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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개항
조선은 1875년 일본이 도발한 운양호사건으로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가 맺어짐에 따라 쇄국정책이 무너지는 동시에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1876년 조일수교조규 당시 부산항이 개항하였고, 1880년 통상장정(通商章程)을 협정하여 그해 원산항과, 1883년 인천항이 차례로 개항되었습니다.
그 후 1897년 목포항 과 진남포항, 1899년 군산항 및 성진항과 마산항이, 1906년 용암포, 1908년 청진항, 1910년 신의주항이 개항 되었다.
군산항은 1899년 5월 1일 대한제국의 자주적인 결정으로 개항이 되었다.
그러나 개항 직후부터 일본의 조선수탈 통로로 활용 되다가 1910년 조일병탐(일명 한일합방)과 더불어 본격적인 일본의 조선에 대한 수탈 통로로 활용되기 시작하였다.
2. 개항전의 군산과 천주교의 관계
가. 최초의 신학생들
군산과 천주교의 인연은 군산항이 개항하기 약 55년 이전인 18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36년 모방 신부에 의해 조선인 예비신학생으로 선택된 3명의 조선인 청년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3인은 서울에 모여 역관 유진길에게 중국어를 배웠다.
1836년 12월 2일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3인은 모방 신부 앞에서 순명과 복종을 서약하고 다음날 밀사 정하상(바오로), 조신철(가롤로) 등의 안내로 모방 신부의 추천장을 받아 서울을 출발했다.
그해 12월 28일 중국 봉황성 변문에 도착하여 조선입국을 기다리던 샤스탕 신부와 상봉하고 약 5개월간 중국의 변문, 심양, 북경, 제남, 남경, 상해, 복주(또는 변문, 심양, 마가자, 서만자, 장치, 남경, 상해, 복주 경로)를 지나 그해 6월 7일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안의 조선교구 신학교(임시)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7일 신학생중의 한명인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위열병으로 사망하는 등 신학생들의 고생은 극심했다.
1839년 4월 6일 마카오의 소요 때문에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두 신학생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의 부대표 리브와(나폴레옹) 신부, 칼레리 신부등과 함께 마닐라로 피신해 그달 19일 마닐라에 도착하였고 그해 5월 3일 도미니코회의 롤롬보이 농장으로 이전해서 신학공부를 이어 나갔고, 그해 11월말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신학공부를 이어나가는 등 신학교 생활도 평탄하지 못하였다.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두 신학생은 칼레리 신부 등 7명의 서양신부로부터 신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서양 학문과 프랑스어·중국어·라틴어 등을 배우고 1841년 11월 철학과정은 모두 이수하고는 신학과정에 입문하였다.
그러나 김대건(안드레아)와 최양업(토마스) 두 신학생은 당시 25세 이상이 되어야만 신부가 될 수 있다는 교회의 원칙에 따라 서품을 받지 못하고 중국에 있었다.
1821년생인 김대건(안드레아)과 최양업(토마스) 두 신학생은 1821년 생으로 모든 신학교과정이 끝났을 때가 21세였다.
모든 신학교 과정인 끝난 김대건(안드레아)과 최양업(토마스) 두 신학생은 조선에서 기해박해 이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시작했다.
나, 신학생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의 조선 입국 노력
1840년대는 파리 외방 선교회가 조선 교구를 담당하여 주교와 신부를 조선에 입국시켜 전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프랑스를 포함한 외국과 수호조약을 맺고 있지 않아 천주교에 대한 종교자유가 없었음으로 프랑스 루이 필립 왕이 파견한 함대의 세실 제독이 조불수호조약을 맺고 천주교에 대한 종교자유를 실행하겠다고 나섰다.
1842년 2월 15일 김대건(안드레아)과 최양업(토마스)은 세실 제독의 통역관신분으로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가 선교활동의 직분을 받은 두 신학생의의 스승인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마카오에서 에리곤호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상해에 도착한 세실 제독이 갑자기 조선 항해를 중지하게 되었고, 김대건(안드레아)과 최양업(토마스) 및 매스트르 신부는 에리곤호에서 하선하면서 조선입국 시도가 실패했다.
1942년 7월 17일 최양업(토마스)은 브뤼니에르 신부, 범요한 신학생과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조선입국을 위하여 마카오를 출발해 조선으로의 입국로를 탐색하고 그해 8월 27일 양자강 부근의 오송항에 도착해 며칠 후 그달 31일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와 상봉하고는 그해 9월 10일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에서 하선하여 중국인 신자 범요한의 안내로 황세흥의 집에서 유숙했다.
그 다음날 범요한의 안내로 영국 배를 이용하여 상해의 강남 대목구장 베시 주교와 만나 조선입국을 의논하면서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달 17일 매스트로 신부와 김대건이 상해 도착하였다.
그해 10월 2일 베시 주교의 주선으로 브뤼니에르 신부, 매스트르 신부, 김대건, 최양업, 범 요한 등과 함께 창가루 섬으로 출발해서 그 달 12일 창가루 섬을 출항(김대건, 최양업의 첫 번째 귀국로 탐색) 했다.
그달 22일 요동반도의 남단인 태장하(현 요녕성 장하시) 해안에 도착하여 그달 25일 백가점(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 태장하 인근으로 훗날 사제들의 조선 입국 거점이 된 차쿠 이웃에 있던 교우촌) 교우촌의 두요셉 회장집에 유숙하였다.
11월초 김대건과 매스트르 신부는 조선입국 경로를 확인하고자 백가점에 남고, 최양업은, 브뤼니에르 신부, 범요한 신학생 등과 같이 개주의 양관(현 요녕성 개주시 나가점) 교우촌을 거쳐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소팔가자(현 길림성 장춘시 합륭진 소팔가자향) 교우촌에 도착해 신학공부를 계속하였다.
조선 입국 경로를 탐색하기로 하고 최양업, 브뤼니에르 신부, 범요한 신학생 등과 해어진 김대건은 그해 12월 변문에 이르러 조선 사절단의 일원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성직자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는 등의 조선 천주교에 대한 소식을 자세히 듣게 되었다.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서둘러 그해 12월 29일 혼자 변문과 의주를 거쳐 입국하였으나 중도에서 신분이 탄로 날 위험이 생겨 다시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돌아갔다.(김대건 1차 입국)
1843년 3월에는 변문을 통하여 의주에서 조선교우와 접촉한 뒤 백가점으로 귀환하기도 하였다.(김대건 2차 입국) - 당시 조선정부에서는 김대건과 최양업의 천주교 사제가 되기 위하여 중국에 유학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런 이유로 김대건과 최양업은 검거하여야할 주요 인사였던 것이다.
김대건은 그해 3월 백가점에서 페레올 주교가 있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기고 소팔가자에 먼저 도착해 있던 최양업과 소팔가자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했으며, 그해 12월 31일 개주 양관성당에서 거행 된 조선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성성식도 참석하였다.
페레올 주교는 변문의 국경감시강화로 변문-의주를 통한 조선입국이 어려워지자 1844년 2월 4일 김대건을 두만강 유역의 훈춘-경원의 입국로를 탐색하게 하였고 김대건은 그해 4월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에도 김대건과 최양업은 소팔가자에 머물며 메스트르 신부로부터 신학을 배우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1844년 4월 삭발례를 시작으로 그해 6월 2일경 차부제품을 1844년 12월 15일경 부제품을 페레올 주교로부터 받았다.
다. 군산 앞바다와 금강을 유유히 올라갔던 라파엘호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부제는, 다시 입국을 시도하여 페레올 주교와 함께 변문으로 왔으나 김대건 부제 혼자만 변문을 1845년 1월 1일 통과해 그달 15일 서울에 도착하였다(김대건 3차 입국).
김대건 부제는 서울에서 조선인 천주교 교우들을 만나고 교우들의 도움으로 길이 25자 깊이 7자에 가마니를 이은 2폭의 돗이 달리고 돗대가 2개인 무동력 목선을 구입하고는 ‘길을 인도하는 대천사 성라파엘’(이하 라파엘호)이라 명명한다.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와 사제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1845년 4월 30일 현석문(가롤로)등 11명의 조선인 교우들(예비교우 포함, 교우 및 예비교우들이 선원 역할을 함)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제물포를 출발해 그해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다.
페레올 주교는 조선에 입국하여 원활한 사목활동을 위해서는 조선인 사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는 그때까지 25세가 되지못한 김대건 부제에게 교구장의 특별권한으로 사제서품을 주고 조선입국을 하려고 했다.
그런 이유로 김대건부제는 그해 8월 17일 상해로부터 20리가량 떨어진 금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 집전으로 사제신품을 받았고, 그곳의 만당 소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첫 조선인사제가 되었다.
김대건신부는 같은 달 31일 페레오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및 라파엘호를 같이 타고 갔던 현석문(가롤로)등 11명의 조선인 교우 및 예비교우들과 같이 라파엘호를 타고 조선을 향해 상해를 출발했다.
그러나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배고픔과 탈진, 배 멀미 등으로 사경을 해매는 등 20여일간 표류하던 끝에 그해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포구 앞의 차귀도에 표착하여 감사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차귀도에 표착한 김대건신부일행은 라파엘호를 긴급히 수리하고 음료와 음식을 구해 보충하고는 그해 10월 1일 차귀도를 떠나 한강을 통해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러나 급하게 수리한 라파엘호는 기존에 파손된 부위에서 물이 차오르는 등 다시 파손되자 목적지를 당시 3대 포구중 하나인 황산포가 있던 강경으로 정하고 진로를 변경해 서해안과 금강의 교착지인 군산을 지나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황산포구 직전의 감시가 없던 나암포(나바위성당의 뒤편으로 현재는 논)에 그달 12일 밤(약 20시 경)에 상륙하였다.(김대건 4차 입국)
김대건 신부는 서울로 올라가 천주교 교우들에 대한 사목활동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주 변문과 훈춘지역에서 조선입국을 기다리고 있던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를 입국시키려고 애썼으나 변문과 훈춘지역의 경비가 심해 실패했다.
페레오 주교는 김대건 신부에게 바닷길을 알아보라고 지시로 교우들과 함께 1946년 5월 14일 마포를 떠나 백령도 부근으로 가서 중국 배에 편지와 조선의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순위도 등산진에서 1846년 6월 5일 밤에 체포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처음 해주관아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고, 이에 조선정부는 김대건신부에게 반역죄를 적용해 군문효수형을 선고하고 그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1845년 10월 11일 ~ 12일경 페레올주교와 다블뤼신부 그리고 조선인 최초 신부인 김대건신부 등을 태운 라파엘호는 금강입구인 군산을 지나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군산에 천주교의 입김을 불어 넣었다.
라. 1847년 신시도 사건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각각 받은 김대건 부제와 최양업 부제는 부제서품 후 김대건 부제는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와 동행하며 조선입국을 시도하게 되었고, 최양업부제는 스승인 매스트르 신부와 동행하여 조선입국을 모색했다.(페레올 주교는 사제들의 조선입국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방편으로 2개조로 나눠 조선입국을 시도했으며,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로 구성된 조가 1945년 10월 12일 조선입국에 성공했다.)
김대건 신부와 같이 유학을 떠났던 최양업은 김대건과 같이 1884년 4월 삭발례를 그해 6월 2일경 차부제품을 그해 12월 10일경 부제서품을 받았다.
부제품을 받은 최양업 부제는 조선으로 들어오기 위하여 매스트르 신부와 같이 동행하면서 변문이나 훈춘을 통한 조선입국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계속 실패하였다.
이때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 김대건 부제 등과 같이 상해로 거점을 옮겨 해상으로의 조선입국을 모색하였고, 매스트르 신부는 최양업 부제 등과 같이 소팔가자에 남아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 조선으로의 입국을 모색한 것이다.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는 1846년 1월초 변문에서 조선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그해 1월 말경 ~ 2월 중순경 까지는 조선입국을 위해 훈춘의 동강자 마을에서 경원으로 가려고 경원 개시를 기다리던 중 체포 되 3일 만에 석방되어 소팔가자로 귀환해 신학생을 지도했다.(최양업의 2차 귀국로 탐색)
그해 12월말부터 최양업 부제는 매스트르 신부와 변문을 통해 입국을 도모하던 중(최양업의 3차 귀국로 탐색), 1847년초 변문에서 조선교회에서 보낸 밀사들을 만나 병오박해 소식을 듣고는 서둘러 조선입국을 하려고 하였으나, 조선교회에서 보낸 밀사들의 만류로 조선입국을 포기하고, 홍콩으로 이전된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출발했다.
최양업 부제는 홍콩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해 조선에서 보내온‘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몰두해 완성한다. - 후일 조선 천주교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에 단초를 마련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1847년 7월 28일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라피에르 함장의 통역관 신분으로 라피에르 함장의 군함 글로와르호 와 빅토리외즈 호를 타고 조선으로 출발하였다.(최양업의 4차 귀국로 탐색) - 출발 전 라피에르 함장의 조선에 대한 임무가 끝나면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는 조선에 남기로 했었다.
그러나 1847년 8월 10일 라피에르 함장의 군함 글로와르호가 고군산군도에 난파하여(일성록 -‘신치도 후양에 난파되었다.’고 기록 됨, 새만금 신시도 배수관문 남남동 약 3㎞ 지점), 그달 12일 신시도 무영구미(신치산 남동방 일대, 신시도 새만금탑 동남방 일대 추정)에 표착해 신시도 영구미뜬물 지역에서 한 달여간 생활하고 그해 9월 12일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최양업 부제는 대공소(부안 대소공소) 신자를 만나 자신을 육지로 대려가 달라는 내용의 필답을 하여 작은배를 가지고와서 육지로 대려다주기로 약속을 받았으나 약속시간에 심한 감시로 배가 오지 못하는 등 신시도에서 생활하면서 육지로 들어오기 위해 조선병사와 관원들의 눈을 피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최양업 부제와 매스트르 신부는 조선에 남아서 육지로 들어갈 방법을 강구하려 하였으나 안전을 염려한 라피에르 함장의 강권과 거절로 결국 중국 상해로 돌아갈 수박에 없었다.
군산 신시도에서 중국으로 돌아간 최양업 부제는 그간 사제서품을 받을 준비가 끝나있었고 나이도 25세가 넘었으나 사제서품을 행하여줄 주교를 만나지 못하다가 1849년 4월 15일 사백 주일에 강남 대목구장인 마레스카 주교에 의해 조선인으로는 두 번째로 감격의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해 5월 매스트로 신부와 함께 중국 배를 타고 백령도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최양업의 5차 귀국로 탐색)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갔다가 그달부터 일단 만주의 부주교 베르뇌 신부아래서(보좌신부 직분) 성직을 수행하면서 귀국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최양업 신부는 그해 11월 요동으로 온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그해 12월 3일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의주를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했다.
그해 12월 말경 매스트르 신부와 헤어져 단신으로 변문-의주를 통해 입국에 성공(최양업의 6번째 귀국로 탐색 성공, 13년 만에 귀국)하여 서울에서 하루를 유숙한 뒤 다블뤼 신부에게 가서 병자 성사를 주고, 충청도로 가서 페레올 주교를 만나고 본격적인 조선에서의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최양업신부는 1850년초 용인 한덕골(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리)에서 아우들을 만난 뒤 진천 동골 교우촌에 거처를 두고 전국 5개도의 교우촌 방문 등의 역동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했다.
이러한 역동적 사목활동은 배티 신학교 지도신부 소임시절을 중 일부기간을 제외하고는 선종할 때까지 10여 년간 지속되었다.
최양업신부는 피와 땀으로 조선 신자들을 이끌던 중, 1861년 6월 15일 베르뇌 주교에게 보고 차 상경하던 중 문경 혹은 진천 배티에서 장티푸스와 과로로 인해 푸르티에 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
최양업신부의 부제시절 자신의 4번째의 조선입국시도는 미완의 입국이었으나, 통역관 신분으로나마 군함에 승선해서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의 일부분인 신시도에 표착하였다. 신시도에서 조선말을 하고 조선의복을 입고 있는 동포를 보고 감격하였고, 대공소(부안 대소공소)의 교우와 필답도 나누는 등 교우들과의 연결도 이뤄졌다.
최양업 신부는 부제시절 군산지역에 첫발을 디딘 사제로서, 군산지역의 천주교에 부싯돌을 던져 놓았다.
마. 천주교 선교사들의 입국통로 군산
19세기중엽 조선 천주교의 당면 과제는 박해에 따른 사제의 절대부족으로 사제들의 조선유입이 과제였다.
중국의 만주지역 팔가자를 전진기지로 하여 압록강하류의 변문과 두만강 하류의 훈춘을 통한 조선입국을 하였으나 국경경비의 강화로 더 이상 변문과 훈춘으로의 사제입국이 어려워지자 조선천주교는 해상을 통한 사제의 입국을 위하여 바닷길개척에 매진하게 된다.
고대 중국과 조선의 바닷길은 산둥반도에서 백령도를 거처 황해도로 들어오는 바닷길과 상해에서 흑산도를 경유하여 서해안 또는 남해안으로 들어오는 대체로 2종류의 바닷길이 있었다.
산둥반도-백령도 바닷길은 가깝다는 장점이 있으나 경비가 심하고 물살이 빨랐으며, 상해-흑산도 바닷길은 난류의 해류를 타고 비교적 안정적 운항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으나 거리가 멀고 태풍 또는 폭풍과 돌풍이 수시로 발생하고 파도가 높다는 단점이 있었다.
김대건 신부의 순교도 김대건 신부가 바닷길을 개척하기 위하여 백령도 부근으로 가서 중국 배에 편지와 조선의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순위도 등산진에서 신분이 발각 되어 순교로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최양업 신부와 같이 신시도에서 한 달여간 생활해본 매스트르 신부는 1852년 8월 고군산을 통하여 조선에 입국하였고 입국연락을 받은 조선천주교에서는 배를 보내서 매스트르 신부를 육지로 맞아들였다.
또한 1854년 3월 쟝수 신부가 배로 바닷길을 이용해 조선에 입국했으며, 최양업 신부는 그달에 쟝수 신부가 타고 온 배로 바닷길을 이용해 말레이시아에 있는 페낭신학교로 유학을 떠나는 신학생 3명을 태워 보내기도 하는 등 바닷길을 통한 사제의 조선입국이 실현되었다.
조선천주교회는 변문이나 훈춘을 통한 육로의 입국에서 바닷길을 이용한 사제의 조선입국과 신학생들의 출국을 실현 시켜 바닷길 개척이라는 일대 전기를 이루게 된다.
조선천주교는 처음 거리가 가까운 산둥반도-백령도 해로개척에 매진하였으나 실패하였으나, 매스트리신부의 상해-흑산도 해로를 통하여 고군산으로의 입국에 고무된 조선천주교는 산둥반도-백령도 해로 개척에도 성공해 이후부터 한불조약(1886년)때까지 변문이나 훈춘을 통한 입국보다는 산둥반도-백령도 해로를 사제입국의 통로로 이용한다. - 1876년 5월10일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 1877년 9월 20일 리델 주교,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가 산둥반도-백령도 해로를 통해 황해도로 입국하는데 성공해 다시 조선의 천주교인들을 이끌었다.
매스트르 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스승신부인 동시에 동료 사제로써 조선천주교를 위하여 헌신하다가 1857년 조선에서 선종하였다.
바. 조불조약 이전의 군산지역 담당 사제 및 소속 교구
(1) 군산지역의 소속교구 변천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에 이르는 때를 ‘대항해 시대’ 또는 ‘지리적 발견 시대’라고 하며, 유럽에서도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주도와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교황청에서는 새로 발견된 지역에서 예상되는 두 나라의 분쟁을 예방하고, 원주민 선교를 추진하기 위해 두 나라에 일정한 경계를 정해주어서, 두 나라가 관할 구역 내에 교구를 설립하여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이를 ‘선교 보호권’이라 한다.
당시 아시아의 해양을 지배하고 있던 포르투갈은 교황청의 일명 “선교 보호권”을 이유로 당시 해상지배권을 가지고 있던 포르투갈이 1558년 포르투갈의 교구일부로 자신들의 식민지인 인도부터 시작되는 동양의 전 지역을 관할권으로 하는 포르투갈 동양무역 중심지 인도 서해연안의 고아에 고아대교구를 설립한다.
포르투갈은 자신들의 해양지배권을 동쪽으로 더욱 늘리고는 1566년 마카오에 전진기지를 마련하고 교황청에 교구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한다.
교황청은 1576년 마카오 교구의 관할을 “중국, 일본과 인접지역”으로 명기한 대칙서를 내림으로써 마카오 교구를 승인하였다.
160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해상세력의 경쟁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그 자리를 영국, 프랑스 등이 차지하면서 해상지배권은 자연스럽게 주도권이 영국, 프랑스 등으로 넘어갔다.
교황청은 이런 국제흐름을 파악하고 원활한 선교지의 관리를 위하여 1620년대 초 포교성을 설립해 교황 파견 선교사를 새로운 전교지역에 파견하여 교황 파견 선교사들이 교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대목구 제도를 시행한다.
그러나 교황청은 일단 중국과 인접국가에 대해서는 포르투갈의 선교 보호권을 동시에 인정하고 1679년 포르투갈이 요청한 중국의 난징대목구 설치에 대해 승인하여 대칙서를 보내 그 관할구역을 ‘난징 및 인근 성과 조선’으로 설정했다. - 이때부터 조선천주교는 서양에서 바라보는 주요 선교지역으로 인식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교황청은 난징 대목구에서 베이징(북경) 대목구를 1690년 독립시키면서 조선 선교의 책임은 베이징 대목구 관할로 넘어가게 되었고, 그런 이유로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파견했던 것이다.
1831년 교황청은 조선대목구를 독립시키면서, 파리외방전교회에 조선 선교를 부탁했고, 초대 조선교구장으로 파리외방전교회의 브뤼기에르주교를 교구장을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포르투갈계의 천주교 사제(선교사)에서 프랑스계 사제(선교사)로 대체 되었다. - 주문모 신부와 유방제 신부는 베이징대목구의 포르투갈 교회의 소속이었으며, 조선대목구설립 이후 조선에 입국한 모방신부부터는 프랑스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었다.
이런 이유로 파리외방전교회의 모방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자 바로 부주교의 권한으로 포르투갈계의 베이징대목구 소속으로 조선에 먼저 입국해 있던 유방제신부를 중국으로 추방했던 것이다.
(2) 군산지역 관할 사제의 변천
군산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조선대목구는 조선대목구 설립 이후 프랑스계의 파리외방전교회 사제(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조선의 천주교 신자들을 이끌게 되었다.
처음 조선에 입국한 포르투갈계의 중국인 사제들인 주문모 신부, 유방제 신부를 거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중국인 사제 모방 신부, 프랑스인 사제 샤스탕 신부, 다블리 신부, 조선인 사제 최양업 신부, 프랑스인 사제 리델 신부였으며,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 되면서 사제(선교사)들의 전라도 공소방문이 끊겼다.
그러다가 1877년 11월경 블랑 신부가 군산지역이 포함된 전라도 지방 담당 신부로 부임하여 천호산의 어름골 공소에 정착하고는 인접한 다리실 공소를 오가며 거주하였다.
당시 조선에는 1876년 5월10일 블랑신부와 함께 입국한 드게트신부와 1877년 9월 20일 리델 주교와 함께 입국한 두세 신부, 로베르 신부 등 5명의 사제가 있었으나, 리델주교는 입국한지 4개월 만에 체포되어 6월 4일 중국으로 추방되면서 블랑 신부를 부주교로 임명하였고, 1879년 5월 15일 드게트 신부가 공주에서 체포 되어 1879년 9월 7일 중국으로 추방되었으며, 이 무렵 충청, 경기 지방 신도들이 수십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포도청에 갇혔다가 순교하였다.
1879년 4월부터 두세 신부는 고산 빼재에 머물렀으나, 드게트 신부를 체포한 후 포도청에서는 블랑 신부를 체포하도록 포교들을 전라도로 내려 보내어 고산지방을 수색하자 블랑 신부와 두세 신부는 장수 큰골 뒷산 상여덤에 있는 굴속에 한동안 숨어 지냈다.
1882년 블랑 신부는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1886년 조불조약을 맺은 후 프랑스 사제는 위상이 높아져 치외법권적인 보호를 받게 되면서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었다. -조불조약 이후부터 사제들의 입국이 자유스러워 지면서 많은 사제들이 입국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군산지역을 사목지역의 일부로 담당한 사제는 주문모 신부 유방제 신부를 거처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다블리 신부, 최양업 신부, 리델 신부, 블랑 신부, 두세 신부, 리우빌신부, 죠스 신부의 순서로 군산지역을 담당 사목지중 일부지역으로 하는 사제의 변화가 있었다.
다만 군산지역을 담당 사목지중 일부 일부지역으로 관할하던 사제들이 군산지역의 교우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어떤 종류의 사목활동이 있었는지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사. 교우촌(공소) 시대
병인박해 이후 군산지역에도 전라도의 다른지역과 마찬가지로 교우촌들이 형성되었다. (물론 그이전인 1800년을 전후로 박해를 피해 이주를 시작하면서 교우촌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나 군산지역을 한정해서 그 부분에 대한 고증이 불가능하다. 다만 부안천주교사에 따르면 군산시 성산면 산곡리 산골 교우촌에서 옹기가마를 운영하며 생활하던 정복조가 1857년 부안 무내미로 옹기가마를 옮기고 이사하여 전교를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결국 군산지역의 지리적 특성상 1880년대 중반 경부터 산골교우촌을 중심으로 교우촌이 형성되 퍼져나가다가 본격적이고 대규모의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병인박해 이후라 봄이 타당하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주로 충청도지역에 거주하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전라도 산간지역으로 이주하지 시작하였고 현재의 군산지역으로도 기존 산골교우촌 및 그 부근으로 박해를 피해 이주해와 교우촌을 형성했다.
군산지역의 교우촌은 주로 옹기가마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농업과 겸업하는 경우와, 숯가마 또는 수공업에 의한 특산물을 만드는 경우, 산간오지의 담배농사 등으로 생활하였고, 이러한 생활은 교우촌 공동작업을 통한 소규모 공동체를 유지하게 된 것이다.
1880년대 전라도의 교우촌이 약 500여 지역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교우촌중 군산지역의 교우촌은 임피 15개소, 옥구 1개소, 함열 9개소(함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임피면과 서수면으로 함열의 일부가 군산에 편입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임피의 사옥개(군산시 내흥동), 감동이, 막김이, 덜뜸이, 세동(새동), 서당골(성산면 도암리)
서수에 흥법(서수면 취동리 점촌), 관운정이(서수면 마룡리, 왈운정, 가는쟁이), 창감(장감), 내동(서수면 취동리), 옥하, 마룡, 축동
성산에 마골(성산면 도암리 마동), 고살미(성산면 고봉리), 산골(성산면 산곡리),
회현면의 칠거리(회현면 고사리)
나포면의 숯골(나포면 나포리)등이 전해지고 있다.
교우촌의 지명이 전해지는 이유는 당시 사제들이 방문하여 성사를 집행했다면 ‘그곳에 공소를 열었다!’고 하여 공소가 설립된 것으로 보았고, 그곳이 바로 교우촌 이었던 것이다.
사제들이 성사가 집행 된 지역을 표기하면서 공소가 설립되었다고 하면서 교우촌의 지명이 전해진 것이고 사실은 교우촌이나 공소는 전해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 조불조약 이전에는 박해에 대한 보안을 이유로 사제들이 교우촌에 대한 자료를 파기했으며, 신자들 역시 같은 이유로 교우촌을 숨겼기에 교우촌에 대한 자료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군산지역에서는 서수 관운정이에서 1880년경 성사가 집행된 것(대야성당 자료, 교세 통계자료에는 1892년)으로 전해지는 것으로 봐 교우촌 중에서도 상당히 중심에 있던 지역으로 판단된다.
교우들은 평소때는 흩어져서 살고 있다가 공소가 개설되 사제가 방문하면 인근의 교우들이 모였으며 대략 군산인근에 살고 있던 교우들은 100여명이 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사제가 방문한 교우촌의 공소개설은 교우중에서도 지도자급 교우의 집으로 공소회장 또는 유력인사의 큰집을 이용하고, 흩어져 생활하고 있던 교우들이 모일수 있는 교통까지 고려해서 개설된 것으로 파악 된다.
1882년에는 문헌성 최초로 현 내흥동 사옥개와 임피 막김이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1883년에는 임피 덜뜸이에, 1884년에는 임피 감동이와 옷산 칠거리 그리고 나포면에 나포공소(교세 통계자료에는 1886년)가 설립되었다.
1885년에는 성산 산곡리에 산골공소(대야성당 자료, 교세통계자료에는 1896년)가 개설 되었고 공소회장은 신사문 회장 이었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화전식 농업, 옹기가마, 숯가마 및 수공업이 주요 생활수단이었다.
나포의 신자들은 숯을 만들거나 왕골, 갓(조선시대 양반들이 머리에 쓰던 관모) 등을 만들어 파는 수공업으로 생활했으며, 얼마 전까지 나포에 숯골이 있었다. - 충남 아산지역이 갓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갓과 왕골이 조선후기 나포의 특산물로 대표되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포지역 교우촌의 신자들은 충남 아산 또는 아산 인근지역출신 교우들이 이전하여 설립한 교우촌이 아닐까 판단되며, 이런 이유로 1791년 이존창의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이사 때 같이 가지 못하였다가 후에 나포지역에 교우촌을 형성한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특히 나포지역은 동학도들이 공주관아를 공격하기 위하여 선택 된 동학군의 이동로중의 하나로 동학군은 나포에서 배를 이용해 충청도 서천으로 올라가 공주를 공격하였으며, 나포에 다다른 동학군들은 나포의 많은 주민들을 동학군으로 받아들여 공주 관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당시 천주교 나포지역의 교우촌 피해는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피해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한편으로는 토착주민들과 전혀 왕래가 없는 상태였다면 피해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다른지역의 교우촌 신자들은 공동작업이 필요한 담배농사와 옹기가마를 주요 생산 및 생활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담배농사는 이익이 크고 개간한 산에서 농사를 할 수 있어 교우촌에서 많이 하였다. - 교우촌에서 담배농사로 큰돈을 벌어들인 신자들도 많이 있었고, 전주본당(현 전동성당) 건축 때 보두네 신부도 담배를 쌀 때 매입해서 비쌀 때 파는 방식으로 건축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옹기가마는 교우촌의 주요 생산수단이었으며 교우촌간의 연락까지 가능한 사업으로 상당히 성행하였다. - 옹기가마운영은 돈이 없고 기술도 없는 교우들이 생업과 신앙생활의 지속적 영위를 위해 운영했으며, 외국인 사제들은 교우촌 교우들의 옹기가마 운영을 지원하고 유약에 관한 사항 등 옹기 기술 및 옹기가마 운영에 대한 사항을 지도해주기도 했다.
1800년경부터 1900년까지 전라도의 옹기촌은 약 30여곳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군산지역은 칠거리, 내동, 흥법, 마골, 관운정이, 산골 등 군산지역 곳곳에 옹기 교우촌이 산재해있었다.
군산은 흙이 좋아 여러 교우촌에서 옹기가마를 운영했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산림법’이 제정 되 벌목을 제한하자 옹기가마의 에너지원인 나무(화목)를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옹기가마를 주로 하는 교우촌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옹기산업이 쇠퇴하면서 옹기가마를 주업으로 하던 교우촌의 교우들은 교우촌을 떠나 군산항이나 이리역의 일용잡부로 생활터전을 옮겼다.
또한 옹기가마는 흙이나 나무 등이 고갈되거나, 토착하고 있던 마을주민들과의 분쟁이 발생하면 옹기가마를 옮겼으며 그러다보니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갔었다.
1857년대 군산시 성산면 산곡리 산골마을에서 옹기가마를 운영하던 정복조는 부안군 주산면 덕림리 무내미로 가마를 옮기고 무내미공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군산지역 공소의 현대적 위치 설명
사옥개 : 이마트에서 금강하구둑 가는 길에 강변도로를 타고가면 축구장 야구장, 금강민물장어가 나오는데 그 부근이 사옥개다.(현재 내흥동) 개(介)자는 부근이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로 '사옥마을 부근'을 의미하며 사옥마을은 금강민물장어 옆부터 내흥초등학교 부근까지의 마을을 가리키며 사옥마을부근(사옥개)는 지금의 금강 하구언 축구장 부근이다.
세 동 : 세곡 또는 가는골 이라고도 한다. (현 성산면 도암리) 골이 가늘고 깊어서 붙여진 이름이고 군장대학교 맞은편으로 들어가면 있다. 군산IC로 가다고 군장대로 내려와서 군장대로 가다가 군장대정문 못가서 오른쪽 다리 밑으로 쭉 들어가면 마을이 나온다.
서당골 : 성산만동마을에 있는 곳으로 지금 전의 이씨 제각이 있는 곳을 서당골 이라고 한다. 예전에 서당이 있었다. 만동마을은 구이와 만동이 합쳐져서 만동마을이라 하는데 서당골은 옛 구이라는 곳의 왼쪽부근의 골짜기에 있는 골짜기이다.
흥 법 : 임피 방면에서 함라 방면으로 가는 길로 가다보면 축성루라는 한우집을 지나 계속가다 보면 신호등사거리가 나오는데 그 사거리에서 왼쪽 나포로 가는 길로 계속가다 보면 고개 넘기 전 흥법마을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그 옆 외무장 보천사 있는 곳과 흥법 사이에 있는 마을이 내동이라는 마을이다. 지금은 내동과 흥법을 합쳐 내흥이라고 한다. (서수면)
관운정 : 왈운정, 번데기라고 도 함. 임피에서 함라로 가는 길에 서수농공단지를 지나 계속가다 보면 오른쪽마을을 운원이라고 하는데 원동마을과 왈운정이 합하여 운원이라고 한다. 왈운정은 길의 좌측(현 관원리) 원동마을은 우측(마룡리)였으나 길이 나면서 운원마을로 합쳐졌고 관운정쪽의 마을이 없어지면서 운원만 남았다.
마을명칭유래가 조선시대 서울에서 임피현감으로 취임하는 현감이 첫발을 디딘 지역으로 이곳에 정자를 지였는데 이정자를 구름과 같이 날아가는 아름다운 곳 이라 하여 일운정(관운정) 이라 불리었다.(서수면)
창 감 : 성산파출소에서 임피로 가는 길에 500미터만 가면 주유소가 나오고 금강슈퍼에서 좌회전하면 둥지아파트가 나오고 고개를 넘어가서 사거리가 나오면 오른쪽으로 계속 들어가면 평강채씨 재각이 나오고 조금 더 가면 산밑에 마을이 나온다. 버스종점이기도한 그곳이 참감, 참암마을이다.
옥하마을 : 서수면사무소에서 서수농공단지로 가는 길로 가다보면 나오는 마을. 옥새우가 나왔다고 하여 옥하로 불렀다.
마룡 과 축동 : 마룡과 축동은 임피에서 함라로 가다보면 신호등사거리를 기점으로 볼 때 왼쪽부근 즉, 상주사 보천사 그 지역이 축동리이고 축동리에 해당되는 마을이 축동리 신장, 복우, 내무장, 외무장, 내흥이 있습니다. - 김영철(베드로)의 부친께서 1950년대 말경까지 축동리 22번지에서 옹기가마를 운영하셨다.
그리고 신호등사거리 지나서 오른쪽 부근이 마룡리이고 마룡초등학교 , 서수농공단지가 마룡리에 속한다.
마룡리에 속한마을이 운원, 신중용귀마을 ,원용귀마을 장곤 하장곤마을
마 골 : 마동이라고 도함 성산IC로 가다가 군장대로 내려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가면 처음나오는 마을 이 마동, 즉 마골임. 예전에 오래된 팽나무가 유명하고 지금은 죽었음 (성산면)
고살매 : 성산파출소 성산면사무소 성산교회부근을 예전에 고살매라고 하였음(성산면)
산 골 : 성산면 산곡리 산곡마을을 산골이라 함. 벽돌공장옆으로 들어가면 산골 이다. 그 옆에 점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서 개정면 아산리로 넘어가는 고개가 전설이 있는 애점고개이다.(성산면 산곡리, 산곡공소의 위치도 산골로 추정됨)
칠거리 : 옥산에서 회현으로 가다보면 고개가 나오는데 그 고개를 칠거리라 한다.
숯 골 : 나포면 주곡리를 숯골이라고 합니다. 왕골과 갓 그리고 숯을 만들었다.
김영철(베드로) 집안의 교우촌 생활
여산숲정이성지의 대표적인 순교치명자인 김성첨(도마)는 넓은바위 교우촌에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1868년(무진년) 병인박해 2년후에 천주교도인이라는 이유로 잡혀서 여산숲정이성지에서 일가 5명, 마을주민(넓은바위 교우촌) 11명과 같이 17명이 순교 치명하였다. 그분의 고손자가 김영철(베드로)다. - 여산숲정이 성지의 순교치명자는 총25명 이다.
김성첨(도마)의 순교 후 그의 아들(김영철의 증조부)은 임실의 교우촌으로 이사를 하였으며, 김성첨(도마)의 손자는 다시 성산 고살매로 삶의 터전을 옮겨 옹기가마를 운영하였고, 김영철(베드로)의 부친은 1950년대 후반까지 서수 축동 22번지에서 옹기가마를 운영하였으나 옹기산업의 어려움으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1967년경 아들 김영철(베드로)과 같이 군산시 신영동으로 이사하였으며, 김영철(베드로)은 군산둔율동성당에서 사목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김영철(베드로)집안은 전형적인 조선 천주교 교우집안의 역경과 그 맥락을 함께한다.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천주교도라는 이유로 순교하고 그 후손들은 이리저리 교우촌을 전전하며 옹기가마을 운영하고 옹기산업이 쇠퇴하면서 다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다가 도시로 진출하여 신앙을 지켜나가는 김영철(베드로)집안의 가풍은 가히 우리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아. 조불조약 후 군산과 천주교
(1) 교우촌 공소의 설립
1886년 6월 4일 조불조약이 체결되면서 어느 정도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된 조선천주교는 공소설립과 병행해서 성당건립을 추진함과 동시에 전교에 매진하게 되었으나, 군산지역은 본당설립이 요원한 가운데 교우촌을 중심으로 공소설립이 계속되어갔다.
1887년에는 세동공소가, 1888년에는 흥법공소가, 1891년에는 서당골 공소가 1895년에는 창감(장감)공소가 설립되었으며, 1900년에는 서수면에 옥하공소와, 마룡공소, 축동공소(회장 이윤옥)가 설립되었다.
1896년 전라도(전주, 나바위, 되재, 수류 등)의 사제들이 군산항에서 서울지역으로 왕래하면서 경유지인 군산항에 사제들의 휴식공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에 의하여 성산면 산곡리에 주택을 구입해 사용하면서 산곡리공소가 탄생하게 된다. - 산곡리공소의 개설은 당시 포구였던 서포까지 평지로 약 10리를 걸어면 갈수 있으면서도 산속에 있고 교우촌도 형성되 있어 사제들이 안전하게 휴식을 취하고 공소의 역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의 교우집에 개설된 공소들과는 달리 현대적 의미의 군산지역 최초 공소로 판단된다.
1909년 개정공소가, 1910년 고살매공소(성산면 고봉리 고봉공소, 회장 홍만철)이 설립 되는 등 이후에도 군산지역의 공소는 꾸준히 증가했다.
(2) 뮈텔주교의 군산지역 사목방문
1896년 11월에는 군산지역은 처음으로 교구장 사목방문의 경사를 맞았다.
당시 조선교구 교구장이던 뮈텔주교는 먼저 저성첨례날(모든 성인의 날, 11월1일) 되재성당(한강이남 최초성당, 조선 2번째 성당)의 성당 및 종 축성식을 하고 약 한 달여간 산하공소방문을 하고, 전주성당(현 전동성당 전신)을 방문하여 보두네 신부를 만나고 나서 전라도 감사를 방문해 사제들과 교우들의 각별한 보호를 요청하는 등 활동을 하고 수류성당으로 이동하여 성탄(12월 25일)을 지내고 또 한 달여간 산하공소를 방문한 다음 서울로 돌아갔다.
뮈텔 주교의 산하공소 방문 때인 1896년 11월 27일 군산지역의 공소인 관운정이 공소를 사목방문하고 공소회장 김요한의 집에서 기거하고 이리공소(이리공소 방문 11월 29일)로 떠난다.
당시 공소가 개설된 관운정이 교우촌 마을은 반은 옹기마을이고 반은 농촌이었으며 공소회장인 김요한은 상당한 부자였다고 뮈텔 주교의 기록에 나온다.
(3) 군산지역 공소들의 교육활동
한불수교 이후인 1889년부터 공소들에서는 서당식 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군산지역에서도 1898년 임피 창감(장감)공소 소속의 학생이 인근의 서당식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였고 1899년 ~ 1900년 임피 창감(장감)공소에 서당식 학교를 개설했고 학생은 2명 이었다.
1890년 ~ 1892년까지는 성산 산골공소 소속의 학생이 인근의 서당식 학교에 다닌 기록도 있다.
그러나 군산에 현대식 학교가 생기면서 학생들을 흡수하여 서당식 학교는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4) 군산지역 공소들의 사회복지 활동 - 고아양육
조선천주교에서는 고아들을 공소로 받아들여 공소에서 키우거나 양육을 원하는 신자가정이 있는 경우 신자 가정에 위탁하여 키우도록 하였으며, 프랑스의 도움(원조)로 양육비를 지급했다.(양육비는 1860년대 기록에 의하면 한 살까지 24냥, 10세까지 17냥, 12세까지 6냥)
군산지역에서도 서수 흥법 공소에 1898년 ~ 1899년 공소 고아원양육고아 1명과 교우가정위탁고아 1명이 있었으며, 1900년 ~ 1901년 에는 서수 흥법공소와 성산 산골공소에 고아원양육고아 1명씩이 있었다.
1910년 ~ 1911년 성산 산골공소에 교우가정위탁고아 1명이 있었던 것을 마지막으로 군산지역에서의 고아에 대한 공소의 사회복지사업은 막을 내린다.
고아복지사업은 프랑스의 고아 양육에 대한 운영비가 끊기면서 공소차원에서는 운영하기가 불가능하였으며, 1915년 이후 군산뿐만 아니라 조선교회에서 고야양육사업은 일단 막을 내린 것이다.
3. 군산본당 태동기(군산항 개항 이후)
가. 1차 군산본당 설립 추진 무산
호남을 직접 사목방문을 행한 뮈텔 주교는 전라도 지방에 본당증설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1897년 피정이 끝난 후 2개의 본당을 증설하기로 하고 그 후보지로 강경 또는 군창(현재 군산)과 막 개항을 한 목포를 후보지로 선정 하였다.
전라도 북단과 남단에 본당을 설립하여 북단은 많은 신자들을 관리하고 신자가 거의 없던 목포는 천주교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전라도 북부지역의 본당설립을 위하여 뮈텔 주교는 1897년 5월 8일 베르모렐 신부에게 본당신설의 임무를 맡기게 되고, 임무를 맡은 베르모렐 신부는 그해 6월 초순 원산항에서 기선 현익호를 타고 남해를 돌아 그달 말경 군산항에 내려 군산을 후보지로 탐색한 결과 군창의 사정상 사제의 정착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베르모렐 신부는 작은 배로 금강을 따라 올라가 강경에 내려 안대동 공소에서 성베드로⦁성바오로 축일(6월 29일)을 지내고 강경에 정착해 보려고 하였으나 강경 역시 사제의 정착이 불가능하여 강경에서 멀지않은 화산 나바위를 후보지로 택하게 되었고 먼저 나바위 아래 군수를 지낸 김여산의 규모가 큰집을 구입하여 12칸의 성당을 마련하였다.
나바위 뒤편이 김대건신부가 사제서품이후 최초로 밟은 육지인 나암포로 후에 나바위까지 매입하여 성역화 하였으며, 나바위 성당은 전라도 북부지역과 충청도 남부지역을 아우르는 모 본당으로 자리매김한다. 군산성당 역시 나바위 성당을 모 본당으로 하여 설립된다.
1897년 뮈텔 주교는 목포와 같이 군산도 개항될 것으로 내다보고 베르모렐 신부를 전라도로 발령하면서 군산에 본당을 세웠으면 하고 내심 바랐고, 베르모렐 신부도 짐작은 하였다.
그러나 군산은 옥구 북면의 진포가 발전하여 된 도시로 조선 중기부터 세미를 보관하는 창고와 이를 지키는 군산진이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인구라야 부두 노동자와 어업에 종사하는 20~30여 호밖에 안되고 교우라고는 한사람도 없어서 본당을 세운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베르모렐 신부는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여건상 군산지역의 본당 신설은 뒤로 미뤄지게 된 것이다.
나. 2차 군산본당 설립 추진(무산)
1900년 9월 보두네 신부, 베르모렐 신부, 라크루 신부 등은 뮈텔 주교에게 목포의 예를 들어 개항을 한 군산지역에 본당설립을 구두로 건의하였다.
건의를 받은 뮈텔 주교는 서면으로 보두네 신부에게 군산지역 본당설립을 지역 신부들과 회의하라고 제안하여 당시 전라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보두네 신부, 베르모렐 신부, 라크루 신부 등이 회의를 하여 만장일치로 군산지역의 본당설립을 통과시키고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고는 성당 및 사제관부지로 동령고개(빈해원 부터 영동입구까지) 일대의 야산(현 장미동 전북은행 군산지점 부근)과 주택을 1,000냥에 구입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1,000냥이라는 재정문제와 당시 군산에 1가구만 거주하고 있어 실효성 문제로 군산본당설립 추진이 무산되었다.
다. 3차 군산본당 설립추진(무산)
1924년도에 다시 사제(선교사)들 사이에 군산에 본당을 설립해야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때에는 군산 부근의 해안을 간척해 거대한 토지를 보유한 일본인 지주회사에서 땅을 개간해 농토로 만들어서 소작할 농민들을 모집하고 있었고, 쌀 수탈의 통로로 군산항이 이용되면서 군산항 부근에 많은 인부가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각종점포들도 모여들어 상업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나바위 본당 카닥스 주임신부는 군산본당이 설립 되면 조선인과 일본인 약 800여명의 교우들이 모일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군산본당을 신설하지 못하면 23개 공소에 3,000명의 교우를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렵고, 군산까지는 거리상으로도 감당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11년에 신설된 대구대목구는 군산에 신설본당을 설립할 재정적 능력이 갖춰져 있지 않았고 사제의 수습도 원활하지 못해 군산본당설립 추진이 무산되었다.
라. 일본인들의 군산진출
1911년 4월 8일 조선교구가 경성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면서 군산지역은 대구대목구 소속으로 바뀌면서 관할주교도 뮈텔 주교에서 드망즈 주교로 바뀌게 된다.
일본은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1910년 ‘이주민 취급규칙’을 만들어 조선에서 일본인 지주를 합법화 하였고 이로 인하여 1911년 일본인 농업이민이 개시 되어 강경과 논산지역에 나가사끼 교구출신 일본인천주교 신자가 탄생하였고, 군산에도 10,000여명의 일본인이 거주하면서 신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드망드 주교는 주교착좌 이후 1913년 5월 29일 나바위 성당을 사목방문 했다.
드망즈 주교의 나바위 성당 사목방문 때 일본에서 활동하던 페랑 신부가 일본인과의 통역과 일본인들에 대한 성사를 위해서 동행하였다.
드망즈 주교의 나바위 성당 환영식에 조선인과 일본인을 합하여 약 500여명이 참석하였으며, 군산지역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 신자들이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
마. 군산공소시대
1900년경 홍안드레아(종식)가 가족을 거느리고 군산으로 이주하여 거주하면서 군산시내에 처음 천주교신자가 나타난다.
군산항이 일제에 의한 수탈의 항으로 커가면서 인구가 증가하고 외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고 천주교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여 1913년~1914년경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최초의 공소는 김마리아 사택(현 군산시 영동 22)에서 공소개설을 하여 나바위성당의 베르모렐신부를 모시고와서 판공성사 및 세례식을 거행했다.(1931년 1월 경향잡지 기사에 ‘18년 전부터 군산에 공소가 있었다.’고 나와 있다.)
이때 세례를 받은 김용진(야고보)는 군산성당 초대본당회장으로 군산본당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 홍안드레아(종식)
태중교우였던 홍안드레아는 집안을 지켜주던 30여살 위의 형님이 1882년 급사하고 나서 천주교인이라는 고변을 받았다는 것을 주위에서 듣고 고령의 부친만이 집안을 지키고 12살의 나이에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1882년경 배편으로 개성을 떠나 안면도에 피해 있던 중 1886년 부친이 별세하고, 대사면령이 선포되자 다시 개성으로 들어가 재산을 찾고 나서 가산을 일부 정리해 1900년경 가족과 같이 군산에 들어와 일출정에서 ‘만동리토점’을 운영하면서 천주교인들의 옹기보부상을 지원하다가 1910년 이후 영동에 터를 잡고 ‘안선상회’라는 포목점(맞춤복전문점)을 운영했다. - 홍안드레아의 부친은 천주교인이 아닌 것으로 보이며, 홍안드레아의 모친, 형과 형수가 천주교인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홍안드레아는 당시 개성의 재산관리는 큰아들과 4째 아들에게, 안면도의 재산관리는 둘째아들에게 관리를 시키고 본인은 3째 아들과 5,6,7째 아들을 대리고 일출동(현 군산시 금암동 우풍화학 부근)의 가옥을 구입하여 ‘만동리토점’을 운영하다가 영동 25번지에 ‘안선상회’를 열었다.
(2) 홍안드레아와 김마리아 관계
홍안드레아의 부인 막달레나는 안선상회 옆에 있던 개성출신의 개성상회 안주인 김여사와 동향이라는 공통점으로 가까이 지네다가 김여사을 선교하여 마리아를 세례명으로 영세시켰으며, 홍안드레아의 둘째딸과 김마리아의 장자 한민수가 결혼하여 사돈을 맺게 되었다.
김마리아는 당시 개신교도였던 남동생 김용진을 설득, 개종시키고 전교에 전념하였다. 김용진(야고보)은 1935년 군산성당에 종을 기증하고 고향인 개성으로 떠 날 때 까지 공소회장 및 군산성당 1대 회장으로 군산천주교의 설립과 자립에 초석을 다졌다.
홍안드레아는 둘째사위 한민수와 그의 모친 김마리아가 운영하던 '개성상회'포목점과 연계하여 가족중심의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3) 군산으로 이주한 군산공소 초창기 신자
개성에서 이사 온 홍안드레아, 김마리아, 김용진(야고보)과 황해도 해주에서 이사 온 강윤흠(요한)을 필두로 서울, 개성, 평양 등지에서 이사 온 임바오로, 한민수(김마리아의 아들, 개성상회 사장), 양성준, 채용수, 유마리아, 박수산나 등과 서천군 마서면 덕암리 교우촌에서 구재현(바오로)의 부친인 구영환(베드로)이 일가를 이끌고 1923년도에 군산으로 이사하였으며, 1920년대 초반 성민호 신부(군산성당출신 최초사제)의 부친이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 교우촌에서 일가를 이끌고 이사하였다. 또한 군산 인근의 교우촌 교우들이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군산지역으로 진출하였고, 이러한 신자들의 서로 어울려 신앙공동체를 이뤄 나가시 시작했다.
(4) 군산공소시대 종교생활
군산공소 신자들은 매일 모여서 예절을 거행하고, 신부님이 오실 때는 성사를 보며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대축일때가 되면 군산지역 신자들은 대축일 전날 저녁을 든든히 먹고 모여서 공소예절을 올린 후 도보로 약 40여 킬로미터를 걸어 어른들이 해주는 모세오경 등의 성경이야기를 듣고, 묵주기도를 하며 대축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나바위성당에 갔으며, 나바위성당에 도착하면 나바위성당에서는 커다란 무쇠솥을 걸어놓고 밤새도록 끓인 국밥을 밤이 새도록 걸어온 군산지역 신자들에게 나눠주었다. - 1918년도 군산의 천주교 신자는 60여명으로 신자들 사이에 형제애를 가지고 생활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산공소가 자리를 잡으면서 신자들 특히 어린아이들이 늘어나면서 군산 째보선창에서 어선을 대절해 금강을 거슬러 올라가 대축일미사에 참례했다. - 1929년에는 군산공소 신자가 일본인 포함하여 250여명으로 늘어났다.
(5) 신영동 군산공소 시대
1920년경 신자들의 노력으로 500원을 모아 동영정(현 신영동)의 14칸 큰집(현 군산시 중앙동사무소)을 매입하여 경당으로 활용하면서 주일참례와 춘추판공성사를 행하며 공소로 사용하였다.(전주교구사는 1928년, - 만약 1927년 이전에 경당을 확보했다면 1927년 드망즈 주교의 사목방문 때 경당 축성식이 있었어야하나 그런 기록이 없는 것으로 봐서 1928년 이후라고 판단해야 한다. 그러나 경향잡지의 1929년 기사에 의하면‘수년전부터 군산에 공소가 있었다.’라고 서술된 것으로 본다면 1920년경이 타당 할 것으로 사려 된다.)
1920년대에는 군산지역에 군산공소 외에도 많은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공소가 있었으나 군산지역의 공소 중심은 군산공소였다.
1927년 대구교구 드망즈 주교는 전라도를 사목방문하면서 1927년 11월 17일~18일 군산공소를 19일~20일은 옥구공소를 사목방문하고 21일부터 세실공소를 방문하기 위하여 떠났다. - 군산공소는 당연히 신영동에 있는 군산공소 경당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며, 옥구공소는 둔산에 있었으며 수산리의 가사메까지가 그 관할이었다.
4. 감격의 군산성당의 시대
가. 군산공소 신자들의 본당승격 열망
군산본당 신자들은 군산본당 승격과 신부님을 모시고 매일 미사와 성사를 행하기를 열망했으며 그 열망은 1929년 5월 2일 군산본당 건립을 위한 ‘대건 혈루회’창립이라는 결과물로 군산본당설립에 다가셨다.
‘대건 혈루회’창립 당시 임원으로는 회장 김용진, 총무 양성준, 사교부장 강윤흠, 재무부장 한민수, 서기 한영수 이용만, 건축부장은 미정 이었으며, 성당 설립 및 성당 건물건축을 위한 분명한 목표를 가진 단체를 신자들 스스로 만들었고, 창립일 성당건축기금으로 2,000여원이 모금 되었다.(특연금 모금에는 군산항공소 신자뿐이 아니라 둔산공소, 가사메공소의 신자들까지 동참하였다. 아마도 인근의 교우촌에서도 적은금액이지만 동참하였으리라 생각되나, 현재 남아있는 자료는 10원 이상의 특연금 출연자만 명단이있어 알길이 없다,
나. 군산본당 설립인가와 본당신부 인사발령
드망드 주교는 군산에 대한 사목방문 이후 군산지역 본당의 신설을 절감하고 드디어 1929년 5월 25일자로 군산본당 설정을 공표하면서 새신부인 김영구 신부를 나바위성당 보좌신부 겸 군산 신설본당 주임신부로 발령을 냈다.
다. 본당설립 기도회
1929년 6월초순경 군산공소에서는 본당설립기도회를 개최하였다.
1925. 5. 25.자로 나바위 성당에 새로 부임한 이약슬 나바위성당 주임신부와 김영구 나바위 성당 보좌신부 겸 군산 신설본당 주임신부를 군산공소회장 겸 대건혈루회 회장인 김야고버가 나바위성당으로 가서 기차로 이리역(현 익산역)까지 성모성심회장 양분도가 자동차로 이리역에서 군산공소로 모시고와서 신자들과 같이 성당건립을 위한 기도회를 성대하게 거행했다.
당시 군산공소 신자는 약 250명가량 되었으며 원거주민 토착신자는 거의 없고 대부분이 군산항이 활기를 띠면서 외지에서 모여든 신자들이었다.
라. 군산공소 군산본당으로 승격
김영구 신부는 나바위 성당에 머물면서 군산본당설립에 박차를 가하여 기존 공소로 사용하던 신영동 14칸의 경당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고 그 부속 건물을 사제관으로 개수하였다.(전주교구사에는 1930년 교구 지원금 1,000원에 신자들의 모금으로 3,500원에 군산시 둔율동 156번지 대성원을 매입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고 함. 홍미카엘(순명, 1910년생, 홍안드레아의 10남매 중 9째)은 생전에 최초군산성당은 신영동에 있던 군산공소자리였다고 구술함. 아마도 1929년 6월부터 1931년 1월 이전까지는 신영동에서 미사가 이뤄진것으로 판단됨 )
1931년 1월 19일 나바위성당 보좌신부 겸 군산성당주임신부인 김영구 신부가 나바위성당 보좌신부의 지위를 면하고 군산성당주임신부로 발령을 받고 부임했다.
당시 본당의 교우는 약 200여명 산하공소에 약 400여명 합 600여명과 일본인 신자 약 60여명의 성당으로 설립된 군산성당은 대지 약 240평에 14칸의 성당으로 시작하였다.
본당설립은 신자들의 기도와 십시일반의 성금으로 완공하였고 그도 차차 증축하기로 하였다.
- 군산성당은 1934년경 대구교구에서 1,000원을 원조 받고 신자들이 모금을 하여 3,500원에 군산 둔율동 156번지에 있는 옥구군 군청 관사 대성원(大成院)을 매입하여 수리해서 사용하다가, 1937년 10월 고가를 헐고 새성당 건축에 착수하였으며, 공사비 3,000여원을 투입해 54평의 화양식 목조건물로 성당을 신축하여 1938년 1월 중순경‘원죄 없이 잉태하신 성모’를 수호성인으로 하여 김양홍교구장주례로 낙성식을 하고 사용하였다.
- 1944년 성당 옆의 야산(현재의 본당건물, 사무실동, 카톨릭회관, 성모동산 등의 부지)을 매입하였다가 1955년 8월 17일 현재의 성당을 준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군산천주교는 설립당시부터 조선 천주교와 전주교구의 역사와 비슷한 양상을 가진다.
군산의 개항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군산으로 몰려든 사람들 중 천주교인들이 한가구 두가구 이렇게 모여서, 외국인 사제들의 주도가 아닌 교우들의 주도로 공소를 개설하고 경당을 설립했으며, 군산교우들은 드망즈 주교의 사목방문 시 강력하게 본당설립의지를 피력하고는 신자들 스스로 대건혈루회를 조직해 신자들이 본당설립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에 고무된 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동의와 1929년 5월 당시로서는 많은 수의 조선인사제 탄생(김영구 신부, 김창현 신부, 송남호 신부, 허일록 신부 등 4명 서품)으로 사제수급까지 용의한 상태였다.
결국 군산성당의 탄생은 군산성당 설립에 대한 기존 외국인 사제에 의한 3회의 시도와는 다르게 군산교우들의 심신과 열의가 교구장 드망즈 주교의 마음을 움직이고 많은 수의 사제까지 탄생하여 사제수급이 용의해지는 등 주님의 섭리로 군산본당이 탄생 된 것이다.
본당설립 당시 군산성당의 관할은 군산 및 옥구전역과 고군산열도 및 어청도를 포함한 인근도서지역과 현재의 익산남부와 동부지역까지로 익산 황등 및 금마까지 관할이었다.
군산성당은 이리천주교포교소 개설을 시작으로 1930년대 이리성당(현 창인동성당)을 분가하면서 1950년대 대야성당, 1960년대 월명동성당, 중동성당(현 팔마성당), 1970년대 오룡동성당을 직접 분가시켰으며 군산과 인근 도서 및 익산 남동부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의 모 본당으로 군산성당에서 분가해나간 성당이 2014년 현재 24개 성당에 이른다.
군산성당은 성당들은 분가시키면서 그냥 신자들만 분가시킨 것이 아니라 기본 부지에 건물까지 설치 축성하여 분가를 시켰다.(이리천주교포교소를 먼저 설립해 선교가 이뤄지고 어느 정도 신자들이 모였을 때 이리성당을 분가시켰고, 대야성당은 대야에 경당을 먼저 신축하여 대야성당은 신부님의 발령만 기다리면 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월명동 성당은 적산가옥을 구입하여 수리해 성당으로 바로 활용하도록 해주었고, 중동성당은 기와공장을 부지로 제공하고 창고건물이지만 성당으로 쓸 수 있도록 했으며 팔마성당 건축 때는 둔율동 성당 소유의 현 팔마성당 부지를 협소한 중동성당 부지와 교환 해줘 그 부지에 팔마성당을 건축하도록 해주었다. 오룡동 성당은 교환한 중동성당 부지 매각자금과 신자들의 모금으로 부지는 물론 성당 건물까지 신축하여 분가시켰다.)
군산성당은 월명동 성당이 분가한 1961년부터 월명동성당과 구분하기위하여 소재지 동의 명칭에 따라 둔율동성당으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