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과 죽음 사이에서 1:22~26
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복음에 합당한 삶 1:27~30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
[오늘의 말씀 요약]
바울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지만, 빌립보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을 압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22-24절
복음을 위한 삶은 세속의 사고를 뒤엎습니다. 세상은 죽음을 불행이라 말하지만, 바울은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바울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버립니다. 어쩌면 그에게는 감옥에 갇히고 채찍과 돌팔매질을 당하며 사는 이 땅의 삶보다 주님과 함께 안식하는 삶이 더 간절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를 위해 자신이 감당할 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습니다. 욕망을 따르며 사는 이들에게 죽음은 절망이지만,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참 안식에 이르는 과정일 뿐입니다.
27,28a절
그리스도인의 소명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며, 그들의 일터는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위해’ 파송된 복음을 위한 일꾼이며, ‘세상에 맞설’ 하나님 나라의 군사입니다. 그러기에 세상과 타협하려 하거나, 교회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등불을 등경 아래 감추는 것(마 5:15)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실천하려고 할 때, 내가 마주할 대적은 누구이며, 그들의 위협은 어떤 것입니까? 어떻게 그 위협을 이겨낼 수 있습니까?
28b,29절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특권이듯, 의를 위해 받는 고난도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바울은 믿음만 은혜(특권)가 아니라 고난도 은혜라 말합니다. 고난이 은혜인 것은 그 고난이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비껴 살지 않았고, 빌립보 성도들에게도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라고 권면합니다. 지금도 고난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우리를 비껴가지 않습니다. 나는 은혜를 바라는 만큼 고난받을 준비도 갖추고 있습니까?
----------------
더 유익한 것을 위해(1:22~26)
자기 생명보다 복음 증언하는 일을 더욱 귀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참된 제자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바울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그가 죽는 것은 주님 품에서 영원히 안식할 수 있는 길이기에 개인적으로 좋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위해 ‘더 유익한 것’에 자신을 바칩니다.
그가 빌립보 성도와 함께 있기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그들에게 믿음의 성장과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면 그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이유를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을 연장해 주시는 것은
우리 개인의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 묵상 질문: 바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빌립보 교회에 어떤 면에서 유익할까요?
- 적용 질문: 어떻게 하면 교회 공동체와 믿음의 지체들을 유익하게 할 수 있을까요?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1:27~30)
결승점을 앞두고 물리쳐야 할 상대가 많은 선수는 무척 힘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는 많은 유혹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이란 첫째, 성도가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품고 복음을 위해 협력하는 것입니다. 분열은 사탄이 언제나 원하는 것입니다.
둘째, 복음을 대적하는 이단 세력에 대해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함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셋째, 성도는 주님을 믿기에 구원의 기쁨을 누릴 뿐 아니라 고난도 겪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꺼이 고난을 견디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성도를 세상이 미워하며 핍박할 때,
하나님은 그런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승리하도록 성도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 묵상 질문: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는 어떻게 생활해야 하나요?
- 적용 질문: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기 위해 특히 힘써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타인과 믿음의 공동체를 생각하기보다는 제 유익에만 골몰했던 이기심을 회개합니다.
마지막 때가 다가올수록 ‘나 홀로’ 신앙생활을 하기보다 지체들과 사랑의 연합을 이루며,
담대하고 충성된 제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
사도 바울의 간절한 소망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서 14장 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기쁨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심한 고통과 수치를 당해도 그가 담대하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이 되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무엇입니까? 오직 땅의 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며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 함께 있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과 같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장 17-18절) 그렇습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는 이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삶을 사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에 익숙한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가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신앙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갇히게 된 것이 오히려 복음을 전파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빌립보 교회가 알기를 원합니다. 비록 바울 사도는 갇혀 있지만, 바울 사도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갇혀있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이 로마의 모든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재판을 하는 과정에서 바울이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게 되었고, 로마의 지도자들 군인들에게도 복음을 변증하고 확증하는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또한, 주님 안에 있는 로마의 형제자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 사도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일 때문에, 오히려 더 하나님을 신뢰하며 겁 없이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담대한 믿음을 갖기를 바라고 있습니다(빌 1:12-14).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시기하고 바울과 경쟁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어떤 사람들은 선한 뜻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사도로 세워졌다는 것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인간적으로 시기하고 대적하는 사람들은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더 괴롭게 하기 위해 이기적인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는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고, 로마의 신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거부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로마 제국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거나, 로마를 대적하여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소식을 전하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러므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더 괴롭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전파한 사람들은 더 요란하게 복음을 전함으로 로마의 관리와 지도자들을 더 자극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더 괴롭게 하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사역의 지경이 넓어지면 바울이 괴로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그들의 동기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옳지 않은 동기로 복음을 전하든 진실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든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기에 바울 사도는 그 일을 기뻐하고,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고, 자신의 안위와 이익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빌 1:15-18).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의 도움으로, 무죄 선고를 받고 감옥에서 풀려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그가 어떤 일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존재와 삶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함을 받으시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삶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므로 자신의 죽음조차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며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죽음도 유익하다”고 고백합니다(빌 1:19-21).
바울 사도는 무죄 석방과 사형선고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육신을 입고 계속 살게 된다면, 사역으로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 개인적으로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둘 사이에 끼어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 사도는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더 머무르는 것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더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자신이 살아서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는 것이 더 필요한 일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빌립보 교회와 함께 할 것을 안다고 고백합니다. 또,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간다면, 그의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자랑할 것이 풍성해질 것입니다(빌 1:22-26).
---------------------------
1:19~30 죽음을 넘어서는 삶의 목표
바울같이 사생관(死生觀)이 분명한 자도 드물 것 같다.
군인들이 사생관이 분명하다고 느꼈었는데
바울은 특전사나 해병대 군인들 보다 사생관이 더 분명하다.
상황으로 볼때에는 매여있는 몸이요 갖혀있는 몸이다.
언제 로마의 법정에 끌려가서 매를 맞을 수도 죽을 수도 있는 환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끄럽지 않다(20)고 고백하고 있고
온전히 담대하다(20)라고 고백하고 있다.
왜 그런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길(20) 원하기 때문이다.
생사를 초월해 버린 바울의 믿음을 본다.
살기위해 죽는 것인지 죽기위해 사는 것인지 분별이 안되는 시대에
바울의 사생관을 배우자.
우리모두의표어 가르치든지, 배우든지, 가든지 보내든지
바울을 통해서 배우는 표어는
살든지 죽든지(20), 떠나든지(23) 거하든지(24) 라는 표어를 보게 된다.
바울에게는 살고 죽는것, 머무는 것 떠나는 것 그 어떤 것도 문제가 안된다.
그런데 나에게는 죽는 것이 떠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죽을 준비도 잘~하자.
언제든지 떠날 준비도 잘~
두번째 말씀을 통하여 명령으로 들려오는 음성은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 명하신다.
2007년이 평양부흥 100주년이라고 기념행사도 많이하고
새로운 부흥의 AGAIN 1907을 기념하는 행사도 유난히 많았지만
내가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돌아보게 된다.
어찌보면 한국교회가 AGAIN 1907을 부르짖었지만
그 내면의 핵심에 있었던 회개는 부족했지 않았나....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부흥만 부르짖었지
내면에서 부터 터져나오는 회개는 부족하지 않았는지...
결과에만 중요시 했지 과정과 절차는 무시하지 않았는지
한 장로님을 통하여 한국 교회 전체가 부끄럼을 당하고 있는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뜻하심은 어디에 있는지 잠잠히 듣고 싶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은 무엇인가?
1. 일심으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이다.(27) .
2. 아무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 하지 않는 것이다.(28)
3.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삶이다. (29) .
일생동안 주를 부인하지 않으며 믿음으로 살게 하옵소서.
4. 주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삶이다.(29)
내 잘못으로 인한 고난 말고 주를 위하여 오는 고난은 기쁨으로 받자.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아버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길 원합니다.
떠나든지 거하든지 믿음의 진보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나의 자랑이길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의 능력이길 소망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나의 힘이길 원합니다.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 가도록 성령님 도와 주옵소서.
하나되는 것에 힘쓰게 하옵소서.
세상에 대하여 두려워 하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삶 되게 하옵소서.
존귀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동시에 고난도 받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이 없듯이 희생 없는 영광은 없습니다.
하다못해 과일도 뜨거운 태양 빛을 겪어야 익는 법입니다. 그렇게 고난 없는 은혜는 없습니다.
은혜를 입은 자로서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에게는 평생 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에, 또한 고난으로 고통당할 때에 우리 마음에 있는 은혜와 고난의 동전으로 경고와 위로를 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베드로전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격려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당신 자신을 드려라<성령님 365 묵상, A.W.토저>
그리스도를 거룩하다 하라. 그분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드려라.
온 정신을 그분에게 쏟으라. 당신 자신을 그분에게 드려라.
당신을 얽어매어 그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줄들을 모두 끊어버려라.
그분만이 당신의 모든 것이 되게 하라.
그러면 그분은 당신이 이제까지 꿈꾸어온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꿈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세상과 충돌하라」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사8: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