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기론 호주 원주민 애버리진은 현재로부터 약 5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진 사이에 동남아로부터 배를 타고 호주로 도착하였다. 그 후 2~4만 년간 간빙기가 오면서 다른 대륙들과 동떨어져 살았다고 알고 있으나 Dr Irina Pugach, of the Max Planck Institute for Evolutionary Anthropology in Leipzig, Germany 가 호주 원주민의 DNA를 조사한 결과 11%가 인도인의 DNA이며,원주민의 호주 이주는 가장 빠른것은 45,000년전이며 대규모 이주는 쿡 선장이 호주를 발견하기 4,230년전이며 그때 호주 들개도 같이 호주로 이주하였다고 밝혓읍니다, 그러므로 뉴질랜드의 마호이족과는 전혀 다른 종족인 셈입니다.
이 나라의 역사는 17세기에 네덜란드의 모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자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신 네덜란드’라 명명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들에게 발견될 당시 약 100만명의 애버리진과 300여개의 부족국가가 있었고 이들 사이에서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개의 방언이 사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2차 대전 당시 노던 테리토리에서 참호를 파던 군인등에 의해 발견된 코인이 900년경 지금의 아프리카 탄자니아 지방 왕국의 것으로 밝혀져 네덜란드 보다도 아프리카 국가가 더 빨리 호주 대륙을 발견한것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죄수 폭증과 미국 독립혁명(1776년)으로 뉴사우스웨일즈주에 새로운 유형(流刑)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1788년 1월 26일,당시 영국의 왕은 조지 3세는 아서 필립에게 명하여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탑승한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식량의 자급 태세를 갖추는 일이 당초의 급선무였으나, 미지의 풍토에서 농업 경험자가 적었던 관계로 개발은 진척되지 않았다. 마지막 죄수 호송인 1868년까지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으며 그래서 호주 영어 발음이 지금도 영국에서 가장 하류계층의 사람들이 사용한다 하여 천박시 대하는 코크니 발음인것 이며 1790년대 부터 자유 정착민이 이주하기 시작하엿으나 태생이 죄수 출신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원주민인 마호이족과 평화롭게 지내던 뉴질랜드 정착민과는 틀리게 원주민들을 학살하엿으며 1860년대에는 태스마니아 섬 원주민들을 전원 학살하기도 하엿으며 1868년-1968년까지 거의 다 학살하고 원주민 약 4만 명이 특별보호구역에 갇혀 있으면서 빈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 때문에 1970년대 까지 백호주의를 부르짖다 결국 원주민 학살에 대해 수상이 "SORRY"라는 한마디로 사과하고 동남아 이민자도 받기 시작했다
100만 명의 원주민이 300년 후에 4만 명으로 감소됐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 그때부터 또 다시 100년이 지난 후 2007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의하면 원주민 애버리진의 총수는 약 45만 명으로 밝혀졌다.
2007년 현재 영국계 백인의 나라인 호주의 총인구는 2천 2백만 명으로 추산한다. 이 중에 애버리진 원주민의 수는 2.2%에 불과하다.





1800년대 초 항해지도



1800년대 원주민들






















원주민 학살에 대한 원주민의 서방세계에 전하는 메세지




원주민 학살을 위한 영국군 주둔



강제 수용소에 갇힌 원주민 아이들

1860년대 최후의 태스마니아섬 원주민

원주민의 언어







호주 원주민과 뉴질랜드 원주민




Aboriginal이라고도 함.
오스트레일리아와 태즈메이니아에 사는 토착 인종.
18세기 후반 유럽의 식민지 개척기에는 인구 30만 명에 약 500개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부족마다 공인된 영토와 독자적인 언어 또는 방언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인들과 접촉한 결과 전통문화의 대부분이 심한 변화를 겪었다.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2만 5,000~4만 년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람이 살아왔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한 차례 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지금은 물에 잠긴 사훌 대륙붕을 통해 왔거나, 뗏목이나 카누를 타고 수로를 건너온 것으로 보인다(→ 색인 : 인구이동). 이주해오던 시기에 딩고라는 종류의 들개도 따라 들어왔다. 케이프요크 반도와 아른헴 북동지역에는 원어 그대로는 아니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말을 공통어로 쓰는 지역이 아직도 있다. 이들은 농사를 짓지도 못했고 목축에도 적합한 짐승이 없었기 때문에 식량 채집과 사냥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신선한 물이 부족하여 활동에 제약을 받았으며, 인구가 늘자 일부는 다른 물길을 찾아 떠나기도 했다.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진로'와 '통상로'를 보면 이주 방향을 알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지역 단위의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들 집단은 식량이 남아 있는 한 1년 내내 함께 생활했다. 부계혈통을 따라 이루어진 집단의 영토에는 조상들이 처음 자리잡았던 수원지(水源池) 주변에 밀집되어 있었으며, 현지 부족민들은 조상들의 혼이 처음 정착한 이후 계속 환생을 기다리며 그곳에 머물러 있다고 믿었다. 2번째로 정착한 집단의 조상들과 그 후손들은 공간·시간·풍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처음 정착한 집단과 그 후손들의 친족이 되었다. 모든 사람을 친족으로 분류하는 체계를 통해 간접적 친족관계, 명백한 세대(世代) 기준, 씨족 구성원 자격, 의식을 통한 결연(結緣) 등에 바탕을 둔 상호행동양식이 규정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친족은 2, 4, 8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들은 서로 연관된 결혼 및 상속 관습을 갖고 있었으며, 보통 족외혼 규칙에 따른 결혼을 했다. 이러한 친족분류체계는 현대에도 전통적인 부족집단 사이에 남아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지역에 따라 1년에 계절을 5~8개로 나누었는데, 보통 예상되는 기후조건과 그 철에 쉽게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종류에 따라 계절을 분류했다. 자연물과 비를 사회·도덕 질서의 일부로 보고, 의식을 통해 이들과 교통함으로써 되풀이되는 가뭄과 식량 부족을 이겨냈다. 전통적인 부족에 속하는 각 집단의 구성원은 사람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자연물도 포함하고 있었으며, 모든 것이 다 친족관계에 있었다. 집단(씨족)마다 자연물 가운데 하나를 토템으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남자들은 하나 이상의 자연물과 조상 전래의 영웅들과 관련된 신화·의례·장소·상징들을 관리했다. 의례를 통해 과거의 창조사를 재현했으며, 이러한 의례가 자연물과 사람의 생명이 안전함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신화와 의식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삶의 영속을 의미하는 꿈의 시대 (Altjira)로 이루어져 있었다(→ 색인 : 꿈의 시대). 노인들만이 꿈의 시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례 및 사회적 행동에 관한 문제에 권위를 가질 수 있었다.
갓난아이와 노인의 죽음, 전쟁으로 인한 죽음을 제외하고 죽음의 원인은 전통적으로 마법의 탓이라 여겼으며, '현자'인 주술사만이 '부정'을 몰아내고 자신감과 삶의 의지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심령 및 심리 현상에 능통했던 주술사는 죽은 자와 토템 신, 하늘 세계와 교통함으로써 단련되었다. 만약 환자를 치료하지 못하게 되면 그것은 주술사를 너무 늦게 불렀거나, 마법의 힘이 너무 강했거나, 환자가 죽을 운명이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원주민의 신화와 의식은 미술·시·음악·춤을 통해 나타났다. 신화는 표현이 시적이고 운율적이며, 가사와 곡조가 복잡한 노래로 되어 있다. 신성한 물건과 부메랑 같은 무기에 신화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새겼으며, 노래 속에서도 신화를 주제로 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의식을 행할 때 배우의 몸에 그림을 그리고, 나무껍질·땅·돌 위에 신화에 관한 그림을 그리거나 새기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 그리기와 조각은 그 자체가 의식이었다.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서도 그림을 그렸으며, 사교적 축제나 비밀 장소에서 모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지역별로 미술과 음악 분야의 기능을 전수하는 곳이 있었으며, 도구와 무기의 형태와 장식도 지역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또한 중요한 종교의식의 내용과 절차 역시 지역마다 달랐다.
19세기의 피비린내 나는 '무력에 의한 화해'에서 현재의 도시화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과의 접촉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원주민의 분열을 막기 위해 1920년대말에서 1930년대초에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보호구역을 설치했다. 원주민들은 누구나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와 접촉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은 모두 다 오스트레일리아 시민이 되었다. 최근 몇 십 년 동안 남부지역에서는 자신들의 주장을 확실히 관철시키려고 노력하는 일부 원주민 집단이 등장했다. 그들은 현대 오스트레일리아 사회에 동화되기보다는 원주민 자신들의 통합을 주장하면서 다른 오스트레일리아인들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상징으로 스스로 정체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북부지역에서는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산개발에 대한 보상(단순한 사용료가 아닌)과 배당을 포함한 토지의 사유와 관리 문제에 초점을 둔 움직임이 꾸준히 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