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세계최강자인가."
서양의 철없는 바둑꾼들은 동양의 프로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의 불씨를 던진 사람은 중국인 녜웨이핑 9단이었다. 일본은 도쿠가와(德川) 막부 이래로 세계 바둑의 맹주였고, 문부성의 후원 아래 세계 곳곳에 바둑을 전파하면서 "이것은 일본의 독특한 문화"라고 선전해 왔다.
그러나 87년 무렵 서양 바둑꾼의 컴퓨터엔 中 · 日 슈퍼대결에서 파죽의 11연승을 거둔 녜웨이핑 9단이 '랭킹 1위'로 올라 있었다. 일본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은 진검승부가 아니다." 이리하여 中 · 日의 자존심은 내연(內燃)하기 시작했다. 중국현대바둑은 1946년 공산혁명정부 수립 직후 부총리 진의(陳毅)가 "바둑 종주국의 위치를 되찾아야 한다"며 초야의 고수들을 불러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첫발을 뗐다. 그 후 40년, 문화혁명의 홍역 속에서도 발군의 기재(棋才)인 녜웨이핑 9단, 마샤오춘(馬曉春) 9단 등이 출현했다. "바둑은 중국이 만든 것이지요." 중국인들은 웃는 얼굴로 이렇게 속삭였다. "일본이 자랑하는 도샤쿠, 슈사쿠보다 훨씬 이전에 중국에는 왕적신(王積薪), 가현(賈玄), 이중은(李重恩) 등 전석적인 고수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대(古代) 바둑 3걸의 행적을 회상하며 속으로 크게 부르짖었다. "陳 부총리의 꿈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누가 최강자인가를 가릴 때가 됐다." 상하이(上海) 출신의 대만 재별 잉창치(應昌期) 씨가 여기에 화답하고 나섰다. 70 노구의 應씨는 40여 년간이나 바둑룰을 연구해 온 집념가. 87년 應씨는 총상금 미화(美貨) 1백만달러, 우승상금 40만 달러라는 파격적인 규모로 세계대회를 창설, 88년 베이징에서 첫 대회를 연다고 발표했다. 그는 곧 자신이 선정한 세계 16강에 초청장을 발송했다. <중국> 녜웨이핑, 류샤오광(劉小光), 마샤오춘(馬曉春), 장주주(江鑄久) <일본> 후지사와 슈코(藤澤秀行), 다케미야 마사키(武官正樹), 고바야시 고이치(小林光一) <한국> 曺薰鉉, 趙治勳 <호주> 우쑹성(吳淞笙) <미주> 마이클 레드먼드 일본은 깜짝 놀랐다. 일본의 권위를 위협하는 세계대회 따위는 하고 싶지도 않지만 꼭 해야 한다면 일본이 먼저 해야 했다. 그들은 순발력 있게 후지쓰배 세계대회를 만들어 應씨배 보다 몇 달 빠른 88년 4월 도쿙서 1회대회를 개최한다고 선언했다.
한국은 다른 이유로 소란스러워졌다. 초청된 16강은 중국인이 8명, 일본인이 5명, 한국인 2명, 미국인 1명, 소속기원별로는 중국기원 4명, 일본기원은 레드먼드 5단과 조치훈까지 10명, 한국기원 1명, 호주협회 4명. 프로기사수가 1백 명이 넘는 한국바둑이 바둑 후진국 미국이나 호주와 동일하게 취급당했다. 모욕을 느낀 한국은 분개했고 출전을 거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주최측은 못들은 체했다. 본질적으로 세계대회는 일본바둑에 대한 중국의 도전이었고, 한국은 들러리였다.
최초의 세계대회, 그러니까 제1회 후지쓰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는 88년 4월 2일 도쿄의 일본기원에서 열렸다. 멀리서 서로 노려보고만 있던 세계 16강이 드디어 일본인들이 말하는 '진검(眞劍)승부'로 맞붙었다. 한국은 조훈현 9단, 서봉수 9단, 그리고 호조의 장두진 6단이 출전했다. 그러나 張 6단은 중국의 마샤오춘 9단에게 지고, 徐 9단은 린하이펑(林海峯) 9단에게 패해 1회전에서 탈락했다.
믿었던 曺 9단도 일본최강 고바야시 9단에게 첫 판에 꺾여 버렸다. '한국, 1회전에서 전멸'의소식은 행여나 했던 국내팬들의 가슴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이 한번의 완패로 한국바둑은 시골의 낙방서생 신세가 됐다. 호화스런 중일(中日)의 바둑파티를 훔쳐본 지 어언 10년, 이제는 우리도 한번 일어서 보자며 푸른 꿈을 꾸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바둑이 모욕당했다며 應씨배 불참을 외쳤던 프로기사들도 멋쩍은 듯 고개만 저었다. 후지쯔배 4강엔 이상적인 정법을 추구한다는 고바야시 9단, 화점혁명을 이끈 우주류 다케미야 9단, 대륙적 기풍의 이중허리 林 9단, 중국의 별 녜웨이핑 9단이 올랐다. 우승은 놀랍게도 다케미야가 차지했다. 한때 '어리석은 다케미야'라고 불렀던 이 환상의 추종자가 모험적이고 로맨틱하기 이를 데 없는 대세력 바둑으로 맨 먼저 세계를 제패했던 것이다. 일본바둑꾼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고 다케미야는 점잖게 화답했다. "앞으로는 내 바둑을 우주류라 부르지 말고 자연류라 불러달라." 자신이 두는 중앙바둑은 고집이나 파격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고, 그게 바로 바둑의 본질이라는 엄청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다케미야가 9월 3일의 결승전에서 우승컵을 거머쥐기 직전 베이징엔 다시 세계의 고수들이 모여들었다. 대규모 상금이 걸린 應씨배가 88년 8월 21일 개막된 것이다. 인민대회당, 마오쩌둥(毛澤東) 이래로 중국 정권이 수뇌부가 서열대로 앉아 국가적 회의를 열어 왔던 이 거대한 홀에서 전야제와 대진 추첨이 있었다.
상석엔 우칭위안 9단, 應씨, 녜웨이핑 9단, 그리고 중국의 고위관리, 두번째 자리에 중국팀, 그 다음에 일본과 한국팀이 배치됐다. 중일전쟁 직전 14세의 우칭위안은 닳고닳은 슈샤쿠의 대국집 한 권을 들고 단신 일본에 건너가 불과 10여 년 만에 4백년 일본바둑을 완전히 쓸어버렸다. 그 10단이 흰 눈썹의 청수한 모습으로 5천년 중국바둑의 상징인 양 중앙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녜웨이핑은 이제 吳 9단의 뒤를 이어 중국에 바둑종주국 자리를 회수해 올 영웅이자 전사였다.
중국은 예의에 어긋나는 자리배치를 통해 그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중국계 8명이 먼저 심지를 뽑았다. 21일의 1회전은 이리하여 중국계와 非중국계의 대결이 됐다. 전야제에서 曺 9단은 말했다. "고바야시와 다시 대결하면 설욕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 누구도 조훈현을 우승후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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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성원을 기대합니다...
첫댓글 스크랩한 글은 수정할 수 없다고 하는군요. 오타가 눈에 띄지만 그대로 놔둘 수 밖에 없네요. 박진감 넘치는, 우리들의 강호에 잘 어울리는 글이라고 생각되어 스크랩해왔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새삼 그당시의 긴장과 환희가 살아납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