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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원문보기 글쓴이: 엘리야
너희가 주라(눅9장10-17)
성경본문|누가복음9:10~17
10.사도들이 돌아와 자기들이 행한 모든 것을 예수께 여쭈니 데리시고 따로 벳새다라는 고을로 떠나 가셨으나
11.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
12.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 들이니이다
13.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에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 하니
14.이는 남자가 한 오천 명 됨이러라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떼를 지어 한 오십 명씩 앉히라 하시니
15.제자들이 이렇게 하여 다 앉힌 후
16.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니
17.먹고 다 배불렀더라 그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거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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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박조준목사
예수님께서 그가 자라나신 고향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배척을 받으신 후 제자 12인을 불러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과 귀신을 쫓아내는 초자연적인 능력까지 부여하여서 각지로 파송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나가서 그들의 사명대로 복음을 전파하고 권능을 행사해서 많은 성과를 거두고 일제히 돌아 왔습니다. 그들의 보고는 매우 좋았습니다. 승리에 찬 보고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보고가 있을 때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을 침울케 하는 소식이 들려 왔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선구자요, 그 당대의 의인이던 세례 요한이 헤롯왕의 칼에 목이 잘리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통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 시대의 악함과 악한 세대에서 신음하는 백성들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시대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특수한 사명이 무엇인 것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제자들만을 다리시고 한적한 곳 벳새다로 가셨습니다.
그 동안 무리들은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벳세다로 가시는 줄 벌써 알고, 모든 고을로부터 걸어와서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벳세다로 갔습니다.
예수님은 이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처럼 여겨서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가 한적한 곳을 찾았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리를 향하여 노여워 하시거나 귀찮게 생각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몰려온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습니다.
아마 이때 예수님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 본 사람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았으리 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 무리를 보시고 그 당대의 사회적인 형편을 생각하였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정치나 경제계는 그만 두고라도 민족의 양심이 되고 지표가 되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 거의가 형식주의자가 되어서 밖으로는 경건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불의와 세속적인 권력과 짝하여 하등의 책망도 충고도 항거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어떤 기대를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때 한 사람이 있었는데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는 당 대의 죄를 책망하고 그 비행을 충고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자에 의해서 그는 무참히도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정치 지도자를 신임하지 못하고 종교 지도자에게 기대할 수 없이 되니까 자연히 민중은 문자 그대로 목자 없는 양처럼 이리 몰리고 저리로 몰렸습니다.
벳새다 들판에 모여든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더구나 지도자에 대해서 실망하고 사상적인 지표가 없이, 신앙적인 희망과 방향이 없이, 생생한 삶의 의욕이 없이 방황하는 무리를 불쌍히 보셨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오신 예수님께서 자기의 쉬실 곳과 제자들과 조용히 이야기할 곳에 사람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해서 노하실 까닭이 없었습니다.
이 무리들은 정말 불쌍하였습니다.
본문 35-36절을 보세요.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저물어 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옵소서”
제자들이 이런 제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을로 가서 각각 자기의 문제를 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미처 그것까지는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 들을 향하여, “너희가 주라‘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니 제자들에게는 또 하나의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때 돈 200데나리온 어치 빵을 사면 한 사람에게 한 개 씩이나 돌아갈까요?
제자들이 머리는 계산이 빨랐습니다.
빌립은 수학적이며 사무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무적으로는 실수가 적은 반면에 신앙적인 모험심은 빈약합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에겐 감격이란 거의 없습니다.
왜 그는 500 데 나리온의 떡이면 각 사람에게 만족하겠습니다 하지 못했을까?
이성에만 사는 사람은 언제나 부족에 삽니다.
제자들은 경제적인 숫자의 계산 이상의 하나님의 축복과 능력을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과연 제자들의 계산대로 200 데나리온의 빵을 사면 이 무리의 배고픈 것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요한복음에는 분명히 그것으로 부족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세요.
문제의 해결은 경제만으로는 안됩니다.
아직 어떤 사람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경제에 있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경제 성장이 문제 해결의 열쇠로 믿는 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즉, 영혼을 소유한 인간에 관한 문제라면 그 어떤 것이던 간에 경제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린 인간의 머리와 경제 계획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인간의 제한성과 인간의 무능을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 금년 1년 동안 우리가 살아온 것이 여러분이 번 돈만 가지고 살아 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우리가 수로 계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컸다고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벳새다 들에 모인 무리의 문제를 해결하였습니까?
거기에 안드레가 있었습니다.
안드레는 빌립과 대조적입니다.
빌립은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고 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드레는 비수학적이며, 안될 줄 알면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것 다하고 그 다음은 주님에 맡긴 사람입니다.
한 소년을 예수님께 데리고와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예수님께 헌신한 사람은 그의 자격 유무를 막론하고 큰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누구인지 자세히는 모르나 기쁜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제공한 적은 정성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어떤 소년이 자기가 먹으려고 집에서 가지고 왔던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주님께 온전히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 비록 작지만 그 것을 기쁜 마음으로 드릴 때 그것으로 큰 이적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당면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언제나 많은 물질이나 힘센 권력이나, 높은 지식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적은 것이지마는 기쁨으로 사심 없이 온전히 바치는 그것이 언제나 문제 해결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 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은 요사이 흔히 하는 말대로 물량의 문제가 아니라 정성의 문제이고 신앙의 문제입니다.
한 나라 세계를 움직이고 옳게 개혁하고 바로 만드는 모든 운동도 결국 많은 사람이 아닌 한사람이 먼저 깨닫고, 시작하고, 그를 따르고, 같이 움직일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미국이 그렇게 이루어졌고, 영국이 그랬고, 2차 대전 후의 독일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 예수님께 인도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그를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날지 모릅니다.
독일의 한 나이 많은 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교실에 들어가면 언제나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추어 학생들에게 절을 했습니다.
어떤 이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대답이 ‘이 소년들 가운데 장차 어떤 사람이 날지 알 수 있겠어요?’하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들 가운데 하나가 마틴 루터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회가 큰 일 났다고 모두 걱정합니다.
부정과 부패, 그리고 불신의 풍조가 날로 더해간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을 나 혼자서야 어떻게 하나? 우리 몇 사람이 어떻게 할꼬? 그래서 잘못된 것을 보긴 보면서도, 안된 줄 알긴 알면서도, 이러다가는 큰 일 나겠다고 장래를 염려하면서도 할 수 없다고 그날그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5천 명을 먹인 것이 빵을 많이 사다가 나눠주어서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자기의 것을 주님께 드림으로 큰 이적이 생겼습니다.
오늘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이 어려운 나라의 형편을 먼저 깨닫고, 자기부터 먼저 옳은 일을 하고 그가 있는 곳에서 악과 싸워 나간다면 이 위대한 이적이 오늘 21세기 우리나라에도 나타날 줄을 믿습니다.
어떤 이의 말이 ‘아무리 한 개인이라도 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의를 위하여 싸울 때에는 온 우주가 그의 배후에서 그를 후원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전적으로 진리를 위해서, 겨레를 중심해서, 의를 위해서 자기의 있는 것을 바치고 나선 다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축복해서 그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나 우상 숭배자보다 수가 많아서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참 신 하나님편에 서서 온전히 헌신할 때 450명의 바알 선지자를 이긴 것입니다.
둘째는,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특별한 것을 우리에게 요구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에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하기를 요구하십니다.
내게 있는 시간, 지식, 물질, 재간, 지위, ...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바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애굽 땅에서 고생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가게하라’고 위대한 사명을 맡겼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모세는 우수하고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40살 나는 청년의 때 애굽 궁전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있으면서 자신은 육신적으로는 호화 스럽고 안일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스라엘의 피를 타고난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것을 보고 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 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여 애굽의 보 좌를 초개같이 여기고”
이스라엘 민족 해방을 위해 결단하고 나선 믿음의 사람이요 애국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미디안에서 40년 지나는 동안에 나이도 나이려니와 자신의 무능함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주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사양하였습니다.
“주여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 양이나 몰고 다니는 지팡이였습니다.
‘이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할 때 미디안에서 양무리나 인도하던 목자의 지팡이가 이스라엘 60만을 인도하는 지팡이가 되었고, 홍해를 향해 이 지팡이를 내밀 때 홍해를 육지같이 건널 수 있었고, 반석을 칠 때 샘물이 솟은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능력이 있어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맡길 때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하나님은 요구하십니다.
내게 있는 것이 보잘것없지만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면 이적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대로를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의 제단에 바치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가지고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어떤 이적을 행하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드리면 주님 뜻대로 요긴하게 쓰십니다.
그리스도의 수중에는 적은 것도 많은 것이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복하시고 100명씩 혹은 50명씩 앉은 사람들에게 질서 있게 나눠주시니 부녀자 외에도 5천명이 배불리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더구나 모든 문제 해결의 마지막 열쇠는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머리를 써야 하며, 물샐틈없는 계획과 강력한 추진을 꾀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라도 지혜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의 마지막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는 일이 왜 잘못됩니까?
일을 계획할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예산에 넣지 않고, 성공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금년 계획에 하나님의 축복과 허락을 계산했었습니까?
잘 되었으면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기억하고 감사하십니까?
더구나 다 배불리 먹고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 두 바구니에 찼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은사를 나눠줄 수록 늘어나는 것을 가르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나누지 않았으면 그대로 있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주렸을 것입다.
그러나 나누어주므로 다 배불리 먹고 또 남은 것도 풍부하였습니다.
신령한 양식과 은사도 나눠줄수록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기쁘고 자신도 만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신령한 양식과 은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 위해 사는 사람은 이해가 저무는 오늘 에도 마음에는 불평, 불만 그리고 곤궁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안겨주리라“ ( 눅 6:38).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해도 저물어 갑니다.
이 사회는 벳새다 들과 같고, 국민은 그때에 모여 든 무리와도 같이 굶주려 있습니다.
경제적인 궁핍만이 아닙니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희망을 찾지 못해 허덕이고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주라 굶주리는 사람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 사랑에 메마른 사람들에게 너희가 사랑을 주라’
‘절망의 심연에서 허덕이는 겨레에게 너희가 소망을 주라’
알렉산드리아호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던 276명의 사람들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다 죽게 되어 절망 상태에 있을 때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함께 가다가 이런 위기 앞에서 모든 사람에게 안심과 소망을 주었습니다.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14일간이나 먹지 못한 사람들이 안심하고 먹었고 바울의 말대로 모두가 구원을 받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굶주린 이 겨레에게 무엇을 줄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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