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 브라흐마 스님 '술취한 코끼리 길들이기' 중에서]
두려움은 고통의 가장 큰 원인이다.
고통을 더 아프게 하는 것이 바로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벗어던지면 단지 아프다는 감각만이 남는다.
1970년대 중반, 태국 북동부 오지의 숲 속 절에서 생활할 때, 나는 심한 치통으로 말할 수 없이 고통받고 있었다.
근처에 치과 병원은 고사하고, 전화도 전기도 없었다. 심지어 약장에는 아스피린이나 해열진통제 한 알 없었다.
숲 속 수행승은 무조건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병이라는 것이 대개 그렇듯이, 밤이 되자 치통은 훨씬 더 심해졌다.
나 자신은 스스로를 꽤 강인한 수행자로 자부하고 있었지만, 그 치통은 내가 얼마나 강한가를 시험하고 있었다.
얼굴 한쪽이 통증으로 마비가 될 정도였다. 그 나이 먹도록 그런 심한 치통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 이후로도 그런 치통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나는 호흡 명상을 통해 그 아픔을 이겨 내고자 했다.
모기에 물어뜯길 때 호흡에 집중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어떤 때는 온몸에 40군데가 넘게 물린 적도 있었지만, 한 가지 감각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것을 잊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 치통은 단순한 통증과는 달랐다. 2,3초 동안은 호흡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금세 감각의 문을 걷어차고 뛰어들어 왔다.
하는 수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걷기 명상을 시도했지만 이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걷기 명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숫제 '달리기 명상'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천천히 걸을 수가 없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달려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 자리에서 뺑뺑이를 돌 뿐이었다.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나는 다시 내 오두막으로 달려가 이번에는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염불을 외기 시작했다.
불교에서는 염불에 초자연적인 힘이 실려 있다고 믿는다.
염불은 행운을 가져다주고, 위험한 동물들을 물리쳐주며, 병과 고통을 낫게 해준다는 것이다.
내게는 그런 믿음이 부족했다. 나는 과학도의 길을 걸었으며, 주문이나 염불이 마술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사기꾼들의 수법이라고 여겼다.
그러한 나의 이성적인 판단과는 상관없이 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염불을 시작했다.
그만큼 절박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곧 중단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염불을 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예 소리를 지르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늦은 시각이라서 다른 수행자들의 잠을 깨우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 식으로 계속 염불소리를 내지르다가는 수십 리 밖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깨웠을 것이다.
통증이 극심해 도저히 정상적으로 염불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고향 집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 전혀 문명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은 까마득한 오지의 밀림 속에서
아무 의지할 대상도 없이 견딜 수 없는 통증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내가 아는 온갖 방법을, 말 그대로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어떤 것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상황이 그러했다.
그처럼 완전한 절망 속, 어느 한순간 환하게 지혜의 문이 열렸다.
일상적인 삶에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 문이었다. 그 순간 그러한 문이 내 앞에서 열렸으며,
나는 그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솔직히 말해,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나는 하나의 단어를 기억해냈다.
'내려놓으라..'
전에도 수없이 그 단어를 들었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것의 의미를 설명해 주기까지 했었다.
내 자신이 그 단어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고 여겼었다. 그것이 바로 '착각은 자유'라는 것이다.
끔찍한 치통을 잊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시도할 마음 자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생애 최초로 진정한 '내려놓기'를 시도했다. 말 그대로 완전히 내려놓았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에 나 자신도 놀랐다.
그 고통스럽던 통증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크나큰 환희심이 밀려왔다. 환희의 물결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마음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감미롭게, 깊은 평화의 상태에 자리 잡았다.
이제는 아무 노력 없이도 쉽게 명상이 이루어졌다.
이른 새벽 두세 시간 동안 명상을 한 뒤 나는 자리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했다.
실로 달콤하고 평화로운 잠이었다.
절에서의 일과를 위해 눈을 떴을때, 나는 치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전날 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가 내려놓은 것은 치통의 아픔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그 아픔을 받아들였으며, 그것을 껴안았고,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것은 떠나갔다.
내 이야기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몹시 아플 때 이 방법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찾아와 불평을 하면서, 자신들의 고통에 비하면 내 치통이 별거 아니었던 모양이라고 지적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고통은 개인적인 것이며,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그 방법이 효과가 없었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나는 세 명의 수행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첫 번째 수행자가 '내려놓기' 명상을 시도한다.
'내려놓으라..'
그는 자기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하고 기다린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는 다시 말한다.
'내려놓으라..'
그런 식으로 그는 자신에게 계속 내려놓으라고 강요한다.
우스꽝스럽게 보이겠지만 우리 모두가 하고 있는 방식이 그것이다.
엉뚱한 것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바로 '내려놓으려는' 그 마음이다.
우리 안에서 사사건건 통제하려고 드는 그 감독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그 감독관이 누구인지 잘 안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우리 안에서 감독관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두 번째 수행자는 고통이 밀려올 때 이 충고를 기억하고 그 감독관을 내려놓는다.
그는 고통과 마주앉아서 자신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고 상상한다.
10분이 지나서도 고통에 아무런 변화가 없을 때 그는 마음을 내려놓아도 별 효과가 없다고 불평한다.
나는 그에게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방법임을 일깨운다.
두 번째 수행자는 고통과 협상을 시도한 것이다.
'내가 10분 동안 마음을 내려놓을 테니, 너 고통은 사라져 줘야 한다. 알겠지?'
그것은 고통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제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세 번째 수행자는 고통이 찾아올 때 그 고통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
'고통이여, 네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내 마음의 문은 너에게 언제나 열려 있다.
안으로 들어오라.'
이 세 번째 수행자는 고통이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머물도록 허락한다.
설령 평생 머물러 있을지라도!
그리고 그것이 더 나빠지더라도 거부하지 않는다. 고통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는 고통을 통제하려는 마음을 버렸다. 그것이 바로 내려놓는 것이다.
고통이 머물러 있든 떠나든, 그에게는 아무 차이가 없다.
오직 이때만이 고통은 사라진다.
☞ 저는 너무 성격이 못된 거 같아요 (방하착의 의미) <선업스님>
첫댓글 몸이 아플 때 우리는 생각(후회,자책,앞일 등), 감정(짜증,불안,두려움 등), 느낌(통증), 그리고 마음(보다 근본적인..).. 이런 것들이 뒤섞여 있는 상태로 됩니다. 이때 수행자라면, 수행의 힘으로.. 생각을 멈추고, 감정과 느낌으로부터 안전하게 거리를 두고, 오직 순일한 마음상태와 하나되는 경지, 최소한 무게중심을 거기에 두는 경지를 맛볼 수 있다면, 수행은 엄청난 진전이 있을 것이며, 통증만한 스승이 없음에 감사하게 될 겁니다. 몸이 아프고 통증이 심할수록.. 기회는 챤스다 !! 멀쩡한 사람들은 도저히 경험해 볼 수 없는 특별한 체험의 특권이 주어졌음을 분명히 알고, 이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합니다. 스승이 떠나가기 전에 !!
앞니2개 없으니 먹는 것도 힘들고 얼굴은 시멘트 바닥에 갈렸으니 상상이 되나요 ㅎㅎㅎ특권을 잘 활용해서
부처님 공부에 더 매진해야겠습니다...
어머나!! 소금인형님 어찌 그런일이... 혹시 아스팔트가 일어섰던가요? .ㅎㅎ
상상하니, 맹구 비스무리하게 변했는것는데... 삼가 얼른 낫기를 바랍니다. 근데 우야다 그케 되셨는지 ......
그리고 이 '내려놓기'는 단지 몸이 아플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플 때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
제게도 지금 스승님이 와 계십니다,
잘 모셔야겟습니다,
스승님은 수시로 오시네요,
스승님은..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오십니다.
왜냐고요? 스승님은 자비로운 분이시니까요 ^^
햇빛 엽서님!
정확한 답변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평안하게 해 주십니다,
몇해전 어깨에서 팔로내려오면서 뼈속까지 아픈 고통이 있었습니다
병원도 가고 침도 맞고 물리치료도하고 별별 방법을 동원해도 낫질 않았어요
어느순간 '아이고 모르겠다 함께 살자' 생각하고 병원도 물리치료도 끊고
그냥 절하고 운동하고 그러고 지냈는데 어느날 갑자기 안아프다는걸 알게됐어요
고통이 사라진것도 모르고 있었던거죠...
또 한번은 몸이 많이 피곤해 아토피 증상으로 온몸이 가려워 견딜수가 없었습니다
거기다 심한 몸살까지와 꼼짝도 못하고 누웠는데 가만히 보니 가려운 증상이 없어진 거예요
그러다 몸살 떨치고 일어나니 다시 가려웠거던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절대적인 고통이 있긴 있는걸까??
다 내 머리속에서 정하는 만큼 고통스러운 건 아닐까?
그때부터 고통을 보는 눈이 좀 의심스러워 졌습니다 ㅋㅋㅋ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예.. 동감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요 ^^
30년을 변함없이 찾아주시는 스승님... 제가 많이 아둔하지요?
스승님은.. 우리가 깨달을 때까지 오십니다.
왜냐고요? 이유는 조기.. 위에 ↑ 적어놓았습니다 ㅎㅎ
지금 많이 고통스러워요....마음이...그래서 새벽녘이면 잠에서 깨어나네요. 그 근심이라는 녀석이 저에게 고통과 두려움을 줍니다. 그분이 오신걸까요?
그렇지요. 오셨지요..
우리에게 고통이 오는 것은, 나의 무의식에서, 저 깊은 본성으로부터의 어떤 메시지라고 합니다.
그 메시지를 잘 해석하면, 전화위복이 되어, 고통은 그대로 행복의 씨앗이 됩니다.
새벽에 잠이 깨면, 조용히 염불을 해보세요.. 마음 속으로 해도 됩니다.
앉아서 해도 되고, 그냥 침대에 누워서 해도 되고.. 관세음보살이나 옴마니반메훔이나..
호흡을 느껴가면서, 숨을 내쉬면서 조용히 부르는 겁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해서..
저는 그렇게 합니다. 한결 편안해집니다. coco님도 도움이 되시기를..
옴 샨띠, 부디 평안하시기를.. _()_
햇빛엽서님...친절한 답글 감사합니다. 늘 햇빛엽서님이 달아주는 답글이 어쩔땐 더 힘이 나는군요. 머리로는 이해 하면서..그걸 또 잊었나봐요. 감사해요.
지금 마주친 현실에서 오는 고통 어쩜 내려놓지 못하고 이 또한 욕심이겠지만
실타래 처럼 엉켜놓고 풀 의지도 능력도 기력도 상실하고 그저 두렵기만 합니다.
오늘 이 글을 보게되어 얼마나 기쁜지요...
고맙습니다.. _()_
옴 산띠.. 늘 평안하시기를..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