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몬한 전투에 대한 영상물을 찾기가 어렵다 보니 급거 동원된 중국 전쟁영화 "퍼플 선셋"의 전차전 장면. 비록 노몬한 전투 뒤인 1945년의 소련군 침공 당시의 모습이지만 노몬한 전투 때도 이와 별 차이가 없었다. ◎ 주의 : 본 게시물은 1280×1024 해상도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상하이~난징 간의 철도를 이용해 이동 중인 일본군의 89식 중전차. 당시 이렇다할 전차를 보유하지 못한 장제스군을 상대로 일본군은 쾌조의 진격을 보여줬다. 하지만 임자 제대로 만난 노몬한에서 이 전차는 제대로 활약을 못해본 채 소련 전차들의 좋은 표적이 되어 버렸다.
제2차 노몬한 전투에서 그나마 분전한 일본군의 95식 경전차. 하지만 이 전차들은 전차전을 치르기 이전에 이미 소련군 포병대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어 거의 활약할 수 없었다. 노몬한 사건, 혹은 할힌골 전투( Battle Of The Khalhin Gol )로도 불리는 2차례에 걸친 희대의 격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에 두 국가가 대규모의 전차들과 정규군을 투입한 혈전으로서 유명하다. 여기서 노몬한이란 한자식 표현으로 노( 소련 ), 몬( 몽골 )간의 국경선 일대의 벌판을 지칭한다. 이 전투는 양측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는데 소련군은 화염병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전차들에 디젤 엔진을 탑재하였으나 보전 합동 전술을 끝내 발전시키지 못해 트럭 및 하프트랙을 미국으로부터 공여받아야 했고( 그나마 전차에 지원보병을 탑승시킨다는 전술은 써먹었다 ) 일본군은 이 노몬한 전투에서 사용한 그야말로 정신나갔다고 할 수 있는 대전차 전술을 태평양 전쟁 기간 내내 사용해 숱한 전사자를 내야 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공으로 일어난 중일전쟁에서 서전을 장식한 일본군은 점차 중국 내륙으로 진격해 들어갔지만 그러는 한편으로 북쪽의 몽골과 소련과의 마찰이 일어나는 것에 상당히 민감해져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1938년 만주의 연해주 국경선에서 일본군과 소련군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났고( 장고봉 사건 ) 1939년 5월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외몽골군이 노몬한 벌판을 가르지르는 하르하 강을 도하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이에 일본 관동군은 이를 불법 월경행위로 간주하고( 일본측 주장 ) 양측은 교전을 시작했는데 여기에 소련군이 가세했다. 당연히 일본 관동군은 소련군과 외몽골군의 거점을 향해 역공을 개시했는데 이것이 바로 제1차 노몬한 전투다.
제1차 노몬한 전투 당시 소련 대표 "BA-6" 장갑차. 상대는 일본군의 94식 경장갑차였다.
1937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할 당시의 BA-6 장갑차. 비록 장갑차라지만 12.7mm DK 기관총과 37mm 주포를 탑재해 일본군의 89식 중전차와 95식 경전차와도 비교적 대등한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1차 노몬한 전투에서 양측간의 전차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 소련군에 전차가 배치되어 있지 않았고 이는 일본군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군 제11 기갑여단은 전차가 한 대도 없이 BA-6 장갑차와 Su-76 자주포로만 편성이 되어 있었고 전투 당시 외몽골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예하 부이코프 저격 기관총대대의 차량이 BA-6였기 때문이다. 공격해 들어온 일본군 역시 아즈( 車 ) 혼성지대 예하의 94식 경장갑차( 1934년에 제식 채용되어 1935년부터 생산되기 시작해 1940년까지 840대 생산 ) 1대만이 배치되어 있었기에 전투는 전형적인 보병전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상황은 그렇지가 못했다. 소련군의 120mm 박격포와 곡사포의 포격이 시작되자마자 이 94식 경장갑차가 그대로 포화에 휘말려 제대로 기동도 못하다가 달려 들어온 BA-6 장갑차의 37mm 주포탄을 맞고 격파당했다. 장갑차를 잃은 일본군의 전력은 결국 보병이다. 하지만 상대는 장갑차를 앞세우고 쳐들어 오니 그 다음 상황은 그야말로 장갑차 VS 보병의 접전이었고 제대로된 대전차 화기가 전무한 일본군에게 있어 결과는 너무나도 뻔했다. 아즈 중좌가 지휘하는 혼성지대 병력은 수류탄과 화염병, 그리고 자신들이 "건빵 폭탄"이라 지칭한 작대기 혹은 막대기 끝에 지뢰를 매단 급조품(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양말 폭탄 못지 않게 눈물이 나는 응급 화기다 )으로 무려 이틀 동안이나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아즈 중좌를 포함한 70%에 달하는 병력을 손실하고 패퇴해야 했다. 하지만 이 전투가 끝난 후의 논공행상이 참으로 가관급인데 당시 스탈린의 대숙청 기간이라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소련군 지휘관( 하필 이름이 잘 안나온다. 정보망의 한계가 절실해 지는 순간이라고 해야하는 것인지 )이 일본군을 격퇴시키고 주요 거점들을 확보하는 크나큰 전공을 거뒀음에도 도리어 문책당해 숙청되었다는 점이다( 아마 이 지휘관이 제정 러시아 왕조의 장교 출신인 것 같다. 스탈린이 1930년대에 벌인 대규모 삽질 중 치명타였고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를 포함한 상당수의 유능한 장교들이 이 시기에 숙청당했다. 그리고 그 결과 독소전이 개전했을 때 보여준 대규모 패전으로 돌아와 모스크바 문턱까지 독일 전차들이 밀려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 그러나 더욱 놀라운 점은 그 후임으로 온 인물이 바로 게오르기 콘스탄티노비치 주코프라는 점이다( 거 참 )
제2차 노몬한 전투 당시 일본군의 작전 참모 쓰지 마사노부 중좌. 제2차 노몬한 전투에서 그토록 많은 일본군의 목숨을 벌판에 파묻은 패전의 책임을 지기는 커녕 처세술이 좋았는지 대본영으로 영전되어 가는 특진을 누렸다. 하지만 당시 주코프는 한창 대숙청이 진행 중인 상황이라 내심 불안했었고( 다시 일본군이 쳐들어와 패할 시에는 자신도 제거될 것이 뻔하니 ) 비밀경찰의 책임자이자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베리야는 그가 일본군에게 패배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 1차 노몬한 전투에서 그야말로 망신 중의 망신을 당하고 하르하 강 이남의 영토까지 빼앗긴 일본군은 당연히 복수전을 펼쳐야 했고 그 주력으로 제7사단과 본토에서 지원된 전력으로 증강된 제23 사단을 선정해 대규모 반격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2차 노몬한 전투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때 제7사단에 전차연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문제는 앞서 게재한 발지대전투 이전의 독일 기갑사단처럼 이들도 총 전차대수가 100대도 안되는 점이고 더욱더 심각한 점은 독일군은 최소한 판터나 Ⅳ호 전차 등 상대방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전차들을 장비했다고 하지만 일본군은 도무지 소련군의 전차들과 상대가 되지 않는 89식 중전차나 95식 경전차가 주력이었다는 점이다. 반면 주코프가 이끄는 소련군은 비록 경전차들 뿐이었지만 그 성능은 일본군보다 압도적이었고 무엇보다 숫자도 전차와 장갑차 합계 470여대에 이르렀으니 관동군 제7사단과 23사단은 이미 전투 시작 전부터 그 운명이 정해져 있었다고 하겠다.
"어서오세요, 일본군 장병 여러분. 우리 밟아줄 준비 다 되었어요♬" 노몬한에서 활약한 소련군의 BT-5 경전차. 크리스티식 현가장치를 탑재해 일본군의 전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기동력과 함께 탑재된 45mm 전차포는 1,000m 이상의 거리에서 일본 전차의 전면 장갑을 관통하는 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일본군 내에서도 이러한 사태를 직감했는지 금쪽같은 전차와 전차병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죄책감에 일본군 전차 연대의 한 작전참모가 출정 다음 날 바로 주둔지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사건이다( 하라키리가 아니라 당황하는 분들도 많으실텐데 그것은 어디까지 부시 바쿠후 시절에나 통용되던 방식이고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 보편적으로 적용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하라키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 한편 포병 전력에서는 더욱더 절망적이었으니 일본 관동군이 확보할 수 있는 곡사포 및 중포를 다 합쳐도 겨우 80문을 넘기는 수준이라 소련군의 대규모 포병대를 만날 시 그 절박함을 미리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러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초반 우세한 공군력을 바탕( 그나마 공군은 조금 우세했다 )으로 소련군의 후방기지인 탐스크 일대에 대한 공습을 실시해 소련군의 항공전력을 약화시킨 다음 전진을 시작했다. 전투 초기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최초의 국경선인 하르하 강까지 진출하는데 성공을 거뒀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관동군이 국경선 회복에 만족하지 않고 하르하 강을 도하하기 시작하면서 전투의 향방이 엇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더욱 큰 전과를 노린 관동군 1개 연대는 소련군에 대한 정보가 사실상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패할 시 자신의 목이 날아갈 것이 자명한 주코프로서도 기존의 국경선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하한 일본군을 가만 놔둘 이유가 없었다. "모름지기 사람이란 분수에 맞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거늘... 욕심이 끝이 없구나. 그만큼 눈감아 줬으면 그 쯤에서 멈췄어야지. 어리석게 도하를 했으니 철퇴를 가할 수 밖에" 주코프는 더 두고볼 것도 없이 곧장 1개 기계화연대에 출동명령을 내렸고 사전 정보도 없이 도하했던 관동군 1개 연대는 곧바로 이들에게 포위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정상적인 지휘관이라면 멀리서 달려오는 소련군의 전차와 장갑차들을 보는 순간이라도 일단 지원을 요청하던가 퇴각을 해야겠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가 시작되었어도 의식은 거의 바뀐 것이 없었기에 이들은 후퇴를 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뒀던 주력 대전차 병기인 화염병 1,200개를 포위 당일에 모조리 소모하면서 사투를 벌였고 그 결과 소련군은 300대에 가까운 차량이 불타버리는 손실을 입는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화염병이 바닥나자 소련군의 전차와 장갑차들은 45mm 주포와 기관총을 난사하며 일본군을 몰아부쳤고 그 결과 가장 최악의 방법인 착검한 소총으로 전차의 관측창을 찌르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까지 쓰이는 참사가 벌어졌다( 역시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다운 전술이다 ) 하지만 이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고 결국 막대한 병력 손실만 입은 일본군은 도하 지점으로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소련군의 역도하를 두려워한 공병대가 치사하게 자기들만 건너간 후 가교를 폭파해버림으로써 이들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붙잡히면 전부 참수당할 것으로 오인한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살아 돌아간다는 집념이 불러온 것인지는 애마하나 이들은 완전 군장을 한 채로 하르하 강에 뛰어들었고 추격해온 소련군 전차병과 장갑차에서 하차한 보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원 장렬하게 수장되는 참패를 기록했다( 도하한 1개 연대 전원 장렬하게 전멸 )
전차전에서 소련군의 주력 중 하나였던 BT-5 경전차. 크리스티식 현가장치의 채용으로 높은 기동력과 함께 훗날 T-34로 발전하는 기초가 된다. 노몬한 전투 초기 일본군의 화염병 공격으로 불타오르는 차량이 늘어나자 중반 이후부터 BT-7 경전차와 함께 디젤엔진으로 교체한 형식들이 투입되었다.
제2차 노몬한 전투에서 DK 기관총을 점검하는 소련군 병사. 데그챠레프가 개발한 중기관총이지만 당시에는 30연발 탄창을 사용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Combat Arms╋의 DshK 38 중기관총 기사를 참고하시길 도하한 1개 연대가 전멸을 당하는 치욕을 당한 일본군이 재공세를 준비하는 동안 주코프도 더 이상 앉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먼저 강을 건너온 것은 일본놈들이다. 우리가 공세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소련군의 공세에 동원된 전차 전력은 대략 1개 기계화 군단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주력은 BT-7 경전차였고 그 뒤를 이어 BT-5 경전차와 일부 T-26 경전차가 동원되었다. 이에 대응하는 일본군은 7사단과 23사단 외에도 주변의 여러 부대를 증원받아 소련군보다 많은 병력으로 방어작전을 개시했다. 원래 일본군 전차부대의 임무는 도하부대와 호응해 1차 노몬한 전투 당시 외몽골군이 축성한 진지를 분쇄하는 것이 주임무였지만 소련 전차들이 하르하 강을 도하한 상태라 이들을 격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제 정신 나간 셈이다 ) 출동한 일본 전차부대의 구성은 엔진을 디젤로 교체해 1935년부터 생산한 89식 중전차 을( 乙 )형을 주력으로 장비한 제3 전차연대와 95식 경전차를 주력으로 장비한 제4 전차연대였고 당연히 89식 중전차 을형이 일본군에서 가장 강력한 전차였지만 이 전차의 주포인 57mm 전차포는 보병 지원에나 적합하지 대전차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난 그나마 운이 좋은 것인가?" 89식 중전차와 95식 경전차가 노몬한에서 소련 전차들을 상대로 벌집이 되었지만 이 전투에 참전하지는 않은 97식 중전차. 1936년부터 개발이 시작되어 1937년부터 생산이 시작된 전차로 탑재된 97식 57mm 전차포는 89식 중전차의 90식 57mm 유탄포를 개량한 것이지만 이 역시 전차전에는 부적합한 포라는 것이 곧 드러난다. 오죽했으면 독일의 Ⅲ호, Ⅳ호 전차도 격파할 수 있는 미국의 M3 스튜어트 경전차의 38mm 전면 장갑을 관통 못했으니 일본군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1942년 4월에 제식화된 47mm 속사포를 탑재한 97식 개( 改 )가 투입될 무렵은 미군의 전면적인 도서 탈환전이 시작되던 시점이었고 75mm 전차포와 전면 장갑 64mm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셔먼 전차가 등장해 95식, 97식 전차에게는 파멸의 시기였다. 그나마 300m에서 45mm의 장갑 관통력을 발휘하는 94식 37mm 전차포를 탑재한 95식 경전차가 대전차전을 수행하는데 조금 유리했지만 문제는 방어력이 7.7mm 철갑탄을 막아내는 수준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본군의 보다 궁극적인 문제는 바로 보급 지연으로 인해 이들 전차들이 연료를 가득 채우지 않았다는 점과 전차전을 치르는데 필수인 철갑탄이 단 1발도 없었다는 점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투를 치르겠다는 것인지 ) 반면 소련 대표 BT-7과 BT-5, T-26 경전차에 탑재된 45mm 전차포는 1,000m에서 40mm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기 때문에 1,500m 상에서도 전면장갑이 17mm에 불과한 89식 중전차를 간단하게 격파할 수 있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전투가 벌어지자 이러한 열세는 금새 드러났다. 부족한 연료로 인해 일본군은 전차들을 축차적으로 투입할 수 밖에 없었고 그나마 진격하던 전차들은 소련군의 절묘한 대전차 장애물인 피아노선에 걸려들어( 훗날 쿠르스크 전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련군의 45mm 대전차포를 얻어맞고 차례 차례 불타올랐다. 그래도 일부 전차들이 기적적으로 방어선을 돌파해 외몽골군의 외곽진지를 제압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곧바로 들이닥친 소련 전차들의 공격으로 몇 대의 전차가 격파당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금쪽같은 전차 전력을 손실할 것을 우려한 상부의 지시로 전차대는 철수했지만 전후 국제 조사단의 현장 조사 결과 화염병을 맞고 불타오른 소련 전차들은 외부에 아무 생채기가 없었지만 일본 전차들은 문자 그대로 "벌집" 상태였다고 한다 ) 그리고 이 전차전 외에 추가적으로 한 차례의 전차전이 더 발생하는데 바로 95식 경전차와 94식 경장갑차로 이뤄진 혼성부대가 과열된 엔진을 공냉시키면서 휴식을 취하던 중 일단의 소련군 장갑차 부대와 조우전을 펼쳤는데 이 때 95식 경전차 1대가 장갑차에서 발사된 37mm 주포탄을 맞고 격파당한 반면 소련군은 피해없이 현장을 이탈했다고 한다.
"일본놈들아! 이거나 먹어라!!" 일본군을 향해 포탄을 날리고 있는 소련군의 M1938 122mm 곡사포. 독소전 기간 동안 소련군의 주력 곡사포 중 하나로 운용된 명작으로 6.25 전쟁 당시에도 북한군에 172문이 공여되어 한국군 및 미군의 M101 곡사포보다 우세한 사거리를 이용해 적지 않게 한국군을 괴롭혔다. 노몬한 전투에서 소련군은 대량의 야포를 동원해 일본군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전차대를 투입해 마무리를 지었다. 마치 조·일 전쟁 당시 화포를 제대로 장비하지 못한 일본군이 조·명 연합군에게 당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재현된 것이라 해야할 듯... 결국 이 두 차례의 전차전을 끝으로 노몬한 벌판에 일본 전차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고 주코프는 대규모 준비 포격을 가한 후 전차와 보병을 앞세운 대공세를 감행해 관동군 7사단과 23사단을 궤멸시키는 것으로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이번에는 1차 노몬한 전투와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었다. 워낙 압도적인 소련군 포병대의 집중 포격으로 인해 일본군은 주간에는 거의 활동의 제약을 받았고 야간에나 절망적인 야습을 감행하다 축차적으로 소모되기도 했다고 한다 ) 러·일 전쟁 이후 33년 만에 벌어진 소련과 일본과의 지상전은 소련군의 압승으로 끝났고 전후 양측의 피해를 집계해 보면 소련군이 전차와 장갑차 270대를 손실( 이 중에서 전차전으로 격파된 차량은 단 한대도 없다 )했고 병력 15,000명을 손실한 반면 일본군은 전사자만 추정치 35,000명 이상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일부에서는 이 외에도 부상을 입어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거나 전장에서 얻은 질병 등으로 인한 '전병사'로 사망한 인원 등을 합쳐 최소 5만명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는 러·일 전쟁 당시 맥심 기관총과 포대로 방어되는 뤼순 요새 공격에서 발생한 제13군의 15,000명 전사자보다 압도적인 피해였고 전투에 투입된 관동군 7사단과 23사단은 전 병력의 75~80%를 손실해 사실상 궤멸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노몬한에서 활약한 소련 제11 기갑여단의 전차들. 하지만 이들은 상당수의 일본군 전차와 보병들을 궤멸시킨 대신 보병 지원없이 움직였다가 일본군 보병들의 결사적인 대전차 전투로 인해 적지 않은 수의 전차와 장갑차를 손실했다. 반면 소련군의 경우 의외로 전사자가 많은 편인데 이는 유난히 보전합동이 아닌 전차와 장갑차 단독 공세를 추구하는 경향이 많았고 이 때문에 일본군 보병의 화염병과 수류탄 세례를 얻어맞아 270대나 되는 전차와 장갑차를 손실하여 적지 않은 수의 전차병들과 장갑차 승무원이 전사했기 때문이다.
노몬한에서 격파당한 소련군의 T-26 경전차. 일본 전차들과의 전차전에서 손실은 제로였지만 보병들의 결사적인 대전차 전투로 인해 적지 않은 차량이 손실되었다. 노몬한 전투 이후 독·소 불가침 조약에 따라 독일의 동맹국인 소련과 일본은 급하게 8월 22일 휴전을 맺었지만 일본과 몽골, 소련 간의 국경선은 소련의 요구에 따라 그어질 수 밖에 없었다. 보병들 역시 전차와 장갑차를 따라갈 하프트랙이 없었기 때문에 전차대가 돌파하고 지나간 자리로 진격해 들어오다가 살아남은 일본군 보병들의 사격을 받아 사상자가 다발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소련은 이 전투의 승리로 전장에서 포병과 기갑부대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지를 께달았고 특히 피아노선의 유효성을 깨달아 후일 쿠르스크 전투에서 이것을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 결과 강력한 타이거 전차가 피아노선에 감겨 그 자리에 주저앉는 사태가 벌어지기에 이르렀지만 일본군은 어땠을까? 여기가 참으로 가관인데 소련과 달리 이 전투의 패배를 은폐하기에만 급급했고 그래도 조금 지각있는 지휘관들은 소련군이 사용했던 피아노선을 제작해 97식 중전차가 그 위를 통과하게 하여 그 유효성을 직접 확인해보기까지 했다.
타라와 상륙작전 당시 미해병대에게 노획된 95식 경전차. 당시 평균적인 미군 병사의 체격과 비교해 봐도 이 전차가 얼마나 작은 전차인지를 보여준다. 보통 이 정도의 체적이면 매복공격에 안성맞춤이라 하지만 37mm 전차포로는 그러한 매복 공격을 수행하기에 눈물이 겨운 지경이라 해야겠다. 일본군은 토치카를 구축하는 등 이 섬의 방어선을 강화하면서 일부 95식 경전차를 배치시켰는데 이들 중 일부는 셔먼 전차의 주포를 명중시켜 주포를 사용 불가능하게 만드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물론 그 대가로 95식 경전차가 중량이 4배나 되는 셔먼 전차에게 깔려버리는 비운을 당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일본군 전체적으로는 이 노몬한 전투의 교훈이 깡그리 무시를 당했고 그 결과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의 M3/M5 스튜어트 경전차와 "태평양 타이거"라는 별칭을 붙여줘도 아깝지 않은 M4A2 셔먼 전차들을 상대로 그야말로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당시 미 제1 해병사단장 '알렉산더 벤더그리프트' 소장은 과달카날섬 전투에서 자신의 M3, M5 스튜어트 및 셔먼 전차들에게 유린당하는 일본군 보병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전차의 무한궤도는 마치 햄버거의 고기 다지는 기계와도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