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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산(楓岳山 600m)은 이름 그대로 가을풍광이 아름다운 산이다.
그래서 금강산의 가을 별칭을 얻은 산으로 600m 높이의 아담 사이즈.
소나무재선충으로 소나무숲이 줄어들고 있는 요즈음 능선길의 유별난 소나무 숲길은 상큼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침 전 날 내린 귀한 비 덕분에 촉촉히 젖은 솔까리 양탄자길은 귀빈행차를 위하여 하늘에서 특별히 깔아준 의전용인 것만 같다.
거기다 드날머리에서 만난 자비로운 마애불(보물 423호) 답사까지 덤으로 챙길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가 된 셈.
주능(천황지맥)에 올라서면 왼쪽 응봉을 지나 비홍재를 넘어서면 노무나 많이 알려진 문덕봉과 고리봉을 지나고,풍악산을 지나 노적봉에서 동으로 방향을
틀면 만행산 천황봉으로 지맥은 어어 달리게 된다.
천황지맥은 호남정맥 팔공산(1,147.6m)에서 서쪽으로 분기하여 마령치에서 성수지맥을 내보내고 남진하면서 북으로 오수천, 남으로 요천의 분수령이 되어
요천이 섬진강에 합수하는 남원시 금지면 성안마을 앞 전라선 신기철교 아래에서 맥을 다하는 59.5km의 산줄기다.
봉우리가 노적가리를 쌓은 듯하여 풍요로움의 상징이 된 노적봉(露積峯 567.7m)과 암벽이 닭벼슬을 닮아 얻은 이름 닭벼슬봉(계관봉 鷄冠峯) 아래에
그 정기를 받아 노봉(露峯) 마을이 터를 잡았다..
나말여초(羅末麗初)인 1,400년 전에 노적봉의 정기를 받아 삭녕최씨((朔寧崔氏)가 집성촌을 이룬 마을이다.
노봉 마을은 노봉서원이 있어 서원리(書院里)로 불리다가 서원리와 도촌리를 통합해서 서도리(書道里)로 바꿨다.
서도리는 최근 ‘혼불‘의 작가 최명희(崔明姬,1947∼1998)의 고향이자 혼불의 배경이 된 노봉 마을에 혼불문학관이 건립돼 탐방객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설 배경이 되는 최씨 종가, 청호저수지, 달맞이 공원, 구서도역 등과 연계하여 문학마을이 조성된 것.
마당에 세워진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歲享) 표석은 ‘천년을 즐기고 만년을 누리라.‘는 말로 무궁무진한 발전을 기원하는 의미인 것 같다.
산행코스: 굴다리-(주)흙농)-신계리마애불좌상-주능-풍악산-신치-노적봉-임도갈림길-닭벼슬봉-호성암지마애불좌상-혼불문학관(4시간)
GPX트랙
<갈대님의 지도>
고도표와 거리 및 소요시간
<참고 개념도> 천황지맥
네비엔 '남원시 대산면 신계리 429-122'를 입력하여 '순천완주고속도로 북남원IC'에서 내려 5분 만에 굴다리 아래에 버스를 댄다.
대강의 산행채비를 갖춘 뒤...
세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주)흙농의 철문을 지난다.
임도 사거리에선...
좌측으로 응봉이정표(용봉은 잘못 표기된 듯)가 붙어있고...
우측으로 '신계리마애여래좌상' 0.8km안내판이 붙어 있다.
마애불 입구는 좌측 돌계단...
안내판 뒤로 잠깐 오르면...
우측으로 석축이 쌓여진 모습에서 만난다.
도선국사가 하룻밤 만에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는 마애불 안내판.
보물 제423호인 남원 '신계리 마애여래좌상(南原 新溪里 磨崖如來坐像)'이다.
3m가 넘는 이 마애불은 자연 암반을 대좌(臺座)로 삼고 매우 도드라지게 조각하여 부피감이 풍부하며 현재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민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유난히 큼직하고 두 귀는 짧고 둥글다.
원만한 얼굴과 거기에 알맞게 묘사된 눈·코·입은 생기가 있으며 근엄한 편이다.
어깨가 넓고 가슴이 발달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볼록하여 다소 어색한 감은 들지만 팔과 다리에 입체감이 살아있어 생동감이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있으며, 옷주름은 평행의 선으로 간략하게 나타냈다.
두 손은 배에 놓고 있는데 왼손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였고 오른손은 손등을 보이면서 검지 손가락과 새끼 손가락을 펴고 있다.
구슬처럼 둥글게 표현한 머리광배에는 연꽃잎을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구슬 모양의 머리광배는 그 예가 별로 없는 특이한 것으로 주목받는다.
풍부한 얼굴표현에 비하여 세부표현이 간략하게 처리된 점으로 보아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자료인용>
뒤로 돌아보니 거대한 바위를 몸체 뒤의 광배(光背)로 삼고 있다.
산길은 마애불 뒤로 난 능선으로 바로 오른다.
소나무가 도열한 솔까리 숲길을 따라...
제법 가파른 오름 구간을 헐떡이며 오르다 보면...
흡사 고인돌을 빼닮은 바위도 지나고...
30여분 만에 주능선에 올라선다.
이제 고도는 평이하여 룰루랄라 촉촉한 솔밭을 여유있게걸으니...
어렵지 않게 풍악산에 오른다.
금곡동에서 처음 참여한 여성회원 두 분.
막 식사자리를 편 일행들 밑으로 순천완주고속도로가 지나가고 북남원IC가 내려다 보인다.
당겨본 북남원IC.
밥상머리에 앉기 전에...
포즈를 잡는 오늘 세번째 참여한 신만덕 여성회원을 옆으로 기념하고서야 점심보따리를 풀었다.
소나무 사이로 내려다 본 모습.
다시 갈 길을 재촉하며 만난 이정표.
이렇게 요상하게 조각한 걸작품을 지나...
잘록한 신치(신재)를 지난다. 신치는 좌측 동계면 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남원장을 넘나들던 고개.
수더분한 산길...
소나무 숲속에는 자연 그대로의 꾸밈없는 모습이 펼쳐져 있다.
잠깐잠깐 만나는 암릉지대에선 우로 에돌기도 하고...
태풍에 쓰러진 고목을 만나면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장애물을 통과한다.
능선을 이어가면서 여러번의 우회와...
또 데크계단을 이용하며...
중간중간 주위조망도 즐긴다.
거대한 암봉을 만나 우로 에돌면...
자로 잰 듯 삼각형을 조각한 바위와...
전망대에 서면...
펼쳐지는 가을풍경. 역시 단풍은 울긋불긋도 해야하지만 푸른 소나무에 섞여있어야 그 아름다움이 살아 나는가 보다.
넓직한 헬기장이 있는 노적봉
노적봉에선 단체 기념사진도 찍었다.
노적봉의 이정표와...
천황지맥 푯말.
B팀을 만나 돌아 보시라고 불러 세웠다.
수동마을 갈림길과...
혼불임도 갈림길에서 또다른 B팀을 만났더니 알바를 하였단다.
혼불문학관에서 역으로 올라오는 산길이 헷갈리는 모양.(굴다리 통과 후 직진하지 말고 좌로 둘러 올라야만 한다.)
탈출로를 열어 놓은 혼불임도(0.5km) 이정표.
닭벼슬봉을 오르며 우로 열리는 조망과 가을 풍경.
그 속에 임도가 꾸불꾸불 보인다.
만추의 산하엔 박무가 끼여 시야가 뿌우옇다.
좌측 산자락에도 온통 뿌옇기는 마찬가지.
닭벼슬봉의 벼슬을 닮은 바위.
우로 에둘러...
돌아보니 역광으로 반사되는 닭벼슬.
다시 이어가는 거친 산길에 산불이 났나 보다. 10여년은 지났나 본데,아직 완전 치유되기에는 멀었다. 불조심!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촘촘히 안내하는 이정표(혼불 2.3km)를 지나고...
중요한 터닝 포인터인 갈림길. 혼불문학관 2.1km와 삼계석문(3.7km)이 나타나면 능선에서 벗어나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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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불 갈림길 이정표에서...
우로 혼불문학관 방향으로 꺾는다.
시누대 숲을 지나면...
이제는 없어진 호성암지(址)가 나타난다.
호성암(虎成庵)은 어느 도승이 호랑이에게 물려 간 아이를 구해주고 그 아이의 부모로부터 시주받은 돈으로 세운 암자였으나 지금은 암자터만 자리하고 있다.
그 암자터 암반에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전북 문화재자료146호)이 새겨져 있다.
조성연대를 조선시대로 추정하는 이 미륵부처님은 양각으로 조각되었으나 고려시대의 기법이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전체높이 585센치미터,신체높이 379센치미터,대좌높이 131센치미터,대좌넓이 470센치로 고창군의 운선암 마애불과 대비되고 있다.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은 두 손을 가슴에 모은 형상으로 꽃송이(용화수)를 들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연화좌대 위에 결가부좌의 형상으로 통견의를
입었으며 옷자락이 펄럭이도록 조각되어 그 조형미가 뛰어나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 모두 두터운 이중원형으로 강조되어 있다.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과 사실적으로 묘사된 통견의가 인상적이며 다소 경직되어 있는 긴 눈, 도툼한 코 형상이 이채롭다.
노적봉 마애여래좌상은 전북지방의 불상양식연구에 귀중한 연구대상이 되는 희귀한 마애여래불이다. <자료인용>
거대한 마애(磨崖) 아래에 수량이 제법 풍부한 석간수(石澗水)가 나는데,마애 부처님이 내리는 성수(聖水)가 분명하리라.
마애불에서의 이정표와...
안내판
또다른 녹슨 안내판엔 재미있는 속담을 하나 소개하고 있다.
"호성암 중 떡 달 듯 한다." 는 말은 호성암 중이 떡 달라는 듯 보챈다는 말인가 보다. 그래서 자꾸만 욕심을 부리는 사람을 일컫는다는...
내려서는데,입구에 있는 돌절구통(물확)이 시야에 들어온다. 폐사 되기 전의 호성암시절에 쓰던 물건인 모양이다.
낙엽을 밟으며 세멘트 포장임도에 내려서면...
만나는 이정표
만추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낙엽 임도를 내려서면...
순천완주고속도로가 길을 막는다. 좌로 조금 에두르면...
굴다리를 통과하여...
호성사를 지나...
호성사 현판
노오란 은행나무와...
붉디붉은 단풍나무를 지나면...
혼불문학관에 닿는다. 산행은 이것으로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지만 10여분간을 더 문학관을 관람하며 산행의 유종(有終)을 맺는다.
문학관 중앙에 자리를 잡은 바위 하나. 아래 안내판엔 호랑이 바위라는 호석(虎石) 안내판이 있다. 호랑이와 관련한 스토리텔링인 셈.
안내판
잔디가 곱게 깔린 혼불문학관.
문학관 옆에 선 빨간 우체통과 아무렇게나 생긴 바위하나. 새암바위라고 한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것처럼 온갖 정성을 다하여 쓴 혼불이 새암을 이뤄 해원(解寃)의 바다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암바위라 명명했다고 한다.
"날렵한 끌이나 기능좋은 쇠붙이를 가지지 못한 나는,그저 온 마음을 사무치게 갈아서 손끝에 모으고,생애를 기울여 한 마디 한 마디 파 나가는 것이다.
- - -중 략 - - -
새암은 흫러서 냇물이 되고,냇물은 강물을 이루며,강물은 또 넘쳐서 바다에 이르기도 하련만,그 물길이 도는 굽이마다 고을마다 송두리채 쓸어안고 함께
울어 흐르는 목숨의 혼불들이,그 바다에서는 드디어 위로와 해원의 눈물나는 꽃빛으로 피어나기도 하련마는,
- - - 하 략 - - -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서...
문학관 별관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때때로 나는 엎드려 울었다.
그리고 갚을 길도 없는 큰 빚을 지고
도망다니는 사람처럼
항상 불안하고 외로웠다.
좀처럼 일을 시작하지 못하고
모아놓은 자료만을 어지럽게 쌓아둔 채
핑계만 있으면 안 써보려고
일부러 한눈을 팔던 처음과 달리
거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쓰기 시작한
이야기 '혼불'은 드디어
나도 어쩌지 못할
불길로 나를 사로잡고 말았다.
-최 명 희-
15년간 <혼불>이라는 작품에 매달리면서 최명희는 작가로서는 영예를 얻었고, 여자로서는 독신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리고 난소에서 발견된 암이 온몸으로 번져 작품을 끝맺은 2년 후 겨울에 ‘거짓이 아닌 글을 썼으니 행복하다’는 말을 남기고 아쉽게도 생을 마감했다.
외로웠으나 누구보다 뜨거웠던 최명희(崔明姬,1947∼1998)의 삶은 지금도 이 땅 곳곳에 새겨져 있다.
딸을 키우는 어머니, 머잖아 어머니가 될 어린 딸들, 추수가 끝나고 겨울을 기다리는 빈 들판과 나락이 흩어진 논 가운데에, 그리고 말라붙은 강가와 발전이라는 간판 앞에서 깎여지는 산중턱에는 오래 전부터 우리를 지키고 키워낸 조상들의 혼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최명희가 사랑한 남도의 사투리처럼 그 혼은 세월이라는 풍파 앞에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김욱-
서서히 땅거미가 내려앉는 혼불문학관 뒤로 노적봉과 풍악산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마당에 놓인 '천추락만세향(千秋樂萬世享)'의 표석.
풍수지리적으로 노적봉과 벼슬봉의 기운이 세어 나가지 못하도록 큰 못(청호지)을 파서 그 기맥을 찰랑찰랑 가둔다면 천추만세토록 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
별관 화장실의 남(♂)여(♀)구분 표현이 예술적으로 느껴진다.
몇 잔의 막걸리로 목을 축인 뒤 청호저수지로 나왔다.
산그늘이 내려앉는 청호 저수지에 은빛 물결이 일렁인다.
혼불의 배경이 되면서 노적봉과 닭벼슬봉의 빠져나가는 기운을 찰랑찰랑 모아둔 그 청호저수지.
그 잔잔한 물결 위에 고운 단풍이 길게 목을 드리운다.
기운을 가둬둔 청호저수지 둘레에...
안내판
산책길이 나있어 둘러 걷노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며...
소설 혼불에서처럼 그렇게 달맞이를 한다면 소원성취를 한다고...
혼불문학관은 매주 월요일 휴무로 09:00~17:00 개관
하동엔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학관'이 있다. 소설 '토지'나 소설 '혼불'을 상대적으로 비교하기는 무리.
하지만 먼저 시도한 곳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하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일 것.
이제 모두 화장을 하고 출발이다.
어채피 여자가 나이 들면 시집이라능 걸 가기는 가얀디,
나는 집도 가난허고,
부모도 멀리 지싱게,
머 부자 혼인은 바라도 못허고,
또 저쪽으서 남자네가 우리보고 가난하다고,
볼 것 없다고 퇴(退)나 노먼 오도가도 못헐랑가,
매급시 그런 생객이 들대요.
에이, 가 보자.
거가 머이 있능가.
허고는 시집이라고 간 거이요.
긍게.
우리 옥란이가 많이 울었지라우.
내가 더 울고.
아이고오,
그런디,
그 담이 바로 지옥이여.
참말로 나,
누가,
너 시집 안 가먼 나 죽을란다고 목을 매도,
누가 시집가라먼 가지 말라고,
나는 도시락 싸들고 댕김서 말리고 싶어라우.
그 일만 허다가 죽어도 좋겄어어.
어치케나 징그런지.
- <혼불> 중에서-
첫댓글 가을끝자락의풍악산넘조아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