉 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승리의 비결은 탁월한 여호수아의 지도력이나 작전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막강한 어떤 비밀 무기가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석에서 모집하여 군대를 조직했는데 무슨 무기가 있으며 무슨 전술이 있습니까? 전쟁 수행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아말렉과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겼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지도자 모세는 이미 지도력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더 이상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절망적인 백성들이 이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분위기가 반전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들은 강한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요? 여러분, 이 말씀은 미래에 대한 비젼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앞으로 나가는 길에 큰 산을 만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줍니다. 그 승리의 비결은 믿음과 신앙에 있습니다. 아말렉과 전쟁이 있던 날 모세는 아론과 훌을 데리고 제일 높은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는 두 진영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두 손을 들어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는 동안에는 이스라엘이 승리하였지만 모세의 팔이 피곤하여 내려왔을 때는 아말렉 진영이 힘을 얻어 이스라엘을 밀고 들어왔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높은 산에 올라간 모세는 전쟁의 상황을 내려다보면서 기도를 쉬면 안 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함께 산에 올라간 아론과 훌이 마침 곁에 있었습니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고, 훌은 누이 미리암의 남편이었습니다. 모세와 모세의 형 아론과 모세의 매형 훌은 모두들 여든(80)이 넘은 사람들입니다. 비록 그들은 여든이 넘은 할아버지였지만 힘과 마음을 하나로 뭉쳤습니다. 돌을 가져다가 모세로 하여금 그 돌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은 양편에서 모세의 손을 높이 붙들어 올렸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므로 모세는 손을 높이 든 채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이에 힘을 입은 이스라엘 병사들은 해가 지도록 아말렉과 싸워서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혼자서는 계속해서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아론과 훌이 옆에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비결은 칼이나 창으로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술이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니고 바로 기도와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다윗이 승리한 비결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믿음에 있습니다.
2-2. 다윗의 승리의 원동력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역에서의 실력입니다. 그의 실력은 갈고 닦은 물매기술과 곰이나 사자와도 싸울 수 있는 무예입니다. 오늘 이 다윗의 실력을 결코 가벼이 취급하면 아니 됩니다. 여러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는 말씀을 자주하는데, 그것은 인용하라고 주신 말씀은 아닙니다. 앞뒤를 보면 결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시간과 노력을 통해서 익숙한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신앙도 실력입니다. 여러분, 사무엘이 등장할 즈음에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당시 영적 책임자는 엘리 제사장이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물론 신체적으로 노안이 왔고, 백내장 녹내장이 와서 잘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징적 해석이 필요한데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보이지 않은 것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엘리는 신체적으로 눈이 나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눈이 멀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적 감각이 둔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떨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무엘은 잠을 자도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에서 자는데, 엘리는 자기 처소에서 잤습니다. 영적 실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영적 실력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있는 여호와의 전은 예배입니다. 여러분, 훌륭한 인격과 도덕과 정직함과 진실함과 훌륭한 삶의 태도는 결국 신앙의 힘에서 나와야 합니다. 내 자신의 잣대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신앙과 믿음을 통해서 만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 때문에 갖춰져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림이 없고 그래야 실패가 없습니다! 다윗은 실력이 있었습니다. 그 실력은 평소의 실력입니다. 양을 지키려고 물매실력을 키웠고, 곰과 사자의 접근을 보며 동작을 알았고 사자나 곰에게 양이 물려갈 때도 그 양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다 보니 실력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실력은 평소실력입니다. 그리고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평소 실력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역에서의 실력이 중요한데 그 영역에서 믿음과 함께 실력을 갖추는 여러분이 되어서 위급하고 난관이 잇는 현장에서 귀히 쓰임을 받는, 필요 때문에 세상이 여러분을 찾고 부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3. 다윗의 기준의 세 번째는 언제나 도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실력이 있어도 도전하는 행동이 없으면, 하늘같은 믿음과 당대 최고의 실력이라도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싫어하고 낮선 곳에 뛰어 드는 그 어려움과 번거로움이 귀찮아서 좋은 재능을 썩히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실력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도전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격언은 나쁜 표현입니다. 못 올라가더라도 쳐다는 봐야 하잖아요? 그래야 정말 내가 오를 수 있는 나무인지 아닌지 가릴 수 있잖아요. 의외로 도전을 안 해서 그렇지 도전하면 쉽게 오를 수 있는 나무인데 그 동안 그런 시도를 한 사람이 없어서 정복을 당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 오르다가 실패를 해 보아야 확실히 포기도 할 수 있잖아요? 쳐다보지도 않고 오르는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잘하면 조언이고 잘해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잘 못 말하면 간섭이라고 합니다. 어디가 기준인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이해는 이해이고 서운함은 서운함 그 자체로 남습니다. 왜냐하면 이해는 이성의 문제이고 머리의 문제이지만 서운함은 감정의 문제이고 가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감정의 문제도 해결이 되어야 온전한 관계가 세워 집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감정과 가슴의 문제까지 해결이 될 수 있을까요? 이해를 하고 서운함을 마음에 남기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예수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임마누엘입니다. 이 것이 신앙이고 이 것이 실력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관계가 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기는 너무 쉬웠습니다. 물맷돌 한 방이면 족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과 실력과 도전의 결정체였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임마누엘 되신 하나님이 계시되 다윗과 함께 동행을 하시고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윗의 모습이 얼마나 눈에 선합니까? 다윗의 멋진 믿음의 표현이 얼마나 귀에 남습니까? 도전하는 모습이 얼마나 갸륵합니까? 누가 그래요. 아름다운 모습은 눈에 선하고 멋진 말은 귀에 남고 따뜻한 사랑의 배려는 가슴에 남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요14:1. Do not let your heart be troubled. You believe in GOD; believe also in me.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늘 믿음과 신앙 가운데 도전을 하시는 그래서 승리가 여러분에게 있는 것을 확인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