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3. 주일예배설교
창세기 18장 16~33절
마지노선은 10명이 아니라 ‘나’입니다.
■ ‘아, 아쉽다..ㅠ 한 명만 더 있었어도 이길 수 있었는데.’ 언제가 노회체육대회에서 제가 속한 팀이 축구경기에 졌을 때 나온 말이었습니다. 공 잘 차는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었으면 이길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었습니다. 당시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한 사람이 더 있었다고 상황이 달라졌을까? 정말 이겼을까? 그래도 지지 않았을까? 우리는 결과를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니, 예측은 얼마든지 빗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쉬움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축구경기의 추억을 통한 이러한 상상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끄집어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태도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 아브라함은 너무도 당황스러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소돔과 고모라 성읍에 미련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99세인 자신에게 내년에는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난 직후에 들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흥분하고 있었는데, 그만 당황하게 된 것입니다. 죽음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죽음의 말씀을 듣자마자, 아브라함은 황급히 천사들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자신에게는 생명의 말씀을 전한 천사들이지만, 사랑하는 조카 롯에게는 죽음을 전할 천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돔 성읍을 향해 길을 나서는 천사들의 앞을 황급히 막아섰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다급한 목소리로 호소하였습니다. 23~25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아브라함의 목소리는 다급했어도 횡설수설은 아니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은 지당하심을 인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소돔과 고모라는 극악한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을 시비할 수는 없었습니다. 대신, 아브라함은 다급히 하나님의 정의를 소환하였습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아브라함의 다급한 목소리는 조카 롯을 사랑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그렇기에 목청을 다해 하나님의 정의에 호소하였던 것입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래서 제시한 조건이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였습니다.
다급하지만, 사랑이 가득 담긴 아브라함의 호소에 하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2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와우~ 진심의 사랑을 담은 아브라함의 호소가 통했습니다. 하나님은 진심, 특히 사랑을 담은 진심을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신이 제시한 조건을 긴급히 수정하였습니다. 이에 용서를 구하고는 혹시 오십 명 중 다섯 명이 부족하다면 여지없이 심판하시겠느냐며 방금 제안한 조건을 수정하였습니다. 뭔가 불안함을 감지했던 것 같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흔쾌히 그 수정 조건을 수용하셨습니다.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28절 하반절)
그런데 아브라함은 또 다시 조건을 수정하였습니다. ‘혹시 40명은 안 되겠습니까?’ 놀랍게도, 이 수정 조건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또 다시 조건을 수정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아예 10명을 줄였습니다. ‘혹시 30명은 안 되겠습니까?’ 놀랍게도, 이 수정 조건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또 다시 조건을 수정하였습니다. ‘혹시 20명은 안 되겠습니까?’ 놀랍게도, 이 수정 조건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또 다시 조건을 수정하였습니다. ‘혹시 10명은 안 되겠습니까?’ 놀랍게도, 이 수정 조건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조건을 수정함에도 이를 노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희망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내가 거기서 사십오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거기서 사십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거기서 삼십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거기서 이십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거기서 십 명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그렇지만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이렇게 관대하신 하나님의 수용에 아브라함은 더 이상은 수정 조건을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만하자!’라는 말씀도 없으셨지만, 그는 더 이상 다른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혹시 5명은 안 되겠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려도, ‘혹시 1명은 안 되겠습니까?’라고 말씀을 드려도 수용하실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말씀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숫자를 50명에서 10명까지 낮춘 이유는, 아브라함도 소돔과 고모라가 얼마나 극악한 성읍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이상의 협상이 불가피했음에도 이를 진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낮춘 10명도 불안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협상은 끝이 났습니다. 3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그런데 혹시 33절이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결론이 안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물론 최종 협상은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하나님이 길을 가시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길을 가시는 모습을 보는 아브라함은 불안한 것 같고, 길을 가시는 하나님은 뭔가 단단한 결심을 하신 것 같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아닙니다. ‘10명이 있어? 없지!’라며 길을 가신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브라함이 50명에서 45명으로, 45명에서 40명으로, 40명에서 30명으로, 30명에서 20명으로, 20명에서 10명으로 그 숫자를 줄여가도 전혀 개의치 않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숫자에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50명이건 10명이건 그런 숫자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한 명 한 명이 중요하시지, 얼마나 많은 숫자가 있는지가 관심이 아니십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악에 대해 아파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이 있는지에 있으셨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느냐의 여부가 중요하셨지, 얼마나 있느냐가 아니셨습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19장 29절을 보실까요?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롯이 거주하는 성은 소돔이었습니다. 결국 그 성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모든 것을 몰살하는 그런 심판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살리지 않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롯과 그 가족을 살리셨습니다. 이유는? 아브라함 때문이었습니다. 과연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10명은커녕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에게 그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0명 대신 아브라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소돔과 고모라의 악에 대해 아파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악행에 대해 슬퍼하는 사람이었는데, 아브라함이 그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파하고 슬퍼하는 아브라함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헤어져 그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돔 성읍을 심판은 하셨어도 롯과 그의 가족은 살려주셨습니다. 비록 한 사람이었지만, 의인 아브라함이 있었기에 생명의 역사가 허락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이 소돔과 고모라 성읍 심판 사건에서 우리의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숫자에서 시선을 떼 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50명에서 10명이라는 숫자에서 시선을 떼고 그 시선을 하나님의 마지노선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 마지노선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바로 ‘나’입니다. 내가 그 마지노선입니다.
살펴봤듯, 마치 약을 올리듯 몇 번이고 수정 제안을 드렸음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제안을 기꺼이 수용하셨습니다. 10명은커녕 한 명도 없다는 소돔과 고모라의 현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인 아브라함이 하는 제안이었기에, 그의 빈번한 수정 제안을 다 수용하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아니었다면, 이런 식의 협상에 노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찾으시는 그런 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비록 소돔과 고모라 성읍은 멸망하였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롯과 그의 가족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살린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 한 사람이 중요했듯이, 나 한 사람이 바르게 사는 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나로부터’ 시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성읍, 이 현실, 이 상황을 살리고 지키는 마지노선은 바로 ‘나’입니다.
혹시 나 혼자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당황하실 것 같습니다. 최소한 10명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실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물론 나 하나로서는 절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 한 사람이 바르게 산다면, 이것의 파장력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점차 거세질 것입니다. 결국에는 나 1명이 10명이 되고, 20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30명, 40명, 45명, 50명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르게 사는 나 한 사람을 통해 만들어지는 ‘거룩한 파장력’입니다.
일본 어느 섬의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즐겨 먹는답니다. 처음에는 고구마를 씻어 먹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씻어 먹기 시작하자, 이것이 어느새 보편적인 행동양식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섬의 모든 원숭이가 고구마를 씻어 먹습니다.
■ 혹시 나 혼자 이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당황하며 반문하시는 분들에게, 이 원숭이 이야기를 빗대 비전을 드립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의로운 삶은 반드시 거룩한 파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느새 이 성읍, 이 현실, 이 상황을 거룩함으로 바꾸어낼 것입니다. 모든 것을 살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마지노선임을 확신하십시요. 하나님은 여러분 한 분 때문에 웃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