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기억 속으로
-서울 남산골
목필균
서울내기가 무슨 고향타령일까 싶어도 어린 시절 집 앞이 남산 중턱이어서 남산에 대한 추억이 많다.
여덟 살 위인 언니와 산 속에 들어가서 놀다가 산림간수에게 걸린 적이 있었다. 언니가 날 들춰 업고 도망을 치다가 가시 철망에 걸려 다친 흔적이 아직까지 무릎에 선명한데 어찌 내 기억에서 남산을 지울 수 있겠는가.
찌그러진 양은주전자에 버찌를 가득 따서 입술과 이가 짙은 보라색이 되도록 먹던 일. 매미와 잠자리 잡으며 놀던 어린 날 남산의 일상은 여느 농촌과 다름이 없었다.
수돗물이 귀한 시절이라 아낙들은 비싼 수돗물에 빨래할 엄두를 못 내고 삼삼오오 모여 물 좋은 남산 계곡에서 빨래를 했다. 윗물이 맑아서 그런지 동네 우물도 청량해서 우물은 물을 길으러 온 사람들의 유비통신의 근원지가 되곤 했다.
영아 엄마는 춤바람이 났고, 보배네는 남편한테 얻어맞아서 눈가가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는 것 등, 소문은 눈덩이처럼 부풀어져 걱정 반, 재미 반으로 온 동네를 굴러 다녔다.
그러다 5학년 때였는지 수도가 들어온 후론 우물가에서 퍼지던 입소문들은 꼬리를 감추기 시작했고, 그 편리한 수도는 알게 모르게 동네 사람들의 살가움까지도 차단하는 벽이 되었다.
밤늦도록 술래잡기를 하던 동네의 너른 공터에 영화배우 김지미와 최무룡이 집을 사러 왔다고 해서 구경을 하러갔던 때도 있었다. 특별한 볼거리가 없던 그 시절 김지미, 최무룡은 최고의 스타, 천상의 사람들이었다. 그 후 윤정희, 이대엽이 연인이 되어 영화촬영을 하는 것을 구경한 적도 있었다. 내가 알기론 당시의 남산은 최적의 영화촬영지였다.
초등학교 시절 월남 파병이 있을 60년대 초였다.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대가 트럭을 타고 아스팔트를 질주하면 동네 할아버지들은 연신 담배를 빨며 데모대를 빨갱이들이라고 했다. 그 시절, 월남전에 기술자로 갔던 형부가 보내준 외제 RCA TV가 도착했을 때는 동네의 화잿거리가 되기도 했다.
권투선수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누르고 세계챔피언이 되었을 때도, 박치기 왕 김일이 일본 레슬링 선수를 박살내었을 때도 우리 집은 동네 조무래기들이 진을 쳤고, 그 때만큼은 힘없고 소심한 내 어깨에도 조금은 힘이 들어가 으쓱해지던 시절이었다.
한 집에 여러 가구 살던 시절
문간방 철없는 새댁과 건넛방 욱이 엄마가
아침이면 궁시렁거리며 눈을 흘겼지
새댁이 멀쩡하던 연탄불 몰래 가져가서
밤새 떨었다고 불끈거리는 욱이 엄마와
대신 새 연탄 넣었는데 꺼질 줄 몰랐다고
삐쳐대는 새댁 사이에서
어머니는 그저 웃기만 하셨지
심심치 않게 터지는 연탄가스 소동엔
누구네 동치미국물이던 뛰어나오고
흙냄새 맡아야 산다고 찬 마당에 눕혀 놓았던
낡은 기억 속의 이웃들 다들 어디로 갔을까?
고층아파트 보일러는 전화로도 돈다는 요즘
그 이웃들 다 어디서 살고 있을까?
-졸시 <정든 사람들> 전문
이미 멀리 떠나온 유년 속에는 병약한 내가 있다. 오남매 가운데 전쟁 끝에 태어난 여린 새순. 화창한 봄에 태어났어도 그늘 속에서 누렁잎 졌던 얼굴에 지금의 내가 있었다.
왜, 살면서 포근한 손길의 기억이 없는지 먼 유년기서부터 걸어온 길을 아무리 더듬어 되돌아가도 찾지 못한다. 병석의 어머니와 손님처럼 오고간 아버지, 아직도 가슴에 가시로 꽂혀있는 언니, 무덤덤한 오빠, 힘없는 날 의지했던 두 남동생. 내 창백한 두 손을 잡아주며 아픔을 감싸주던 기억은 어느 곳에도 없다. 혼자서 공부하고 혼자서 울고 아무도 내 앞길을 염려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누워 계셨던 어머니만 가끔씩 날 기특하다고 하셨다.
이제는 가물가물 잊혀져가는 남산의 유년 시절, 모교 일신초등학교가 문을 닫은 지 몇 십 년 만에 서울 월곡동에 다시 문을 열자 난 기가 막히게도 재개교하는 일신초등학교 교가를 작사하는 필연을 겪게 되었다.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낡아가는 몸이지만 지금도 남산 그 시절을 떠올리면 어둡던 그 시절도 마냥 그립기만 하다.
첫댓글 때가 지나면 그 때가 그리워지지요 우리 일신동문 대부분은 남산속에서 혹은 남산을 끼고 어린시절을 보냈기에 남산에 대한 추억이 남다를겁니다
나도 남산공원이 있는 서쪽 끝부터 장충공원이 있는 동쪽 끝까지 국민학교 입학전부터 헤집고 다녀서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국민소득이 100불도 안돼 인도 다음으로 못살던 그때 그시절 5,60년대 남산골의 풍경과 삶을 정밀화 처럼 묘사한 글속에서 어린시절 함께 공유했을 추억들이 떠오릅니다ㅎ
읽을수록 우리 일신모교가 없어진게 정말 아쉽기만 합니다 글 잘 읽었어요^&^
어린 시절 유난히 몸이 약하고 소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못했었는데.... 그 시절 사람들을 지금 만나면 어디서 비만의 체격이 생겼는지... 어떻게 교사생활을 그리 오래했는지...... 모두들 놀라운 일이라고 이야기들 할 것입니다.
낡은 기억....
동창님 글을 읽으니...주마등 이라는 단어가 생각나고...
마치 흑백영화를 마주 하는 느낌으로...그 어릴 적 어렵게 살던 모습이 떠 오릅니다...
공동수도...충무로가 가까워 영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
니노 벤베누티...참...이런 이름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선배님들께는 죄송하지만...세월이라는 것의 속도를 실감하는 요즘..
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낡은 기억들이 너무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써 놓은지 십 년도 더 된 수필들입니다. 2008년 <짧은 노래에 실린 행복>이란 수필집을 내놓으면서 정리했던 글이지요. 그 때 <낡은 기억 속으로>라는 시리즈 시들을 발표했는데.... 그 시들과 글들이 이 카페와는 또 다른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네요. 좋은 기억들, 아름다운 기억들을 떠올려보며 유년 시절을 돌아보세요.
수필의 구절구절 마다 나의 이야기요 내가 살던 모습들 이니 아마도 우리는 같은 동네 같은 집에 살던 오누이가 아닌가요??
ㅋㅋ
남산계곡 청량한 개울소리,빨래하는 아낙들의 방망이 소리가 그리운 오늘 아침입니다..^^
그 시절 누구라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다만 저는 글로 표현했을 뿐이지요. 공감한 부분이 많으셨다니 기분이 좋습니다. 선배님!
" 전 어린시절 서울에서 자라서 고향이 없어요 " --- 이 말은 얼마전 TV 오락 프로그램 한 장면, 정말 그럴까, 필경 그는 고향이라는 말이주는 느낌을 농촌풍경과 함께 떠올리며 한 말루 들었지만 우리에겐 분명 떠올리기 싫은 기억과함께 그리운 우리만의 고향 분위기가 맘 속 깊이 새겨져있지요 ^,,^
1960년대 남산이 있는 고향은 아마도 시골 풍경과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 비지밥은 먹는 친구들도 있었던 때.... 누구라도 어려운 기억들이 남아있을 것입니다. 선배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