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광산 프로필
한마리의 룡이 일월성신을 등에 지고 동해로 내달리다 우뚝 멈추었다. 웬일일가? 보니 두만강처녀가 가는 허리를 배배 꼬며 룡의 앞길을 막았다. 두만강처녀는 때론 늘씬한 허리를 비틀어 룡에게 물보라를 끼얹는가하면 때론 성난체 파도를 몰아 룡의 허리를 철썩철썩 때린다. 룡은 요염한 두만강처녀의 자태에 흠뻑 반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룡은 그만 그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굳어진 룡이 바로 일광산이다.
일광산은 백두산 줄기의 한갈래인 남강령의 동북단에 위치해 있다. 일광산은 해발고도가 비록 높지 않으나 기골이 우람차고 기세가 사납다. 일광산은 두만강을 앞에 두고 갑자기 끊어졌는데 두만강 저편은 조선의 남양시이고 이쪽은 옛날 회막골이라 불리우던 도문시다. 일광사는 현재 도문시를 상징하는 일광산공원으로 거듭났다.
일광산은 백두의 정기를 머금어서였는지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일광산에서 만고불후의 이야기를 엮어놓았다. 전설에 태조 리성계는 그 아비 리자춘과 더불어 늘 두만강을 사이두고 일광산에 화살을 날렸다고 한다. 그린데서 일광산의 풍만하던 앞가슴이 와그르르 무너져 가파로운 벼랑으로 되였다고 한다. 바로 조선의 강양쪽을 향한 너럭바위다. 이성계의 고조부 리안사는 전주의 호적이였는데 금을 뚝쇠로 아는 호방하고 의리있는 가문이였다. 어쩌다가 못된 전주고을 별감을 때려죽이고 강원도와 함경도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였다. 그러다가 리성계의 조부때에 와서 전공을 많이 세운데서 함경도의 천호로 되였고 리자춘때에 와서는 벼슬이 더욱 높아가 병마사가 되는 등 실제상 두만강류역의 “왕”으로 한세대를 풍미했다. 이성계는 말을 잘 탄데다 명궁이였서 두만강일대의 여진인이나 토호들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일찍 임자년에 남이 장군이 검은 연기가 타래쳐오르는 일광산 봉화대를 쳐다보면서 안타까이 읊조리였다. “백두산석 칼 갈아 다슬고 두만강물 말 먹여 마르게 하리. 남아 스물에 천하를 평정 못하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부르리요” 그런데 남이의 이 호언시가 목숨을 았아갈줄을 남이 자신도 몰랐다. 남이는 성격이 호방하고 무공이 뛰여나 27세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하지만 가세와 권세를 믿고 평소에 교만하고 말을 아끼지 않아 훈구대신들의 미움을 받았다. 당시 병조정랑으로 있던 유자광은 남을 모해하는데 뛰여난 재주를 가졌었다. 그는 자기의 상사이고 안하무인인 남이를 몹시 꺼려 불구덩이에 밀어넣었다.
“전하, 남이는 역심을 품고 있나이다.” 유자광이 쪼르르 대전에 달려가 예종에게 고했다.
“뭐라? 누가 역심을 품었다는거요?” 예종은 놀랐다.
유자광은 “남아이십미평국(男儿二十未平国)”을 “남아이십미득국(男儿二十未得过)”으로 외곡하여 예종에게 여쭈었다. 워낙 남이를 꼴사납게 보던 예종은 이때라싶어 “그놈이 기어이 거사를 도모하려는군.”하면서 추포하여 참형에 처했다. 남이가 정말 역심을 품었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어느 하루 혜성이 지나가는것을 보고 “혜성은 묵은것을 없이고 새것을 알리는 징조이다.”라고 말한것으로 미루어보면 반역할 뜻이 임음직도 하다. 아무튼 남이는 두만강을 넘나들면서 건주여진인들을 여지없이 소탕했기에 “남이가 왔다.”고 하면 두만강량안에서 삼척동자도 자다가 와뜰 놀란다고 했다. 일광산과 그 부근의 높은 산들에는 남이를 막고저 봉화대를 세웠다. 봉화대에 세가닥의 연기가 타래쳐 오르면 건주여진이나 우디거, 우랑하는 산속으로 숨어들기에 바빴다.
1908년에 “이범윤의병부대”는 연추에서 장고봉을 넘어 조선으로 진군했다. 소규모적인 기습작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범윤은 부하 안중근더러 회령과 경원사이에 있는 일광산에 근거지를 두고 회령과 경성 경원을 기습하게 했다. 8월의 어느날 밤 안중근은 100명의 의병을 이끌고 회령을 기습하고저 출발했다. 의병부대가 은밀히 회령에서 5리 떨어진 지점까지 왔을 때 공교롭게도 늙은 취사원이 재채기를 참지 못하고 그만 “앗치”를 했다. 적군 은페소의 초병이 인차 회령경비부대에 신호를 보냈다. 그리하여 적들은 전투준비를 갖추고 안중근의 의병부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일제히 사격을 했다. 안중근의 부대가 복멸되였다. 안중군은 어둠을 타서 30리를 곧추 내달아 일광산에 숨었다. 싸움에 패한 안중근이 울라지보스토크에 가자 별로 반겨주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안중근은 가까운 사람들로 “단지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들썽케한 이또암살사건을 성사시켜 만고의 영웅으로 위상을 높혔다. 일광산은 시야가 좋아 사면에 초소를 세우면 수십리 밖의 동향도 보아낼수 있는 유리한 지세다. “이법윤의병부대”가 이 점을 보고 일광산에 근거지를 두었다.
1902년 봄에 람루한 두루마기에 옹고바지를 입은 중년의 수월선사가 성큼성큼 일광산에 올랐다. 짙은 눈섭에 가는 눈으로 강물이 범람하여 이루어진 10리 버들방천과 옹기종기 들어앉은 회막골을 한참이나 번갈아 바라보던 수월선사는 황페한 이 땅에 보리수 한 그루를 심으리라 마음을 다지였다.
수월선사는 대덕 경허스님의 수제자다. 일직 충청도 홍선에서 부자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경허스님을 만나 불교에 정진했다. 두만강을 건넌 수월은 20여가구가 살고있는 회막골에서 회막골사람들과 더불어 살았다. 밭도 갈아주고 울바자도 만들어주고 돼지우리를 남도식으로 지어주었다. 그때 성이 장씨인 중국인이 북새골에 살았다. 그는 수걱수걱 일을 잘하는 남도령감(수월을 남도령감이라고 불렀음)이 사람뒴이 좋다고 일광산 북쪽 기슭에다 암자를 지어주었다. 암자에서는 가끔식 맑고 웅굴진 “대비주”송독소리가 바람타고 회막골까지 들렸다. 그 소리는 회막골 사람들의 서늘한 가슴을 따뜻하게 덥여주었다.
그런데 수월스님은 별로 암자에 있지 않았다. 그는 밤이나 낮이나 일광산 부근의 마을들 돌아다니며 불쌍한 사람들의 시중을 들었다. 어느날 장씨가 수월을 만나 물었다.
“스님은 암자의 주인인데 왜 암자를 비워두는거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거유? 내가 언제 절을 비워두었다고 그러우. 나는 한시각도 절을 떠나지 않았고 한시각도 절을 멀리하지 않았수다.”
장씨가 의아스레 머리를 갸우뚱하자 수월스님이 인차 말을 이었다.
“여보게 보살 나의 절은 저 암자가 아니유. 나의 절은 당신이고 저 회막골사람들이란 말이유."
그랬다. 수월선사의 절은 흙과 돌로 쌓은 담장안의 집이 아니였다. 백성들 자체가 하나의 암자였고 세상 천지가 하나의 절이였다. 수월선사에게는 회막골 사람들 한명한명이 모두 부처님이였다. 그런 부처님을 공양하느라 수월에게는 밤낮이 따로 없었다. 수월선사는 회막골에서 약 7년동안 백성을 공양하다가 량수천자와 금창을 지나 라자구로 갔다. 거기에서 입적했다.
1919년에 홍범도의 밀령을 받은 독립군 소분대가 일광산에서 신들메를 조이였다. 그들은 새벽을 틈타 감쪽같이 두만강을 건너 강양분주소에 똬리를 틀고잇던 왜놈에게 벼락을 내렸다. 이 쾌거가 결국 봉오동전투의 도화선이 되였다. “범 무서운줄 모르고 날뛰는 독립립군”을 소멸하고저 일제는 “훈춘사건”을 빌미로 군대를 간도에 들이밀었다. 그러나 청산리에서 이범석, 김좌진 등이 거느리는 북로군정서부대에 여지없이 얻어맞는다. 참패를 당한 일제는 그 보복을 무고한 백성들에게 했다. 바로 소름끼치는 “경신년대토벌”이다. 일제가 토벌한것은 결국 적수공권의 조선족들이다. 일제는 조선에 있는 제19사단과 로씨아에 있던 3개사단 그리고 관동군의 일부 부대들을 동원하여 소탕작전을 벌렸다. 6천여채의 가옥이 불탔고 2만여명의 사람들이 살상되였다. 토벌대들은 조선족마을들은 찾아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집안에 가둔후 불을 질렀으며 누가 뛰쳐나오면 총창으로 찔렀다. 또 청장년을을 잡아서는 무리채로 생매장을 했다. 왕청현 하마탕에서 놈들은 수십명 사람들의 코를 쇠줄로 꿰여 10리를 끌고가서 죽였다. 청산리일대의 천여세대에 달하는 가옥이 모두 불탔다.
1935년에 일본의 닛코시 륜왕사에서 온 2명의 중이 일광산의 아름다움이 마치 고향의 산 모습과 같은데서 일광산에 사찰을 짓고 “일광사”라는 편액을 올렸다. 그로부터 회막골사람들에게 남산재라 불리우던 산이 일광산으로 환골탈퇴했다. 일본 중이 세운 사찰은 일광산 서쪽에 있었는데 거기에 크고 넓직한 바위가 여러개 있다. 그리고 북쪽 기슭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부리바위라고 불렀다. 후에 누군가에 의해 동강이 났다. 그리고 부리바위앞으로 사철 마를줄 모르는 샘이 있었다. 일광산에 일광사가 앉기전에 일광산은 남산 혹은 “회어목”이라 불렀다. 회어목을 넘으면 지금은 사라졌으나 신선더기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뒤로는 걸만. 유기. 창신 등 마을이 있었다.
2009년 10월에 부처님의 집 화엄사가 일광산에 일떠섰다. 금빛 반짝이는 거대한 삼존불이 누리에 자비의 빛을 뿌린다. 록수청산에 둘러싸인 일광산 화엄사는 지금까지 동북지역에서 가장 큰 사찰로 그리고 국내 유일의 조선족 사찰로 알려지고 있다. 화려하고 웅위로운 대웅전의 금동삼존불의 높이는 7메터나 되여 국내에서 비교적 큰 불상으로 지목된다. 중국의 사찰양식과 한국의 고유단청문양 그리고 조선의 탱화로 아른답게 장식된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약사여래불이 모셔져 있다. 2009년10월26일(음력9월9일) 도문시 일광산 화엄사 대웅보전락성 및 삼존불점안법회가 있었는데 만여명 불자들이 참가했다. 국가종교국 장건영부국장과 중국불교협회 부회장 명성스님 길림성불교협회 회장 성강스님을 비롯한 정부의 종교사업일군들과 불교계인사들이 법회에 대거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였다. 동시에 중한불교문화교류회 회장이며 한국 불교방송 이사장으로 계시는 영담스님을 포함한 한국의 대덕고승1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일광산 아래에는 두만강나루터가 있었다. 가난한 조선인들이 남부여대하고 매일 나루터에 밀려들었다. 나루터에서 약 5백메터되는 지점에 만춘여관이 있었다. 노래 “눈물젖은 두망강”이 바로 이 만춘여관에서 작곡되였다. 작곡가 이시우가 만춘여관에서 밤새도록 슬피우는 여인의 사연을 듣고 비분에 넘쳐 불후의 명곡 “눈물젖은 두만강”을 작곡했다. 작사는 김용호가 했고 노래는 김정구가 불렀다. 여인은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찾아 북간도에 왔다. 그런데 남편은 이미 체포되여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였다. 두만강은 그때나 지금이나 역시 눈물젖은 두만강이다.
이제 세월이 흘러 일광산이 또 어떤 이야기를 엮어낼지가 궁금하다.
첫댓글 재밋게 엮은 일광산의 력사 이야기 즐감하였어요
일광산의 력사속에 함께 빠졌다가 나옵니다.재미게 엮은글 즐감하였어요.
일광산의력상에 대하여 차근하게 설명을 해 주셔서 잘알고 갑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언제나 감미롭게 읽어 보는 님의 글입니다.
백룡촌으로 가면서 룡의 전설도 들었고 일광산도 몇번이나 지났지만 끝내 올라가 보지 못했네요. 다음 기회에는 꼭 가 봐야겠어요.
풍부한 역사 지식과 높은 문화 수양에 감탄입니다.
감미롭고 뜻깊은 산행글 또 기대합니다.
일광산에 대한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수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