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해남 달마산과 미황사를 다녀와서!
달마산(達摩山)남도의 금강산
산행은 약 6km, 3시간에 불과하지만 암릉, 억새, 다도해상록수규암
산을 오르는 도중 돌더미가 흘러내리는 너덜지대를 통과하기 때문에 산행이 쉽지
만은 않으며 곳곳에 단절된 바위 암벽이 있어 혼자 등반하기보다는 여럿이 오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향토사학자에 의하면 이 산은 옛날의 송양현에 속해 있었는
데 지금은 해남군 현산·북평·송지 등 3개 면에 접하고 해남읍으로부터 약 28㎞
떨어져 있다. 이처럼 3개 면에 위치하면서 두륜산과 대둔산의 맥을 이어 현산이
머리라면 북평은 등, 송지는 가슴에 해당하는 형상이다. 또 사구·통호·송호 등의
산맥을 지맥으로 이루면서 한반도 최남단 땅끝 사자봉에 멈춘 듯하지만 바다로
맥을 끌고 나가 멀리 제주도 한라산을 이루고 있는 독특한 산이다. 이렇듯 수려한
' 산세가 유서깊은 천년 고찰 미황사를 있게 한 것이다. 또 옛날에 봉수대가 설치
되어 완도의 숙승봉과 북일 좌일산에서 서로 주고받던 곳으로 현재 잔허가 남아
있으며 극심한 가뭄이 오래 계속되면 산봉우리에서 기우제海路流入說)을 뒷받침
하기도 한다. 경내 부도전의 부도조각이 특히 아름답고 대웅전 뒤쪽으로 산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 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은
들어가 앉을 만하다. 앞으로는 층대가 있어 창망한 바다와 산들이 서로 가까이
있는 듯 느껴진다. 정상은 기암괴석이 들쑥날쑥 장식하고 있어 거대한 수석을
세워놓은 듯 수려하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 대흥사의 말사.
개설
미황사(美黃寺)는 달마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사찰이다. 미황사 사적비의 내용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인 749년(경덕왕 8)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달마산은 삼황(三黃)의 미가 있다고 하는데, 삼황은 불상과 바위, 석양빛이 조화를 이룬 것을 말한다. 미황사는 해남의 불교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사찰이며, 미황사의 괘불재 등은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불교문화 자원이다.
건립 경위 및 변천
749년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창건한 미황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영암군 산천조와 1692년(숙종 18) 민암(閔黯)[1636~1693]이 지은 미황사 사적비의 내용에 다음과 같은 창건 연기설화가 전한다.
749년 석선(石船)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에 닿았는데 배 안에서 천악범패(天樂梵唄)의 소리가 들리자 어부가 살피고자 하였으나 배가 번번이 멀어져 갔다. 의조화상이 장운·장선 두 사미와 촌주 우감, 향도 100인과 함께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자 금인(金人)이 노를 저어 배가 해안에 닿았다. 배 안에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문수보살과 40성중, 16나한과 탱화 등이 있었고, 금환과 흑석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전과 부처님 상을 해안에 내려놓고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흑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 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의조화상의 꿈에서 소에 경을 싣고 가다 소가 누웠다가 일어난 곳에 통교사를,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한 미황사를 지었다고 한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울음소리가 아름다워서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의 색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이러한 미황사 창건 설화는 불교의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고려시대 1264년부터 1294년 사이에 남송의 고관과 군자들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미황사가 널리 알려졌고, 조선 전기에도 사세를 꾸준히 유지하였다.
1754년(영조 30)에 기록된 미황사 「대법당 중수 상량문」에 따르면,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1598년부터 1601년(선조 34) 사이에 승려 만선(晩善)이 중수하였다. 1658년(효종 9)부터 1660년 사이에 승려 성간(省侃)·수신(脩信)이 중수하였다. 1751년(영조 27) 승려 덕수(德修)가 동서 양쪽에 금고각을 세우고 1752년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3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와 1754년에 대웅전과 나한전을 지었다. 18세기에는 승려 연담(蓮潭) 유일(有一)[1720~1799]이 여러 차례 머무르면서 수륙도량을 개설하고 참회법석을 열기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승탑이 미황사에 세워졌다. 1858년(철종 9)에는 영허(靈虛) 의현(義玄)[1816~1874]이 아미타신앙의 법회인 만일회를 개설하였으며, 초의선사가 「미황사만일회기」를 지었다. 그 후 혼허(渾墟)가 주지로 있을 때 미황사 중창을 위해 모금 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와 청산도를 가다 조난을 당하였다.
이후 100여 년을 미황사는 쇠락한 채로 있다가 1989년 승려 금강, 지운, 현공이 미황사에 부임하여 10여 년간 중창 불사를 하여, 1996년 만하당을 짓고 누각을 복원하는 등의 노력으로 다시 융성하였다.
활동 사항
체험 휴식형 365일 상시 산사 체험인 ‘나를 위한 비움 여행-여여(如如) 템플스테이’, 수행형 템플스테이인 ‘참선 집중 수행 참사람의 향기’, 어린이 한문학당, 자원봉사, 해넘이 해맞이 기원법회[매년 12월 31일과 새해 1월 1일], 부처님오신날[매년 음력 4월 8일], 괘불재[매년 10월 27일~28일], 미황사 음악회 ‘달이랑, 별이랑, 사람이랑’[매년 1월], 초하루 법회, 경전 읽기 모임 등의 행사를 하고 있다.
현황(조직, 시설 현황 포함)
미황사의 전각으로 해남 미황사 대웅전, 해남 미황사 응진당, 명부전, 삼성각, 만하당, 달마전[승방], 세심당[객실], 향적전[객실], 자하루[누각] 등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석조·당간지주·미황사 부도전·미황사 사적비 등이 있다.
관련 문화재
미황사의 지정문화재는 보물 제947호 해남 미황사 대웅전[1988년 4월 1일 지정], 보물 제1183호 해남 미황사 응진당[1993년 11월 19일 지정], 보물 제1342호 「미황사 괘불탱」[2002년 7월 3일 지정], 명승 제59호 해남 달마산 미황사 일원[2009년 9월 8일 지정],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3호 해남 미황사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2015년 8월 6일 지정],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4호 해남 미황사 명부전 목조 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2015년 8월 6일 지정],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5호 해남 미황사 응진당 목조 석가여래삼존상 및 나한상 일괄[2015년 8월 6일]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해남읍지(海南邑誌)』(1791)
- 『해남군의 문화유적』(전라남도 해남군·목포대학교박물관, 1986)
- 『전남의 전통건축』(전남대학교박물관·전라남도, 1999)
- 『해남군의 문화유적 길라잡이』(해남군, 2001)
- 『문화유적분포지도』-해남군(전라남도 해남군·목포대학교박물관, 2002)
- 『국토순례 시발지 땅끝해남』(해남군, 2003)
- 『해남의 문화유산』(해남군, 2008)
- 우리마을의삶과문화편찬위원회, 『우리 마을의 삶과 문화』상·하(해남문화원, 2011)
- 문화재청(http://www.cha.go.kr)
- 해남 미황사(http://www.mihwangsa.com)
진달래 꽃이 피었습니다 ~ 곧 봄이 오려나 봅니다(희망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