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2. 24 주님 성탄 대축일 성야 미사)
슈퍼 히어로
우리는 금방 긴박한 상황 속에서 극적으로 태어난 아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항상 영웅의 탄생은 범상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또한 정상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설화나 영화 속의 영웅이 아니십니다. 히어로는 비인간적인 특별함을 가진 존재들이죠. 그들은 인간을 닮은 듯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초능력을 지닌 특별한 존재가 히어로입니다.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스파이더 맨 등. 이른바 어벤져스 군단. 인간의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그들은 분명 메시아가 맞지만 그들의 종횡무진과 통쾌 역전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왠지 허무하고 공허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대리만족을 느끼지만 현실 속의 나를 바라보고 있으면 여전히 비굴하고 무력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등장에 열광합니다. 비현실적 존재이지만 내가 갈구하는 나의 욕망과 꿈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죠. 어릴 때 슈퍼맨 영화를 보고 난 후 빨간 보자기를 싸 메고 2층에서 뛰어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영화를 보고 십자가를 지고 못 박히는 연출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부분은 빨리 돌려 보기를 할지언정.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영웅이 아닙니다. 동정 잉태라는 특별한 방식을 택하시긴 했지만 그 외에는 우리와 같은 조건 속에 태어나셨고,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셨다. 그래서 우리가 접근하고 이해하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죄 말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 지셨습니다. 반면 오늘 인구 호구 조사령을 내렸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당시 슈퍼 히어로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신으로 여겼고, 본인도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나는 제우스의 아들이다.” “존엄한 자이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그 슈퍼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 세우지 않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한 아기입니다. 그리고 그 아기는 로마 황제처럼 세상에 군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탄을 축하하고 기념하는 첫 번째 이유도 인간을 위한, 인간을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구세주가 슈퍼 히어로가 아니라 굳이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태석 신부님은 암으로 돌아가시기 1년 전에 톤즈에서 두 명의 유학생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최근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토마스 타반 아콧이라 불리는 이 청년은 한 인터뷰에서 합격 소감을 밝히면서 ‘기쁘지만 신부님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한국 유학 생활이 힘들 때면 담양의 신부님 묘소를 찾고 힘을 얻었다던 그는 전문의를 따면 고국으로 돌아가 마음까지도 치유할 수 있는 의사로 봉사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마 신부님이 살아 계셨다면 분명 ‘야, 잘했다.’하며 등을 한 대 치면서 웃으셨을 것이라고.
이태석 신부님은 톤즈에 유능한 사제, 의사, 교사, 악단장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톤즈의 슈퍼 히어로가 아닙니다. 그분의 재능이 탁월했지만 이태석 신부님이 돌아가셨을 때 톤즈 사람들이 그렇게 슬피 운 것은 그분이 톤즈 사람으로 왔다가 톤즈 사람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죽는 날까지 톤즈 사람을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톤즈 사람들을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죽음에 너나 할 없이 온 동네사람들이 슬피 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 지체 높은 대사제도, 유능한 의사도, 권위 있는 라삐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아기로 오셨고, 목수로 사셨으며, 사형수로 죽으셨습니다. 그분은 철저히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사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분이 보여준 인간으로서의 삶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세상은 예수님 탄생을 기뻐하며 축제를 즐깁니다. 그러나 저는 별로 기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탄생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육화, 곧 인간으로 오신다는 것은 사형선고가 기다리고 있는 위험한 도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기 예수는 구유에 누워 우리를 보고 방긋 웃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보고 있으면 미안하고 눈물이 납니다.
본당 신부는 캐나다에서 4번째 성탄을 맞습니다. 요즘 문득 드는 생각입니다. “이민자를 위해 파견된 나는 과연 이민자와 동화되고 있는가? 육화라는 말은 감히 쓸 수 없다. 내가 이민자가 될 수 없으니 말이다. 그저 동화되고 있는가?” 아직 멀었습니다. 어느 정도 이민자들의 마음은 헤아리지만 여전히 난 한국인으로서 사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화 사건은 사제인 나에게 많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한편 이 거룩한 밤에 여러분들에게도 서로에게 동화되고 있는가 묻고 싶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그리고 교우들은 교우들 간에. 결코 쉽지 않음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 육화하셨으니 나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용기를 낼 수 있습니다. 다시 성탄입니다. 해 마다 반복되는 이 축제일에 우리는 다시 용기를 내어 서로 고백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끝까지 같이 가겠습니다.” 이 고백의 원천은 아기 예수님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입니다. 이제 내가 그대에게 임마누엘이 될 차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