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은
비장미* 외
-우크라이나 여전사 루브차첸코
세상은 흐른다
태양도 흐르고 노을도 흐르고 폭음도 흐르고 우리의 이별도 흐른다
조국을 품은 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펜을 잡던 손으로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받아 든 가녀린 손 “절대로 누구에게도 총을 쏘고 싶지 않아요. 난 정말....”
조국을 애인처럼 품고 뒹굴며 흐르다 흐르다
어느 지점쯤에서 허허롭게 웃으며 서로의 각색各色을 각색脚色하지 않고 헬멧을 벗고 방탄조끼를 벗고 전투복을 벗고 칼라시니코프 소총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회색 꿈을 뿌리며 점점 좁혀오는 거친 숨소리
눈을 감고 화약 냄새의 위치를 가늠하며 살아야 할 이유를 죄다 소환한다
나의 찬란한 젊음과 사랑은 어디에 멈춰 길을 잃고 헤매나
잃어버린 시간과 기나긴 해우의 키스를 할 수 있을까
그날이 오기나 할까
공포가 공포를
공포를 공포로
우주의 난민이 되어
생멸의 순간을 서로 위로하며
차마, 눈물을 떨구지 못하고 눈동자에 갇혀 울다 지친
살고 싶어, 꼭 살아내야 해
끝이 처음을 만날 때처럼 오늘의 나와 내일의 너
거푸집에 박힌 나의 성형을 이제 끝내야 해
*슬픔과 함께 숭고함이 곁들인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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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지인가?
-티베트 고원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산머리에 우뚝
태초인 듯, 이제 막 태양과 별이 황홀하게 떠오르는
티베트 국기를 보라
신이 있다면 이곳에 제일 먼저 발을 묻고 가난하고 소외당한 이들의 간절한 축원을 품었으리라
문명의 지층 아래, 그 아래
혹독한 추위보다 더 시린 억압
자유를 잃고 주권을 잃어버린
새싹이 돋을 것만 같지 않은 대지에 엎드려 슬픔과 좌절이 겹겹이 녹아내리는 설 수를 내 안에 묻고, 휑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분단의 슬픔을 묻고, 민주주의가 사라져가는 내 땅의 안녕을 묻는가? 나보다 더 슬피 우는 선한 눈동자를 보며
우리는 동지인가?
나는 총부리를 겨눈 허리 잘린 나라에서, 너는 자유가 종속되어 머리 위에 슬픈 짐을 얻고 우리 서로 이마를 맞대고 위로하며 어떤 희망을 소원해야 하는지
온기라고는 찾을 수 없는 환경에서 밝게 웃는 아이들이 너희의 희망이라면 그 해맑고 화사한 얼굴에서 내 땅의 희망을 찾고 싶은데 내 땅에 아이들에게 뭔가를 찾고 싶은데…
유신독재, 군사독재, 이제는, 이제는 검찰 공화국이라 감히 말하기 어려운 검찰 독재
빛과 어둠의 총량이 같다고 하니
이 어두운 대지 어딘가에 공평이 피어날 것 같아
시린 얼굴 비비며 우듬지 맞닿은 하늘을 보네
에베레스트 설원에서
가은
2021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으며 시집 『봄바람에 기울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