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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菩薩의 十種律儀*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律儀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於一切佛法에 不生誹謗律儀와 於一切佛所에 信樂心不可壞律儀와 於一切菩薩所에 起尊重恭敬律儀와 於一切善知識所에 終不捨愛樂心律儀와 於一切聲聞獨覺에 不生憶念心律儀와 遠離一切退菩薩道律儀와 不起一切損害衆生心律儀와 修一切善根하야 皆令究竟律儀와 於一切魔에 悉能降伏律儀와 於一切波羅蜜에 皆令滿足律儀가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無上大智律儀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계율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모든 불법에 비방하지 않는 계율과, 모든 부처님 계신 데 믿는 마음을 깨뜨릴 수 없는 계율과 모든 보살에게 존중하고 공경함을 일으키는 계율이니라.
모든 선지식에게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계율과, 모든 성문과 독각에게 생각하는 마음을 내지 않는 계율과, 모든 보살의 도(道)에서 물러감을 멀리 여의는 계율과, 중생을 해롭게 하는 모든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계율이니라. 일체 선근을 닦아서 모두 완성하게 하는 계율과, 모든 마(魔)를 다 능히 항복시키는 계율과, 모든 바라밀다를 다 만족케 하는 계율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위없는 큰 지혜의 계율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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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隨順堅固一切善根廻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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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는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인이다. 다른 말로는 무차법회(無遮法會)라 한다. 무차시(無遮施) 무차회향(無遮廻向)이다.
무차법회를 하다가 다음으로 넘어가면 아만이 싹 빠져버린 평등회향이 나온다.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
견고하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쇳덩어리 같다. 쇳덩어리보다 더 견고한 것이 허공이다. 허공은 안 부서진다. 유통기한도 없다. 그런 것이 견고한 것이다.
견고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견지금계(堅持禁戒) 불훼범(不毁犯)하리니 영사신명(寧捨身命)이언정 종불퇴(終不退)하리라’이런 이야기도 있다.
수순견고, 수순하는 사람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도덕성이 있는 사람이 널리 회향할 수 있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는 해당이 안 된다.
수순이 다른 말로는 바라밀행의 극치라고 한다.
반야심경에서는 수순을 뭐라고 하는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조견(照見)이라 한다. 아까는 정념한다, 엄정한다고 나왔는데 수순한다는 것과 다 똑같은 뜻이다
견고하다고 하는 것은 불퇴전의 신심이 확철한 것이다.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렇다.
십회향품에서는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을 하면서 눈코입귀부터 시작해서 대표적으로 60가지 보시를 나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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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의 십종율의(十種律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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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은
유십종율의(有十種律儀)하니 :열 가지 계율이 있다.
하등(何等)이: 무엇이
위십(爲十)고 :열 가지 계율이냐. 율의를 가지고 수순견고일체선근에 배대시켜 놓았다.
열 가지 율의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순하는 것이다. 세상 인심에 수순하고, 중생들의 마음에 수순해서 견고한다. 변하지 않고 영원히 도와주면서 일체 모든 선근이란 선근을 다 행한다. 중선봉행한다. 이런 것을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 중의 행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평등하고 집착없는 이치를 깨달아버린 사람은 실제적으로 모든 데 다 통한다.
평등한 이치에 대해서, 화엄경을 해석할 때 원효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득의(得意) 즉, 뜻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옳다. 물구나무를 서서 거꾸로 가도 옳고, 뒤로 가도 옳고 바르게 가는 것이다. 옆으로 가도 바르게 가는 것이다.
뜻을 모르는 사람은 똑바로 걸어가는 데도 정도(正道)가 아니다. 옆에서 보면 정도(正道)가 아닌 사람들한테는 똥파리가 달라붙는다. 화장실에서 구린내가 나듯이, 정도가 아니면 무조건 똥파리가 달라붙는다.
정도로 가면 마치 자석에 쇳가루가 달라붙듯이 점점 복이 무량해진다.
저는 눈앞에서 그런 것을 현실적으로 많이 본다. 가장 대표적으로 어른스님이 그렇다. 어른스님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스님이 좋아하시는 건 지금 화엄경뿐이다. 그것도 신심 있게 좋아하시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불사는 저절로 계속 돌아간다.
작게는 저 자신을 보더라도 그렇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성격도 별로 안 좋고 말도 좀 빼딱하게 하고 잘난 척도 하고 이러는데 그건 원래 인물이 잘났으니까 할 수 없다 치고 아무튼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복이 많은가? ‘아, 이거는 화엄경에 묻혀지면 이렇게 되는구나’
보현행원품을 해석하시고 나서 청량국사가 그랬다.
부독화엄경(不讀華嚴經)이면 화엄경의 뜻을 진실하게 읽지 않은 사람은, 부지불부귀(不知佛富貴)라 부처님이 부귀하신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요새 중국에서는 이렇게 나왔다.
청량국사 이야기인데 청량국사를 사모하시는 분이 많겠지만 누구를 제일로 치냐, 명나라 때 육조 스님의 좌우보처로 계시는 감산덕청(憨山德清)스님을 제일로 친다. 감산몽유집(憨山夢遊集) 열 권을 읽어보면 정말 좋은 글이 너무 많잖은가.
감산직해라 해서 기신론직해(起信論直解)도 있고 능엄경직해도 있다. 직해라고 하는 것은 가지치기를 해서 거기서 글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바로 해석하는 것이다. 줄기에다가 바로 해석한다.
가지에 해석하는 것은 수소연의초(隨疏演義初)라고 한다. 소를 따라서 뜻에 따라서 초를 붙이는 것이다. 그런 것은 가지에다가 잔가지에다가 이파리를 붙이는 식의 해석이다.
선사(禪師)들이 그러면 선사의 맛이 안 난다. 통나무를 그대로 갖다 놓고 그걸 푹 찔러서 본문을 갖다 붙여야 선사답다. 대표적으로 잘해 놓은 것이 금강경 오가해 종경스님의 제방이라든지 부대사의 해석이라든지 설의도 금강경 같은 데서 그렇게 해놓는다.
예를 들어 화엄경에서 ‘장대교망 녹인천지어(張大敎網 漉人天之魚)라’ 하면 ‘대교망을 펼쳐서 만 중생을 구제하겠다’ 하지만, 금강경에는 이렇게 한다. ‘천척사륜 직하수(千尺絲綸 直下垂) 일파재동 만파수(一波縡動 萬波隨) 야정수한 어불식(夜靜水寒 魚不食) 만선공재 월명귀(滿船空載 月明歸) 제도할 중생이 어디 있노? 법이 어디 있노? 펼칠 그물이 어디 있노? 건질 고기가 어디 있노?’ 이렇게 푹 찔러서 해석한다. 이런 것을 직해라 한다. 금강의 오가해 같은 데는 똑같은 해석을 하면서도 그렇게 쿡 찔러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감자가 하나 있으면 삶기도 하고 찌기도 하고 채썰기도 하고 볶기도 하고 프렌치 프라이 맥도날드 감자도 만든다. 감자를 갖다가 별별 음식을 다 만든다. 전을 부치기도 하고 감자 떡을 만들기도 하고 그런데 그 과정이 다 다르잖은가? 그건 전부 누구를 위한 것이다? 하근기를 위한 것이다. 부처님은 방편이 필요 없다. 중생에게만 방편이 필요하다. 건강한 사람은 약 먹을 필요가 없다. 병든 사람은 그 병의 경중에 따라서 침을 찌르는 깊이도 다르다. 침을 깊이 찔러야 될지 약하게 찔러야 될지, 약을 세게 써야 될지 약을 작게 써야 될지가 다르다.
대방광불화엄경의 대방 큰 방편은 어떤 것인가? 어른들한테는 대방을 쓰고 아이들한테는 소방을 쓴다. 그러니까 크게 이야기해 줄 때도 있고 자잘하게 이야기해 줄 때도 있다.
어쨌든지 여기서 수순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는 방편이고 바라밀이다.
수순 다음에는 기신론 같은 데는 어떻게 나오는가? 득입이라. 득입(得入)은 종착역이라는 것이고, 종착역을 다른 말로는 터미널이라 한다. 터미널을 구경열반이라고 한다.
여기도 수순견고라고 하는 것은 구경으로 가는 길이다.
수순견고라고 하는 것은 구경으로 가는 길이다.
지난 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게 이런 게 있었다.
진짜 보배라고 하는 것은 한 사람 두 사람이 가진 것은 보배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 있어야 보배다.
예를 들자면 저 태양 같은 것은 누가 주인이냐? 주인은 없지만 전부 다 주인이다. 허공 같은 것 이런 것들이 진짜 보배다.
아까 감산스님을 이야기하다 살짝 빠져버렸는데 감산스님 호는 징인(澄印)이다. 감산스님은 청량국사를 사모했다.
청량국사의 청량은 호이고 법명은 징관(澄觀)이다. 징(澄) 맑을 징자 오징어 징자 오징어가 투명하잖은가. 오징어는 몸은 투명한데 먹물은 검다. 그래서 오징(烏澄) 검기도 하고 투명하기도 해서 까마귀 오자 맑을 징자 오징어라고 한다. 오징이라는 글자 두 개가 서로 반대다. 하나는 맑고 하나는 탁하고 그러고 보니 뜻이 청탁(淸濁)이다.
청량 징관국사를 좋아하던 감산 덕청스님이 징관스님의 징자를 따와서 스스로 징인(澄印)이라고 호를 지었다.
덕청스님은 명나라 시대 때 앉아서 좌탈하셨다.
‘내가 죽는 것까지 보여줄게. 끝까지 보여줄게’
‘경전에 강사들이 해석해 놓고 강의해놓은 내용이 너무 틀린 게 많다. 지져분하게 그런 것이 아니다.’
임제록에도 나오는 이야기고 구마라집의 제자스님들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질근질근 씹어서 먹던 음식을 남에게 먹으라고 주는 것과 비슷하게 해설을 했다고 하면서 그런 것은 해설 같지도 않은 해설이라고 했다.
그래 육조스님은 금강경 서문에 그렇게 해놓았다.
‘뜻을 아는 사람은 내 해설을 굳이 빌릴 필요가 없다.’
이것은 질근질근 씹어서 지져분한 것이다. 너희들이 먹을 물건이 안된다. 밥을 못 먹는 이유식 먹는 애들이나 엄마가 씹어서 주는 것이지, 제 숟가락 뜨고 있는데 무슨 남 해석한 것을 보고 있는가. 육조스님은 금강경을 해석하는 데 그렇게 해놓았다.
원효스님도 기신론 별기에 그렇게 해놓았다.
‘아는 사람은 그냥 알면 되는 것이고 이것은 내가 좀 둔한 사람이다 보니까 나혼자 보려고 노트해 놓은 것이지 남에게 소개해서 저작이라고 내놓을 것은 아니다’
청량국사도 왕복서를 쓰면서 그렇게 해놓았다.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니야. 이것은 내 저작이 아니야’ 내 저서도 아니고 저작 작품도 아니고 내가 지금 왕복서를 해놓은 거는 술이다 조술(祖述)이다. 옛날부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구술되어 오던 얘기 있잖은가. 논술되어 오던 이야기, 그걸 갖다 내가 지금 진술할 뿐이다. 그것을 받들어서 여러분들한테 소개시킬 뿐이다, 이런 이야기들이다.
청량국사의 소초를 보시면서 감산 덕청스님이 선사답게 콱 줄여서 뭘 지었냐면 화엄경 39품 대의를 지었다.
그래서 제가 한 14년 전에 도표를 만들면서 청량국사 것은 너무 복잡하니까 감산스님 것을 갖다 딱 붙여 놓았다.
제목 한 줄 쫙 달은 것은 합론(合論)을 지으신 통현장자 것이다. 각권대의는 통현장자의 것이고 각품의 대의는 감산 덕청스님 것이다.
감산 덕청스님은 쪽 짜내서 감에서 곶감이 나오듯 만들었다.
청량국사 것은 감을 감 자체 통째로 보는 것과 같다면 그것을 쪽 짜내서 감산 덕청스님은 곶감을 만든 것 같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화엄경 보시기 힘들면 감산스님의 39품 화엄경 대의를 쭉 보시면 제일 빨리 취득할 것 같다.
감산스님이 스스로 호를 징인((澄印) 맑을 징(澄)자 도장 인(印)자를 쓴 것은 청량국사를 사모해서 청량스님의 이름 징관(澄觀)에서 따온 것이다.
중국 사이트에서 보니까 분명히 내가 볼 때는 청량국사 이야기인데 ‘감산대사왈’ 하면서 중국사람들이 뭐라고 해놨냐 하면 ‘부독화엄경이면 화엄경을 읽지 않은 사람은 불식’ 이렇게 해놨다.
불식불가지부귀라, 불가의 부귀 불교 가문 있잖은가. 불교 가문의 부유하고 귀한 것을 모른다 그렇게 해놨다.
불식 불가지 부귀 해놓고 이건 감산스님 이야기다, 라고 써놨는데 원조는 누구인가? 청량국사 것이다.
화엄경 보현보살품에도 나오지만 화엄경 현담에도 보면 그 구절이 나온다. 수순견고일체선근회향이다.
소위어일체불법(所謂於一切佛法)에 :소위 일체 불법을
불생비방율의(不生誹謗律儀)와 : 비방하지 않는 계율과 불교를 비방하지 않으려면 보현행원에서도 첫째 예경을 잘한다고 나온다.
하심(下心)이 안 되는 사람은 남을 많이 비방한다. 여러분들이 도반들과 같이 한번 지내보고 일반 신도님들 한번 보라. 남한테 예의 없고 하심 안 하고 자기 아상과 아만이 높은 사람들은 칭찬보다는 남을 많이 헐뜯는다.
하심이 잘 된 사람은 남 칭찬을 잘한다. 제가 통계적으로 나눠본 것이다. 오위백법(五位百法)을 딱 놓고 ‘아, 왜 나는 남을 헐뜯지?’ 가만보니까 하심이 안 된 것이다.
하심이 안 된 사람은 칭찬을 잘 안 한다. 그러니까 예의 잘 지키고 칭찬 잘하는 사람들은 잘 베풀어 주고 점잖고 자기 참회를 잘하고 남 좋은 일 있으면 같이 기뻐한다. 자꾸 법회가 열리도록 주관도 한다. 어쨌든지 책도 많이 찍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
올해는 윤달이 들었으니까 만으로 384일이다.
음력으로 윤유월 29일 한 달이 더 들어가잖는가.
양력으로는 365일이지만 음력은 354일인데 여기에 한 30일을 더 보태면 된다.
삼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윤달이니까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올해는 가사불사도 하시고 삼사순례도 하시기 바란다.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무엇을 해야 되는가? 윤달에는 무조건 화엄경 80권을 다 읽어야 한다.
노는 입에 염불을 하셔야지 아니 스님들만 하실 게 아니고 신도님들도 윤달에는 전부 다 화엄경을 한 편씩 읽자. 그러다 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렇게 항상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눈앞에 중생이 보이게 되고, 자기 자식이 보이게 되고, 자식이 물에 빠지고 진흙에 빠지고 똥통에 빠지는 게 보이게 된다. 그 사람들 손을 잡아줘야 되고 그러다 보면 한두 사람 구하다가 안 되면 이웃집 아이도 보인다. 보개회향(普皆廻向)이다. 이것이 보현행원이잖은가.
불교의 가장 큰 가르침은 자기 깨닫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지만 그런 것은 한 12.5%밖에 안 된다.
자기가 깨닫고 난 뒤에 위타인설(爲他人說)이라. 사구게라도 해설해 주고 강의를 해주는 것이다. 비록 뜻은 모르더라도 해설해 주고 법보장 USB라도 나눠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출가할 때 어떤가?
우리 어릴 때는 한산시, 선관책진(禪關策進), 선가귀감 노란 똥종이에 되어있는 천수경 금강경 얄궂은 똥종이에 맨 책들이 있었다.
한 사 오십 년 전을 한번 생각해 보시라.
그런 책들을 보고 저같은 사람도 선가귀감 선관책진 이런 것을 보다가 출가를 했다. 그 책들을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거기 있는지도 모르지만 여기저기 굴러다니잖는가. 그래서 하나 얻어보다가 한 구절이 좋고 한 구절이 좋고 ‘절에 오려면 하늘을 덮고 땅을 덮을 복이 있어야 된다는데 나도 가면 될랑가’ 싶어서 도망 오기 바빴다. 아무리 누가 말려도 안 된다.
그렇게 누가 찍어놓은 책인지도 모르게 어릴 때 책도 귀했을 건데, 내용도 잘 모르면서 그런 책 하나 이렇게 얻어걸려 보다가 중이 됐잖은가.
지금도 USB를 이렇게 깔아놓으면 우리하고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볼 것이다. 어떤 교회에 잘못 갔다가 교회 잘 다니는 사람이 그걸 한 번 잘못 보고 또 절에 와서 중이 될 수도 있다. 천주교 신부님도 아마 중이 될 것이다. ‘이런 게 있었나’ 이러면서 목사님도 중이 되고, 중 되는 게 아니면 불교공부를 하실 것이다. 진리를 보고 다 찬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법희스님은 몇개 하실 건가?
“100개요.”
100개? 백 개 하시는 분들에 한해서 제가 거기 안 담겨 있는 것 하나를 보너스로 드리겠다. 문수지남도 책 있잖은가. 그 책을 파일 통째로 드리겠다. 그림이 엄청 보기 좋다. 그림도 있고 해설도 있잖은가. 화엄경 그 운율도 내가 다 잡아놨다. 그걸 야무지게 보면 화엄경 전체가 꿰뚫어진다.
그거 내가 23년 동안 썼던 책이다. 23년 동안 새벽마다 일어나 ‘새벽일기’로 쪽쪽 써놨던 것, 그것이 책 한 권인데 그냥 일 이년 걸려 썼겠지 하는데 그게 아니다. 23년 동안 꼭 일기로 썼던 책이다. 그것을 통째로 드리겠다.
그리고 USB 100개씩 신청하시는 분들에 한해서 화엄경 표해과판 80변상도도 다 들어있는 거 있잖은가. 그 책도 한 권씩 내드리겠다. 저번에 소개시켜드렸잖은가. 화엄경 전체 표해 그것도 제가 96년도에 만든 거니까 딱 30년쯤 됐다. 30년 묵었으면 엔간히 익었다. 그걸 통째로 드리겠다.
어일체불소(於一切佛所)에 : 부처님 계신 데
신락심불가괴율의(信樂心不可壞律儀)와 :믿는 마음을 깨뜨릴 수 없는 계율과
어일체보살소(於一切菩薩所)에 :모든 보살에게
기존중공경율의(起尊重恭敬律儀)와 : 존중하고 공정함을 일으키는 계율과
어일체선지식소(於一切善知識所)에 :모든 선지식에게
종불사애락심율의(終不捨愛樂心律儀)와 :사랑하는 마음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계율과
어일일체성문독각(於一切聲聞獨覺)에 : 일체 성문 독각에 대해서는
불생억념심율의(不生憶念心律儀)와 :불생 응념심 계율이라.
쪼잔하게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잘 사는 게 아니구나.
그런 것에 마음을 내지 않는다.
원리일체퇴보살도율의(遠離一切退菩薩道律儀)와 : 모든 보살도에서, 진정한 성인이 가는 길에서 물러감을 멀리 여읜다.
불기일체손해중생심율의(不起一切損害衆生心律儀)와 :그다음에 일곱 번째 중생을 해코지하는 마음, 중생을 손해 보게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계율과
수일체선근(修一切善根)하야: 그러니까 수순이다.
항순중생(恒順衆生) 항순중생 항순중생 거기 보면 눈물 난다.
중생이 뿌리다. 중생이 근간이다.
불보살은 뭐라고 해놨는가?
불보살은 가지요 잎사귀다, 라고 해놨다. 지엽이다.
꽃과 열매와 같다 해놨다. 화과다 라고 해놨다.
불보살은 꽃과 열매이고 뿌리가 없으면 꽃과 열매가 달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중생에게 잘하는 것이 부처님에게 공양올리는 것과 똑같다.
화엄경의 정신은 그렇다. 항순중생, 중생이 모든 것이다, 이렇게 해놨다.
항순중생편에 중생이 없으면 우리가 뭘 못한다고 해놨는가? 성불할 수가 없다.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을 해놓으셨다. 모든 선근을 닦아
개령구경율의(皆令究竟律儀)와 : 끝까지 완벽하게 구경, 완벽하게 구경에 들게 하는 계율이라.
어일체마(於一切魔)에 : 모든 마를
실능항복율의(悉能降伏律儀)와 : 다 항복시키는 계율이라. 어제 교무스님께서 오셔서 어른스님한테 항복중마부 하면서 어디 나오는가 했더니 108 대회참 중에 35번째 나온다. 항복중마부라. 모든 마구니를 항복 받는 것.
항복율의라. 항복받기 전에는 뭐가 있는가? 수행이 있다.
수행 이전에는 뭐가 있는가? 발심(發心) 이해가 있다.
이해 이전에 뭐가 있는가? 믿음 믿음 이전에는 뭐가 있는가? 정리, 정지작업이 있다.
집을 짓기 전에 예를 들자면 집을 짓기 전에 아파트를 짓기전에 재개발을 해야 될 때 뭘 해야 되는가? 모든 사람을 퇴거시키고 정지작업을 해야 된다. 포크레인을 가지고 기존에 있던 건물들을 싹 없애버리고 토지 구획정리를 하고, 기초공사를 하고 관개수로를 놓고 배관을 하고 그럴 것이다.
정지작업 그 정지작업을 우리 불교에서는 수행할 때는 3점차(三漸次)라고 한다. 정지작업을 해놓으면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이 구획정리 되어 대지가 하나하나 조목조목 생겨지잖는가.
그걸 관개지라 한다.
관개지가 되면 농사지을 땅이 하나 생겨지고 집지을 땅이 하나 생긴다.
그걸 바라밀행으로 보면 십지품에서는 보시바라밀은 터를 닦는 것과 같다. 계율바라밀과 인욕 바라밀은 터를 닦은 데서 집에 담장을 둘러친 것과 같다. 이렇게 쭉쭉 표현한다.
화엄경 속에 나오는 이야기다.
요즘 우리의 일상 사례에도 이런 이치를 가지고 현상 사(事) 세상 살아가는 인생을 쳐다보면 모든 사실이 다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요즘은 탄핵정국인데 탄핵 찬성도 있고 반대도 있지만 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
‘반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사람도 아니다’ 그러는데 이 사람도 대한민국 사람이고 저 사람도 대한민국 사람이다.
불교입장에서는 견해가 나눠진 것은 중생이 쪼가리 마음을 쓰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 마음의 파편들을 우리는 심소(心所)라 한다.
마음의 원유 통째 자체를 갖다가 뭐라 하는가? 심왕(心王)이라 한다. 심왕은 유식에서 여덟 가지라 한다.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나식 아뢰야식이다.
구사(俱舍)에서는 심왕을 제6식의 하나로 보지만, 유식(唯識)에서는 여덟 가지라고 한다. 사람의 심왕이 다 일일이 똑같은 아뢰야식과 안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간에 얄궂은 주변 환경들이 끼어들면서 생각의 파편들이 희노애락으로, 선악시비로 갈라진다. 그것을 심소라고 한다.
심왕, 심소가 전부 ‘만법은 유식(唯識)이다’ 이렇게 하면 편하다. 그 두 구절을 쭉 정리한 게 이렇다.
초기 불교에서는 제법(諸法)은 종연생(從緣生)하고 연진법환멸(緣盡法還滅)이라. 제법(諸法)은 종연멸(從緣滅)한다고 하잖는가.
그렇게 이야기하고 대승불교에서는 그걸 더 구체적으로 능가경에서는 기신론에서 토스해서 원효스님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이런 이야기를 한다.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하고 한생각이 일어나니까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심멸즉촉루(心滅卽髑髏)도 불이(不二)다. 한 생각 꺼지니까 해골바가지도 둘이 아니더라.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한다.
기신론이나 능가경의 구절을 그렇게 인용해놨다.
기신론은 능가경의 별신서가 되고 모든 불교 대장경의 총론이라고 하잖는가.
유독 화엄종파에서는 원효스님이나 현수스님이난 화엄종파에서는 기신론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했다. 청량국사마저도 자기 왕복서를 처음 해석하면서 기신론 구절을 딱 가지고 와서 ‘원효스님이 본체 마음의 심체 본각에 대해서’ 저 뒤에 가서는 ‘명진체어만화지역(冥眞體於萬化之域)’ 이라고 할 때 그 대목도 원효스님의 구절을 가지고 인용한다.
하여튼 마를 항복 받는 것은 예경 잘하고 칭찬 잘하고 참회 잘해야 된다. 그다음에 열 가지
어일체바라밀(於一切波羅蜜)에 : 일체 바라밀에
개령만족율의(皆令滿足律儀)가 : 원만하게 만족하게 하는 계율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다. 바라밀을 만족하게 한다. 만행 무궁이다.
약제보살(若諸菩薩)이 :만일 모든 보살들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무상대지율의(則得無上大智律儀)니라 : 무상 대지의 율의를 큰 지혜의 율의를, 위 없는 큰 지혜의 율의를 얻게 되느니라. 법도를 지키면 뭐가 사라지기 시작하는가?
규칙을 지키고 법도를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아만이 사라진다. 한번 해보시기 바란다.
규칙을 잘 지키다 보면 나한테 있던 ‘법대로 해야지 법대로 해야지’ 이러면 아만이 사라지는데 법대로 안 하면 어떤가?
없던 아만도 생기고 자꾸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머트롭게 사는 사람은 아만이 계속되어서 탱천 된다.
호를 탱천이라고 해야 한다.
아만이 계속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런데 법도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순리대로 살면 있던 아만이 쪼르륵 줄어들기 시작한다.
오늘은 요 일곱 번째 대목까지 하고 마치겠다
(7) 等隨順一切衆生廻向
*菩薩의 十種自在*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有十種自在하니 何等이 爲十고 所謂命自在니 於不可說劫에 住壽命故며 心自在니 智慧能入阿僧祗諸三昧故며 資具自在니能以無量莊嚴으로 莊嚴一切世界故며業自在니隨時受報故며受生自在니於一切世界에示現受生故며解自在니於一切世界에見佛充滿故며 願自在니 隨欲隨時하야 於諸刹中에 成正覺故며 神力自在니 示現一切大神變故며 法自在니 示現無邊諸法門故며 智自在니 於念念中에 示現如來十力無畏成正覺故라 是爲十이니 若諸菩薩이 安住此法하면 則得圓滿一切諸佛의 諸波羅蜜과 智慧神力과 菩提自在니라
“불자여,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자재함이 있으니 무엇이 열인가. 이른바 생명에 자재하니 말할 수 없는 겁 동안 목숨이 머무는 연고며, 마음에 자재하니 지혜가 능히 아승지 모든 삼매에 드는 연고이니라. 사용하는 도구에 자재하니 한량없는 장엄거리로 모든 세계를 장엄하는 연고며, 업에 자재하니 때를 따라 과보를 받는 연고며, 태어나는 데 자재하니 모든 세계에서 태어남을 보이는 연고며, 아는 데 자재하니, 모든 세계에서 부처님이 가득함을 보는 연고이니라. 서원에 자재하니 욕망을 따르고 때를 따라 여러 세계에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연고며, 신통한 힘에 자재하니 모든 큰 신통변화를 보이는 연고며, 법에 자재하니, 그지없는 모든 법문을 보이는 연고이니라. 지혜에 자재하니 잠깐잠깐마다 여래의 열 가지 힘과 두려움 없음을 나타내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연고이니, 이것이 열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일체 모든 부처님의 여러 가지 바라밀다와 지혜와 신통한 힘과 보리를 원만케 하는 자재를 얻느니라.”
*
등수순일체중생회향(等隨順一切衆生廻向)
*
등(等) 평등하다 수순 일체 중생 회향이라.
일체중생을 수순해서 중생이 하자는 데 따라가면서 평등하다.
평등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평등이라고 하는 것, 평등수순이라고 하는 것의 제일 대표는 증엄스님의 보천삼무(普天三無)가 있다.
평등하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그분이 아마 생존해 계신 분들 중에서는 제일 기치를 세우신 것 같다.
이 세상에 내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내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도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내가 믿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 믿을 놈 한 놈도 없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너를 용서하지 못하겠다’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가 평등함을 가지다 보니까 평등에 따라오는 말이 뭐겠는가? 자재하다는 말이다. 집착이 없다보니까 자재다.
자재라고 하는 것은 새가 새장에서 탈출해서 훨훨 창공을 여기저기 막힘없이 나는 것이다. 새장에 있고, 동물원에 갇혔다면 무슨 자유가 있나 자재가 있나. 남의 의도대로 졸졸 따라다녀야 되지만 구름처럼 새처럼 어디든지 흘러가는 것, 바람처럼 다닐 수 있다면 그것이 자재 아니겠는가?
이 자재라고 하는 것은 바이러스나 병든 기운이 싹 죽어버리고 새살이 돋아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수행을 하다 보면 그런 기분이 돋아나잖는가. 새살이 돋을 때, 흙이 따까리 떨어져버리고 새싹이 간질간질 돋아나는 거 있잖는가.
그러면 병들었을 때는 자유롭지 못하다가 딱지가 다 나으면 어떤가? 다 나으면 자재롭다.
조금만 상처 있으면 아프고 이렇게 따갑고 하다가도 딱지가 떨어지고 아물면 어떤가?
그러니까 이 정도 등수순해서 집착이 없고 평등하게 남을 대하는 이는 마음의 상처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지 않은가.
우리가 볼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래 되다 보면 나중에 넘어가면 뭐가 되는가?
제8지로 넘어가면 색자재 심자재 그렇게 된다.
근본적으로 자재하려면 뭐부터 빠져야 된다? 아만부터 빠져야 된다. 아만 빠지려면 평등심을 가져야 된다.
“왜 평등심이 안 됩니까?”
아만이 있는데 어떻게 평등심이 되는가.
안에 독극물이 가득 찼는데 아무리 씻어내봤자 이 그릇 자체가 독극물인데 청산가린데 되나? 안 된다.
그래서 기신론에 그렇게 해놨다.
“왜 한마디 들으면 똑같이 실천해야 되는데 저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 됩니까?”
6조는 되는데 왜 나는 안 되냐?
중생의 무명업장이, 각각에 덮힌 후박(厚薄)이 두텁고 얇은 것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다르다.
일심은 똑같을지 모르지만 찌들어버린 바가 다르다. 자업자득이다. 그걸 어떻게 하느냐? 자기가 해결해야 된다. 이렇게 해놨다.
*
보살(菩薩)의 십종자재(十種自在)
*
불자(佛子)야 : 불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 보살마하살이
유십종자재(有十種自在)하니 : 유십종자재하니
하등(何等)이 : 하등이
위십(爲十)고 : 위십고
소위명자재(所謂命自在)니 :이른바 생명에 자재하니
어불가설겁(於不可說劫)에:말할 수 없는 겁동안에
주수명고(住壽命故)며: 목숨에 머무는 연고다.
이 목숨이라는 것은 범부라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성인에 처하더라도 목숨이 또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똑같다. 정주영 씨는 그만큼 돈이 많은데 일찍 돌아가셨잖은가. 의사가 그렇게 많은데 안 죽어야지,돈도 많고 의사도 많은데.
심자재(心自在)니: 마음에 자재하니 심자재라.
명자재 심자재 가장 근본적인 것을 건드려 버렸다.
명자재, 귀명진시방(歸命盡十方) 그렇게 나온다.
마음에 자재하니
지혜능입아승지제삼매고(智慧能入阿僧祗諸三昧故)며 : 지혜가 능입아승지 삼매에 드는 까닭이며
자구자재(資具自在)니 : 사용하는 도구에 자재하니
능이무량장엄(能以無量莊嚴)으로 : 한량없는 장엄거리로
장엄일체세계고(莊嚴一切世界故)며 :모든 장엄을 하는 연고고
업자재(業自在)니 : 업에 자재하니 묶인 곳에서 자유자재하니
수시수보고(隨時受報故)며 : 때에 따라서 과보를 받는 연고다.
그렇게 업에 자재하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즐거운 것이다. 중노릇하면 중노릇이 즐거워야 되고, 공부를 하면 공부가 즐거워야 된다. 운전하면 운전하는 업이 즐거워야 된다. 자기가 하는 업에 대해서 자유자재하다는 것은, 묶인 곳에서 자유자재하는 것이 진짜 자유자재한 것이다.
수생자재(受生自在)니 : 태어나는 데 자재하니
어일체세계(於一切世界)에 : 모든 세계에서
시현수생고(示現受生故)며 : 태어남을 보이는 연고고
해자재(解自在)니 : 아는 데 자재하니
어일체세계(於一切世界)에 :모든 세계에
견불충만고(見佛充滿故)며 :부처님이 가득함을 보는 연고고
원자재(願自在)니 :소원에 자재하니
수욕수시(隨欲隨時)하야 :욕망을 따르고 때를 따라서
어제찰중(於諸刹中)에 : 여러 세계에서
성정각고(成正覺故)며: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연고다. 모든 게 일심이지만 그 인연을 따라가는 게 여기서 원자재, 해자재, 수생자재, 심자재, 명자재, 자구자재 이름이 10가지로 다 다르다.
신력자재(神力自在)니 : 신력 자재, 신통한 힘의 자재하니
시현일체대신변고(示現一切大神變故)며 :모든 큰 신통한 변화를 보이는 연고고
법자재(法自在)니 : 법자재, 법자재나 심자재나 전부 다 어떨 것 같은가? 이름이 다 인연에 따라서 다르게 나오지만 전부 일심(一心)일 뿐이다.
풀이만 다르지 다 일심일 뿐이라.
신통한 힘에 자재하니 모든 큰 신통변화를 보이는 연고고, 법에 자재하니
시현무변제법문고(示現無邊諸法門故)며: 그지없는 법문을 보이는 연고라
지자재(智自在)니 : 지혜에 자재하니
어염념중(於念念中)에 : 잠깐 잠깐마다 염념 중에
시현여래십력무외성정각고(示現如來十力無畏成正覺故)라:여래 십력의 힘과 두려움 없음을 나타내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연고이니
시위십(是爲十)이니 :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약제보살(若諸菩薩)이 : 만일 보살들이
안주차법(安住此法)하면 : 이 법에 편안히 머물면
즉득원만일체제불(則得圓滿一切諸佛)의 : 모든 부처님의
제바라밀(諸波羅蜜)과 : 여러 가지 바라밀다와
지혜신력(智慧神力)과 : 지혜와 신통한 힘과 지혜신력과
보리자재(菩提自在)니라 : 보리를 원만하게 하는 자재를 얻느니라 오늘은 거기까지 하겠다.
천 번 만 번 변해도 우리는 뭐뿐이다? 일심뿐이다, 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오늘 강의를 마치겠다.
오늘 입춘날 봄설날 택인데 먼 길 오신다고 상당히 근념하셨다.
(죽비소리)
하강례
만나기 어려운 선지식
큰스님 : 콩나물 키워 봤어요?
보살님 : 예? 예, 예예.
큰스님 : 물이 어떻게 샙디까, 담겨있습니까?
보살님 : 새야지예.
큰스님 : 새야 콩나물이 살지
보살님 : 예.
큰스님 : 담겨 있으면 어떻게 된다?
보살님 : 썩어버리지예.
큰스님 : 썩어버리지?
보살님 : 예.
큰스님 : 근데 그게 왜 머리에 남아 있길 바라?
보살님 : 아, 그래예?
(일동 웃음)
큰스님 : 머리에 남아 있으면 안 돼. 한 번 스치고 지나가야 돼. 새야 돼. 그리고 새로운 게 또 들어와야 돼. 또 들어와서 계속 콩나물을 키워야 돼. 그런 이치라. 무비스님 콩나물 법문이 얼마나 유명한대.
*
2월 25일, 인터넷 다음카페 염화실 <염화실 그림자>방에 영산월님이 ‘화엄전. 무비스님 콩나물 법문’이라는 짧은 동영상을 올려주셨다. 보살님들이 큰스님을 친견하러 갔을 때, 어느 보살님이 ‘들어도 자꾸만 잊어버린다’고 하소연을 하신 모양이었다.
콩나물 법문을 많이 들었지만 ‘그리고 새로운 게 또 들어와야 돼’ 이 말씀은 처음 같았다. ‘계속 콩나물을 키워야 돼’ 이 말씀에 밑줄을 긋고 싶었다.
아침 8시 유튜브 화엄법회 시간에도 매일매일 받아쓰고 싶은 말씀들이 넘쳐난다. 선재동자가 제5 무진공덕장회향의 바수밀다녀를 만날 때는 “바수밀다녀를 한 번만 끌어안아도 전부 복덕을 증장한다, 이 대목이 재미있었는지 탄허스님이 여러 번 말씀하셨어요.” 하고 웃음을 터뜨리셔서, 바수밀다편이 더욱 매력 있게 느껴졌고, 제7수순일체중생회향 선지식인 관자재보살을 설하실 때는 “다시 또 서원하되 모든 중생이 만약 저를 생각하거나, 만약 저의 이름을 일컫거나, 만약 저의 몸을 보거나 하면 다 모든 공포를 면하기를 서원합니다.” 하는 관재재보살의 서원을 두 번씩 읽어주셔서 눈물을 쏙 빼내셨다. 관세음보살님을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났다.
24일 관음재일법회 때는 용학스님이 범어사 보제루에서 법문하시다가 ‘남순동자와 선재동자가 같은 이냐 다른 이냐’ 물었는데 어느 분이 다른 분이라고 했다가 쫓겨났다고 하시면서 큰스님이 그 이야기를 전하며 너무나 즐겁게 웃으셨다. 그 자리에 있던 분들은 아마 모두가 남순동자와 선재동자가 같은 이라는 것을 잊지 못할 거라고 하셨다. 이제부터는 시간을 가지고 관음재일 법문을 잘 찾아서 들어봐야겠다는 결심이 새로 생겨났다. 24일에는 수원 수원사라는 포교당에서 5월부터 3년간 화엄경 독송회를 하는데 증명법사로서 매법회 때마다 나올 큰스님의 인트로 법문을 녹음하러 오셔서 목소리를 아껴야 하는 날이라고 하셨다. 마침 정취보살편을 읽으셔서 법문이 짧게 끝났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부처님의 가피를 또 느꼈다. 2월 20일 화엄경 제 68권 서문 끝에 몇 분간의 법문을 녹취해 둔 것이 있어서 여기 기록한다.
제일 뒤에 제가 살피면서 갑니다. 마음 놓고 가십시다.
이와 같은 선지식은 곧 우리들이 읽고 있는 이 화엄경입니다.
여러분들 화엄경 만난 거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시고 정말 다행 중에 다행으로 생각하시고 백천만 겁에 만나기 어려운 것을 만났다,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세상을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다른 경전과 철학 서적들 등등 동서고금의 철학 서적들 성인의 가르침들 다 섭렵해 보고 내용을 알면 알수록, 화엄경만한 것이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 화엄경을 그냥 설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그 깨달음의 내용을 그대로 화반탁출 해서 조금도 남기지 않고 떡을 쪄서 소반째, 칼 대고 다른 쟁반에다가 나누고 이렇게 하지 않고 소반째 다 드러내서 갖다 바치는 식으로 당신의 깨달음의 내용을 다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걸 화반탁출이라 그래요.
부처님의 깨달음은 인류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고 그 깨달음의 내용을 화반탁출하여 조금도 남김없이 다 펼쳐 보이신 화엄경은 인류가 남기신 최대의 걸작이다, 그 깨달음을 조금도 남김없이 다 설명하신 이 화엄경은 인류가 남기신 최고의 걸작이다, 이 이상 가는 위대한 작품은 없다, 이 이상 가는 위대한 가르침은 없다, 이 이상 가는 위대한 진리의 말씀은 없다, 이 이상 가는 성인의 가르침은 없다, 온갖 성인들 현인들 철인들 심리학자들 등등 훌륭한 사람이 많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전부 머리를 짜내고 짜내서 그 사고에 의해서 생각에 의해서 이리 정리하고 저리 정리해서 나온 것입니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시고 어느날 보리수 나무 밑에서 아침에 떠오르는 샛별을 보고 문득 이 세상의 모든 인생사 세상사 진리를 그대로 다 깨달으신, 그 깨달음에 의해서 설명되어진 것입니다.
처음부터 재료가 달라요. 구리로 무슨 불상을 만들었다든지 비녀나 여러 가지를 도구를 만들었다 하는 것하고 순금을 가지고 불상을 만든 것하고는 재료가 다릅니다.
그렇게 아셔야 돼요.
우리 불자들이 이런 화엄경을 모시고 살면서 그런 데 대한 확실한 소신과 이해가 없는 게 참 안타까워요. 제가 왜 화엄경 화엄경 하겠습니까. 전들 동서고금의 그런 철학서, 온갖 심리학서적을 안 봤겠습니까.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불경하고 다른 점이, 불경은 처음부터 출발이 깨닫고 나서 설하신 내용입니다.
중생들이 머리가 좋고 마음이 아주 뛰어난 분들이지만 그 머리를 짜내고 짜내고 생각을 짜내고 짜내서 정리한 말씀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제발 ‘그 차이 있는 것 좀’ 아셔야 돼요.
석가모니 부처님도 보리수 아래서 시성정각, 처음에 화엄경이 뭐라고?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이루었다’ 그전에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전에도 숱한 사람들 숱한 선지식들 만나서 배울 거 다 배우고 알 것 다 알고 했는데 그거는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 만 분의 일 정도 되는 것이었고, 깨닫고 나서 시성정각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깨달음의 내용을 화반탁출(和盘托出) 조금도 남김없이 아끼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다 펼쳐내 보이겠습니다’ 하고서 설하신 경전이 화엄경입니다.
제발 그것 좀 부디, 좀 정말 정확하게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거 뭐 제가 덕이 없어가지고 내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습니다. 말한 사람이 아무리 진실한 말을 하더라도 덕이 있어야 그 진실한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덕이 없으면 그걸 제대로 받아들이려고 안 해요. 그런 점도 있습니다만 또 꼭 저에게만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죠.
본인들 각자가 또 거기에 대한 이해가 문제 있을 수가 있고 여러 가지, 그것을 따지기로 하면 이야기거리가 많은데, 사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사람들끼리는 이런 시성정각의 내용, 깨달음을 그전에도 알았다 이거예요. 그런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제사 비로소’ 35살이 돼가지고 ‘이제사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시성정각(始成正覺)이라고, 이런 표현을 했어요,
그전에도 알았어요. 알아도 좀 보통 안 것이 아닙니다. 정말 많이 알았어요
많은 사람들하고 공부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35살에 이르렀는데 그때사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전에도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지만, 내로라라고 했지만 그때 것은 엉터리였다, 보통 마음에서 그런 표현을 하셨겠습니까? 글자 한 자 한 자 그냥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다 담아 놓은 것이 화엄경입니다. 그래서 저는 줄기차게 말합니다.
이 말세에는 특히나 사람을 선지식이라 생각하면 그건 100% 사기당하는 것이고, 착각하는 것이고, 잘못 아는 것입니다. 화엄경 같은 선지식이 없습니다. 제발 그렇게 이해하십시오.
이 말세에는 사람을 선지식으로 생각하면 그건 백발백중 사기당하는 것이고, 잘못 아는 것이고, 본인이 잘못 알고 있거나 아니면 고의적으로 사기를 치거나 그런 거예요. 저 눈에는 훤히 보입니다. 그렇지만 잘 아는 사람들에게 그걸 지적해서, 본인이 잘못 알고 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그래도 지적해 주면 이해를 하겠지만, 고의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도 모르고 그렇게 하는 거 그걸 어떻게 합니까.
선지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이게 현실 문제입니다.
아주 시급하고 아주 현실적인 문제예요.
오늘은 53선지식 중에서 바수밀다녀 26번째 선지식 바수밀다녀라고 하는 선지식을 친견하러 갑니다. 선재동자와 그리고 많은 오백동자 오백동녀 온갖 오천 성문 우바새 우바이 할 것 없이 그렇게 많은 부대들이 선지식을 친견하러 가고 그 뒤에 2025년 이 시대에 와서 우리가 또 그 뒤를 쫄쫄쫄쫄 선재동자 팀들 그 뒤를 따라서 갑니다.
그 앞에는 먼저 오셨으니까 앞장 서서 가야죠. 우리는 뒤에 출발했으니까 뒤에 따라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 부대들 많습니다. 그 앞에 또 2700년이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부대들이 늘어났는지 막 까마득하게 모래수 만치 많고 많은 이들을 우리 화엄행자들은 쭉 따라가고, 오늘은 165명이나 되는 우리 화엄행자들이 이 시간에 잊지 않고 동참해 주셔서 이렇게 아주 큰 대부대가 되어가지고 저기 우주 밤하늘에 많고 많은 은하수처럼, 은하수 별들처럼 그렇게 반짝이면서 선재동자 팀의 뒤를 따라서 갑니다. 이렇게 선지식을 친견하러 우리가 한 부대가 되어서 갑니다. 그 맨 뒤에 제가 있습니다. 혹시 뒤쳐진 분들, 혹시 가다가 발이 탈 난 분, 다리가 탈 난 분, 무슨 문제가 생긴 분이 있을까 살피면서, 제일 뒤에 제가 살피면서 갑니다. 마음 놓고 가십시다.
-無比스님, 2025년 2월 207일, 유튜브 염화실TV 중에서-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그래도 지적해 주면 이해를 하겠지만’ 이 부분을 잘못 녹취했나 싶어서 여러 번 들었다.
전에 학무거사님께 무비스님에 대해서 뭐라고 표현하실 수 있는가 여쭤봤더니 ‘한마디로 통방학인 남행강사지요’라고 하셨었다.
2월 7일 큰스님은 무염족왕편을 공부할 때, ‘사람은 달라집니다. 그 희망으로 교육을 하는 거에요. 부처님도 관세음보살도 지장보살도 그랬습니다.’라고 하셨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교육에 대한 믿음이 바로 큰스님의 무기라는 것을 다시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 무기는 빛으로 변한 것만 같다.
어느 때든, 누구든, 심지어 매일 아침 듣는 유튜브 법회에서도, 그 빛을 받으면 걱정 근심이 사라지고 세상이 온통 봄처럼 싱그럽게 피어난다. 그건 바로 ‘화엄경의 빛’이라고 큰스님께서 일러 주실 것만 같다.
아름다운 빛
날마다 화엄(華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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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름다운 빛...참 좋습니다 고맙습니다 _()()()_
_()()()_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나무대방광불화엄경... 고맙습니다. _()()()_
" 始成正覺... 佛經은 처음부터 출발이 깨닫고 나서 설하신 내용입니다. "
...받아들이는 사람도 복덕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스승님(사람 선지식)의 허물이 아닙니다.
혜거스님께 공부할 때, 종종 통방학인 말씀을 하셨는데요. 나중에서야 그 분이 무비스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