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을 보는 사람 (최한나)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 이사야 6:1-8 말씀 아멘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었던 해인 주전 742년에 소명을 받았다. 그는 이상 중에 왕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신 여호와를 보았다. 그분의 옷자락은 성전을 가득 채웠으며 그 앞에서는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들이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치고 있었다. 1~4절에 ‘가득하다’(말레)라는 단어가 세 차례나 사용되어 주의 옷자락, 연기, 주의 영광 등이 온 이스라앨을 가득 채우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가득함”은 2장에서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을 '가득 채운' 것들과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해야 할 곳이 온각 가중한 것들로 가득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오신 것은 기대 되었던 일이다. 썩어빠진 이스라엘의 지도충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실 날이 왔다는 것이 선지자의 메세지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사야 6장을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으로 보며 6장을 앞과 뒷장으로부터 독립된 장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6장을 독립적인 소명의 장 으로볼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만약에 이것이 이사야의 소명의 장이라고 하면 왜 1장이 아니라 서론의 마지막인 6에나오는가? 예레미야 에스겔과 같은 선지서들에서 선지자를 부르시는 소명은 책의 맨 처음에 나온다. 둘째, 이사야는 그 이전에 이미 선지자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6:1에 웃시 야가죽는해라고기록하는데 1:1에서 이사야는 자기의 사역의 때를 웃시야 시대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역대하 26:22에는 “이 외에 웃시야의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고 말한다. 이사야가 웃시야 왕의 사적을 기록했다는 것은 그를 가까이 모시면서 활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웃시야의 죽던해에 이사야가 소명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셋째, 6장이 5장에 연결된 것이 아닌 독자적인 장으로 보면 5장은 적군이 급격히 몰려오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렇게 적군이 쳐들어와서 어떻게 되었다는 말인가? 또한 이사야의 예언에서 이렇게 급격한 징계로써 단원이 끝나고 말 것인가? 이사야의 예언은 각 단원마다 심판 뒤에는 반드시 회복으로 끝난다. 따라서 6장은 5장의 것을 보충 설명하고,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결론 부분이 되어야 한다. 이상의 이유에서 우리는 이사야 6장을 5장에서 연결되는 하늘 법정의 장면으로 보며, 5장에서 이루어진 예언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사야가 본 환상에서 하나님의 보좌는 성전에 베풀어져 있으며, 성전 너머 높이 들려 있다. 성전에서 하나님은 지성소의 속죄소 위에 임채해 계시면서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리라”고 하셨다(출25:22). 그러나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제한적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후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 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전이오리이까”라고 고백하였다(왕상 8:27). 하나님은 성전에 임재해 계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러나 그는 하늘에 군렴해 계시고 땅은 그의 발등상도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자신이 성전에 계시면서도 하늘높은곳 보좌에 계시는것을보여 주었다. 하늘에 보좌를 펴고 군림하신 그 하나님을 천사들이 “만민의 여호와”라 부른다. 우주를 통치 하시는 그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전에서 자기 백성과 만나시는 분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신 것은 그가 지금 법정을 베풀고 계시는 현장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재판석에 앉으셔서 자신의 위용을 갖추고 계신다. 그 법정에 천사들이 시위하고 있는데, 그들을 ‘스랍’이라고 부 른다. 히브리어 ‘스랍’은 동사 사라프( 불타다)에서 온 명사로서 “불타는 자 (buming one)”란 의미다. 아마도 그의 모습이 불붙는 모습을 하고 있기에 스랍 이라고 부른 것 같다. 다니엘 7:9~10에 다니엘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 보좌가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보좌에서 불이 강처럼 흘러나오는 것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그 보좌에 앉으신 이가 심판“재판”을 베풀고 있다고 했다(단7:10). 심판을 상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불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사야서 6장 스랍도 심판을 베푸는 장면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 천사로 볼수 있다.
스랍 천사들이 그의 거룩과 그의 영광을 찬양한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외친다. 세 번의 반복은 거룩의 극치를 표 현한 것이다. 또한 그의 영광(키보드)이 온 땅에 가득 갔다고 외친다. 천사 들이 날개로 얼굴과 발을 가혔다. 얼굴을 가린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커서 자신이 감히 하나님을 볼 수 없음을 시인히는 자세로 볼 수 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카보드)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였다(출 33:18,20).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갈 때에 모세가 반석 틈에 숨고 그의 등(후광)만 보게 하셨다. 본문에서 천사도 하나님의 영광을 감히 보지 못하여 얼굴을 가리고 있다. 또 스랍이 발을 가린 것은 자신의 모습을 감춤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초라힘을 나타내었다. 이 모든 것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더 높이 는것이다.
하나님의 보좌를 경험한 자, 이사야는 높이 높이 들린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다. 그는 왕으로서 백성을 심판하기 위하여 보좌에 앉으셨다. 그는 거룩, 거룩하신 분이다. 그 거룩 앞에 온전히 설 자가 없다. 우리도 이사야와 같이 보좌에 앉으신 그분을 보아야 한다. 거룩하신 그 분 앞에 우리가 서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는 보좌에 앉으셔서 백성들을 심판하신다. 만약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불려갔다면 이사야보다 더 망한 자신을 볼 것이며, 그리하여 자신이 철저히 싶판받는 모습을 경험할 것이다. 이사야가 핀(제물을 태운) 숯불로 죄사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경험을 해야 한다.
성경의 로마서를 보면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다툼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졌고 행하고 있으므로 자신들은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이방인들의 타락한 모습(롬 1:18~32}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너희는 어떠하냐?”고 반문한다(2:1). 그들이 율법을 다 이룰 수 있는가?그리하여 결론은“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다. 유대인들이 가진 율법은 오히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하는 역할을 한다(3:19).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서 율법이 정죄 할 때 사람은 어떤 변명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의 구속{값을 대신 지불합)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자"가 되었다(3::24).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러한 하나님의 법정을 경험해야 한다.
로마서는 이어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고 말한다. 내가 행한 공로는 전혀 없다.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나서 “의롭다 함을 얻 은 자”가 된 것은 전적으로 은혜일 뿐이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전혀 없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 많은 대형 교회 목사들은 목에 힘을 준다. 자신은 몇 만명 혹은 몇 천명 모이는 교회의 목회자니 마땅히 그만한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노회 혹은 총회에서 발언권이 세며 작은 교회의 목사들을 무시한다. 물론, 전부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대형 교회 목회자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모든 목사를 비롯한 우리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재판정을 경험해야 한다. 거룩, 거룩, 거룩을 외치는 그 보좌앞에 선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신 안에 내세울 것이 없음을 인식한다. 우리는 매일 이보좌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2. 누가 능히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리요?
1.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왕위를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 2. 솔로몬이 이에 짐꾼 칠만 명과 산에서 돌을 떠낼 자 팔만 명과 일을 감독할 자 삼천 육백 명을 뽑고 3. 솔로몬이 사절을 두로 왕 후람에게 보내어 이르되 당신이 전에 내 아버지 다윗에게 백향목을 보내어 그가 거주하실 궁궐을 건축하게 한 것 같이 내게도 그리 하소서 4. 이제 내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여 구별하여 드리고 주 앞에서 향 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차려 놓으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절기에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오니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규례니이다 5. 내가 건축하고자 하는 성전은 크니 우리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심이라 6. 누가 능히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내가 누구이기에 어찌 능히 그를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요 그 앞에 분향하려 할 따름이니이다 -역대하 2:1-6 말씀 아멘!
역대하2:1~5:1은 솔로몬의 통치에 대해 다루고 있는 역대하1:1~9:28 중에서 성전건축 문맥인 역대하2:1~7:22에 위치한다. 이 본문은 성전 건축을 위한 솔로몬의 요청과 후람의 반응(대하2:1~18)과 성전 구조와 기구들 (대하 3:1~5:1)으로 구분된다. 솔로몬의 건축 계획과 준비(대하2:1~2, 171~18)절에서 솔로몬의 성전 건축 관련 기사는 “솔로몬이 결심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 결심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의 건축이다. 솔로몬의 사명은 성전 건축이기에 그의 부와 지혜 그리고 왕권의 견고함(대하 1장)은 자연스럽게 성전 건축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그의 결심은 사역의 절정에 도달함을 뜻한다. 그래서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담군(짐꾼)7만 명, 작벌자 8만 명, 감독관 3천 6백 명을 정집한다. 고대 근동에서 왕의 공사를 위한 많은 노동자 들의 강제 정집은 일반적인 관습 이지만 레위기에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한다. 역대하2:17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아닌 “이스라엘 땅에 거한 이방인”들을 정집했음을 언급함으로써 토라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음을 나타낸다.
성전 건축의 목적과 동참을 요청(대하 2:3~10)절에 대하여는 역대하 2:3~10은 솔로몬이 후람에게 보낸 서신이다. 이 서신은 매우 전략적이다. 첫째, 솔로몬은 “당신이 나의 부친 다윗과 함께 행했던 것처럼”이 라는어휘를 통해 후람의 2차적 행동의 필요성을 은근히 제시한다. 이런 솔로몬의 행동은 열왕기상 5:1~6에 비교할때 그의 주도권을 드러낸다. 이 연설은 열왕기와 달리 변중적이지 않고 후람의 행동에 대한 당연성올 이끈다. 이런 솔로몬의 주도권은 고대 근동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보여주며 곧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낸다(대상3:5),둘째, 솔로몬은 주도권올 토대로 두 신학적 주제를 사용해 성전 건축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하나는 성전 건축의 목적을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그것을구별하기 위하여”라는 문구로 설명한다. 이런 표현은 신전을 신의 물리적 거주지로 이해했던 고대 근동의 사고를 분쇄한다. 솔로몬은 성전에 대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집”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것은 신명기에 제시된 언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신명기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태하신 곳”(신 12:~11, 14, 8, 21)을 강조하고 그곳이 예배와 기쁨의 장소라고 명시한다. 이 토라의 명령을 솔로몬은 실천하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솔로몬의 성전 건축의 또 다른 이유인 정규적 예배와 연결된다. 그는 “주 앞에서 향 재료를 사르며 항상 떡을 진설하며 안식일과 초하루와 우리 여호와의 절기에 조석으로 번제를 드리려 하니”(대하2:4)라고 주장한다. 이는 매일의 예배에서 일 년의 예배를 요약한 것으로 출애굽기(30:1~8), 레위기(24:5~9), 민수기(29~29장)에서 제시된 예재의 실현을 보여준다. 성전은 예배의 자리이고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의 섬김을 표현하는 절정의 자리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하신 이름을 높이는 자리이다. 셋째, 솔로몬은 초월적 하나님의 위대성과 인간의 무익성을 역설한다. 하나님의 위대성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려는 당위성과 그가 사용한 수사적 질문에 나타난다. 하나님은 모든 신들보다 크시기 때문에 솔로몬은 크고 웅대한 집을 지으려 한다(2:5,7)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수사적 질문을 통해 하늘과 하느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지 못한다(대하2:6)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건축물에 제한 받지 않고 초월하셔서 행하시는 광대하신 분 이다. 솔로몬의 이런 주장은 자신이 건축하는 큰 집도 여호와 하나님의 초월성과 광대성을 감당할 수 없다는 고백이다.
나아가 솔로몬은 “하나님의 전을 누가 건축할 수 있겠는가”, “내가 누구관대 어찌 능히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요”라고 질문한다. 이 질문은 할수 없다 라는 답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초월적 하나님 앞에 인간의 무익성을 드러내며, 동시에 무익한 인간이 초월적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 것은 큰 영광임을 은근히 드러낸다. 이것은 성전건축에 후람의 참여가 곧 그 영광에 동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솔로몬은 후람에게 숙련공과 재목을 요청하고 그들과 솔로몬의 숙련공의 동역을 강조하면서 일치감을 이끌어 낸다.
역대하 2장은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주 목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이며 초월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솔로몬의 연설과 후람의 찬양에서 충분히 드러 낸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우주의 통치자이시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거룩과 공의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인간의 한 업적물에 갇혀 있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해 자유롭게 행동하신다. 그러나 불 행히도 우리는 의도적으로 혹은 무지해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용납지 못하는” 광대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공간, 사고, 계획에 머물도록 집요하게 노력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든 건물에 갇혀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따라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우리를 위해서만 존재하신다는 편협된 사고에서 벗어나 광대하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배해야 한다. 둘째,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자리이며, 여호와께 예배하는 자리다. 성전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다스리심을 나타낸다. 성전은 하나님의 만남의 자리요,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처소다.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상징적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역사적인 실체로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요한의 표현처럼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리는 참된 예배는 창조주 하나님의 놀라운 이름을 높인다. 이것이 창조된 인간의 본질적 사명(창2:15)이요, 구속받은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무다. 따라서 교회 건축이 우리의 욕망의 표현이 되지 말아야 하고 우리의 업적으로 치부 되지 말이야 하며 우리의 능력과 성공의 척도가 되지 말아야한다. 셋째, 우리의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분명한 사실을 망각할 때가 있다. 솔로몬의 지혜와 부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성전 건축에 바쳐졌고, 이방인 후람과 지혜로운 숙련공 후람 아비도 자신의 재물과능력 그리고 지혜를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사용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은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지금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 그리고 지혜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없기 때문인가?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원 하신다. 문제는 우리의 관심이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한다.
3. 때를 아는 사람
20.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가 가지고 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그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받으리라 하고 21.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맞이하여 이르되 평안이냐 하니 22. 그가 이르되 평안하나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제자 중에 두 청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로 왔으니 청하건대 당신은 그들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23. 나아만이 이르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그를 강권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 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그들이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4. 언덕에 이르러서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받아 집에 감추고 그들을 보내 가게 한 후
25. 들어가 그의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하니 대답하되 당신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6. 엘리사가 이르되 한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이할 때에 내 마음이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27.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하니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 -열왕기하 5:20-27 말씀 아멘!
20~27절까지는 나아만과 엘리사 내러티브의 마지막 부분으로 사환 게하시의 탐욕과 그의 대한 징벌 기사이다. 나아만이 가져온 엄청난 양의 예물을 엘리사가 끝내 거절하는 것을 본 게하시는 스승의 그러한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게하시는 아람으로 돌아가는 나아만 일행을 급히 뛰따라가서 거짓말을 함으로 자신의 탐욕을 채을 수 있었다(20~24). 하지만 게하시는 이러한 거짓된 행동으로 인해 나아만이 고침받은 바로 그 문둥병에 걸리는 질벌을 당하게 되었다(25~27절). 본절에 저자는 그 동안 침묵을 지키던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를 부각시키기 위해 본절의 앞부분에서 소개하고 있다. 특히 본서 기자는 게하시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으로 소개함으로써 이후에 벌어지는 게하시의 행위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이라는 직분 사이에 아이러니가 발생하기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여기에서 게하시는 본장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가운데 나아만 집의 이스라엘 출신 계집종과 그의 스승 엘리사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행동을 보인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대조를 통해 거하시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다. 먼저 나아만의 계집종은 그의 주인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여 그의 주모에게 엘리사를 소개하였지만, 여기에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자신의 주인을 속이려고 한다, 원문에서 보듯이 이 둘은 모두 “나아르”로 나타나며, 둘 다 나아만과 엘리사에 대하여 각각 ‘우리주인’3절의 ‘내주인’20절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람에 포로로 잡혀가 나만의 집의 종이 된 어린 소녀는 나아만 장군에게 치료의 길을 열어주는 데 반해, 선지자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그의 주인인 엘리사와도 크게 대조한다.
5장 본문은 아람군대 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치유 이적 사건과 관련하여 다루거 있는 문단이다. 여서거는 문둥병을 치유받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여화와 신앙을 고백하고 우상에게 절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처리를 말하며 사죄를 요청한 사실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15~19절에 이어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의 탐욕과 엘리사의 저주로 인한 게하시의 문둥병 발병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또한 엘리사가 나아만이 주는 예물을 거절한 한다. 그런데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는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한 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리하여 나아만 에게서 무엇이든지 받아내야겠다고 결심하고 그의 뒤를 쫒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나아만을 따라 잡은 게하시는 나아만에게 엘리사가 은 한 달란트와 두 벌옷을 요청했다고 거짓으로 말함으로써 그것들과 그에 더하여 준 은 한달란트를 취하여 자기 집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게하시의 그러한 행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게하시는 엘리사로부터 책망과 저주를 듣고 그 자신은 물론 그의 자손들까지 대대로 문둥병에 걸리는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여기서 탐욕에 빠져 죄를 범한 게하시와 그의 집에 임한 문둥병은 나아마의 문둥병이 그대로 옮겨간 것으로서 이 사건은 비록 육적으로나 형식적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공도체에 가입해 있다 할지라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바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하나님의 은총에서 제외되어 마침내 버림을 받게 될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여 준다. 아울러 이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한 야고보고 1장 15절 말씀처럼 영적 진리의 새삼 각성시켜 주는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탐심에 대한 경계가 요구됨을 교훈하여 준다.
또한 27절에 나타난 것에 의하면 탐욕으로 인하여 게하시가 받은 형벌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게하시 자신이 나아만과 같은 나병환자가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병이 자손 대대로 유전되리라는 것이다. 그에게 내린 형벌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선지자의 직분을 남용하는 당시의 많은 거짓 선지자와 지도자들에게 경종이 되는 것이었다. 한편 본 절의 ‘나병이 발하여 눈같이 되었더라’는 말은 출 4:6과 민 12:10과 동일한 표현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속인 죄 뿐만 아니라 탐심으로 지은 죄에 대한 당연한 결과였다
본 저자는 5장에서 이방인이었을 뿐 아니라 종교적으로 부정한 문둥병자였던 나아만이 순종을 통하여 치유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 함으로써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반대로 게하시가 이스라엘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이었을에도 북구하고 불순종 함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문둥병자가 되어 공동체에서 쫓겨난 사실을 통하여 불순종의 치명적 결과를 강조해 보여 주기도 한다. 이는 특히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의 포로로 잡혀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특권을 잃어버린 본서의 제일차 독자들이 어떻게 현재의 이와 같은 비참한 운명에 ㅍ=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시사해 주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5장은 본서일차 독자들이 가졌던 이스라엘이 왜 이렇한 비참한 운면에 처했는지에 대한 신학적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5장은 나아만 간은 순종이 있을 때에는 어떤 신분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밝힘으로 본서일차 독자들이 당면한 비참한 상황에 대한 해결책까지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수 있다.
4.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사람
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1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대답하되 끓는 가마를 보나이다 그 윗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졌나이다 하니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예레미야 1:11-14 말씀 아멘!
예레미야 선지지는 586년까지 40년간 하나님 말씀을 전한 선지자이다. 예레미야는 유다 멸망기에 하나님 말씀을 전했고, 그는 하나님의 심판과 예루살렘의 멸망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고난을 당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목자의 심정에 동참한 눈물의 선지자였다. 그는 성전파괴 이후에 임할 새 세상과 새 시대를 바라보며 고난을 받았고, 그 새 시대와 새 세상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됐다. 예례미야는 예언과 시의 선집이라 할 수 있다. 예레미야의 구조는 크게 예레미야의 예언과 시들(1-20장)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시대의 역사적 담설(21-36장), 예루살렘 멸망전후의 사건들(37-45장), 열방에 대한 신탁(46-51장)으로 나눌 수 있다. 예레미야 1-25장까지는 예레미야의 유다에 대한 심판예언과 예레미야의 갈등을 기록했다.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가장 앞부분으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받심을 받은 후 이어 두가지 환상을 보여주신다. 살구나무가지의 환상은 내용에 있어서는 소박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의미 심장한 부분이다. 선지자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히 살구나무 가지일 뿐이다. 하지만 이 가지는 추측컨대 잘 자란 나무의 굵은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선지자는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해 답한 후에 이내 다소 당황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게 된다. “이는내가 내 말을 지켜(보아) 그 대로 이루려 함이니라.” 환상과 이에 수반하는 신탁에 대한 해석에서 무엇보다도 필 요한 것은 히브리어의 언어유희를 분간해 낼 즐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번역 본에서는 인지할 수 없는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예레미야는 그가 샤케드“살구나무”롤 보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쇼케드“지켜볼 것”할 것이라고대답하신다 다시 말해서, 언어유희는 나무와 하나님의 지켜보심이 긴밀한 상관관계률 맺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환상의 기록은 이렇게 축약된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길이도 짧아서 환상이 갖는 중요성과 그에 수반되는 언어률 충분히 이해하기 위헤서는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동원되어야 할 정도다. 우리는 선지자가 보았던 것이 막 싹이 돋은 나무 가지였고 그래서 곧 아름다운 살구 꽃이 풍성하게 피어날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가지는 이미 꽃이 핀 상태였으며, 봄이 도래했음을 보여 주는 분명한 표식이라는 가능성을 지닐 수 있다. 첫 번째의 경우라면, 환상은 예레미야에게 그가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 싹에 숨은 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주이것은 곧 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셈이다. 두 번째의 경우에는 그 말씀의 선포 그 자체는 예언 말씀의 본질을 전하는데 있어 하나님의 말씀이 도래한다는 표식으로 볼 수 있다. 두 가지 경우는 모두 모종의 확실성과 필연성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예레미야에 의해 선언되는 예언 말씀은 필연적으로 성취될 것이라는 말이다.
환상과 이를 해석해 주는 언어의 본질은 선지자의 사역에서 특정 시점과 관련시 키기에는 지나치게 보편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 성취에 관한 어떤 보증도 얻지 못한 내용의 말씀을 선언해야 하는 임무에 대해 갖는 선지자외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아 주저하는 응답 속에서 이러한 환상 체험은 선지자가 갖는 사역의 첫 순간에서 부터 중요성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환상은 선지 사역이 시작된 후 수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이루어진 것일 수도 있다. 즉. 에레미야가 그의 사역 초기에 자신 이 선언해야 했던 말씀의 권위에 대해 이따금 의문을 품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러 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살구나무의 환상은 그런 류의 환상 체험에서 으레 그렇듯이 의심할 바 없이 아나듯에서의 선지자의 삶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톰슨(Thompson. 153)이 지적하고 있듯이 선지자의 시기에 항상 그랬던것처럼 바로 그 날까지 살구나무가 아나타 마을 주변에 무성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 살구나무는 이른 봄 즉 1월의 어느 때쯤엔가 첫 개화를서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에 유다 땅에서 자라고 꽃을 피웠던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 사이에서 아주 특별히 인상 적인 나무였을 것이다.
두 번째환상으로는 예레미야가 눈으로 보았던 두 번째 장면을 상상해보려면, 우리는 타오르는 불꽃과 그 속에 담긴 숱이나 장작 위에 놓인 요리용 가마솔을 연상해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 놓인 바닥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가마는 한쪽으로 기울 어졌을 것이며, 그것은 남쪽을 향해 기울어진 모양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복쪽에서 바람이 불어와 잦아들어가던 숫덩이에 확 불꽃이 피어나게 하여 가마를 끓어 넘치 게 만든다. 그로 인해 그 속에 든 끓는 액체가 넘쳐서 남쪽 방향으로 홀러나오게 된다. 선지자가 환상 가운데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동일하게 낯익은 장면이 재연된다. 그는 다시금 환상의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듣게 된다. 강한북쪽의 바람처럼 재앙이 유다로 불어닥칠 것이며, 이전 쟁의 바람은 예루살렘 성문에 재난을 몰고와 거기서 그 거민을 몰아낼 것이다.
복쪽에서 오는 적이 누구인지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신탁이 선지자의 초기 사역의 것이라고 시기를 결정하려 할 때. 북방 적은 스키타이 인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곤 했다 그들 스키타이인들은 지금의 남부 러시아에 있는 험준한 지형에서 달려온 약탈을 일삼는 종족인데,이렇게 특정 종족을 추정하 는 것은 대부분 개연성이 없다(Vaggione. JBL 92[1973] 523-30 참조).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비록 소명이라는 것이 책의 처음에 기록된 대로 사역의 처음에 나타난 것일지라도 이것은 사역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그 무엇이라는 사실이다. 예레미야의 소명은 그를 그 길의 출발점에 위치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의 사역 속에서 지속적으로 그의 곁에 머물렀던 것 이다. 고난을 겪게 되는 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이 길 위에 서게 만든 바로 그 순간을 회상할 것이다. 이것은 그에게 가져온 고뇌로 인해 일면 슬픈 기억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 새로운 생의 전환점이 막 시작되는 순간에 그에게 던져졌던 약속과 보호를 회상하는 순간에 이것은 또 다른 의미로서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근원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 1장의 소명 기사는 이어질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이해해 가기 위한 득서 외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이제 기초는 준비되었다. 득자는 이 소명 기사률 잊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기억이 훗날 선지자의 기억 속에 자주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기억은 후에 재관의 결과로 나타날 " 고백록" 속에서 솔직하게 개진될 것이지만. 소명을 받았던 땅에서 쫓겨나 애굽에서 망명의 신분에 있던 선지자의 마지막 시기에도 그 그림자는 여전히 드리워지고 있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내기를 원하시고 통로삼기를 원하실 때, 핑계를 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아 쓰임을 받는 것이 은총이요, 복임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그 과정에 크고 작은 장애물이 있고, 때로는 산을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일이 있더라도,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 옵소서. 오늘 하루도 우리를 던져 주신 우리 가정과 교회와 일터와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함께 지어져 가게 하시고, 우리로 인해서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모든 삶의 자리가 세워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받은 달란트가 얼마인지를 세어보기 보다, 우리에게 그 달란트를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청지 기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이 시대를 세워가는 예레미야들이 되게 하여주옵소서.
이 모든 말씀 살아역사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