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투레티니 가문의 망명
투레티니 가는, 16세기에 제네바로 망명 온 이탈리아인들 중에서 가장 훌륭하고 대표적인 가문이었다. 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로마의 박해를 피하여 안식처를 구하러 이탈리아 루카(Lucques)를 떠나 온 그들은, 1580년경에 제네바에 정착했다. 1580년보다 훨씬 이전에 이탈리아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우선 프랑스에, 다른 이들은 플랑드르(Flandres)에 정착했었다. 그 후, 그들에게 첫 피난처를 제공했던 외국 땅에서조차 교황의 분노 때문에 쫓겨나게 된 믿음의 사람들은, 마침내 스위스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이야말로 보다 안심되는 피난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로마는 우리가 말한대로, 불쌍한 추방자들을 계속 협박하였으며, 분노의 채찍을 계속해서 휘둘렀다. 1558년에, 바오로4세(Paul IV) 교황의 기도에 근거하여, 루카 시 의회가 매우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그 규칙은 종교개혁세력에게 이미 가해지고 있었던 고통을 가중시켰고, 그들이 외국에서 선량한 가톨릭 신도들과는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1560년경에 기슬리에리(Ghislieri)는, 루카에서 여름을 보내려고 온 김에 루카의 종교 당국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는데, 개신교가 앞서 제정된 규제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의 상태를 미루어 살핌으로써, 그는 개신교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루카 사람과 외부인들 간의 소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사실 리옹(Lyon)에는 미셸리 가문,아르폴피니 가문, 칼랑드리니 가문, 투레티니 가문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을 방문하러 온 이탈리아 사람들이 동족 간에 종종 친절하고 우호적인 상거래를 하면서, 개혁주의 신앙의 싹을 틔우게 되었다.
이러한 이교도 가정들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로마의 분노는 아래와 같은 새로운 법령을 만들어 냈다.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이 반역자들 및 이단자들과 곳곳에서 자주 모이고 친해지더라도 뭔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므로, 시 의회에 이름이 올라가고 신고를 당한 반역자들과 이단자들이 가톨릭 교도들이나 수도원이나 기독교 단체들을 더럽히거나 오염시키는 것을 막기 위하여(이런 일들이 쉽게 일어나므로), 소위 이단자들과 반역자들은 오는 2월 중순 후에는 다음과 같은 일정한 지방 혹은 장소들에 가거나 살 수가 없음을 알아야만 한다. 즉, 우리 나라가 의례적으로 여행하고 살고 교역을 하던 곳들인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프랑스령 플랑드르 및 브랑스령 브라방(Brabant) 등이다. 그들이 위의 장소에 돌아오거나, 혹은 위에 정한 기한 후에도 그들 중 발견되었다가 언급된 장소에서 죽임을 당할 경우, 살인자가 장관의 선언에 의해서 정당 살인으로 인정을 받으면, 한 명당 300에퀴(ecu)의 현상금을 마을 금고로부터 지급받는다. 의회의원들과 종교 관료들의 경우는, 이 법령에 의거하여 현상금을 즉시 지불하라고 명령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살인자가 추방자라면, 시의회의 추인을 받지 않고도 추방령이 반드시 취소될 것이며, 살인자가 추방자가 아닐 경우, 그에게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이 끔찍한 법령이 스위스에 알려졌을 때, 제네바 의회와 그들의 보호자였던 베른은 깊은 충격을 받았다. 이 두 의회들은, 수배당한 불쌍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항의하기 위해서, 그리고 편파적인 기준을 비난하기 위해서 루카 의회에 편지를 썼다.
그렇지만, 이탈리아 추방자들을 두둔한 이들은 베른의 시의회와 제네바 당국만은 아니었다. 프랑스왕 샤를르 9세와 카트린느 드 메디치는, 그들에게는 너무 자주 있었던 정치적 돌변의 일환으로, 그 나라에 정착하여 살고 있는 루카인들이 지속적인 감시대상이 되고 끊임없이 그들의 삶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동정하는 조치들을 취하게 되었다. 샤를르와 카트린느는 이 법령의 폐지를 요구했고, 리옹 시장에게 그 도시에 체류하고 있는 개신교인들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눈 밖에 나기 싫었던 루카 공화국은 카트린느와 샤를르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루카인들을 변호하면서, 샤를르와 카트린느는 고집부리지 않고 다음의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였다; 리옹 종교지도자들의 소송과, 귀찮은 일 때문에 핍박이 필요 이상으로 가혹해졌다는 사실을, 그러면서 그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에 관한 동정심을 유발했다.
에이나르(Eynard)씨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나바르공 앙리 4세와 몽모라시 사령관, 그리고 교황 대사와 파리 주재 스페인 대사가 루카 의회에 아주 관대한 편지를 썼는데도, 외국에 사는 루카인 개신교들에게 대한 인도적 지원의 희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몇 년 후 프랑스 땅을 휩슬 전쟁의 폭풍우와, 프랑스 개신교도들의 절망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독자들께서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플랑드르와 브라방 출신의 종교난민들은, 종교재판소와 화형대가 세워지는 것을 공포스럽게 목격하다보니,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교황 피우스5세의 기도에 스페인 왕은 동조했고, 네덜란드인 종교난민들을 몰살시키려고 마음을 먹었다.
스위스는 관대하게 환대를 베풀었고 비교적 안전한 장소이기도 했으므로, 초기 정착지에서 쫓겨나온 이탈리아 개신교인들의 목적지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투레니티 가문도 그런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제네바 경내에 정착하로 온 이 가문의 첫 구성원은, 우리 전기의 주인공인 투레티니의 할아버지 프랑수아 투레티니였다. 그는 루카 공화국의 첫 사법관이었던 레귤로 투레티니 장관의 아들이었으며, 1573년에 클라라 프랑시오티와 결혼하였는데, 이 가문에서 1634년에 루카의 주교인 A. 프랑시오티 추기경을 배출하게 된다.
할아버지 투레티니는 먼저 앙베르(Anvers)에 체류하였다. 그곳은 생트 알데공드(Sainte Aldegonde)의 유명인사 마르닉스(Marnix)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투레티니는 플랑드르에 갔다가, 취리히를 거쳐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가게를 내고 장사하다, 제네바로 왔다. 제네바에 정착한 뒤로, 그 가문은 시민회에 귀중한 봉사, 즉 시민회가 어려운 순간에 돈을 얻어오는 봉사를 했다. 그후 1615년에, 그는 흑사병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자비를 베풀었다. 할아버지 투레티니는 이미 오랫동안 시민계급의 지위를 얻지 않은 채로 제네바에 살고 있었다. 1627년 11월달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고결한 봉사를 기리고 그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그에 걸맞는 지위를 그에게 대가 없이 수여했으며, 그의 두 아들 쟝과 베네딕에게도 그리하였다. 할아버지 투레티니는 200인회(conceiller des Deux Cents, 대민회라고도 부름)의 회원이 되었고, 동시에 60인회(conseiller des Soixanre)회원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이 명예를 누리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이듬해 1628년 3월 15일에 향년 81세의 나이로 그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투레티니는 구빈원(hopitaux), 장학기관(bourse) 및 그 외 공공기관들에 총 51,000플로린의 유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1578년 7월9일에 귀족 미셀 부르라마키의 딸 카미유(Camille)와 결혼했었고, 후에는 클라라 칼랑드리니와 재혼했다.
이 사람은 진실로 순전한 사람이었다. 관대한 정신의 소유자였으며, 경건뿐만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모든 흠모할만한 미덕을 겸비한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큰 일에도 충성스러웠고, 탁월한 상인이었으며, 영원하신 분을 경외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았고, 죽으면서 자기 자식들에게 좋은 추억을 남겼다. 후손들이 본받을 수 있도록 본을 보였으며,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을 적용하도록 한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맏아들 베네딕은, 그 당시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이었다. 1588년에 취리히에서 태어난 그는, 제네바에서 공부를 뛰어나게 잘했다. 1609년, 베네딕은 제네바 교회 뿐만 아니라 외국 학교도 자신을 탐낼 것임을 예견하고서는, 21살이라는 약관의 나이에 제네바 아카데미와 소민회(petit conseil)와 목사회(venerable compagnie)를 사임하였다. 실제로 제네바 교회와 외국학교는 앞다투어 베네딕의 아버지, 즉 할아버지 프랑수아 투레티니에게 그의 아들을 다른 곳에 보내지 말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할 정도였다. 사역자들은 하나같이 “베네딕은 보배다”라고 말했다.
이에 할아버지 프랑수아 투레티니는 말했다. “나는 그를 교회에 헌신하도록 하나님께 바치려는 것 외에는 다른 의도가 없다. 나는 그에게 오는 여름에 6-7달 동안 프랑스에서 휴식을 취하고 그 이후에 다시 돌아오라고 했을 뿐이다.”
1611년 베네틱 투레티니는 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맡았다. 그 이듬해에, 그는 정식 교수로 임용이 되고, 거룩한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게 되었다.
1620년에 그는 알레스(Ales) 총회에 제네바 대표로 파견되었다. 독자들도 아시다시피, 알레스 총회는 토르트레흐트 총회의 결정을 계기로 소집된 총회였다. [알레스는 프랑스 남부의 도시이며, 이곳에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거부하기로 한 네덜란드 도르트 회의의 결정을 도입하기로 결정한 프랑스 교회 총회가 열렸다]. 같은 해에, 제네바 시민회의록에 기록되었듯이, 그는 님므(Nimes)의 교회에 일시사역자로 6개월간 파견되었다. 님므 교회는 그를 더 오래 붙들고 싶어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이 임시직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당시 끔찍한 스켄들에 휘말려 있었던 님므교회를 위해 큰 일을 해냈다. 목사들 중 하나, 즉 꼬뜰리에라고 불리우는 이는, 구세주를 부인하되 교리로만 부인한 것이 아니라 행위로 더더욱 부인해버린 아르미니우스주의자(arminien)였고, 그의 악행 때문에 해임되었다. 님므 치리회는 우리가 살펴볼 이 모든 역사적인 혼돈에 뒤이어서, 꼬뜰리에 소송으로 인해 갈라진 영혼들을 다시 모으고 정신들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음을 이해하면서, 이 심각한 갈등에 편승하지 않고 평화와 사랑의 일을 힘쓸 수 있는 목회자를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님므 치리회는, 제네바 최고 통치자들에게 베네딕 투레티니를 보내주기로 허락을 얻을 심산으로 제네바에 대표단을 보냈다.
보렐 목사가 자신의 저서 <님므 개혁교회사>에서 말한 것에 따르면,
“이 신학 교수는 달변의 설교자요 사상가로 인정을 받았으며, 꼬통(Cotton)신부에 대항하여 제네바 성경 번역본을 옹호한 책 제2권을 출판했다. 또한 <형벌의 유익성에 대하여>라는 설교를 했더니, 그 영향력으로 인해 청중의 숫자가 증가하여 치리회(consistoire) 회원을 3명 더 뽑아야 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목사들을 도와달라고 신자 중 유력자들에게 도움을 청할 정도가 되었다. 투레티니가 떠날 날이 다가오자, 세 개의 교단 협의체로 이루어진 총회 회원 4명이 그 전날 그의 집에 와서, 그가 교회에 감화를 끼치고, 프랑스 목사들 중에 아르미니우스주의가 스며들지 않도록 수고했던 것에 대하여 온 교회를 대표하여 사례하였다. 베네딕 투레티니가 떠나면서 공석이 된 자리는 쟝 쇼브(Jean Chauve)가 대신 맡아 1년간 수고하였다.”
이 목사는, 예수회 꼬통 신부가 <표절자 제네바>라는 제목으로 쓴 글에 대한 반박문을 쓰기도 했고, 그 외에도 여러 중요한 작품을 펴냈다. 그는 또한 수많은 논술집들고, 가장 순수한 교리로 채워져있고 학식 넘치는 신학 논집들을 출판했다. 그는 다작가이며, 그가 평소 생소한 주제들에도 관심이 분명히 있었음을 고려해볼 때, 최소한 41개 이상의 작품을 남겼을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로 수많은 설교를 남겼던 것처럼, 논쟁서도 많이 남겼다. 제네바 목사회는 베네딕 투레티니에게 제네바 역사 모음집 저술을 의뢰했다. 그래서 그는 그 작업을 수행했고, 1618년 2월에 목사회에 원고를 제출했으나, 출판되지는 않았고, <제네바 종교개혁사>라는 제목의 원고로만 남아있다.
베네딕 투레티니는 정치적으로도 성공했다. 세네비에(Senebier)는, “그의 재능과 그의 미덕은, 그가 고결한 애국자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정부가 1621년에 위험에 처한 제네바를 위하여 자금을 모금해 오라고 홀란드에 사람을 보낼 때, 선택된 사람은 바로 그였다. 잘 알다시피, 이 시대 개혁의 거리 혹은 스위스 복음의 열쇠라고 불리웠던 우리 제네바는, 다시 사보이 대공의 침략 위협을 받기 시작했다. 베네틱 투레티니는 이 심부름을 받아들이고 네덜란드로 떠났다. 그는 네덜란드 연방정부에 호소했고, 한자동맹 도시에 호소했으며, 그의 수완과 재능이 합해져서, 그에게 맡겨진 민감한 과업을 완전한 성공으로 이끌었다.
1622년 7월 1일에 투레티니가 제네바로 돌아와서 소민회에 출석함으로써, 그의 과업은 완수되었다. 그는 자신이 특사로서 했던 주요 과업들을 간략히 보고했으며, 프랑수아 투레티니가 40년 후에 아버지와 똑같은 일을 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다. 그는 또한 제네바 최고통치자들에게도 말하기를, 자신이 네덜란드 연방정부에 받아들여지는 영광을 누렸지만, 여러 경쟁자들 사이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보조금 3만 플로린 모금이 거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베네딕은 홀란드 당국의 편지를 의회에 부쳤다. 오란녜(Oranjie)공의 호의적인 통신문을 보면, 그가 체류하는 동안 홀란드 당국이 그에게 많은 호의를 베푼 것을 알 수 있다. 오란녜공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제네바 당국자 여러분, 믿으십시오, 나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고, 어떤 경우에라도 제네바에게 매우 애정어린 섬김을 보여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베네딕 투레티니는 목사회에 동일한 보고를 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다. “목사회 사람들에게 정황을 설명하면서, 베네딕은 네덜란드 교회에 특별한 애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특별한 애정이란, 하나님의 진리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도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이 교회를 마치 촛대처럼 붙들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베네틱 투레티니는 1631년에 죽었다. 시민들의 애도는 그에게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조사가 되었다.
고티에(Gautier)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네바 아카데미와 교회는 같은 해에 신학 교수 투레티니를 잃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가 그의 직임을 감당하면서 나타낸 비범한 재주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요절을 더 아쉬워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 선한 사람은 생을 마감했다.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했고, 각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그가 끼친 행복한 영향력과, 그의 경건함과 지식, 그의 설득력 있는 달변, 그리고 모든 시련을 견뎌내는 용기를 칭송했다. 그가 자기 나라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는 것에 대해서 증거를 대자면,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1632년에 200인회는, 그의 형제 베네딕이 국가에 했던 봉사를 기리는 의미에서, 쟝 투레티니에게 시골집을 하사하였다.
그 외 수많은 투레티니 가족 구성원들은, 여러 작위와 계급을 수여받는 특권을 얻었다. 그리하여 명문가로서의 평판이 집안 대대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들이 학자이며 동시에 시민으로서 제네바 사회 지도계층에 편입되자, 신앙을 위해 순교를 각오했던 이 사람들을 루카 공화국에서 쫓아냈던 것이 얼마나 자신들에게 큰 손실인지를 루카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들이 이주한 지 한 세기가 지난 후에 어떤 주교는, 그들은 추방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였는데, 그들이 루카를 떠난 후에 이탈리아에는 큰 불행이 도래하였고, 반면 제네바에서 그들은 지위를 회복했다고 개탄하였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야 말로 만시지탄이었다. 제네바라는 자유의 땅에 그들은 뿌리를 깊에 내렸다. 루카 입장에서는 그들을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지만, 제네바는 그들이 있음으로써 그들의 후손들이 유익을 볼 것을 생각하고 기뻐했다. 레티(G. Leti)라는 또 다른 이탈리아인은, 이탈리아로의 이민에 대하여 우리가 여기서 인용하기에 적절한 날카로운 세부 통찰을 그만의 독특한 문체로 서술한다.
“또한 옛날에 루터(Luther)와 칼뱅(Calvin) 신앙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산 넘어 이민을 간 많은 집안들이 루카 출신이다. 그들은 루카에서 태어난 사람에 비하면 예배행위에 더 큰 열심을 내었다. 현재 제네바에 존재하는 많은 가문들 중에서 상당수가 루카의 주요 가문과 혈족 관계라고 자인한다. 루카의 가문들이 제네바에 거주하는 가문들과 똑같다고 루카의 가문들이 말해줄지 여부는 내가 모르겠다. 만약 더 알고 싶은 호기심이 있다면, 루카에 가서 직접 알아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루카 사람들이 제네바 사람들과의 혈연관계를 경멸할 것이 아니라고(일반적으로 거리끼는 큰 장애물로 여겨지는 종교조항만 빼면), 이 가족들은 사실 매우 좋은 평판과 영예를 누리고 살았다. 그 중에서도 여러 가족들은 프랑스 귀족 집안과 연결되어 있고, 제네바 뿐만 아니라 유럽의 방방곡곡에서도 사업으로 인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나는 미셸리, 디오다티, 브르라마끼, 미뉘톨리, 투레티니 등과 같은 가족들을 인용할 것이다. 투레티니 가문은 그 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사저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그들을 대저택의 투레티니라고 불렀다. 종교 조항이 아직도 루카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제네바 시민인 그 이탈리아인들이 원래 태생적으로 그들의 동포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인간적인 모임이라는 차원에서 본다고 해도, 그들과 한핏줄임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각지에서 그들이 그들의 가지를 뻗었을 때, 그리고 그들이 고대에 누렸던 찬란함을 간직할 뿐만 아니라 증가시켰음을 그들이 알았을 때, 그 가문의 영광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옛날에 루카에서 만들어졌던 투레티니의 가계도를 읽다보면, 적지 않은 장관(gonfalonier)들과 최고 행정관(Anziani)들이 나왔고, 귀족 집안 중 하나였다. 물론 이탈리아 종교 난민들의 숫자가 절정에 달했고, 그들은 누구나 옛날에 귀족 출신이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귀족 명칭과 많은 영지가, 진짜 귀족을 만드는 것은 아님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그 귀족 칭호가 추방과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두려워했던 영혼들의 도덕적인 가치에 보태줄 것이란 전혀 없고, 단지 보배로운 신앙의 용기와 믿음의 실천만이 세상에서 인정받을 수 잇다. 그런데 열매 없이 헛된 세월만 보내면서, 이 집들은 옛날의 영광만 찾고 있었다. 그들은 허송세월을 하면서, 자신들을 귀족화시키고 참된 위엄을 되찾게 해줄 유일한 수단, 즉 마땅한 일이 없어서 열매를 맺지 못한 채로 남아있음을 자신들의 영광으로 삼고 자위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망명자 가족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들 인격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면 때문에 우리가 그들에게 가치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투레티니 같은 집안의 사람을 동료 제네바 시민으로 얻게 된 것을 축하해야만 할 뿐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부르주아 계급으로 인정받을 때로부터 지금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다른 망명객들과 협력하여, 우리 나라에서 그들이 우리 조상들로부터 받은 환대를 광범위한 봉사로써 되갚으면서, 우리 나라를 계속해서 빛나게 했기 때문이다. 행정관으로서나, 교회에서나, 학교에서나, 투레티니 가문은 언제나 탁월했다.
투레티니의 가계도
프랑수아 투레티니의 아들은 레귤로(Regulo)와 폴리노(Paulino)였다. 레귤로는 1573년 생이며, 루카의 장관을 역임했다. 폴리노의 아들은 뷔제의 생트 크루아의 영주 마리오(Mario)였고, 마리오는 아이 없이 죽었다. 레귤로의 아들이 프랑수아였다.
1547년에 출생한 망명자 프랑수아의 자녀로는 베네딕, 클레르(Claire), 카트린느(Catherine), 쟝(Jean), 쟈베타(Zabetta), 마리(Marie), 여동생과 동명이인이었으나 어려서 죽은 클레르, 르네(Renee)와 프랑수아즈라는 두 딸을 남긴 세자르, 그리고 사무엘과 그 외 다섯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 다섯은 어려서 죽었다.(총 14명)
1588년에 출생한 베네딕은 바르브(Barbe), 에티엔느(Etienne), 프랑수아, 마리(Marie), 오라스(Horace), 보세의 영주 베네딕을 낳았다.
1619년생 에티엔느의 자녀들은 프랑수아즈, 루이즈, 오라스 베네딕과 앙드레엿다.
1651년생 오리스-베네딕의 자녀들은 아드리엔느, 베네딕, 프랑수아즈, 루이즈, 쟝-루이였다.
1697년생 쟝-루이의 자녀들으느 쟌느-루이즈, 아드리엔느-프랑수아즈, 오라스-장-루이와 르네 프랑수아즈였다.
1746년생 오라스-장-루이의 딸은 잔느-앙드리엔느-카롤린느였다.
1655년생이며 에티엔느의 아들인 앙드레 투레티니의 자녀들은 피에르-프랑수아즈, 베네딕, 오라스였고, 그 이에도 후손 없이 죽은 네 명의 자녀가 있었다.
1698년생 피에르-프랑수아의 딸은 안느-지베타(안느-엘리자벳이라고도 함)였다.
1701년생이며 사역자였던 베네딕 투레티니의 아들 프랑수아-오라스 투레티니인데, 후손이 없이 죽었다.
1623년생이며 이 책의 주인공인 프랑수아 투레티니의 아들은 쟝-알퐁스였다.
1680년생이며 사역자였던 장-알퐁스의 자녀는 마르크(Marc)와 마리(Marie)였다.
1712년생 마르크의 아들은 쟝-알퐁스였다.
1735년생 쟝-알퐁스는 자녀 없이 죽었다.
망명자 프랑수아의 아들인 1600년생 쟝 투레티니의 자녀는, 다음에 살펴볼 장-프랑수아, 그리고 프랑수아즈, 마르크, 마리, 미셀, 앙리 등이었으며 모두 14명이었다.
1631년생 장-프랑수아의 자녀는 도로테, 프랑수아즈, 그리고 후손 없이 죽은 미셀이었다.
장의 아들이며 교수엿던 1646년생 미셀 투레티니의 두 아들은 사무엘과 프랑수아-장이었다.
1688년생이며 교수였던 사무엘의 아들은 앙투안느, 샤를르, 그리고 프랑수아-장이었다.
1720년생 앙투안느의 자녀는 장-다니엘, 샤를르-알베르, 앙드리엔느, 마리-샤를롯이었다.
1751년생 쟝-다니엘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앙투안느-위젠느, 카롤린느-르네, 샤르롯트-세실이었다.
앙투안느의 아들이며 1750년생인 알베르의 아들은 샤를르-피에르-르네-루이였다.
1782년생 샤를르-피에르-르네-루이의 자녀는 오귀스트와 아멜리였다.
미셀의 아들이며 1690년생 프랑수아 장의 아들은 제데옹, 사무엘, 장-자크였다.
1723년생 제데옹의 자녀들은 시몽-오귀스트-루이, 안느, 그리고 알베르였다.
1753년생 알베르의 아들은 안느-샤를르-가스파르-투레티니-네케르였다.
프랑수아-쟝의 아들이며 1727년생인 쟝-자크의 두 딸은 수잔느와 앙드리엔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