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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어거스틴은,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것을 따라가게 되고, 또한 사랑하는 것에 모든 것을 바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욕심과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돈 때문에 죄 가운데 거하게 되고, 명예와 권세를 사랑하는 사람은 불법과 비리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영국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위선에 대해 4부에 걸쳐 신랄하게 비판한,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나단 스위프트”는, “약속과 파이껍질은 깨어지기 마련이다”라며, 약속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했습니다. 이는, 확실하지 못한 약속은 잘 지켜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신이 약속한 것은, 지키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설령 자신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상대에게 이해를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결코 약속을 깨뜨리지 않으시며, 식언치 아니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입니다. 민 23: 19을 보시면,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고 하며, 시 89: 34을 보시면, “내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고 내 입술에서 낸 것은 변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약속에 대해 식언치 아니하며, 입술에서 낸 것을 변치 않는다고 다짐하신 하나님께서, 수 1: 5절에서 여호수아에게,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대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당할 자가 없게 하셨고, 그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에 대해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렘 23: 23을 보시면,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신실하시며,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께서 본문에서 여섯 가지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무엇입니까? “건지리라, 높이리라, 응답하리라, 영화롭게 하리라, 장수케 하리라, 구원을 보이리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추구하는 모든 것입니다. 이런 복이 하나님 외에 어디서 나오겠습니까? 어디서 보장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만 우리에게 이런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나 받을 수 없으면서도,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이런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까다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하나님을 알고 믿고 간구하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과 도식적이고 기계적인 관계에 있지 않고, 언제든 찾으면 응답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성도로서 살아갈 수 있고, 하나님을 끈끈하게 사랑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본문을 통해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로서 세상에서 담대하게 살아가라는 겁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거나 위기에 처할지라도, 언제든 우리가 하나님을 부르면, 하나님은 그 곳에 계셔서, 역동적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심으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니,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확신을 가지고 담대함으로, 자신있게 살라는 겁니다. 올 2025년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인 우리를 건지고, 높여 주십니다.
본문의 “사랑”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솨크”라고 하는데, 그 뜻은 “달라붙다, 애착을 가지다”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엄마를 놓치지 않으려고, 꽉 붙잡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전적으로 매달리고, 의지하는 것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앞에 붙잡힌 바가 되어, 하나님 앞에 바싹 붙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기적,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기적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시 145: 20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옛 속담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라고 합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정신을 잃지 않는 것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성도된 우리의 믿음에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눈”입니다. 이 눈은, “수직적인 눈”과 “수평적인 눈”으로 분리할 수 있습니다. “수직적인 눈”은, 어려운 난관에 봉착하면, 가장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겁니다. “수평적인 눈”은, 지금껏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회상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에 정착해서 살 때, 그들은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과거 조상들이 어떻게 홍해를 건넜으며, 광야에서 어떻게 살았는지를 회상하곤 했습니다. 즉, 삶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현실에서의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다지고, 하나님께 더욱 가깝게 바싹 붙는 겁니다. 또, 본문 후반부에서 “안다”는 것은,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 중에 가장 확실한 지식이 무엇입니까? 내가 직접 경험에서 얻은 지식입니다. 그러기에, 과학자든, 어떤 분야의 연구자든, 확실한 것을 알기위해, 가설을 정하고 이것을 여러 상황에 대입하는 실험 즉, 경험 속에서 결과를 찾습니다.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는, “성경공부”를 강조하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기 원한다면, 여러분이 과거에 환난이나 어려움 속에 있었을 때, 또는, 현재 환난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그 곳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를 경험하는 겁니다. 이러한 환난이나 어려움은 거부하고, 성경공부를 강조하는 것은, 풍부한 성경지식에 욕심을 두고, 이로 인해, 다른 성도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탐욕적 교만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확실하게 알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높인다”고 합니다. 본문에서의 “높다”는 것은, “안전하다, 형통하다, 영광스럽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성도와 함께 하심으로, 안전하고 평안하게 해 주시며, 또, 하나님을 아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로 삼아주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심으로,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신 28: 13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너를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한다”는 것은, 성경적 지식이 아니라, 삶 속에서의 실천이요, 경험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높이시는 자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이며, 복된 사람입니다. 올 2025년에는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건지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5절을 보시면,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간구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그에게 응답하십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다”라고 했습니다. 과거의 성도들과 오늘날의 성도들을 비교해 보면, 오늘날의 성도들이 성경을 훨씬 잘 압니다. 신앙생활도 다방면으로 넓은 영역에서 열심으로 합니다. 과거의 성도들은 성경지식이 짧았고, 신앙생활의 영역도 거의, 개인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이 신앙생활로 볼 때는, 훨씬 잘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예배참여와 기도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참여는 쉽고, 편한 것을 먼저 추구합니다. 또, 기도 역시, 기본적인 것으로 하는 것에 고정된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렇기에, 오늘날의 성도들이 혼자있을 때, 찬송소리 듣기 어렵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알 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성도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 모세, 다윗, 베드로, 사도 바울등 성경 속의 인물들에게서의 공통점을 보면, 그들은 수시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습관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눅 22: 39을 보시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산에 가신 것은, 대부분 기도하거나 조용하게 제자들을 모아놓고 가르치고자 하실 때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감람산은 예수님의 기도 처소였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기도처소가 있습니까?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재직할 때, 그는 백악관을 자신의 기도처소로 삼았습니다. 기도는 성도된 우리에게 활력을 주며, 우리의 생활을 풍족하게 합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최우선에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 65: 24에서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본문 시작에서의 “간구”는 히브리어로 “이크라에니”입니다. 이는 “부르다, 외치다”의 의미로,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며, 도움을 요청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헬라어로는 “파라칼레오”라고 하며, 그 뜻은 “가까이서 부르다”라는 의미로 결국, 하나님 가까이에서 간절히 부르며,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간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가까이에 서게 될 때가 언제입니까? 환난이나 고난이 있거나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그 무엇이 있을 때입니다. 그러기에 시 121: 7을 보시면, 이렇게 간구하는 자에게,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성도인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에서의 교제가 아니라, 친밀한 관계 속에서의 교제를 해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매우 가깝게 친밀한 교제를 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전쟁이 임할 때도, 평소에도 하나님께 늘 기도했습니다. 성도된 우리도 이와 같이, 하나님께 늘 기도하며,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는 기도처소에서 하면 가장 좋지만, 이러한 처소가 없다하여 기도를 못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장소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길거리에서도,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중에도, 직장에서도, 어디서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입으로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자신의 소망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집니다. 렘 33: 3을 보시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부르짖으라” 곧, “간구하라”는 겁니다. 기도처소에서는 소리 내어서 간구하고, 그 외의 곳에서는 마음 속의 외침으로 간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과 성도된 우리와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작은 문제도 기도하고, 큰 문제도 기도해야 합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도 기도하고, 감당할 수 없는 것도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늘 깨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며, 우리를 영화롭게 하여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6절을 보시면,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최고의 복이 무엇입니까? 물질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만남의 복 등등 많이 있지만, 최고의 복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고, 하나님께 구원을 입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건강을 위해서 약을 먹거나, 운동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장수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바램을 위한 노력일 뿐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알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주권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 121: 1 - 2을 보시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전적으로 받아야 할 도움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간구해야 합니다. 본문 앞의 2절에서 본문의 기록자가 고백한 내용을 보시면,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라고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요새시며,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마치, 다윗의 삶이나 다윗의 고백과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시 91편의 기록자를 “다윗”이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기록자가 하나님께 이렇게 고백한다는 점에서, 그가 하나님과 얼마나 깊은 교제를 하고 있는 지, 추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뭐라고 고백합니까? 여러분, 우리의 건강, 우리의 장수, 우리의 생명, 우리 구원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주관자,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잠 10: 27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기록자는 본문 앞의 1절에서, 성도를 가리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이란,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곳, 하나님의 보호 속”을 의미하기에, 마치, “하나님의 안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하나님의 권능의 오른 손에 붙잡힌바 된 자이며,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안가에 거하게 하시며, 영생의 복을 주십니다. 올 2025년에는 성도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늘 감사하고, 찬송하는 가운데,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구원의 축복이 우리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