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10월 14일,
세계 最古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발견
1966년 당시 석가탑은 두 차례나 사리함을 노린 도굴로 금이 가는 등 손상이 심해 붕괴의 위기에 몰렸다.
이에 긴급하게 보수를 위해 해체 작업을 하였다. 보수를 위해 2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는 중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지주가 부러지면서 옥개석이 땅바닥에 추락하는 사고가 났다. 이러면서 땅에 내려놓았던 3층 탑신
석과 부딪치면서 탑신석은 부숴졌고 이와 함께 2층 탑신 내부가 노출되어 그 안의 사리감이 모습을 드러냈다.
1966년 보수 공사 당시
이처럼 경황이 없던 때 갑자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유물이 발견됐다. 10월14일, 1200여 년 동안
사리함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있던 유물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 ‘무구정광대
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으로 밝혀진 것이다.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이 발견된 사리구(위, 좌), 비단에 쌓여진 대다라니경 발견 시의 모습(위, 우),
그리고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리니경(아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8세기 중엽에 간행된 목판인쇄본으로, 너비 약 8㎝, 전체길이 약 620㎝이며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놓은 것이다. 다라니경은 죄를 씻고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다라니(일종의 주문)를 외우고, 작은 탑을 만들어 그 속에 이 경전을 모셔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2장의 종이를 이어 붙였으며, 1행 8~9자의 다라니경문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적어 놓아
길이가 6.2m에 달한다.
무구정광대다리니경의 제작 년대는 대략 704년~751년 사이로 추정된다. 근거는 산스크리트어로 된
다라니경이 처음 중국에서 한자로 번역된 것이 704년이고,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인 751년에
김대성의 발원으로 세워졌고 석가탑은 불국사와 함께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쇄문화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중국은 다라니경 내에서 확인되는 8자의 무주제자를 근거로
들어 700년~704년 사이에 중국에서 만들어져 신라로 보내진 것을 탑에 안치한 것이라 주장하였고
일본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정확한 제작연대가 불분명함을 들어 770년에 간행된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이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런 우격다짐이나 흠집 내기를 넘어 다라니경의 명성에 의구심이 들게 하는 일이 2005년
일어났다. 다라니경을 석가탑 안에 넣었다고 기록한 1024년(고려 현종 15년)의 중수기문이 사계
전문가들에 의해 판독된 것이다. 1966년에 발견된 이후 40여년 만이다.
결락된 글자나 종이가 찢겨져 나간 부분을 감안해서 해당 기사 부분을 보자.
“대금도 한 묶음과 구리에 도금한 ○, ○칼 한 묶음, 무구정광다라니경…, 금으로 만든 병 하나, 수
금대 하나, 사리 8○, 수금도 한 묶음, 두루마리로 된 무구정광다라니경 한 권, 수금대 하나 등을
이 탑에 안치하옵니다.
(○○矣臺錦刀冬音一銅鍍金○...○刀冬音一无垢淨光
○羅尼[經]九偏全金甁一隨[錦]一舍利八○..○金
○一隨錦刀冬音一无垢淨光○羅尼經一卷隨[錦]一右之安藏爲白置...)”
요컨대 1024년 석가탑 중수 때 여러 부장품과 함께 다라니경을 안치하였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다라니경이 통일신라 때가 아니라 고려시대에 만들어져 탑 속에 넣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구심은 탑을 창건할 때 넣었던 다라니경을 고려 때 보수하면서 도로 집어넣었다는 사실을
적은 것으로 보면 어느 정도 풀린다. 더구나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때 탑에서만 발견되며 고려로 넘어
오면 ‘보협인다라니경’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다라니경이
발굴된 신라 탑은 10여기에 이르지만 고려 탑에서는 발굴된 예가 없다.
또 1007년 간행된 보협인다라니경은 정교한 인쇄기술로 제작된 반면 다라니경은 초보 수준이다. 인쇄
기술로 봐도 다라니경이 보협인다라니경보다 나중에 제작됐을 가능성은 없다. 무주신자(武周新字, 중국
당나라 측천무후가 제정하여 집권 당시만 일정기간에 사용했던 글자)를 일부 사용했으며, 서체가
고식이라는 점 등도 8세기 제작설에 설득력을 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