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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영성이어야 하는가?
“생명목회를 위한 영적 쇄신 심포지움”- 발제 1
유 해룡 교수 (장신대)
들어가는 말
언어는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가장 좋은 표지이다. 그러한 언어들 중에서 오늘날 가장 활발하고 폭 넓게 사용되고 있는 말들 중의 하나가 ‘영성’이라는 말이다. 그 말은 어떤 한 사람이 창안해 낸 말도 아니고, 어떤 운동이 만들어 낸 용어도 아니다. 그 말이 어디로부터 비롯되었든지 그 말은 오늘 이 시대의 정신세계를 가장 잘 표현해 주면서 동시에 그 정신적 욕구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주는 함축적 용어이기에 그 말은 불길처럼 퍼져 나가고 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의미로서의 영성이란 말은 결코 교회에서 창안된 독창적인 언어가 아니다. 이미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용어이다. 저널리스트 모이어스는 “영적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금세기의 가장 큰 이야기’라고 믿는다.”고 했다. 스티브 터너는 “우리는 영성으로 돌아오라.”는 말을 점증적으로 더 많이 듣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90년대의 영성이라는 말은 60년대의 정치에 부여했던 정도의 중요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것은 이 시대의 사회문화적 풍토와 각 개인의 신앙적 욕구가 서로 어울려져서 마침내 교회적 언어로 정착되어 가고 있는 말이다. 그러므로 영성이 회자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해 낸다면 오늘의 목회를 성찰하고, 미래 목회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이 글은 영성이 회자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상황을 진단하고, 이에 대응하고 있는 교회적 자세와 미래적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1. 시대적 상황
영성(spirituality)이란 말은 단순히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의 명사형으로 생각할 수 없다. 우리말에서 ‘영성적’이라는 말과 “영적‘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들이 다른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전적인 정의 이전에 정서적인 차이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신학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적‘이라는 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일치된 이해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지 않다. 1990년대 이래로 ’영성‘이라는 말이 활발하게 회자되면서 그 말의 정의나 의미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영적이라는 말이 기독교적 환경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엇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말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에 교리적이고 신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소 불편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것은 단순히 정서적인 느낌만은 아니다. 영성이라는 말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의 여지는 영성신학적인 입장에서조차 그 용어에 대해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정의가 내려져 있지 않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영성이라는 말의 회자 배경을 개략적으로 살펴봄으로서 영성이라는 말의 의미를 간접적이고 포괄적으로 전해 받을 수밖에 없다.
60년대 이래로 서구 신학은 종교 다원주의와 심리학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아오고 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이래로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 영역을 제도권적인 교회 밖으로 확대시키고자 하는 분위기가 일어나면서 영성의 의미를 보다 폭넓게 사용해 오고 있다. 개인의 믿음 생활이 교회법적인 테두리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지면서 경험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믿음과 교회의 권위보다는 믿음과 개인의 경험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이전의 경향과 비교하고 그 독특성이 있음을 일깨우기 위해서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즐겨하였다. 20세기 후반이 시작되는 60년데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세계는 매우 급진적인 변화를 겪어왔다. 종교는 실제이고, 문화는 종교의 표현 양식이라는 폴 틸리히의 주장대로 미국의 60년대는 종교와 문화가 서로 굳게 손을 잡은 시기였다.
종교, 문화, 경험 이 세 영역이 서로 굳게 손을 잡으면서 나타난 합성된 산물이 뉴에이지 운동이다. 이 운동은 이전부터 있어왔던 운동이기는 하나 그것이 대중들의 가슴속으로 깊이 파고들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60년이다. 이 운동은 무슨 특정한 노선이나 선언문을 내건 의도적인 운동은 아니다. 해묵은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내면의 자유를 구하고자 하는 내면적인 운동이요, 정신적이요, 문화적인 운동이며,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생명운동이기도 하다. 이 운동을 한마디로 규명하기는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경향을 지니고 있다. 이 운동의 이론가인 매릴린 퍼거슨은 이 시대의 특징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정신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실용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초월적이기도 하다. 이성과 신비, 위력과 겸양, 상호의존과 독립 등 두 대립 요소들이 함께 공존한다. 이러한 모순된 시대정신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타난 자연발생적인 운동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이다.
60년대 미국의 젊은 세대를 분노케 하고 희의케 하는 사건들이 터져 나오면서 그 운동은 가속도가 붙었다. 1963년의 케네디대통령의 암살과 곧 이어 벌어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암살, 그리고 베트남 전쟁의 본격적인 개입, 극단적인 냉전의 갈등 분위기등이 지식인들 특히 젊은이들을 분노케 하고 절망케 하였으며, 그들은 더 이상 희망을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의 문화, 종교, 사회를 향하여 저항하는 일단의 반문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반문화 운동이 60-70년대의 미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틀에 박힌 생기없는 물질 문명과 기술문명 사회로부터의 탈출과 자유를 선언하였다. 그들은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객관적인 진리와 절대적인 가치관에 더 이상 의미를 두지 않으려 하였으며, 그 대신 경험주의적인 종교 문화에 탐닉하였다. 동양의 신비종교 특히 인도의 힌두교가 새로운 시대 정신에 활기를 불어 넣는 듯 했다. 이러한 흐름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상대성과 종교 다원주의는 자연스럽게 퍼져나갔다. 이 세대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영성이란 전통적인 권위나 교리라는 형식보다는 내면적이요 초월적인 경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심층 심리학의 발달이 이러한 운동에 가세를 했다.
그동안 전통적으로 오직 종교의 영역이라고 믿어 왔던 영혼의 문제, 자아의 탐구문제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의 주제가 되었다. 추상적인 영역이었던 내면의 문제나 영혼의 문제가 구체적인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은 막연한 추상적인 실체가 아니라 경험적인 실체가 되었다. 이러한 심리학자들의 노력은 내면의 갈망으로 헐떡이는 새로운 세대에게 구원의 메시지가 되었다. 심리학자들은 이 새로운 세대들에게 의도적으로 신비적인 내면세계의 체험이나 종교 체험을 일으켜 주고자 하는 노력들을 하였다. 이러한 운동들이 물질적이고 권위적인 시대 흐름에 대한 회의주의에 부분적으로 해답을 주는 듯 했다. 대부분 이 운동들이 교회 밖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추구가 제도권적인 교회의 독점적인 영역이라는 전통적인 이해로부터 개인적인 경험의 영역이기도 하다는 확신이 점점 강하게 싹트기 시작했다.
과학주의나 물질주의의 반동으로서의 영성을 말하고 있다. 과학주의의 한계성과 위험성을 말하면서 그 위험성이란 물리적 차원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대한 상대적 궁핍을 말한다. 상상력과 신비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서 인간의 내면세계나 비물질적인 세계에 대한 불신을 낳게 하면서 모순되게도 동시에 내적인 갈증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 예로서 현대과학의 상징인 빌딩 숲을 거닐고 있는 세계 대 도시의 시민들이 보다 단순화된 삶을 희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과학 문명의 노예가 되어버린 내적 실향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작업이 바로 영성운동이다.
2. 개인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시대
우리는 지금 특정한 전통이나 권위에 자신에 신앙을 맡기기를 주저하는 세대에 직면해 있다. 열린 사회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가치관을 접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교리나 권위에 의존하고 있는 제도권적인 종교에 대하여 큰 신뢰성을 두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흔들리지 않는 내적인 바위를 외적인 권위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적 경험으로부터 찾으려 한다.
헨리 나우웬은 오늘의 이 세대의 사람들은 핵 인간이라고 정의하면서 핵 인간의 특징을 역사적 단절, 단편화된 이데올로기, 새로운 불멸에 대한 추구 등이라고 말한다. 현대인들은 연대감이나 연속의식 보다는 ‘지금 여기’ 라는 바로 그 순간만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핵 인간은 시대를 초월하여 타당한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우선적으로 가치있게 느껴지는 경험만이 중요한 이데올로기가 된다. 그리고 인간은 불멸의식이 분명할 때 ‘오늘 여기에’가 의미가 있으며 창조적 욕구가 발동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전통적인 믿음이나 권위에 대하여 연속의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 속에서 불멸의식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각 개인은 자신의 경험 안에서 불멸 의식을 찾으려 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보다 내면적인 실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체, 존재의 근원 등에 더욱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 사회에 명상이나 정신통일 또는 묵상을 위한 장소, 선이나 요가센터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대의 고독한 군중들은 점점 더 내향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헨리 나우웬은 지적한다. 그들은 보편타당한 외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는 대신에,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믿고자 한다. 이 세대는 개인적인 것에 절대 우위를 부여하는 세대이며, 자아 속으로 움츠려 더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세대이다. ‘바깥 어딘가’ 또는 ‘위 어딘가’에 아무 것도 없다면 ‘내면 어딘가’에 무엇인가 의미 있고 확실한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져야 현대인들은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내향성은 반권위주의를 지향하면서 동시에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물질적 안락함이나 욕구의 즉각적 만족에 빠질 수가 있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향적 세대들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내면에 계신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고 그 다양한 경험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름을 붙여 설명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오늘 시대 상황이 점점 공동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점점 개인주의가 팽배해져 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서양에서는 디지털 코쿤(Digital Cocoon) 족이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본래 코쿤족이란 안전한 공간에서 자신만의 생활 공간을 즐기는 칩거 증후군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인터넷을 통하여 외부와의 끊임없이 의사소통을 하면서도 칩거증후군을 가진 사람들을 디지털 코쿤족이라고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겪을 미래적 신앙 상태를 예측해 볼 수 있다. 그러한 현상이 바람직한 상태는 아니지만 현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도록 도와 주지 않는다면 그들이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지속하기도 어렵거니와 내적인 성숙을 이루도록 하는 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세대들에게 교회는 어떻게 그들의 영적 생활을 도와 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야 한다.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내적인 상처에 대해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혈연 지연적인 닫힌 사회로부터 무한 경쟁의 열린사회로 치달으면서 현대인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깊은 패배감과 좌절감을 자주 경험한다.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그들은 내가 누구인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건강 한가 즉 정체성 확인, 의식적 삶(사명의식)에 대한 재확인, 내적 상처에 대한 치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경쟁적이고 개인주의화 되어 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심층심리학적인 이해가 보편화 되어 가면서 사람들은 보다 자신을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심리적으로 접근하려 든다. 비교적 자신의 운명이 집단적인 체제에 의해서 결정되던 시대와는 달리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지어야 하는 열린사회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상당한 심리적 부담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한 현대 신앙인들에게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자아의 신비를 일깨워 주고, 자아의 정체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안내자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3. 현대 교회적 상황
오늘 교회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가야할 또 다른 변화의 조짐이 있다고 켐벨 존슨은 지적한다. 그는 오늘 미국 교회의 영적 흐름을 진단하면서 베이비부머 세대들을 예로 들고 있다. 그들 중에는 다음과 같은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믿음은 있으나 특정한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특정한 교파에 소속되지 않는 단체나 근본주의적인 회중들이나, 자기중심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뉴에이지 운동이나 동양의 종교에서 내면의 갈망을 충족시키려는 구도자 유형이다. 세 번째는 역동적인 하나님 체험 없이 교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베이비부머 세대의 사람들이 최근에 다시 교회로 복귀하면서 새로운 물음이 제기되고 있다. 그들은 전통적인 교리나 교회적 권위나 책 속에 갇혀진 가르침을 원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개별적으로 하나님 체험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제기해 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나고 있다. 현재 우리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세대 역시도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다. 이들이 지난 세월동안 사회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리다가 점점 실존적 불안에 직면하면서 새롭게 교회를 찾고 있으며 찾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한국교회는 선교 초기부터 미국교회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그런데 그 영향의 구도가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움직여 왔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교단에 속한 교회보다는 탈교파주의, 탈권위주의, 탈형식주의를 표방하면서 독립교회로 성장한 교회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새들백 교회, 윌로우 크릭 교회, 빈야드 크리스탼 펠로우쉽 교회들이 있다. 그러한 독립 교회들이 미국 사회 안에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으며 성장하고 있다. 그들은 형식화된 교리주의나 전통을 배제하고 오히려 성경의 가르침이 각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이 21 세기의 한국 교회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 주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미국의 베이비 부머들이나 한국의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연대는 차이가 있으나 비슷한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고 있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에 대해서는 그 이전 세대보다 더 불안감을 느끼며, 내면적인 성찰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 만큼 지성적이다.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교회가 각 개인의 불안과 내적 갈망에 대해서 적합한 답을 제시해 주기를 목말라 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들이 선포되어진 말씀을 들음으로서 그들은 각각 자기의 영혼 안에서 성령의 영향을 받게 된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개인 안에서 이러한 활동과 영향력에 대해서 어떤 일깨움을 받으며 또 어떻게 분별하고 반응해야 하는가를 도와 주어야 한다. 여기에 비로소 개별적인 영적 지도가 요청된다. 헨리 나우웬은 ‘영적 지도란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각자의 삶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분별하게 하고, 그래서 이 움직임에 대하여 기꺼이 순종하여 영적 삶을 향하여 중대한 결단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작업이다.“라고 했다. 윌리암 베리는 영적 지도는 ”어떤 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의사를 전달하시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사 전달하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며, 하나님과의 친교를 깊게 하고, 그 관계에 바탕을 둔 삶을 살다가도록,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도움이다.“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작업은 복음 증거자들이나 목회자들이 해야 할 몫이지만 오늘날 영적 지도를 특별한 영역으로 도는 이유는 현대 교회가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목회 신학적 진단
우리의 목회 환경은 이미 이러한 흐름 속에 놓여져 있으며 그 흐름은 더욱 가속화 될 것이다. 그러한 목회적 환경에 대응하지 못한 현대 교회를 일컬어 사람들은 영성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미 흐르고 있는 문제를 본질적인 것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교리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로,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함으로서 대안의 무능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 교회의 현재적 모습은 무엇인가?
현대 교회가 영적으로 무기력하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무기력하다는 말은 절대적인 영성의 결핍을 말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적인 영적 무기력이 더 심각하다. 오늘 이 시대는 지성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활짝 열려져 있다. 보다 수준 높은 지성적 경험을 통하여 보다 깊은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종교 체계를 쉽게 접함으로서 진리의 다양성을 맛보고 있다. 양자택일적인 사회로부터 양자 모두 일 수 있는 다원주의적인 사고가 팽배하고 있다. 그리고 다양한 영성의 교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불교나 힌두교가 매우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으며 한국 역시 선 수행이나 기 수행에 참여하는 인구가 점점 늘어나는 것도 그러한 현상 중의 하나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기독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다른 종교나 전통으로부터 소위 “영성”을 공급받을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다원적 사회 현상 속에서 고민하고 있는 그들은 현대 교회의 대화점이나 접촉점을 찾디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복음주의 신학자인 도날드 블러쉬는 오늘의 현대 교회가 내면 세계나 영성 생활에 대한 탐구나 훈련 보다는 외적인 활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경향은 개혁교회 노선을 강조한 교회에서는 회심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기는 했으나(여기서 회심이란 복음적 회심이라기 보다는 특정한 교회 문화적 회심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다원화된 세계 속에서 그리스인답게 살도록 도와 주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한다. 믿는 내용이나 신조가 생활 공동체 속에서 발휘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훈련이나 연습이 필요한데 현대 교회가 여기에 적절히 대응해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핵심적인 무엇이 빠져 있다는 의미에서 영성의 회복이 회자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이 회자되면서 개혁교회 신학의 핵심인 ‘계시 중심’의 신학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식’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에 직면하고 있다. 영생은 교리 문제 보다는 경험의 문제에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버나드 맥긴은 기독교 영성의 정의를 시도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살아있는 경험’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 영성은 믿음 자체에 대한 인식론적 반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교리와는 구분된다고 한다. 또한 인간의 모든 행동을 도덕적 규범과 관련시켜 평가하는 기독교 윤리학과도 구분된다고 한다. 기독교 영성은 생동력 있는 인간의 하나님 체험에 초점을 준다. 영성은 보다 직접적으로 분명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룬다. 이런 기독교 영성의 특성 때문에 영성의 회복을 언급하는 사람들로부터 전통적 권위나 교리적 권위에 무조건적 승인이나 동의를 기대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최근 들어 몰트만은 칼 바르트의 기독론 중심의 신학이 인간의 종교적 영적 체험을 다루기에는 너무나 계시 중심에 서 있어 적절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도날드 블러쉬는 바르트 신학에서 발전된 계시의 탁월성에 대한 강조와 아울러 인간 종교에 대한 철저한 부정은 능동적인 경건 훈련이나 경험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밖에 없닥 지적하고 있다.
또한 기독교 영성을 말할 때 교리학적인 접근과 인간학적인 접근의 상관관계성을 언급해야 한다. 교리학적인 권위가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체험적인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샌드라 슈나이더느나 에워드 카즌스는 영성의 문제를 다룰 때 계시의 문제보다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차원을 언급하며 이곳으로부터 인간은 궁극적인 실재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으며 그 실재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영성은 개혁 신학에서 계시와 인간의 경험적 의식과의 연계성을 간과해 버린 부분을 보완할 수 있다.
개혁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 타자성에 집중한 나머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질적 차이를 만들어 놓았고, 인간의 하나님 체험은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렸다라고 몰트만이 지적한 대로 기독교 영성은 절대 타자로부터의 계시와 인간의 경험적인 차원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연속성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떻게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에 대하여 기독교 영성은 이 둘의 관계를 온전하게 통합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로 인하여 개인의 철저한 변화의 경험을 목적으로 한다. 이러한 기독교 영성의 속성과 우리의 신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개혁 신학과의 조화점 속에서 오늘 우리의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 실제로 개혁사상의 틀을 분명히 하고 있는 신학 있는 목회자들은 경험의 문제에 대해서 매우 의구심을 품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는 신학적 기반을 목회의 중요한 구심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경험적이고 감성적인 목회 형태를 취하는 사람도 여전히 심리적으로 자신의 경험에 대한 진정성에 확신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서 목회의 근거는 외적인 활동성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영성목회에 대한 기반은 흔들리게 된다. 그 요인들을 몇 가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목회적 의미를 깊게 반추하고 성찰할 수 없을 만큼 분주한 활동이 영성의 결핍을 가져다 준다. 그렇게 분주하도록 내몰고 있는 주요한 원인은 현대사회의 특징인 성공주의와 결과주의적인 성향을 관조하지 못하고 몰두하는 데 있다. 오늘날의 목회적 활동에서 자주 직면하는 문제는 그 목회가 기능적으로 얼마나 가치로운지 그리고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놓기 때문에 목회적 삶에 관련된 내면세계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띄어 놓고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다. 기능적이고 효과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그들에게 있어서 내면적인 삶에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은 오히려 비생산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목회의 심층적인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거니와 그것에 대해서 큰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스스로 회의적인 물음을 던진다. 과연 충실한 내면적 삶을 추구하는 목회가 사람들로부터 무슨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으며 무슨 경이로움고 보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의 목회적 활동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고 분주한 것은 홀로 있음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은 홀로 있음과 외로움을 구분하면서, 홀로 있음에 대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외로움이란 두려움이요, 염려요 근심을 동반한다. 사람들의 박수갈채와 인정을 목말라 하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홀로 있음을 두려워 한다. 사람들로부터 잊혀져 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며, 스스로를 통제하고 평가할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언제나 일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독대를 매우 낯설어한다. 벌거벗은 나 자신과 하나님 그 분과의 만남이 무의식적으로 매우 낯설기 때문에 그 사이에 반드시 활동과 일을 끌고 들어간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낯설어 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기대하고 설정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그 분 자신으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그 분을 두려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하나님 그 분 자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한 요구를 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더 희생적인 헌신과 노력을 요구한다는 내적 두려움도 있다. 그래서 홀로 있음으로부터 벗어나 사람과 일 속으로 끊임없이 늘 일을 찾고 있는 사람을 찾는 상태를 헨리 나우웬은 외로움이라고 한다.
그에게는 평화가 없다. 그래서 목회자는 이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홀로 있음을 훈련해 한다. 즉 의도적으로 물러남의 시간들을 가져야한다. 거기서 참 자아와 활동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홀로 있음에 대해서 평화와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목회를 통하여 자아성취는 이룰 수 있지만 목양적인 차원의 돌봄은 일어날 수 없다. 목회란 목양적 돌봄과 배려이다. 그런데 목회자 자신이 내적인 평정과 안정감을 유지하지 못하는데 그런 사람으로부터 어떻게 참된 목회적 돌봄과 배려를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한 상태를 영성이 결핍된 목회적 행위라고 한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기 위한 훈련이 결여된 것이 영성 목회의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내면에 거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경험과 목회 활동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전자의 경험은 후자를 자연스럽게 한다. 목회자는 누구나 영적으로 풍요로운 목회활동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 실현이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의 성찰적 훈련이 결여되어 잇기 때문이다.
목회자 각자가 가지고 그릇된 신념체계가 영성 목회의 걸림돌이 된다. 사람들은 스스로 길들여진 습관으로 말미암아 어떤 것은 거룩하고 어떤 것은 세속적이라는 구분을 한다. 그러한 구분이 정서적인 차원일 뿐이지 심층적인 통찰력에 의한 결과가 아닌 것이 보통이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릇된 신념 체계는 건강하지 못한 목회의 가치와 목적을 설정한다. 자신에게 길들여진 그릇된 신념체게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몰두적 삶으로부터 자기 초월을 통하 자기 개방적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롭게 열려진 삶을 유지할 때, 목회자는 자유롭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활동에 대해서 민감하게 응답할 수 있다. 편협 되거나 그릇된 신념체계에 바탕을 둔 목회적 활동은 자주 폐쇄적이고 자아성취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자기 몰두에서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비전을 그대로 전해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비전) 묵시가 없는 자는 방자히 행한다.(잠29:18)라고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비전이 분명히 알려지지 않은 채 그릇된 신념으로 목회를 펼쳐갈 때 그 목회는 자기 좋은 소견대로 행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삿17:6, 21:25) 그러므로 영성 목회를 위해서 목회자는 자기 몰두적인 신념 체계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어 그 신념 체계를 바로 잡고 보완하려는 자기 성찰적 시간을 가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영성 목회의 장애물은 우리의 목회 활동 안에 잘못된 명분이 숨어 있는 경우이다. 자기도취, 야망, 무감각, 자존감 상실 등이 하나님과의 일치된 영적 생활에 큰 걸림돌로 작용한다. 자기도취와 ,야망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해도 그것이 가져다주는 최대치는 자기실현 이상을 뛰어넘지 못한다. 목회에 있어서 자기실현이 부수적으로 따라오기는 하나, 그것이 목회의 최종적인 목표일 수 없다. 사도 바울의 주장대로 목회는 해산의 고통을 직시하고 감내해 내는 의도적인 행위이다. 그리고 그 수고의 결과는 자기실현 이라기보다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내는 일이다.(갈4:19) 그러므로 영성 목회를 지향한다면 의도적으로 자기도취와 야망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마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우슬초(고통을 경감시키는 약초)를 거절했던 것과 같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도취와 야망은 영적 무감각과 일치될 수 있다. 그러한 목회자는 사람 중심적 이라기보다는 일 중심적인 목회를 지향한다. 그런 목회와 목회자는 각 개인의 내면세계를 통찰함에 있어서 민감성이 결여될 수 있다. 사람들의 고통과 번민에 대해서 무감각하게 된다. 낮은 자존감을 지닌 목회자 역시 자기 방어를 위하여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상처를 치유하는 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입히고, 청중들을 향하여 수용적이고 개방적이기 보다는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이끌어 갈 수 있다.
5. 영성적 목회의 대안적 전망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미래적 환경에 귀를 기울여 보자. 획일적이고 규격화된 대량 생산적인 산업 구조로부터 다양성과 개별성이 존중되는 정보 산업의 부상으로 말미암아 사회는 엄청나게 달라지고 있다. 즉 집단을 위하여 개인의 희생을 요구했던 집단 체제로부터 개성이 인정되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추구하는 사회체재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래서 공동체 주의로부터 개인주의적 성향은 더욱 가속화 되어 갈 것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선택을 인정하고 열어 놓는 공동체만이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지도체제 역시 명령 하달식의 피라미드식 체제로부터 상호 협력적인 네트워크식 구조로 바뀌어 가고 있다. 통제하고 명령하는 군림하는 지도체제로부터 기능상 조정하고 감독하는 관리체제로 전환되어 간다. 남성 지배 구조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이 부상되고 있다. 생산업체 위주의 산업구조가 정보 분야의 산업 구조 형테로 전환되면서 여성들의 경제 사회 분야의 진출 기회는 훨씬 넓어졌고 다양해졌다.
그동안 성장분위기나 열의가 하강국면에 이르고 있는 교회 현실을 사회 심리적 측면에서 고려해 본다면, 그 원인이 교체되어지고 변화되어 가고 있는 새로운 물결에 대한 부적응으로부터 비롯된 면이 없지 않다. 그동안 교회의 지도력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에 의해서 유지되었다. 그런 교회일수록 빠르게 성장했고 주목을 받아왔다. 그곳에 속한 청중들의 만족도도 높았다. 그러나 점점 자의식이 팽창되고 정보사회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중앙집권적 체제가 도전을 받고 있다. 기존의 방식으로 교회를 새곱게 세워가려고 하는 이들은 자주 거센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그러한 도전은 지도 체제하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굳힌 교회 아에서도 심상치 않은 기류가 일고 있다. 개별적인 목소리가 그 이전보다 훨씬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한 혼란을 경험하는 이들을 향하여 지도력의 문제를 거론하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지도력의 약화라기보다는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지도력을 구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개인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상호협력적인 지도체제로 전환되면서 목회자가 돌봄을 겸한 관리자로 머물러 있을 때 새로운 지도력을 얻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동안 교회는 지도력의 이중적인 체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관리 중심의 지도체제와 섬김 중심의 지도체제가 그것이다. 남성들은 주로 피라미드식 관리 체제에 익숙하여 그러한 방식을 여전히 고수하고, 여성들은 주로 섬김의 현장에서 그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왔던 이러한 체제가 이제 여성들의 사회 경제적 역할이 신장되면서 남성들의 지배구조적인 관리체제가 도전을 받고 있다. 목회자가 이러한 갈등구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정하지 못하게 될 때 심각한 좌절감과 실패감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부터 목회자의 영적 지도력은 무기력하게 되고 그것이 청중들에게 전달되어 영성이 결핍된 공동체라는 인상을 전해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대로 오늘의 청중은 집단적 돌봄의 목회에 만족하지 않는다. 개별적인 경험을 인정받고 그것을 발전시켜 가면서 내적 확신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가 집중되고 있다. 이러한 욕구에 응답하기 위해서 오늘 교회의 지도력을 관리 중심적인 체제에서 실제적으로 영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평신도 사역체제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청중들의 내면적인 욕구에 적합하게 응답해 줄 수 있는 평신도 그룹들을 발굴해 내고, 훈련시켜서 과감히 목회의 동역자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절실하다. 특히 여성들을 목회에 실제적인 동반자로 수용할 수만 있다면 영적 지도력을 발휘하는데 있어서 남성들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동안 교회는 자주 초기 교회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것을 하나의 영성 목회를 회복하는 징조로 받아들여도 좋다. 우리가 말하는 초기 교회도 하나의 전환점에서 새롭게 형성된 신앙체제였다. 초기 교회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와의 갈등 관계에 있었던 유대주의를 생각해 보자.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갈등 구조의 근본을 직시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만족스럽지 않은 당시 유대 주의적 공동체를 새롭게 개혁하고, 영적인 혁신을 이루어 기독교 공동체인 초대 교회를 탄생시키는 주역이다. 유대주의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그리고 그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 삼자 관계는 유비적으로 오늘 기성 목회 구조와 새롭게 태어나기를 기대하는 시대적 요청과 그 사이에서 갈등구조를 의식하고 있는 현대 목회자라는 구조와 같은 맥락이다. 복음서는 유대교의 부정적인 부분과 그것을 극복하고 새롭게 태어난 초기 교회의 영성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예수님이 갈파한 낡은 구조로서의 유대교의 특징은 이렇다. 첫째, 형식적이고 위선적이었다. 둘째, 권위주의적이었다. 셋째, 권력과 명예에 대한 집착이 강했다. 넷째, 분당심과 자만심이 강했다. 다섯째, 소유지향적이었다. 당시 유대주의적인 요소가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오늘 교회가 초기 교회의 영성을 회복하자는 목소리는 바로 이러한 모습으로부터 탈바꿈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알아들어야 한다.
예수님이 유대주의를 극복하고 재형성한 초기 교회 영성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형식 파괴라고 할 만큼 내적 자유함을 소중히 여겼다. 둘째, 권위주의 대신에 사랑과 섬김의 도를 실천했다. 셋째, 집착 대신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초연함과 중용을 실천했다. 넷째, 분당심과 편단심 으로부터 포용주의적인 자세를 가지도록 했다. 다섯째, 자만 대신에 겸손함과 자기비하를 제시했다. 여섯째, 성취 지향적이거나 소유 지향적이기 보다는 존재 지향적인 삶의 방식을 가르쳤다. 오늘 우리의 청중들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의식 구조에 대해서 대단히 민감하다. 그들이 당장 그러한 삶의 자세를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할지라도 교회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능력은 상당히 갖추고 있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요구에 응답하지 못하는 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실천하지 못하는 내적인 갈급함을 해결해 보고자 열망으로 영성의 회복을 자주 언급하고 있다. 오늘 교회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복음서가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의 전환을 꾀한다면 회자되는 영성의 목마름은 올바른 방향으로 해소되어 갈 것이다.
위의 글은 “생명목회를 위한 영적 쇄신 심포지움” 에서 발제된 것으로 예향원(www.yehyangwon.net)에서 발췌한 내용임. (본문에는 각주가 있었으나 위의 내용에서 각주를 생략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