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불난 집에 부채질.
향기가 수련원을 떠나가고 한 시진이 지나자 중부와 누리가 돌아왔다.
둘은 귀가 歸家시 일반적인 통로인 지름길을 이용하지 않고, 사냥감이 있을 만한 곳을 물색하며, 우회하여 돌아오면서 여우와 들꿩을 한 마리씩 사냥해왔다.
수련원은 게르가 세 개다
하나는 사로국 출신 다섯 명과 서누리와 걸걸호루가 사용하고, 한 곳은 청하문의 황태중남과 을지담열 소왕의 처 조카인 발렬투 형제가 이용한다.
나머지 한 곳은 여자들이 잠을 잔다. 우문청아, 민들레, 이슬비, 사림이다.
그중 사로국 출신이 머무르는 게르가 제일 컸다. 다른 게르의 배 이상 규모다.
회의 장소 겸 공용무기 보관 역할까지 하다 보니 규모가 클 수밖에 없다.
아침, 저녁 시간대에는 큰 게르에 모두 모인다.
중부가 막사에 들어가니 저녁 식사 준비에 모두들 바쁘다.
유목민들은 하루에 식사를 한 끼밖에 하지 않는다.
저녁만 먹지 아침은 우유 한잔, 점심은 건너뛴다.
유목민으로서는 시간 절약 차원에서 할 수밖에 없는 생활방식이다.
해가 뜨기 전에 밤새 굶은 가축들을 빨리 초원에 방목해야 하니 할 수 없다.
그러니 해가 진 후의 저녁 식사는 푸짐하다.
물론 사로국 출신과 부여족들은 아침을 대충 챙겨 먹는다.
농경민들은 아침 배가 든든하여야 일을 할 수 있다.
중부와 누리가 게르에 들어가니 식사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었다.
식사 자리 배치도 配置圖가 보통은 게르의 안쪽, 이중부의 맞은편에 우문청아가 앉는데, 오늘은 반대편 입구 쪽에 우문청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바쁘게 앉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라며 단순히 생각하고,
중부는 돌아오는 길에 사냥해온 여우를 우문청아에게 건네주며,
“겨울에 목도리하면 따뜻할 거야” 한다.
“네, 감사합니다.”
순간,
중부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우문청아는 중부를 보면 항상 “사부님”을 입에 달고 다녔다.
중부는 물론,
옆 사람들조차 듣기 민망할 정도로 중부를 보고 입을 뗄 때는 접두사가 ‘사부님’으로 시작하여 ‘사부님’이 접미사가 되는 그런 어투였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입을 여는 첫마디가 ‘사부님’으로 시작하여 저녁에 잠자기 전 마지막 낱말이 ‘사부님’으로 끝난다.
보통 때 같았으면 애교가 듬뿍 담긴 어조로,
“사부님, 감사합니다. 역시 사부님이 최고야”이런 식 어투로 호들갑을 떨며, 주위 분위기를 고조 高潮시키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어감 語感도 무미건조 無味乾燥한 어투로 사무적이다.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우문청아를 바라보니, 슬비가 중간에 서서 중부의 시선을 차단하며, 양고기를 담은 그릇을 중부가 앉은 탁자 앞으로 내밀며,
“오라버니, 식사하세요” 한다.
양과 소를 잡는 일은 서누리와 발렬마호 형제들이 주도하지만. 게르 안에서 요리하거나 식탁에 나르는 일은 나이가 어린 걸걸호루와 이슬비 그리고 사림 낭자가 주로 하고 있었다.
“으 응” 건성으로 대답하며 중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누리와 같이 자리에 앉는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우문청아를 계속 쳐다보고 있다.
우문청아는 짐짓 모른 체, 도마 위 양 갈비의 살점을 작은 손 칼로 발라내고 있다.
슬비가 중부를 보고 심각한 표정으로 한쪽 눈을 찡끗거린다.
그리고는 청아의 눈치를 힐끗 보더니, 검지를 세로로 세워 입에 갖다 댄다.
중부는 ‘아하, 오늘 내가 없는 동안 수련장에서 무언가 일이 있었구나’ 생각하며 궁금증을 억누르고, 슬비가 건너 준 양고기를 칼질로 발라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박지형도 자꾸 중부를 쳐다본다.
할 말이 분명히 있는데, 주위 사람들 때문에 차마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자 눈치 빠른 서누리가 막사 안 분위기를 대충 파악하고, 이상스러운 분위기를 바꾸어 보고자 입을 뗀다.
“오늘은 마유주 한잔하고 싶은데, 사림 낭자 술 있어요?”
“네, 잠시 기다리세요”
성격 싹싹한 사림이 게르 출입구 오른쪽 벽에 걸린 마유주를 가죽 주머니째 들고 온다.
마유주는 말의 젖을 짜서 양가죽에 담아 일만 번 이상 나무 막대기로 젓고 두드려 발효 숙성시킨 알콜 도수 度數가 낮은 술이다.
사림은 황태중림남 중 유일한 여성 수련자다.
“자~ 드시고 싶으신 분은 잔을 드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잔을 들어 올린다.
사림이 나무 국자로 정성껏 일일이 따라준다.
중부도 한잔 받아 마신다.
게르 안의 어색한 식사 분위기를 바꾸어 보고자, 누리가 먹던 양 갈비뼈를 손에 들고는 목청을 높여 주위를 둘러보며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오늘 늑대를 한 마리 잡았지”
“그럼, 그 늑대는 어딨지?”
“마침 그 옆이 설걸우 천 부장님 막사의 혈창루 모용 어르신 게르 근처였어”
“그래서?”
“혈창루 어르신께 인사차 드렸지, 어르신께선 아직 정정하시던데”
“하, 전설적인 대단한 분을 뵈었구나”
어수선하던 게르 안의 분위기가 구심점 求心點을 찾은 듯이 정리가 되며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주위 동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서누리는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상기된 표정으로 목소리를 한 단계 더 높여 일장 연설을 시작한다.
“그런데, 사부님의 친구, 머라더라...아, 동방향기란 친구가 천부장의 군사 軍師역을 맡고 있다더군, 우리 나이에 군사 직을 맡고 있다면 대단한 거잖아, 그것도 여자가”
옆에서 듣고 있던 중부는 자기의 여자 친구를 칭찬해 주는 서누리를 바라보며, 상당히 고무 鼓舞된 표정으로 입가에는 옅은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박지형과 이슬비의 얼굴이 하얗게 변한다.
둘은 동시에 얼른 우문청아를 바라본다.
술잔을 든 청아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진다.
마치, 벌레 씹은 표정이다.
‘흥, 중부도 계획적으로 나를 떼어놓고, 동방인지 서방인지 그 여시를 찾아갔구나’
불난 집에 물을 끼얹는다는 것이 물통이 바뀌어 기름통을 쏟아부었다.
옆자리의 중부는 불난 사실도 모르고 또, 누리가 지금 쏟아붓고 있는 것이 기름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불난 집에 기름을 들이붓고, 그 옆 사람은 그곳에 열심히 부채질하고 있는 광경이다.
그 모습을 멀찍이 바라보던 우문청아의 미간 眉間이 내 천(川) 자를 만들며 좁게 찌부러지고,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진다.
이를 지켜보고 있는 박지형과 이슬비는 불안불안한 마음에 좌불안석 坐不安席이다.
우문청아는 들고 있던 마유주를 단숨에 ‘쭉’ 들이키더니, 잔뜩 화난 표정으로 이중부를 째려보며,
“이중부, 나 좀 보자” 날카로운 목소리를 거칠게 내 뱉고는 게르 밖으로 나가버린다.
순간,
이중부는 어안이 벙벙하다.
중부뿐만 아니라 막사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란다.
이 무슨 해괴 駭怪한 변이람?.
“사부님이란 호칭도 바꾸고, 편하게 친구로 지내자”라고 이중부가 그동안 누차 당부하였으나, 우문청아는 그 제의를 한사코 거부하고 ‘사부님’ 호칭을 이 년 동안이나 고집하였다.
그런데, 돌연 ‘이중부’라고 막 대놓고 이름을 부르다니, 그것도 격한 감정이 실린 어투다.
중부가 눈을 크게 뜨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청아가 나간 게르 출입문을 바라보자, 비로서 말할 기회를 잡은 슬비가 얼른 중부에게 다가가 작은 소리로
“오늘 동방향기 군사가 오빠 찾으려 왔다 갔어”한다.
순간적으로 중부의 뇌가 복잡해진다.
“어! 향기가, 그런데, 왜? 둘이 싸웠어?”
“아니, 싸운 건 아닌데, 서로 간에 눈치싸움이 대단했어.”
“무엇 때문에?”
“참 내, 오빠 때문이지”
“내~ 가, 왜?”
“몰라, 하여간 빨리 나가봐요”
슬비에게 떠밀리다시피 게르 밖으로 나가니, 우문청아는 자신의 말 위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중부의 애마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