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서교육총회 산하 광진학교 모습. 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에 당시 교편 생활을 했던 김구 선생이 보인다. 김구는 1908년 해서교육총회 학무총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
1907년은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면, 신년 초부터 대부흥운동이 불기 시작한 때이며, 독노회가 설립되면서 한국인 목사 7인이 장립된 경사스러운 한 해였다. 반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이 최종 단계에 이른, 한국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해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한국 교회와 침략자들 사이에는 상호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 부흥과 민족중흥의 일환으로 교회를 많이 세우고, 교회 옆에는 반드시 부속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전개했다.
장로교 계통의 학교만 하더라도 1907년에 405곳, 1908년에는 561곳, 1909년에는 719곳 등 매년 약 150개교가 증설되었다. 일본 침략자들은 교회의 교육 목적을 알아차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1908년 최광옥(崔光玉)의 제안으로 황해도 지역의 교육 보급을 확대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가 곧 해서교육총회다. 이는 최명식(崔明植), 김용제(金庸濟) 등 황해도 지역 기독교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면학회(勉學會)가 발단이 되었다. (교회사총람)
신세원 목사 ekd@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