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도행전 2:42-47
제목: 초대교회성도들의 소통
일시: 2016. 5. 15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사도행전 2장은 소통의 장이다. 오순절 초대교회성도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성령이 바람같이 불같이 임했다. 그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을 했고 천하각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성령의 소통케하는 역사였다. 그리고 그날 사도 베드로는 그 유명한 오순절 설교를 하는 것이다. 그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라.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그 회개 역시 성령의 소통케 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늘과 땅이 소통되었는데 그 소통의 분위기가 초대교회성도들 사이에도 이어지며 초대교회와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와도 이어지고 있다. 그들은 어떻게 소통하고 있는가?
II. 초대교회성도들은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을 내야 하고 돈을 써야 하고 어떠한 테마를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할 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주님도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다. 주님은 보통 유대인들이 상종하기를 꺼려하는 사마리아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수가성으로 들어가셨다.
하지만 만나야 교제가 있고 만나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일은 만나서 해야 한다. 요즘 우리는 소통과 교제를 메일이나 카톡으로 많이 한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하거나 함께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원한다면 카톡이나 메일정도로는 안되고 만나야 한다. 급하면 전화를 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만남보다는 수준이 낮은 것이다. 만날 때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얼굴(facial expression)표정이나 제스쳐 그리고 목소리 톤 등으로 나의 감정과 의지와 뜻을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만난다는 것은 시간이 들어가고 돈이 들어가고 에너지가 들어가는 것이기에 만남 자체가 큰 비중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의 여동생네가 암웨이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올해 3월 은퇴를 했다. 서울에서 살았는데 제주도로 이사가기로 결정했다. 가장 섭섭해 하시는 분이 어머니이시다. 옆에 있으면 딸을 늘 볼 수 있는데 제주도에 가시면 보고 싶을 때 바로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도도 해외 아닌가! 그래서 어머니에게 핸드폰 배우라고 했다. 그러면 자녀들은 물론 손주들까지 단체카톡에 사진도 올리고 소식도 주고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결국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위로가 될까? 아니다. 부모님들에게 반은 제주도에서 반은 서울에서 사시라는 위로가 계속된다. 교제와 나눔은 전화한통이나 메일 혹은 카톡으로 될 일이 아니다. 더 깊고 인격적인 교제를 위해서 직접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초대교회성도들은 모이는데 선수였다. 오늘 본문 44절을 보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46절을 보라.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모이기에 힘쓰는 것이다. 모든 일들은 모이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모일 때 예배할 수 있고 모일 때 함께 기도와 찬송을 할 수 있고 모일 때 서로의 필요를 알고 채울 수가 있는 것이다.
아이젠반 이 건물로 오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만의 공간 갖기를 그토록 갈망했다. 왜냐하면 새벽부터 시작하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종종 소리를 내면서 하는 경배와 찬양과 통성기도 그리고 예배 등을 위해, 무엇보다 된장 김치 냄새나는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고 우리의 방언으로 시끄럽게 해도 누가 뭐라하지 않을 교제를 위해서 말이다. 그래서 대상으로 삼은 것 가운데 하나가 독일교회를 구입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었다. 강력한 물망에 오른 것이 하나 있었는데 하일란드 키르세이다. 우리가 쓰기 딱 알맞았다. 그래서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목사님은 몇 개의 교회를 맡아 사역하고 계셨다. 각 교회마다 그리 많은 교회식구가 출석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그곳에 출석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몇분만 이해하고 허락하면 될 것 같았다. 우리는 그들의 결정을 위해 기다렸다. 결국 부결되었다. 후에 알았는데 그 교회 교인은 우리가 본 대로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교인이 많았다는 것이다. 회의를 할 때는 바로 그런 분들도 다 참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출석하는 사람은 극히 적어도 등록된 교인들이 많았다. 교회식구라고 할 때 보통 독일은 등록교인이고 한국은 출석교인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정부에 등록이 되면 종교세가 자동 납부되고 교인이 자동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출석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종교세를 잘 내면 교인으로 다 임무를 다하는 것같다. 그러니 일주일에 한번 예배하면 크게 잘하는 것이고 보통 일년에 3번 만난다고 하지 않는가? 부활주일, 감사주일, 크리스마스이다. 또한 더 적은 사람은 평생에 3번이라고 한다. 유아세례, 결혼식, 장례식이다. 주일을 성수하고 주일예배를 왜 꼭 드리라고 하는가? 그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우리 안에서의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부예배를 드릴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1부를 드려라. 2부가 어려우면 독일교회나 영국교회나 예배드리기를 작정해야 한다. 수요예배가 있다. 새벽기도가 있다. 작은교회 모임이 있다. 초대교회성도들의 소통은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III. 초대교회성도들이 그렇게 만나서 무엇을 했는가? 하나님을 찬미하고 기도하고 예배를 했다. 그들은 성령으로 하나 되어 소통이 되어 있고 같은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에 영적으로 충만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인 교제가 궁극적인 목적지임을 알고 있다.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단체도 아니고 다른 어떠한 취미활동을 하는 동아리 모임도 아니고 사회를 돌보는 자선사업단체 NGO 그룹도 아니고 오직 복음으로 뭉쳐져 있던 교회공동체인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성도들은 성령의 소통을 그들의 삶에서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그저 우아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고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양복을 입고 성경책만 끼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작업복을 입고 먼지를 마시고 번거럽고 피곤한 일을 자청하여 감당했다. 그들이 만나서 무엇을 했는가? “모든 물건을 통용하고...” 그게 쉬운 일인가? 빌려주면 가지고 오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서로 통용하면 내것 네것이 없기에 주인없는 물건이 되기 쉽다. 그러면 금방 망거지지 않는가!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그것은 사심 없는 희생이다. 그리고 가장 많이 나오는 초대교회성도들의 모습은 “떡을” 뗀다는 것이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교제의 최고 상징물이다. 할 얘기가 있으면 차나 한잔할까요? 라고 한다. 그때는 긴장한다. 뭔가 필요해서 만나자고 하는구나 싶다. 그러나 “식사한번 합시다”라고 할 때는 나를 보고 싶어서 만나자고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독일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자고 할 때는 아주 친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다윗이 조나단의 아들 절름발이 므비보셋을 다윗의 상에서 늘 먹게 했다. 한 상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가족으로 보는 것 아닌가! 왕의 가족으로 보는 것이다. 식사를 한다는 것은 가장 친근하다는 것이다. 맛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식사를 하는 것은 밥맛 떨어지는 사람과 하는 것이 아니라, 밥맛이 생기게 하는 사람과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함께 먹는다는 것은 아주 친하다는 말이고 복된 일이다.
성경에는-많이 의식하지 못했고 소홀히 여길 수 있었겠지만 - 의외로 먹는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 먹는 것의 의미가 얼마나 큰지 모른다. 먹는 것을 결코 천박하게 여기지 말라. 교제의 최고 상징이고 그 의미는 너무나도 깊은 것이다. 주님은 죄인과 세리와 더불어 음식을 드셨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15:1-2). 지난 주 빚쟁이 자녀 말씀을 전할 때 본문의 서두이다. 만나 친교하고 관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그 음식 먹는데 있는 것이다. 주님은 상종치 못할 사람들과 음식을 먹었다. 여리고 성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이 “... 삭개오야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신다. 오병이어의 표적에서도 그날 무슨 말씀이 선포되었는지 기록이 없어도 먹은 역사는 씌여 있다. 한 소년이 제공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지 않는가! 사람들은 오병이어를 먹은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의 떡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었다. 주님이 십자가의 사역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을 보내실 때도 최후의 만찬을 하셨다. 그리고 떡과 잔을 나누시며 당신의 몸이요 당신의 피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바다에서 고기잡으로 다시 돌아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이른 새벽에 나타나신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새벽에 숯불 고기를 구워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조반을 먹으라”고 하시며 침묵이 흐른다. 이미 제자들은 주님께서 하실 말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주님은 소통하기 위해서 식사를 하신다. 그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만찬인가? 얼마나 값지고 축복된 만찬인가?
워렌 버핏과의 점심경배가 있다고 한다. 2만5천달러(약 3000천만원)부터 시작을 한다. 점심을 먹으면서 어떠한 주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한다. 다만 향후 버핏의 투자계획에 대해서는 물을 수 없다고 한다. 사업이익을 빼갈까봐서이겠지. 워렌버핏은 2000년도부터 15년 동안 자신과 점심을 경매에 부쳤다고 한다. 그래서 총 1790만 달러 즉 198억원정도를 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것을 기부하거나 자선사업을 했다. 2014년도에는 싱가포르의 앤디추아라는 사람이 216만6766달러 즉 22억원 정도에 버핏과의 점심을 함께 했다는 것이다.
IV.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다. 먼저 우리가 성령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한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이다. 소통이 있게 되면 우리는 지체들과 더불어 소통이 있게 된다. 지체들이 하나가 되면 세상이 보게 되고 하나가 되게 된다. 하나님과 나, 나와 다른 지체, 그리고 우리와 세상 이렇게 소통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지막 47절 말씀을 보라. “...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오늘 주 안에서 함께 교제하는 귀한 시간들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