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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산문집 [☆침묵을 엿듣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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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을 엿듣다]
정재분 산문집 / 시와소금산문선 001 / 나무아래서(2014.01.20) / 값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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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느낌을 수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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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물을 보았을 때의 첫 느낌을 나는 종종 무시하거나 망각해 버리곤 했다. 느낌의 막연함과 있을 수 있는 느낌의 오류가 기억의 부실화를 촉진시켰을 것이다. 느낌이란 그림자 같은 것인데, 그림자는 분명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실체와 그림자와의 관계를 간과하거나 그것들을 사장시켜버린 전력이 숱하다. 그것은 결국 자기소외로 나타났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통로가 막혀 협심증 증세를 보였고, 어떤 위험의 전조를 간과하여 좌충우돌하였으며, 자연과의 교감에 둔감해져서 더욱 외로웠을 것이다. 사소한 것들이 기여하는 이온음료와 같은 활력과 에너지원을 대수롭지 않게 여김으로써 느낌과 생각들을 유폐시켰음을 토설한다. 느낌의 수납을 유보하는 것은 판단을 타인에게 위임하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나 사물과의 직접 소통을 회피하는 것이다. 느낌의 집적이 직관으로 첨예해져서 나아가 통찰에 이르는 것인데, 정서가 지성과 통합하고 직관의 핵심을 구체화 시켜 통찰에 이르는 것인데 나는 그리했다.
이 세계는 은유와 환유의 방식으로 제 존재를 발설한다. 그 사실을 알아채고 받아들이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수렵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개개인의 느낌과 직관이 한방울 물이 되어 언어의 실개천을 이루고, 개념의 모세혈관이 되고, 예의가 되고, 정의가 되고, 관습이 되고, 분노가 되고 예술이 되었다. 달리 말하면 느낌은 몸의 공명이요 무언의 언어인 셈이다. 그것은 언어 이전의 방향 제시이며 도도한 내적 질서이고 대항하기 힘든 중심이다. 느낌이나 직관은 지극히 주관적인 출발 선상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단순히 쾌, 불쾌의 반응을 뜻하는 기분과 혼동할 위험을 담지하고 있다. 그것들은 한 혈통임에도 갈래지어져서 의미의 방향을 달리 가리킨다. 느낌은 근원적 감지능력이다. 그럴지라도 얼마간 아집과 혼재되어 있는 느낌 덩어리의 자가당착에서 벗어나려면 객관성의 검증을 거쳐야 할 필요가 있겠다.
언어 이전의 느낌을 발성할 때 나는 일상과 주변으로부터 이방인이 되었다. 내면의 속삭임이, 산만한 외부의 소리에 위축되어 존재의 위기를 겪었다. 감정은 지극히 사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유발되기까지는 역학구조와 개연성은 한 개인의 것이라 치부할 수 없다. 복합적 지대에서 야기된 어떤 현상이나 생명의 자가발전으로의 느낌을 삶의 동력으로 전환하는데 등한시했을 것이나 느낌군단을 다시 추적하고 자연의 소리에 다시 귀 기울이게 된 것은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소홀히 여김을 받고 공중 분해된 느낌을 감꽃처럼 꿰어 한 줄의 목걸이라도 되게 할 자기요청이 생긴 것은 그러니까 순전히 시의 영향인 것이다. 시는 순간의 강렬한 인상이요, 계기판의 눈금이 치솟는 임계치의 경고요 그런 실상의 그림자다. 시의 생리, 시의 문법에 의존하여 사물을 읽었으나 새롭게 생긴 시각을 검증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객관성이라는 대척점에서 사물을, 생명을 재조명하고 싶었다.
나무를 테마로 설정하고『침묵을 엿듣다』라는 제목을 붙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 거시적 미시적으로 나무의 이미지를 기술하면서 마땅히 허와 실을 되비추는 근거자료로 시가 소비되었다. 전통과, 신화와, 현존하는 생명체들과 소통은 다분히 객관적 방식을 택하였다. 고목이나 혹은 여타의 여린 나무만이 아니라 사물들 나아가 사람과의 소통은 언어 이전의 느낌 덩어리들을 헤아리고 생각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때 원활해질 것이다.
본 산문은 격월간《정신과 표현》에서 2년간, 계간지《애지》에서 2년간 연재한 것이다. 출간을 앞 둔 시점에서 얼마간 저어된다. 밤과 낮의 경계에 있는 새벽의 불투명한 시력으로 사물을 읽어낸 것은 아닌지 일말의 두려움이 없지 않다. 이런저런 상념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연재한 글을 읽어주고 응원해 준 여러 선생님들의 말씀에 힘입어 책을 묶게 되었음을 아뢰며 아울러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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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프롤로그 | 느낌을 수납하다
chapter01 시원을 찾아서 : 물오르다 / : 찾아가다 / : 흘러가다 / : 박달나무
chapter02 풍경에게 말 걸다 : 창밖을 내다보다 / : 자연과 대화하는 마지막 종족 / : 북방한계선 / : 예작도에서 마임하다
chapter03 봄이 전하는 아포리즘 : 먼저 피는 꽃 / : 먼저 내민 손 / : 소쇄원 담장에 기대어
chapter04 느티나무 그늘 아래 : 쉼표 / : 특별해지다
chapter05 나를 찾아 나서다 : 마주치다 / : 자기탐문 / : 정선의 뽕나무 / : 나다워지는
chapter06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다 : 소리의 세계 / : 숨어있는 / : 찾아내다
chapter07 주홍빛깔 : 종묘에 가다 : 감나무가 있는 자리 / : 정전 앞 월대에서
chapter08 그리피츠 산에는 은행나무가 없다 : 시선 / : 두려움 / : 진면목 / : 불요불급
chapter09 하여가 : 육백 년을 건너온 창덕궁 다래나무 / : 달라부어 살다 / : 무쏘의 뿔처럼
chapter10 차안과 피안의 경계에 있는 : 향나무 / : 하나의 축이다 / : 이상향은 어디서나 있었다
chapter11 소나무 : 바람의 행방을 찾는다면 : 사람 닮은 / : 정신의 지대에
chapter 12 다원적 자리에 있는 : 선비들의 벗 / : 대나무를 심지 않으리 / : 어느 대나무의 고백 / : 공空과 화엄으로의 대나무
chapter13 나무 아닌 세상의 나무 : 고원 / : 알롱창포 강변 / : 암드록쵸 가는 길 / : 의미의 뒷모습
chapter14 무의식의 퍼즐을 찾아서 : 시 / : 별
chapter15 수평 위에 수직 : 강변의 미루나무 / : 이름 / : 미루나루를 찾아서
chapter16 통주저음으로의 미선나무 : 애틋한 / : 풍토색 / : 감동을 추적하다
chapter17 상수리나무 아래서 : 내 생애의 무심천 / : 영원을 꿈꾸는 / : '참'이라는 말은 / : 횡행군자
chapter18 배롱나무 겨드랑이를 간질이다 : 병산서원 가는 길 / : 도마뱀의 침묵 /: 시선
chapter19 안개를 사랑한 왕버들 : 성밖숲 왕버들 / : 아무래도 상관없는 / : 주산지 왕버들
chapter20 나무로 다시 살다 : 눈 내리는 길 / : 전등사 가까이 / : 숲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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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분 산문집 [※침묵을 엿듣다※]
[ chapter 12 ] -
다원적 자리에 있는
선비들의 벗
고산 윤선도(尹善道)는「오우가五友歌」에서 다섯 벗이 물, 돌, 소나무, 대나무, 그리고 달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각각의 특징들을 묘사하였는데 다섯 번째 연이 대나무에 대한 묘사이다. “나모도 아닌거시 풀도 아닌거시/곳기뉘시기며 속은 어니 뷔연다/뎌러코 사시에 프르니 그를 됴하 노라.” 한 이 시조는 대나무의 모호한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는데 부정의 부정을 병렬로 도열하여 음악벅 효과를 얻어 공감을 증폭시킨다. ‘아닌거시’의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에 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문율의 긍정을 이끌어내는 괴력을 발휘한다.
어디 그뿐일까. 중국의 소동파는 고기가 없는 식사는 할 수 있지만 대나무 없는 생활은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고기를 안 먹으면 몸이 수척해지지만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이 저속해진다는 것이다. 서예가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는 대나무를 가리키며 “이 친구(此君)가 없으면 하루라도 어찌 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한 후부터 차군(此君)은 대나무의 별칭이 되어 많은 선비들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에 앞서 대나무를 죽존자라 칭했던 이가 고승, 혜심(彗諶, 1178~1234)이다. 혜심선사는 대나무의 속성과 선(禪)의 이치를 대비하면서 “바닷가 외지고 험한 곳에서 무슨 불사를 돕느라고 푸른 바위 사이에 서 있습니까?”라고 묻자 죽존자가 대답하기를 “세속의 먼지를 덜어내어 자연을 도우며 큰 대비의 마음을 돕는다” 했다. 물론 죽존자의 대답이라는 것이 혜심의 관점과 다름이 아니다. 자신이 곧 대나무가 되는 인간의 죽화현상은 유래가 깊다. 벗이요, 차군이요, 죽존자요, 더하여 죽부인이라고 불렀던 선인들의 직관과 대나무의 생태적 면모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동아시아권에서의 대나무는 청정한 이상세계와 절개를 지키는 고결한 정신을 상징하였다. 생태적 사실성을 뛰어넘어서 하나의 문화코드로 위상을 획득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대나무는(Bamboo-The tallest grass in the would, can grow up to 90㎝ in a day)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큰 풀이다. 생태적 관찰에 의거한 분류다. 백과사전의 해설은 이러하다. 대나무는 벼과(一科 Poaceae) 대나무아과(一亞科 Bambusoideae)에 속하는 상록의 키 큰 풀의 총칭으로, 문헌에는 120속(屬)에 1,250여 종(鍾)으로 집계가 그것이다. 한국에는 4속 14종이 있지만, 같은 종에 여러 이름이 쓰여 중복된 경우를 감안해야 한다.
‘대풀’이라는 이율배반적 명시가 정서적 파장을 일으킨다. 사실 나무로 정의되려면 몇 가지 특징을 갖추어야 한다. 줄기나 가지가 목재로 쓸 수 있어야 하고 해가 거듭될수록 몸집을 불려가는 부름켜활동이 있어야 하며, 그러했다는 표적의 나이테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나무는 2-3년 동안에(어떤 것은 1년 만에) 키가 다 자라는데, 그 후에 몸피를 불리지 않고 단단해지는데 주력한다. 또한 벼과의 특징인 마디를 지니고 있으며, 나이테가 없어 나무로 분류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상부가 60년에서 120년까지 생존하는 면에서 나무의 특징을 가졌다. 풀이라고 하기엔 그 위용이 뛰어나고 수명도 장구하다. 대나무의 ‘대’는 갈대의 대, 수숫대의 대처럼 속이 비로 호리호리한 풀줄기에 어원을 둔 순 우리말이다. 갈대나 수숫대와 달리 우리의 선조들은 ‘대’에 ‘나무’ 字를 붙여 격상시켰던 것은 대나무의 독보적 특성을 간과하지 않아서다.
대나무뿌리는 50~60㎝ 정도 아래로 뻗어난 다음에는 게걸음을 걷듯이 옆으로 뻗는다. 대나무는 뿌리가 깊지 않으면서도 키가 큰 식물이어서 구조상 바람에 취약할 수 있으나 얼개를 이루어 서로를 잡아주고 지지하여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잘 견딘다. 게다가 대나무 사이사이로 자연스럽게 바람의 길이 생겨서 부러질 듯 흔들리기는 하여도 여간해서 쓰러지지 않는다. 대숲에 바람이 불 때, 댓잎이 부딪는 소리는 ‘어름처럼 차가운 백돌이 부딪치는“ 듯 청량한 소리가 난다. 그 시원한 소리에 귀를 씻으면 귀가 맑아지고 마음을 씻으면 마음이 상쾌해질 것이다. 남도에 거주하는 한 시인은 대숲바람소리에서 맑디맑은 사랑소리를 듣고, 한숨소리를 듣고, 장타령을 듣는가 하면 새벽별 푸른 숨소리를 듣는다.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 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가던
징소리 꽝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하게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대닢파리의 맑은 숨소리
- 송수권,「대숲 바람소리」전문
대나무를 심지 않으리
대나무는 불의 성질을 가졌다. 영어로 대나무를 Bamboo로 표기하는데, 대밭이 불탈 때 나는 폭음을 의성화한 말레이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우후죽순이라는 말의 어원이 된, 죽순이 자라는 모습을 “푸른 불꽃처럼 폭발하는 죽순”이라고 묘사하리만치 빠르게 자라는데, 절정기에 하루에 일 미터씩 자라는 맹렬한 성장과 굽히지 않고 곧게 뻗어가는 강직한 줄기가 불길이 순식간에 위로 치솟는 모양과 흡사하다. 파죽지세(破竹之勢)는 대를 쪼개는 ‘대쪽’ 같은 기세로 적에게 거침없이 쳐들어가 물리치는 기세를 일컫는 것으로, “대나무 코드에 불의 요소가 강화되면 이념색이 짙은 의죽(義竹)과 혈죽(血竹)이 태어나”게 되는데 이방원에게 살해된 정몽주의 일편단심을 일컬어 의죽(義竹)이라 한다. 그가 피살된 다리가 선죽교(善竹橋)요, 민영환의사가 자결한 곳에 돋은 대나무는 혈죽(血竹)이다. 열거된 죽음들이 사심 없이 이루어졌던 것처럼 속이 빈 대나무가 꽃을 피우고 하얗게 죽어버리는 그 결기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무슨 뜻이 그리도 ‘대차서’ 거침이 없으며 무슨 뜻을 이루고 미련 없이 목숨을 버리는지 대나무는 일반적인 식물계의 습성에서 벗어나있다. 그 다부진 정신을 옹골차게 표방하는 대나무가 무기로 쓰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할 것이다.
동아시아권에서의 대나무는 신화의 다양한 소재였다. 막대기가 용으로 화했다는 것이 그중 하나인데, 그것을 일컬어 화룡(火龍)이라고 하였으며, 밑뿌리가 꾸불꾸불하다고 하여 잠용(蠶蛹)이라고 하였다. 왕권을 상징하는 용으로 화한 대나무가 전쟁도구로의 활용도는 높았다. 궁시(弓矢)를 만들고 죽도, 방패, 대창과 죽창으로 만들어진 반면에 문구(文具)를 만드는 재료인가하면 여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의 재료로 쓰이는 등, 대나무는 대립과 모순을 아우르고 반대되는 것을 일치시키는 다재이세(多材利世)의 덕성으로 생활 깊숙이 침투되었다. 대나무로 만든 죽부인을 빼놓을 수 없는데, 만질만질한 겉대로 엮어 만든 죽부인은 그 옛날 더위를 나는 데 더 할 수 없이 요긴하였던 것으로 그 소속을 분명히 한다. 아버지가 품었던 죽부인을 결코 아들이 품지 않는다함이 그것이다. 사방팔방으로 쓰임이 다양했던 대나무를 심지 않겠다는 작자미상의 시조가 있어 그 까닭을 살펴본다.
백초를 다 심어도/대는 아니 심을 것이/법대는 울고 살대는 가고, 그리나니 붓대로다/구태여/울고 가는 그리는 대를 심을 줄이 있으랴?
옛 시인은 “구슬픈 가락을 내는 피리를 만드는 대나무여서 심어 기르기 싫다고 했고, 화살을 만드는 재료가 되는 전죽도 한번 쏘면 과녁을 향해 끝없이 날아가 돌아오지 않으니 심어 가꾸기 싫다는 것이고,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붓대의 재료인 대나무조차도 심지 않겠다는 것인데 대나무가 항상 임을 여의고 그리움 속에서 연연하는 마음을 그리고 쓰는 붓을 만드는 재료이기 때문”이라 했다.
어느 대나무의 고백
대나무는 광기의 한 형식이다. 가장 빠른 속도로 단번에 성장하고 더는 자라지 않는 절제력과 생명력 또한 같은 양상이라 할 것이다. 2차 대전 중에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서 유일하게 생존했을 정도로 대나무는 생명력이 강하다. 이산화탄소 흡수량은 단연 최고로 소나무의 3.8배로써 바이오매스 자원으로 각광 받고 있는 작금이다. 그러나 그 지대한 생명력이 갑작스럽게 시들고 한꺼번에 죽어버리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자랄 때나 죽을 때나 전력투구, ‘올인(all-in)’하는 대나무의 생존방식이 우주의 생성과 소멸의 드라마를 선험적으로 드러낸다.
초목은 꽃이 진 자리에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대나무는 씨앗으로가 아닌, 땅속에서 처음 난 것, 즉 모죽으로 뿌리(영양) 번식을 하기 때문에 굳이 꽃을 피워야 할 이유를 갖지 않는다. 이른바 뿌리 곁가지가 나서 하나의 또 다른 대나무로 성장하는, 마치 자기분열방식으로 번식한다. 대꽃은 번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죽음을 예고하는 전령이다. 벌이 침을 사용하고 나서 죽는 것처럼, 교미 후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수컷 미얀마제비처럼, 수만 리를 헤엄쳐 제가 태어났던 강으로 와 알을 낳고는 죽는 연어처럼, 꽃을 피우고는 죽는 대나무의 존재가 지닌 함의가 비장하고도 처연하다. 생의 정점에서 휘황하게 꽃을 터뜨리는 여느 식물과 확연히 다른 대꽃은 귀하면서도 더없이 아픈 꽃이다. 대나무는 한 그루에 꽃이 피면 전염병처럼 꽃이 번진다. 고란사 낙화암에서 떨어진 삼천궁녀의 집단자살이다. 지난해 태어난 것도 올해 태어난 것도 같이 꽃을 피우고 같이 죽는다. 일생일대에 단 한번 꽃대를 밀어올리고는 하얗게 말라 죽어간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같은 해에 꽃을 피우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대나무 숲 전체가 사라져버린다. 설령, 같은 뿌리에서 나온 줄기의 일부를 떼어서 다른 곳에 심었을지라도, 아무리 먼 곳으로 옮겨 심었을지라도 원래 줄기와 같은 날 꽃을 피우고 죽는다.(출처-대나무자원연구소, 이송진 박사) 이런 현상을 공허와 회의라고 할 것인가. 복효근 시인은 칸칸이 들어찬 어둠속에 터질듯 한 공허와 회의라고 했다. 파죽지세를 구현해야하는 존재에게 있을 법한 배면이 시인의 눈에 여지없이 포착되었다.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 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를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 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은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데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 복효근,「어느 대나무의 고백」전문
대찬 생존법칙으로 수렴되는 대나무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시이다. 전범도 표본도 없이 스스로 전설이 된 대나무의 고백을 듣는 것은 한 이치를 깨치는 일이다. 풀의 종족으로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풀의 족보를 뛰어넘어 나무의 위엄을 갖추고 뜻과 기개를 드높이기까지 맹렬한 질주이며 동시에 견딤이다. 뜸북새 우는 소리가 울 밖에서 들리던 시절,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던 오빠이다. 이른 나이에 전쟁에 나갔던 용사며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았던 우리의 근대사이다.
공空과 화엄으로의 대나무
독일의 철학자 헤겔(1770-1831)은 동양의 궁도에 심취하여 궁도의 신묘한 경지에 도달한 유일한 서양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남긴『궁도에서의 선(禪)』에 보면 “서양 사람들이 활을 쏠 때는 먼저 과녁에 눈을 맞추는 외관을 하는데 동양 사람들이 활을 쏠 때는 먼저 마음의 눈을 맞추는 내관을 하는 것부터 다르다 했다. 활터에 서면 뒷머리- 목뼈- 다리 정강이- 귀꿈치를 마치 대나무처럼 일직선으로 세운다. 이를 마음속에 세우는 대나무라고 하여 심죽(心竹)이라고 한다. 그리고는 온몸에 흩어져있는 마음의 응어리들을 풀어 이 심죽에 그대로 흡인시키는 과정에서 대나무 속이 비어있듯이, 마음을 비운다. 이렇게 속이 비어 심죽이 될 때를 기다려 활시위를 당겼을 때에 신궁이 된”다고 했다.(『사상으로 보는 대나무』에서 발췌, 이어령 作)
지난 여름, 런던올림픽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한국의 양궁은 세계적인 양궁의 종주국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과 4차례의 경기에서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중국의 어느 양궁 감독은 “한국의 양궁은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다”라고 극찬했다. 마음을 비우면 다른 차원의 입구가 열리는 것인가. 그간에 볼 수 없었던 세계의 진경이 펼쳐지고 드디어 보게 되는 것인가. ‘마음을 비우라’ ‘힘을 빼라’는 권고를 우리는 자주 듣는다. 비움의 경지에 이르러야할 필요에 직면할 때가 일상에서 적지 않다. 비우는 것은 무상무념의 다른 이름이다. 선인들이 대나무에서 물질 이상의 것으로, 정신을 가다듬는 거울로, 벗으로 가까이한 까닭이 여기에 있겠다.
대나무는 존재론적으로 예외적이고 독보적인 무엇을 표방한다. 세한삼우에서 대나무는 소나무, 매화나무와 같이 나무의 친구가 되고, 사군자에서는 난초와 국화와 같은 풀의 친구가 된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은, 함께인 동시에 따로다. 현대적 심미안의 한 양상이 된 다중성을 대나무는 생래적으로 구현한 셈이다. 단일한 틀에 가두어지기를 거부하고 독자적 기호의 초석이 된 대나무를 (The tallest grass in the would) 서양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풀 정도로 인식한 것과 달리, 동양에서는 총체적으로 받아들였다. 풀과 나무의 경계에 있는 식물로 인식한 점에서 한국과 일본이 같으나, 중국에서는 개별화하여 대죽 변으로 분리 독립시켰다. 그들의 문자가 상형문자여서 용이하였을 것이다. 하나의 기호가 된 “죽(竹) 계열의 문자들이 무려 990개나 되어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였다.
용트림을 하듯이 얽히고설킨 뿌리는 “계층도 중심도 없이 연결되는 요소의 연쇄”로 리좀의 일면을 지녔다. 새로운 출구요 대안이 되는 점에서 일치하나, 외적내적으로 복제되는 계보의 존재방식에서 다르다. 대나무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탈구조의 선험이다. 대나무는 생래적으로 차이를 내재화한 존재의 본령이다. 단일한 카테고리에 수렴되지 않는 태생적으로 변별되는 ‘차이’는 공(空)과 화엄의 세계에서유출된 것일까. 거침이 없고 경계를 침범하면서도 주춤거리는 일이 없는 “대나무는 또한 반대되는 것을 서로 보완하고 일치시키는 마력을 지닌” 영험한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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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나무를 테마로 설정하고『침묵을 엿듣다』라는 제목을 붙여 한 권의 책으로 묶는다. 거시적 미시적으로 나무의 이미지를 기술하면서 마땅히 허와 실을 되비추는 근거자료로 시가 소비되었다. 전통과, 신화와, 현존하는 생명체들과 소통은 다분히 객관적 방식을 택하였다. 고목이나 혹은 여타의 여린 나무만이 아니라 사물들 나아가 사람과의 소통은 언어 이전의 느낌 덩어리들을 헤아리고 생각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때 원활해질 것이다.
본 산문은 격월간《정신과 표현》에서 2년간, 계간지《애지》에서 2년간 연재한 것이다. 출간을 앞 둔 시점에서 얼마간 저어된다. 밤과 낮의 경계에 있는 새벽의 불투명한 시력으로 사물을 읽어낸 것은 아닌지 일말의 두려움이 없지 않다. 이런저런 상념에도 불구하고 그간에 연재한 글을 읽어주고 응원해 준 여러 선생님들의 말씀에 힘입어 책을 묶게 되었음을 아뢰며 아울러 감사를 전한다.
- 지은이,「프롤로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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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분 시인∥
∙ 정재분 시인은 계간 시전문지《시안》에서「사나사」외 4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시집으로『그대를 듣는다』를 상재했으며, 합동기행 시집으로『티베트의 초승달』이 있다.
손톱을 깨무는 버릇이 있는 시인은 자기존재의 탐구와 존재 증명의 일환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작업을 하면서, 언어가 없는 사물의 본질에 지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미시적이고 객관적 시각이 요구되는 작업을 통해 경이로운 눈빛으로 내면의 숨은 아이와의 조우한다. 시인은 궁금증이 많은 숨은 아이의 질문을 되뇌며 그 해답을 찾는 도정을 통해 자기발견에 이르는 길을 찾아간다. 최근에 생긴 걷는 습관이 ‘아이’와 ‘사물’의 수화를 배우는데 용이하다는 그가 첫 번째로 엮는 이 책은, 그만큼 의미가 크다.
본 산문집『침묵을 엿듣다』는 격월간《정신과 표현》에서 2년간, 계간 문예지《애지》에서 2년간 연재한 것을 한데 모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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