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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초 김부용 묘소 참배를 마치고 와서
오늘은, 천안문인들이 주축이 되어 거행하는 조선조 여류시인 "운초 김부용 추모제"를 다 녀왔습니다.
자료가 좀 부실하더라도 이해주시길 바랍니다.
ㅇ 일 시 : 2002. 4. 28. 11:00- 13: 30
ㅇ 장 소 : 천안시 소재 광덕산(광덕사) 근처 운초 묘역
ㅇ 내 용 : 분향시 낭송, 헌다, 일반제례, 낭송문학회 시낭송,
들차회, 운초의 문학세계 고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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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초김부용 소개 1)
부용은 성천 기생이다. 용모가 아름답고 시를 잘 지었다.
그의 詩는 관서 지방에 크게 유행하였다.
나그네와 함께 해주 부용당에서 노닐었는데, 나그네가 詩를 지어주기를
芙蓉當上芙蓉立 人芙蓉勝花芙蓉
부용당상부용입 인부용승화부용
부용당 위에 부용이 서 있어
사람 부용이 꽃 부용을 능가하네.
하였다.
나그네의 시가 비록 촌학자의 고풍에 지나지 않지만 또한 과장하고 있다.
부용의 명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戒酒戒詩
계주계시
酒過能伐性 주과능벌성
詩巧反窮人 시교반궁인
詩酒雖爲反 시주수위반
不疎亦不親 불소역불친
[술을 삼가고 시를 삼가다]
술이 지나치면 본성을 헤치고
시에 뛰어나면 사람이 궁해진다.
시와 술이 비록 벗이 된다 하여도
멀리 친하지나 말았으면 하노라
다른 해석-
[술을 삼가고 시를 삼가다]
술이 지나치면 본성을 헤치고(酒過能伐性 주과능벌성)
시에 뛰어나면 사람이 궁해진다.(詩巧反窮人 시교반궁인)
시와 술이 비록 벗이 된다 하여도(詩酒雖爲反 시주수위반)
멀리도 가까이도 말았으면 하노라(不疎亦不親 불소역불친)
열녀(烈女)라도 머리 가 센 뒤에 정조를 잃으면 반평생의 절개가 물거품이 된다.
옛말에 이르기를 '사람을 보려 거든 그 후반생을 보라'고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명언이다."
하였다. 비록 천한 기생의 몸일지라도 사랑의 아픔을 조용히 인내하며 낭군을 따라 늙을
때까지 수절한 그녀들의 이름은 지금도 곱게 전해져 오고 있다.
북망산 기슭의 총총한 무덤 속에는 당대를 풍미하던 영웅호걸도 있고, 천하를 좌우하던 고
관대작의 묘도 즐비하지만 오늘날 그들의 무덤을 찾는 이는 별로 없다. 하지만 한평생 기
생과 부실로 살면서 천대를 받았지만 가슴 속에 아로 새긴 설움을 정갈한 시로 엮은 부용
의 삶은 오늘날 만인의 심금을 울린다. 또한 그녀를 흠모하는 손님이 날로 더하니 세월은
흘러도 아름다움은 영원한 것인가. 뜨거운 날씨에 가파른 산길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기
어 오르지만 힘이 들수록 아름다운 그녀의 자태는 영롱해 보이고, 애모의 정도 더욱 솟아
난다.
부용의 사랑
김부용(金芙蓉)은 1812년 평안도 성천에서 무산(巫山) 12봉의 정기를 받고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네 살 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에
통하였다. 열 살 때 부친을 여의고 그 다음해 어머니 마저 잃으니, 부용은 어쩔 수 없이 퇴
기의 수양딸로 들어가 기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시명(詩名)이 운초(雲楚)인 부용은 한번 배우면 둘을 깨우칠 만큼 영특하였고, 용모도 몹
시 고와 뭇 사내들의 가슴을 태웠다. 그러나 운초는 오만함 없이 사람을 정성으로 대하고,
물리치되 서운함이 없도록 하였다. 열 두 살에 기적에 오르고, 열다섯살엔 시문과 노래와
춤에 능통할 뿐만 아니라 얼굴마저 고와 천하의 명기가 되었다.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풍류객이 찾아와 재기를 칭찬하고, 수령의 수청을 독차지해 동료 기생의 시샘을 받았
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노류장화의 외로움과 설움으로 슬픈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열
아홉 살이 되었을 때 운초에게 일생의 전환기가 왔으니 성천에 신임 사또가 부임해 온 것
이다. 그는 정사에만 힘쓰는 명관(名官)으로 운초의 특출한 용모와 재색을 아껴 자기 스승
인 평양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소개를 하였다.
김이양(金履陽, 1755∼1845)은 호가 영천(淵泉)으로, 풍채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으
며, 예조 판서를 거쳐 평양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성품이 너그러운 김이양은 젊었을 때
몹시도 가난하여 굶기를 밥먹 듯하였다. 하루는 저녁도 못 먹고 굶고 자는데, 도둑이 들어
쌀이 없자 부뚜막을 헐고 솥을 떼어가는 소리가 났다. 부인이 남편을 깨워 살림살이의 전
부인 솥을 가져 간다고 하자 김이양은,
"오죽 가난하면 남의 집 솥을 떼어가겠소. 우리보다 못한 사람인 것같으니 내버려 둡시다"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도둑은 크게 깨달아 솥을 그냥 두고 갔으며, 그 후로 열심히 일하
여 부자가 되었다. 훗날 김이양이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옥당 학사(玉堂學士)로 있을
때 은혜를 갚고자 찾아 와 둘은 그 후 백년지기처럼 친하게 지냈다 한다.
당시는 사또가 부임하면 곧 직속상관에게 부임 인사를 하는 것이 정례로 되어 있어, 신임
사또는 정무가 대략 파악되자 운초를 데리고 평양으로 김이양을 찾아갔다. 특별히 아끼는
제자가 오자 김이양은 그를 위해 대동강가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 자
리에서 신임 사또는 부용을 소개하였는데, 그 때 김대감의 나이는 이미 77세였고, 부용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시문을 통해 일찍이 김이양의 인품을 흠모해 온 부용은 평양에 머
물면서 김이양의 신변을 돌보아 드리라는 사또의 명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 천거에 대
해 김이양이 거절하자,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입니다."
라고 말하여 부용을 거두게 되었다. 김이양은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끔찍히 사랑하였
고, 부용 역시 연만한 늙은 감사의 공양에 정성을 다하였다. 두사람은 비롯 김대감이 나이
가 들어 남자 구실은 못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정답게 지냈다.
그러던 중 김이양이 호조 판서가 되어 한양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이별을 하
게 되자 김이양은 직분을 이용하여 부용을 기적에서 빼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었다. 그
런 다음 정식 부실(室)로 삼았으나, 훗날을 기약하며 혼자서 한양으로 떠나 갔다.
이별이란 누구에게나 애타고 눈물겹다. 그러나 그 깊이는 전적으로 그가 겪은 사랑의 질
에 좌우된다. '정의 문을 닫으면 마음은 한가로운 가운데 외롭고, 정의 문을 열면 마음은
괴로운 가운데 행복하다'라는 말이 있다. 생이별을 한 운초는 재회의 날만 기다리며 외로
움과 그리움의 나날을 보냈다. 몇 달이 가도 소식이 없자 원망도 많이 하였다. 멀리 있는
님을 생각하니 때로는 보고도 싶고, 때론 잊지나 않았나 의심도 하고, 때론 걷잡을 수 없
는 이별의 슬픔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기도 하였다. 부용은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시
를 써서 인편으로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부용상사곡'이라는
보탑시(寶塔詩)이다.
이별하옵니다 (別)
그립습니다 (思)
길은 멀고 (路遠) 글월은 더디옵니다 (信遲)
생각은 님께 있으나 (念在彼) 몸은 이 곳에 머뭅니다 (身留玆)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紗巾有淚)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雁書無期) 없습니다
향각서 종소리 들려 오는 (香閣鍾鳴夜) 이 밤
연광정에서 달이 떠오르는 (鍊亭月上時) 이 때
쓸쓸한 베게에 의지했다가 (依孤枕驚殘夢) 잔몽에 놀라 깨어
돌아오는 구름을 바라보니 (望歸雲 遠離)
멀리 떨어져 있음이 슬픔니다
만날 날 수심으로 날마다 (日待佳期愁屈指) 손꼽아 기다리며
새벽이면 정다운 글월 펴 들고 (晨開情札泣支 ) 턱을 괴고 우옵니다
용모는 초췌해져 거울을 (容貌憔悴把鏡下淚) 대하니 눈물 뿐이고
목소리도 흐느끼니 사람 (歌聲鳴咽對人含悲) 기다리기가 이다지도 슬픔니다
은장도로 장을 끊어 죽는 ( 銀刀斷弱腸非難事) 일은 어렵지 않으나
비단신 끌며 먼 하늘 ( 珠履送遠眸更多疑) 바라보니 의심도 많습니다
어제도 안 오시고 오늘도 (朝遠望暮遠望郎何無信) 안 오시니 낭군을 어찌
그리 신의가 없 습니까
아침에도 멀리 바라보고 (昨不來今不來妾獨見欺) 저녁에도 멀리 바리 보니
첩만 홀로 속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대동강이 평지가 된 뒤에나 (浿江成平陸後鞭馬 過否) 말을 몰고 오시려 합니까
장림이 바다로 변한 뒤 (長林變大海初乘船欲渡之)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렵니까
이별은 많고 만남은 적으니 (見時少別時多世情無人可測) 세상사를 누가 알 수 있으며
악연은 길고 호연은 짧으니 (好緣短惡緣長天意有誰能知)
하늘의 뜻을 누가 알 수 있겠습 니까
운우무산에 행적이 끊기었으니 (一片香雲楚臺夜神女之夢在某)
선녀의 꿈을 어느 여자와 즐기시나요
월하봉대에 피리 소리 끊기었 (數聲良甥柰樓月弄玉之情屬誰)
으니 농옥의 정을 어떤 여자와 나누고 계십니까
잊고자해도 잊기가 어려워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안타깝게도 홍안만 늙어가고
생각치 말자해도 절로 생각나 (不思自思乍倚牡丹峯每歎綠髮衰)
몸을 모란봉에 의지하니 슬프도다 검은 머리 자꾸 쇠해가고
홀로 빈 방에 누우니 눈물이 (獨宿空房下淚如雨三生佳約寧有變)
비오 듯하나 삼생의 가약이야 어찌 변할 수 있으며
혼자 잠자리에 누었으나 (孤處香閨頭雖欲雪百年貞心自不移)
검은 머리 파뿌리 된들 백년 정심이야 어찌 바꿀 수 있으랴
낮잠을 깨어 창을 열고 화류 (罷春夢開竹窓迎花柳少年總是無情客)
계년을 맞아들여 즐기기도 했으나 모두 정 없는 나그네 뿐이고
베게를 밀고 향내 나는 옷으로 (推玉枕攬香衣送歌舞者 莫非可憎兒)
춤을 춰 보았으나 모두가 가증한 사내 뿐 입니다.
천리에 사람 기다리기 어렵고 (千里待人難待人難甚矣君子薄情豈如是)
사람 기다리기 이 토록 어려우니 군자의 박정은 어찌 이다지도 심하십니까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바라보니 문을 나가 바라보기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옵건데 관인하신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대장부께서는 강을 건너 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사람은 만나 사귀다 보면 정이 든다. 남녀의 연정은 모든것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지금보
다는 소식 전하기 어렵고, 만나기 힘든 옛날이 그 애절함이 더욱 깊었을 것이다. 아무리 기
다려도 오지 않는 김이양을 원망하며 눈물로 하루를 보내던 중 하루는 한양에서 예조 참
판 강순황이 평양에 왔다. 그는 이 곳에 명기 부용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용을 만나 보
고자 하였고, 부용은 혹시 한양 소식이라도 알 수 있을까 하여 그를 만났다.
당대의 시인 강참판은 일찍부터 부용의 시를 감탄하여 오던지라 부용을 직접 만나자 기쁨
에 취해 밤 늦도록 시로 화답하였다. 그러나 헤어질 때가 되자 그는 연모의 정이 솟구쳐 떠
나가는 부용을 배웅하며,
나의 혼은 그대를 좇아가고 (魂逐行人去)
빈 몸만 문에 기대어 섰오 (身空獨依門)
라고 읊었다.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솔직히 노래한 것이다. 그
러자 부용도 화답하기를,
나귀 걸음 느리기에 내 몸 무거운가 했더니 (驢遲疑我重)
남의 혼 하나를 함께 싣고 있었오 (添載一人魂)
라고 하여 사내의 애간장을 뜨겁게 녹였다. 눈같이 흰 살결과 꽃같이 곱던 얼굴도 기다림
의 고통과 상심한 슬픔에 나중에는 피골이 상접할 야위었다. 부용은 님을 기다리며 많은
연모의 시를 썼다.
<빗소리를 들으며 (雨 中 書 懷) 〉
한번 서울로 떠나 이별하니 생각은 하염없고 (一別成都惱遠思)
뜰 꽃은 떨어져서 비 내리듯 하는구나 (庭花如雨滴 )
처마 밑 까치 소리에 어린 꿈 깨고보니 ( 鵲數聲 罷夢)
꿈에 본 길 희미하게 실낱처럼 떠오른다 (夢中歸路細如絲)
봄바람은 화창하게 불어오고 (春風忽 蕩)
서산에는 또 하루 해가 저문다 (山日又黃昏)
오늘도 님 소식은 끝내 없건만 (亦如終不至)
그래도 아쉬워 문을 못 닫소 (猶自惜關門)
실버들 휘늘어진 창에 기대어 (垂楊深處倚窓開)
님 없는 집에는 이끼만 낀다 (小院無人長綠苔)
주렴 밖엔 봄바람이 절로 불어와 (簾外時開風自起)
님 오시나 속은 게 그 몇 번인고 (幾回錯誤故人來)
학수고대하던 김이양이 사람을 보내 부용을 부르니, 부용은 한양 남산 중턱에 신방을 꾸렸
다. 그 집은 단촐하였지만 숲이 우거졌고, 기화요초로 정원을 꾸며 '녹천당(祿泉堂)'이라
하였다. 이 곳을 찾아 온 김대감의 친구는 부용을 '초당마마(草堂)'라 불렀다. 김이양과 교
제를 하던 많은 노정승들은 부용과 즐기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 하였다. 어리면서도 시재
가 뛰어나고 인물 또한 고와 부용은 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였다.
김이양이 83세로 벼슬에서 물러나자 임금은 그에게 '봉조하(奉朝賀)'라는 벼슬을 제수하
였다. 그 벼슬은 종신토록 품격에 해당하는 녹을 받고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는 조복(朝
服)을 입고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예우직(職)이다. 김대감이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한 생
활을 하자 그들은 원앙새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과거에 급제한지 60년이 되는 회방(回榜)잔치가 89세에 있자, 김대감은 부용을 데리고 이
곳 천안 조상의 묘를 참배하였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법,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 지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대감은 92세의 천수를 누리
고 세상을 떠났다. 임종 시 김대감은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
때 부용의 나이는 겨우 33세였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님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
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풍류와 기개는 호산의 주인 (風流氣槪湖山主)
경술과 문장은 재상의 기틀 (經術文章宰相材)
십오 년 정든 님 오늘의 눈물 (十五年來今日流)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고 (峨洋一斷復誰栽)
부용은 고인과의 인연을 회상하면서 일체 외부와의 교류를 끊고, 오로지 고인의 명복만을
빌며 16년을 더 살았고, 그녀 역시 님을 보낸 녹천당에서 눈을 감았다. 부용은 어느날 꿈에
서 그리운 님을 뵙고 다정한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시를 읊었는데,
20년간 그리던 님을 이제사 꿈에 보니 (二十年前夢裡人)
서로간 상대하니 백발이 새로 났네 (海天相對白頭新)
이제라도 헤어진다면 서러워 말고 (從此無心傷歲暮)
잔 들어 담소하며 봄을 보내소서 (一樽談笑別生春)
그녀는 임종이 다가오자 유언으로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주오."
라며 다시 못 올 불귀의 객이 되었다.
예쁜 운초의 묘
천안의 태화산에서 광덕사 경내로 들어가는 길과 뒷산으로 올라가는 삼거리 오른쪽에
는 '朝鮮時代 女流詩人 雲楚金芙蓉墓 가는 길'이라고 쓴 나무푯말이 흰 바탕에 검은 글씨
로 씌어 있다. 산마루에 오르니 정갈한 무덤이 한 기 있는데, 그 옆 묘비에는 '詩人 雲楚 金
芙蓉之墓'라 쓰여 있다. 무덤은 조그맣고 동그라니 부용의 얼굴처럼 예쁘기만하다. 무덤
앞에 발을 멈추고 명복을 비니, 패랭이 꽃이 서너송이 피어 찾아 온 손님을 반기어 맞는
다. 패랭이 꽃은 파란색으로 화려하지도 않고, 추하지도 않아 마치 부용의 모습과 성품을
보는 듯하다. 몇 송이 꺾어 손에 쥐고 향기를 맡으니 더욱 연모의 정이 솟는다. 생전 그토
록 사랑하였던 김대감을 죽어서도 가까운 산기슭에서 모시니, 부용의 사랑은 끝나지 않은
것인가?
옛 말에 '정이 있으되 말이 없으니 흡사 정이 없는 것 같다(有情無語似無情)'라는 말이 있
다. 하지만 궂이 말은 안하여도 꽃 향기로 답하니 서운치 않고, 이렇게 연모의 정을 나눌
수 있는 묘라도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랑하면 욕심이 생겨 이별을 두려워하게 되지만, 사랑이 다가 올때도 한 인간의 보잘 것
없는 선택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다가 오듯이 사랑을 보내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만남과
이별은 하늘이 만드는 운명이므로 인간의 의지로는 어찌 할 수 없다. 그것은 생이 유한한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지금이라도 망자(亡者)를 일깨워 술잔을 나누며 생
의 애환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여인은 그저 웃음으로만 답할 뿐이다.
<고제희 교수論>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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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찬 문학서재(http://member.kll.co.kr/so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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