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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 보는 한국의 정치변동
1960년대 박정희정부는 정치와 경제 모두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정치적으로는 1963년과 1967년 그리고 1971년 세 차례에 걸쳐 선거 승리를 통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경제적으로도 경제기획원 등 국가관료 기구의 주도 하에 국가발전계획을 세우고 이에 저항하는 요소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통제를 구사하면서 한·미·일 3각의 비대칭적 정치경제 협력 틀을 통해 일관되게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했다. 1962~1971년 동안 연평균 9%의 경제성장을 달성함으로써 박정희정부는 업적에 의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1969년에는 3선개헌을 성사시키는 등 정치적 책략을 통해 상대적으로 안정된 정치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면서 박정희정부는 1960년대의 성과와는 별개로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도전과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다음에서 보듯이 국제정세–시민사회–국내정치 등으로부터 제기되는 도전과 위기 상황에서 1970년대 초 박정희정부는 박정희의 권력의지를 실현해나갈 모종의 정변을 추진하게 된다. 1972년 10월유신은 이러한 대내·외의 도전을 봉쇄하고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도모한 위로부터의 쿠데타적 책략이었다.
첫째, 국제정치적으로는 1971년 베트남전 종결을 위한 닉슨독트린의 발표와 함께 미·중 화해의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화가 가시화되었다. 이는 반공·안보 이데올로기와 제한적 다원주의를 결합시켜 정권을 유지해왔던 박정희정부에게 보다 강력한 동원체제를 통해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하도록 새로운 정치적 대응 틀을 요청하였다.
둘째, 해방 이후 20여 년이 지나면서 국민들의 의식과 삶의 방식에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대중교육의 지속적인 확대 실시로 1970년대 일반 국민들 사이에는 자유민주주의적 법치의 가치가 보편화되고 있었다. 또한 1960년대 산업화의 산물로서 노동자와 중간층이 성장하고 박정희의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자유민주주의적 성향의 사회세력이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셋째,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의 강력한 도전을 가까스로 누르면서 박정희의 3선은 확보되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기존의 44석을 두 배 이상 상회하는 89석을 확보함으로써 박정희 이후 정치질서의 불확실성 내지는 차기 선거에서의 정권교체 가능성 등 권력승계 위기가 태동하였다.
1970년대 초에 유신정부가 등장하게 된 경제적 설명은 자본주의의 위기 돌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6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이에 대한 대응책의 하나로서 노동통제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정치적 기제로서 유신체제가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차관경제의 경공업 수출성장 전략은 특혜융자를 둘러싼 자본낭비와 중복·과잉투자로 인해 일부 기업들은 금융비용 증대로 인한 원리금 상환압박을 받게 되는데, 1969년 차관업체 83개를 포함 총 45%가 부실기업인 것으로 발표될 정도로 위기였다.
누적된 외채와 만성화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경제성장률은 1969년 13.8%에서 1970년 7.6%, 1971년 9.4%, 1972년 5.8%로 10% 이하로 떨어지게 되자, 박정희정부의 자랑거리이자 지지기반인 고도성장 이데올로기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또한 1960년대 차관경제의 경공업 산업화를 거치면서 1960년 11.8%였던 노동자계급이 1970년에는 24.1%로 확대되자 이렇게 확대된 노동자들의 불만이 1970년 1,656건의 노동쟁의로 분출되기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1970년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살에서 극적으로 표출될 정도로 1960년대 산업화 추진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충분히 맛보지 못하는 노동의 상대적 좌절감 속에서 자유민주주의적 계급의식을 확대시키고 정권교체를 추동시킬 정도로 경제적 불만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은 때마침 제1차 유가파동이 닥치자 경제적 위기감을 고조시키면서 기존의 경공업 중심의 산업화 방식에서 중화학 공업으로의 구조적 전환 내지는 심화를 전면에 부각시켰다. 노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 표출과 산업구조 재편에 대한 기업가들의 이의제기에 대응하여 박정희정부는 비상한 방식으로의 정치재편을 도모하게 되는데, 이것이 10월유신으로 나타난 것이다.
유신정부의 등장과 관련해서는 1970년대 초 동북아의 정세변화로 인한 안보위기에 대응하고 남북대화 및 통일을 추진해나가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유신정부의 정당화 설명이 제시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한은 '선건설 후통일'에 매진함에 따라 일종의 '대치적 무시'라 부를 수 있는 상호관계의 단절로 나아갔다. 그러나 북반부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통제를 보다 일찍 마무리한 북한은 1963년 2.1%, 1964년 7.5%에서 1967년에는 30%에 달할 정도로 군비지출을 확대하면서 '4대혁명 노선'을 적극 추진해나갔다.
이에 따라 비무장지대에서의 충돌이 1965년 59건, 1966년 50건에서 1967년과 1968년에는 각각 566건과 629건으로 급증하였고, 특히 1968년에는 무장공비가 청와대 근처까지 침투하고 미국 정보함 푸에블로호가 납북되는가 하면 1969년에는 미정찰기 EC–121기가 북한군에 의해 격추되는 등 남북한 및 북미관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한반도에서의 긴장 고조와는 반대로 1971년 미국은 아시아의 방위를 일차적으로 아시아인에게 맡긴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하면서 주한미군 제7사단을 철수시키고 이어 1972년에는 중국을 방문하여 미·중화해의 시대를 열었다.
이와 같은 동북아의 정세 변화는 남북한으로 하여금 남북대화의 진전으로 나아가도록 압박했지만, 여전히 남북한 간 상호신뢰의 결여와 안보위기 고조는 대내적으로 더욱 강고한 권력집중과 동원체제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유신정부는 바로 이와 같은 박정희정부의 안보위기 의식과 결부되어 반공안보의 대응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대내적 동원체제가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위로부터 기획되고 강요된 정치적 재정비였다.
1972년 11월 계엄령 하에서 국민투표로 통과된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입법·행정·사법의 삼부 위에 군림하는 국가적 영도자로 규정하였다. 통일주체국민의회를 통해 사실상 박정희의 종신집권이 보장되고 또 대통령이 국회해산권과 국회의원 1/3 추천권, 판사임명권, 긴급조치권을 보유함으로써 실질적인 1인 독재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러한 제도적 기반과 함께 박정희는 비공식적인 개인적 연결망과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합참정보국, 수도경비사령부, 방첩대 등 정보기관을 통해 정치·군사적 도전자를 봉쇄·무력화시켰다. 그 과정에서 불법적인 체포와 납치, 고문, 정치적 재판은 다반사였다. 유신헌법에 대한 정치인·지식인·학생·종교지도자·노동운동지도자로부터의 반대를 억압하기 위해서 박정희 유신체제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1호로부터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에 이르기까지 초법적 조치로 반정부운동을 탄압·봉쇄하였다.
유신 이후 박정희의 영구집권으로 인해 정치권력의 개인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시민사회에 대한 정치적 탄압의 강화와 함께 정치사회의 군사화–탈정치화 그리고 총력안보체제의 가속화가 진행되었다. 박정희 유신정부는 제3공화국의 군사정부적 특성에서 벗어나 점차 박정희 개인의 절대주의적 공포정치의 특성을 더 강하게 보였다. 특히 박정희의 후원 하에 효율성과 기술적 전문성을 강조하는 기술관료의 위상과 역할이 강조되었다.
유신정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안보논리가 전보다 더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유신정부는 안보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서 일부 재벌기업들의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국제적 분업체계에 부응하는 중화학공업화를 통해 기계·전자·철강·비철금속·석유화학·조선 등 특정업체에 대한 선택과 집중의 불균등 성장전략을 적극 추진해나가게 된다.
유신정부에 대해서는 인권탄압과 공포정치라는 부정적 평가가 압도적이지만, '100억불 수출, 1천불 소득'의 구호 아래 국가주도의 특혜적 수출지향 산업화를 적극 추진했다는 성과를 인정받기도 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유신정부의 산업화란 위로부터의 주도·강제·특혜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걸친 동원체제의 구축을 통해 단기적 효율성을 최대화한 총력동원체제의 성과였다.
유신정부는 외형적인 강고성과 단기적인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내외의 도전으로부터 취약성을 면치 못하였는데, 특히 1977년 카터정부가 인권외교와 미·소 데탕트 그리고 그에 따른 주한미군철수를 거론하게 되면서 불가피하게 미국과 불편한 부조화의 관계에 처하게 되면서 대외적 위기상황에 몰리게 된다. 대내적으로도 1973~1974년 김대중 납치사건과 조선·동아일보 등 언론탄압, 민청학련사건 등을 거치면서 유신정부의 인권탄압–공포정치와 용공조작정치에 대한 염증과 자유민주주의적 반발이 확대되어 나갔다.
유신체제에 대한 대내외적 저항이 대두하는 상황에서 치러진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는 야당인 신민당이 32.8%로 집권 공화당의 31.7%보다 더 많은 득표를 함으로써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시켜주었다. 선거를 통해서 나타난 국민들의 반정부 의식에 기반하여 그 이후의 반독재투쟁은 1979년 부마항쟁에 이르기까지 의회에서는 물론이고 대학, 언론, 종교, 노동 현장 등 장외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1979년 10월 부마항쟁의 와중에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으로 암투를 벌이던 중앙정보부와 대통령경호실 간의 빗나간 알력이 맞부딪치게 되는데, 결국 중도하차가 불가능할 정도로 굳어버린 박정희 유신정부는 내부의 알력에 의해 일거에 산화되고 만다.
[네이버 지식백과] 1972년 10월유신 (사건으로 보는 한국의 정치변동, 2004. 4. 15., ㈜살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