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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의 수요일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이 있으므로 참회식은 생략합니다.>
주제 : 여러분은 오늘 금식하셨습니까?
여러분은 오늘 금식하셨습니까? 하루라도 제대로 움직이려면 하루 세 번 식사하는 일을 중지하지 말아야 하는데, 신앙과 전례에서는 먹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전례에서 이렇게 말하는 의미를 우리더러 굶어죽으라고 알아들으면 안 될 일입니다. 사람은 자기 앞에 닥쳐오는 일을 알아듣고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에, 알아듣는 일은 참 중요합니다.
오늘은 올해, 2012년도 사순절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올해 부활대축일로 기념할 날은 오늘부터 46일이 지나면 다가옵니다. 특별한 날을 정해놓고, 그에 앞서는 특정한 날짜를 정하여 우리는 아주 특별한 자세로 그 시간을 지내야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가 실수할 수 있는 일의 하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내가 지금 참여하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에 관심을 가질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실수하는 요소라고 했습니다만, 세상에 사는 내가 다른 사람의 삶을 판단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굳이 다른 사람을 먼저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사순절을 잘 시작하고, 제대로 지내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우리가 또 한 가지 실수할 수 있는 일은 남들에게 드러내는 특별한 행동으로서 내가 잘 지내거나, 아니면 잘못 지내거나 하는 판단을 받는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의 한 가지가, 조금 전에 복음말씀으로 들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관한 문제입니다. 요즘에는 단식(斷食-일반의미)이라는 표현 대신에 ‘금식(禁食-종교의미)’을 씁니다만, 뜻에는 별 차이 없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를 내가 만족하거나 남들의 칭찬을 받는 수준정도만 실천하면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일입니다.
세상 삶을 판단하는 방법과 기준은 몇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나 혼자 스스로 판단하기만 하면 충분한지, 아니면 세상의 평가만 잘 받으면 되는지,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직 내가 눈으로 본 적이 없고 만난 일도 없지만 하느님의 판단기준은 따로 있는지를 살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단계별로 생각하는 모습에 따라 사람의 삶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고, 평가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이마에 재를 얹게 될 것입니다. 재는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있던 ‘물질이 불에 타고 나서 남은 가루’를 말합니다. 다른 생물의 성장에 도움이 될 요소가 그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세상에 남은 것들 가운데서 보잘것없는 것이라는 표현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재를 우리의 이마에 얹는 것은 어떤 의미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마에 재를 바르면서 ‘사람은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라’거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라는 말씀 가운데서 한 가지를 들을 것입니다. 편의에 따라서 짧은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만, 의도는 차이가 없는 일입니다. 내가 지금, 하느님의 말씀이 울리는 장소에 나와서 이마에 재를 받으면서 듣는 그 소리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알아듣는 바에 따라서 우리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모두 선인으로 살아야한다고 말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따를까요? 세상 사람들을 향하여 악인으로 사는 것의 의미를 애써 얘기하면 모든 사람이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고 그대로 받아들일까요? 정답은 저도 모릅니다. 제가 모든 사람의 삶을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이 특별한 자리에 함께 하고, 우리가 마음과 생각을 모아 이 특별한 시간에 특별한 기도를 하면 세상일 가운데서 그 어떤 것이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것 역시도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한가지로 마음을 모아 청했을 때,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도 미루어지거나 달라질 수 있음을 요엘예언자는 얘기했습니다만, 우리가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정말로 세상 삶이 달라질 일입니다.
오늘은 사순절을 시작하는 첫 번째 날입니다. 이마에 재를 얹는다고 해서, 우리가 삶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 앞에 선 내 모습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뭔가 달라져도 달라질 일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내가 마음과 생각을 열고 그 은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느냐, 하느님의 은총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그저 세상일에 바빠서 하느님의 은총을 거부하는 사람이 되느냐의 차이뿐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는 이 때, 과연 어떤 자세가 옳은 것이겠습니까?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주제 : 사람의 이상
저도 사람들 중에서 하나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만, 이 사람에게는 아주 묘한 특성이 있습니다. 일을 적게 하면서도 많이 한 사람의 영예를 누리려고 하고, 밥을 잔뜩 먹으면서도 날씬한 몸매를 갖기를 원합니다. 얼마나 가능할까요? 혹시 이론이나 상상에서는 가능한 일이지만,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일, 말로나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심정에서 하는 얘기일까요?
콩을 심으면 콩이 나는 법이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는 법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안다고 하는 이 말도 ‘다른 사람의 삶’에는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내 삶에는 콩을 심어도 팥이 되어야 하고, 팥을 심어도 콩이 되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이 삶에서 지나치게 분명한 말을 하고 살면 재미는 없다고 말합니다. 때로는 내가 가진 허점도 보여주고, 남들의 도움도 청하고 살아야 돕는 사람에게 즐거움도 주는 법인데, 그런 세상 삶의 자세와 하느님 앞에 나서는 사람이 갖는 자세는 분명히 달라야 할 것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세상일에 바쁜 사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는 사순절이든 연중시기든 아무 상관이 없겠지만, 사순시기를 생각하고 오늘 이 자리에 온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뭔가 다른 자세를 갖게 합니다.
사람이 십자가를 지고 사는 게 가능할까요? 받아들이는 방법에 따라서 그 대답은 달라질 것입니다. 가능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가능성을 보고 사시는 분들입니까 아니면 불가능성을 보고 사시는 분들입니까?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닐 것입니다.
목숨을 구하려면 위험을 피해서 도망치거나 그 위험을 상대로 해서 도전해야 할 터인데, 어떤 것도 쉽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에서 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차원이 다릅니다. 맨 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서, 내 것을 내던지고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서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야한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정도가 되면, 참으로 진퇴양난입니다. 신앙인으로 살겠다고 생각하면,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내 앞에 천국으로 가는 길이 훤히 펼쳐져있고, 그저 룰루랄라하고 갈 줄 알았는데, 차원이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을 등지고, 뒤돌아서기 좋게 하는 말씀입니다.
법과 계명에 대한 신명기의 말씀도 마찬가지이고, 그 말씀을 들은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옳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법과 계명은 올바른 길에서 비뚤어지게 나가고 싶고, 올바른 길을 내버려두고 돌아가려는 사람에게 지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선포될 때에 가졌던 최초의 목적은 다릅니다. 생명과 번성을 향한 법이라고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모세의 선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우리 삶의 모양은 달라질 것입니다.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주제 : 내가 좋아하는 것과 하느님의 뜻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하여, 아주 정확하고도 옳은 판단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험담(=흠을 잡아내어 나쁘게 말하는<=헐뜯다> 얘기)하거나 낮추어 말하면, 그 소리가 상대방의 귀에 옳게 전달될 가능성은 얼마나 있을까요? 이런 소리에 그 어느 누구도 그 일의 효과가 좋게 나올 거라고 말해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로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보다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있는 일도 없는 것처럼, 나쁜 일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해주고 끝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거꾸로, 그 일을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말하는 옳은 소리인걸 알면서도 그대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사람이 자신이 좋아하는 일, 맘에 드는 일을 먼저하고 삽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인내력이 조금 더 있는 사람이라면 아주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사람에게서 돌아오는 반응은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부러 가식을 꾸밀 것도 없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오늘 이사야예언서 독서에 나온 말씀처럼,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여 덤비는 마음으로 살지 않는다고 말해줄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내가 한 좋은 일은 크게 보이고 보상을 받으려고 하고, 내가 하는 잘못된 일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나 혼자만 못된 일 하는 것도 아닌데, 일부러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세상에 그렇고 그런 사람, 나만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남도 잘못하는 사람들이기에 내가 남보다 더 큰 책임을 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 세상은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그 결과나 모양을 반드시 다른 사람의 말로서 봐야만 아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눈을 찌푸릴 세상이 될 것이고, 아무도 만족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즐겁게 실천하는 일과 하느님의 뜻이 항상 부딪히고 대립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내 맘대로 사는 사람이 나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서 정확하게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도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순절이 되면 권장하는 단식의 의미는 과연 어떤 것이겠습니까? 이사야예언서에 나온 하느님의 뜻과 우리가 알고 있는 단식의 뜻이 얼마나 같은지, 다르다면 어떤 쪽을 바꾸어서 한 가지로 만들어야 하는지 알아야 할 시간입니다.
하느님 앞에 나서는 일은 남들보다 조금 나은 것이어서는 만족할 것은 아닙니다. 나는 세상에서 옳은 길을 따라서 실천할 사람이지, 언젠가 훗날에 내 삶을 내가 세운 기준에 따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 뜻과 하느님의 뜻은 과연 하나가 되어 같은 목표를 향해서 갈 수 있을까요?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사순 제 1 주일
주제 : 시작이 반--고진감래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낱말의 뜻을 알아듣는다고 해서, 누구나 그 말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지식만 갖고 사람의 삶을 선한 것으로 판단해줄 수 있다면, 사람은 세상 삶에서 저마나 누구나 성공한 결실을 맺는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이때 말하는 성공한 모습이 무엇인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사람의 삶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누가 내 삶의 계획을 방해하는지, 어떤 대상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협조해주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사람이 세운 계획대로 세상의 일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아주 뛰어난 존재이고, 때로는 전통적으로 구별돼왔던 하느님의 영역까지도 가볍게 보고, 함부로 침범하는 존재이지만, 그렇게 해도 되는지 아니면 잘못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오늘 사순 첫째 주일에 들은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로 가셔서, 미래에 하실 복음선포를 위하여 준비하신 과정을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한참 남쪽에 있었던 유대광야로 떠나십니다. 물론 예수님 스스로 내린 결정과 뜻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마르코복음서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보내신 일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다면, 사람이 세상 삶에서 세우는 계획들이 나름대로 좋은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맞이하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전통적인 표현으로 오늘 이 시간을 시작했습니다만, 정말로 올바른 준비가 있어야 제대로 된 시작을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고진감래라는 표현도 마찬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단 결실을 얻기 위해서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알아들을 것이 아니라, 내게 다가오는 힘겨운 현실을 제대로 이겨낼 때에 그 다음에 다가오는 결실이 달고 맛있다는 소리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 순서를 바꾼다면, 우리 앞에 펼쳐질 일이 얼마나 달라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분명히 정상적인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삶에 대한 올바른 준비에는 하느님의 사랑도 필요합니다. 사람이 워낙 뛰어난 존재라서 ‘하느님의 도움 같은 것은 내 삶에 필요하지 않다고 외칠 사람’도 있겠지만, 오늘 창세기 말씀을 통해서 들은 것처럼, 세상이 제대로 된 길, 올바른 길로 가는 데는 하느님의 배려도 필요한 법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께서 주신 뛰어난 지혜를 사용하여, 세상의 삶에 대해서 이렇게나 저렇게 알아듣고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자기 뜻과 생각대로 처음부터 다시 배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한 때 오늘 들은 창세기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끝이 온다면, ‘물로 망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제 그 끝은 불에서 오겠구나(!)’ 하고 말한 때도 있었습니다. 어떤 것이 정확한지는 역사가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오늘은 2012년도 사순절의 첫 번째 주일입니다.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의 순간순간에, 미리 정해진 전례의 기념일들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갖는 자세에 따라 똑같은 일도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본당에 교적을 둔 신앙인들은 3600명이 넘는다고 하지만, 3600명이 넘는 신앙인들 모두가 똑같이 좋을 결실을 누릴 거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도 우리가 갖는 삶의 자세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순절의 끝에 다가올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할 법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어떤 자세로 준비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사랑을 기대하고 사는 우리가 드러내야 할 올바른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누구나 똑같이 실천할 수 있는 똑같은 방법은 없습니다. 각자 자신이 마련한 삶의 그릇과 그 크기에 따라 성실하고 기쁘게, 또 매 순간 하느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은 행복을 누리면서 드러내야 할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을 비온 다음에 비출 무지개와 같은 모습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세상 삶에 바쁜 우리가 가끔씩은 하느님나라에 관심을 갖도록 하느님은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외롭게(?) 사십일을 지내신 예수님은 유혹을 이겨내시고, 사람들에게 하느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에 함께 할 우리가 갖추어야 할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사순 제 3 주일 (나해)
주제 : 나는 무엇을 깰 것인가
사람이 늘 새로운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삶에 실천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 중요한 실천하다보면, 다른 사람과 부딪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고, 내가 하던 주장을 뒤로 물리기도 합니다. 그래야만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게 하는 지름길이라고 민주사회에서는 배우고 그렇게 삽니다.
여기까지는 세상에서 말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논리입니다. 그렇게 타협과 조정의 길만 제대로 구별해서 실천하고 산다면, 세상에서 사람이 손가락질 받을 일은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물론 그 좋은 결과를 내가 다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을 남에게 양보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게 민주사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세계와 신앙을 기본으로 해석하는 세계에 타협은 없습니다. 타협을 통한 물러섬도 없고, 양보도 없습니다. 그렇게 신앙세계의 주장과 민주사회의 주장을 비교하면 어느 쪽의 등급이 더 높겠습니까? 사실은 이렇게 질문하는 방법이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싸움은 종교를 바탕으로 하는 싸움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양세계에는 아직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만, 서쪽 아시아와 유럽세계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의 배경에는 그리스도교를 바탕으로 하는 논리와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하는 논리가 부딪힌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까지 드러나는 세상의 싸움은 이슬람교의 세력이 그리스교의 세력에 눌리고, 그리스도교의 세력이 승리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그 모습도 얼마나 갈지는 모릅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으로 생각한다면 유대교의 논리와 아직은 그 모양을 갖추지 못한 그리스도교의 논리가 부딪히는 싸움내용입니다. 신앙의 입장을 나누자면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만, 드러난 모습은 성전에서 해도 좋은 일은 무엇이냐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와 그에 대한 해석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성전에 들어가셔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시고 한바탕 일을 벌이십니다.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서 소란이 될 수도 있고, 혁명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에서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성전정화 이야기를 이해하겠습니까?
사회는 늘 평온하게 가야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존에 움직이던 일과 색다른 것이 나타나면 사회의 불순세력이라고 매장당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불순세력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웬만해서는 살아남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기존사회로부터 불순세력이라고 배척된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습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익힐 수 있는 그리스도교와 그 공동체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을까요? 옛날의 왕정사회와 군주사회가 그리운 사람도 있겠지만, 늘 같은 왕조, 늘 똑같이 높은 사람, 늘 똑같은 신분제도가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만족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깨트릴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바꾸고 깨트린다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접시를 단단한 바닥에 떨어뜨려서 두 번 다시 쓸 수 없게 조각조각으로 만드는 것으로 알아듣지는 말아야 합니다. 또 지금 사회의 단점을 이야기하되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게 하는 극단적인 모습은 아니어야 바꾸고 깨트린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전정화사건이라고 요한복음사가가 전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대하신 것일까요? 복음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만, 앞서 말씀드린 삶의 원칙은 기억해야 합니다. 성전에서 일을 벌인 예수님의 행동을 그곳에 있던 힘깨나 쓴다던 사람들은 46년이나 걸려서 지은 성전을 파괴하자는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들의 질문에 따라 나온 말씀을 아주 편협한 시각으로 본 사람들이 해석한 내용입니다. 기존세력을 유지하고 옹호하려고 하고, 내가 누리는 권력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주기 싫었던 사람들이 하는 반발의 소리였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반발을 드러냈던 사람들은, 탈출기말씀으로 들은 것과 십계명,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담은 ‘십계명(十誡命)’을 몰랐던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늘 탈출기독서와 요한복음을 통해 들은 말씀을 생각하면 사람이 바뀐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일인지 알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온전하게 적용되기는 참 힘든 일입니다. 하느님이 가지셨을 힘이 약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힘이 드러나도록 인간이 협조하지 않아서 그럴까요? 이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다릅니다. 하지만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일 뿐이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내용이 바로 하느님의 한계는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힘이 나를 쓰러트리고 나를 항복시키면 그때 가서 내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가당찮게 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나의 목숨이 끝날 때가 되었거나 내가 내 힘으로 움직이지 못할 때 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발전하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이 적용되는 세상이 되려면, 과거의 껍질이 깨야 합니다. 그래야 그를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이고, 완성을 향한 첫 걸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지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사순 4 주일
주제 : 높은 곳을 향하여
오늘은 사순4주일입니다. 사순절을 잘 지내고 계십니까? 이 질문에 ‘잘 지내고 있다’는 뜻을 말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겹쳐 질문합니다만, 사람이라면, 그리고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라면 어떤 방법이든지, 어떤 말이든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사순4주일에 들은 복음말씀은 예수님께서 ‘들어 올려져야한다’는 말씀을 통하여, 십자가 위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들어 올려져야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세상에서 저마다, 누구나 높은 곳에 오르려고 합니다. 권력의 위치에도 그렇고, 권리의 위치에도 마찬가지이고, 산 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장 먼저 높이 올라간 사람, 내가 세상에서 가장 높은 데에 제일 먼저 올라간 사람이 되려고 나름대로 애씁니다. 이렇게 사람이 오르려고 하는 높은 곳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들어 올려져야한다’는 말씀과 비교하여 생각하면 어떤 판단을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통용되는 의미의 높은 곳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올려져야 할 곳은 같은 곳일 수도 있고, 서로 다른 곳일 수도 있습니다. 그 두 장소를 같다고 생각하면 그에 알맞은 결실을 얻으려고 애를 쓸 것이고, 그 두 장소가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그에 알맞은 결실을 찾아서 서로 다른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로 뱀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들어 올렸을 때, 구리로 만든 그 뱀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고,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도 죽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 구원의 효과가 미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막의 불뱀에게 물려 고통이 엄습해오는 순간에도, 구리로 만든 그 뱀을 쳐다봐야 했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히브리백성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신약과 그 시대 다음에 살고 있는 현실의 우리는 십자가 위에 높이 달려계신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빛과 어둠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아무래도 이 자리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빛을 좋아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다음 순간, 빛과 그 빛 가운데 머무는 삶이란 어떤 것이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다양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대답이 되었든지, 말로 대답을 잘하는 것보다는 실제 삶에서 어떤 것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내게 구원이 되느냐, 구원이 되지 않느냐로 갈라질 것이고, 그 태도에 따라서 올해 사순절을 잘 지내고 있는지, 아니면 아직 부족한 상태에 있거나 바꾸어야 할 자세가 더 많은지에 대한 판단이 갈라질 것입니다.
높은 곳을 향하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이겠습니까? 높은 곳을 물었으니, 그에 상대적인 표현은 낮은 곳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 높거나 낮은 자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도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의 차이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삶에서 내게 다가오는 결과들은 내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역대기 독서말씀에 나온 것처럼, 하느님의 징벌이 찾아온 것은 현실 삶에서 하느님의 뜻을 잘못된 자세로 대한 탓이고,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하느님의 심판을 불렀던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면서도, 세상에서 애써 땀 흘려 이루어놓은 세상의 결과들이 잘 보존되기를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마음을 간절하게 갖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겠지만, 현실은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드러난 행동의 결과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민족의 역사를 담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내용입니다만, 인과응보는 신앙인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엉터리로 살면서 신앙인이라고 우긴다고 해서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의 결과가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내 삶을 통해서 원하시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이겠는지 잠시 묵상할 시간입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해서 얻은 결론을 잘 실천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도우심을 청할 시간입니다.
성 요셉 대축일 [0319]
주제 : 요셉의 어리석음(?)
사람은 세상에서 누구나 똑똑해지려고 더 많이 배우고, 실제로 그것을 목표나 목적으로 해서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어리석다는 소리를 남들에게서 들으면서 살 사람은 없다는 얘깁니다. 그 말은 누구나 아는 것처럼 좋은 뜻을 포함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생각할 때, 어리석다는 것이 정말로 나쁜 일이고,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인지 알아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요셉성인 축일입니다. 미사지향에도 같은 세례명을 가진 두 분이 있습니다만, 같은 세례명을 가지신 분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이 요셉성인은 목수와 세상 삶을 마치는 이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하고, 노동자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분은 우리가 전례에서 기억하는 이런 표현보다는 세상의 삶에서 자기 목소리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산 사람입니다. 굳이 세상의 기준과 평가방식대로 말한다면, 그는 정말로 어리석고 별 볼일 없이 살다 가신 분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살면, 그분처럼 어리석고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을까요? 이런 구별은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산 사람이냐, 신앙의 기준을 받아들인 사람이냐 하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에서라면 그 누구도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음 순간 높은 사람이 되고, 남들에게 큰소리칠 수 있는 보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거부할 거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다를 수 있습니다. 어리석게 살거나, 현명하게 살거나 그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서 똑똑하고 현명하게 산 것이 하느님나라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것인지는 우리가 또 질문해야 하는 일입니다.
소리 소문 없이 살면서, 자기 배우자와 아들을 위해서 자기 삶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나 하는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미리 받은 사람이었든지, 삶에서 무지막지한 노력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인지 성경말씀은 우리에게 그 사정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요셉은 세상에서 자기 밥그릇도 다 찾아 먹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지만 우리는 특별한 삶의 본보기를 보이신 분이라고 기념합니다. 세상의 기준과 하느님의 기준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모습을 두고 하는 소리일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은 세상의 기준을 우선시 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도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사는 것은 그의 세상 생명이 끝나는 날, 모든 것이 끝나고 맙니다. 그 다음 세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교해서 신앙의 기준에 따라 사는 것은 입장을 달리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이나 기쁨이 그대로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옛날 다윗에게 내렸던 나탄예언자의 구세주 약속에 대한 예언은 세상을 기준으로 하는 삶에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면, 따라야 할 하느님의 기준은 어떤 것인지 살필 수 있어야.......
사순 제 5 주일
주제 : 하느님의 선언
세상 삶에는 진리라고 그 특징을 부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진리라고 부르면서도 함부로 대하는 것이 문제입니다만, 사람의 삶은 그 진리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좀 더 좋은 길로 갈 수도 있고, 자기만의 세계로 아주 깊이 빠져 올바른 삶에서 멀어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진리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어디까지 진리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 진리의 말에 대한 한계를 묻는 것의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내가 얼마나 진리라고 받아들이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말을 진리라고 알아듣는 사람으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선언하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것도 쉬운 대답은 아닙니다.
진리를 대하는 태도를 또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세상의 역경과 어려움들을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대해서 이기고 넘겠다고 할 것이냐, 아니면 나를 찾아오는 그 어려움과 역경에게 내 등[=Back]을 보이면서 달아날 것이냐 하는 차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평안하고 편안한 마음일 때는 내가 어떤 소리를 들어도 정답과 진리에 가까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 늘 평안하지도 않고 늘 편안한 것도 아니기에, 사람이 늘 진리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 세상에서 산다고 말은 합니다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삶의 본보기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자리에서 복음에 나온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이 말씀은 과연 무슨 뜻일까? 나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옳은 사람이 될 것인가.... 하고 질문하거나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구원’이라는 명분은 참으로 큰 것이었지만, 그 일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의 하나로 살면서, 하느님이셨던 예수님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람의 시각을 담아서 글로 쓰인 복음서의 말씀만 봐서는 예수님도 아주 심각하게 고민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이런 행위를 얼마나 이해하는 사람일까요? 질문은 합니다만, 말로 하는 대답이 중요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말로 하는 것은 그 소리가 내 입을 떠나는 순간, 더 이상 내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아주 객관적인 실체가 되고 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내가 계속해서 그 중요한 것을 내 삶에 붙잡아두려면 객관이 아니라 주관의 입장으로 대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것은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신감 있게 사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땅에 떨어진 밀알 하나가 죽지 않겠다고 작정하고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진리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세상 사람들 가운데는 밀알 하나의 심정으로 세상에 태어나듯이 땅에 떨어져서 자기 몸을 부서뜨려 새로운 열매를 맺을 생각은 없이 자기 생각대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보면서 굳이 남을 탓해야 소용없는 일입니다.
세상에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그 대답을 멀리서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대답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답을 발견하고 내 삶이 그에 따라 움직이게 하려면, 예레미야예언서에 나오는 것처럼, 내 안에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하느님의 법이 움직이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지내고 있는 2012년도 사순절도 이제는 끝을 향해서 많이 다가섰습니다. 우리가 아무행동도 하지 않고 숨만 쉬고 있어도 부활날짜로 정해진 날은 다가오겠지만, 그 순간이 진정으로 내게 기쁨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신경 쓰고, 행동해야 할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실천방법으로, 오늘 미사에 오신 여러분은 어떤 것을 생각하시겠습니까?
수난 성지주일
①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후
우리는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 구원자로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것을 전해주는 마르코복음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드러난 사건은 아주 간단합니다. 제자들이 어린 새끼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왔고, 제자들이 자기 겉옷을 잔등에 얹었으며,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흔들기도 하고 깔기도 했으며,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에 함께하면서 이와 비슷하게 노래 부르려니, 영 쑥스럽지요? 어쩌면 우리는 히브리인들이 느꼈던 그 절박한 심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같은 마음자세를 가지려고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라는 원칙은 없습니다. 다만 짐작할 뿐입니다.
히브리인들 가운데, 당시에 예루살렘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똑같은 마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입성기념식 마르코복음에 나오지는 등장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반대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위기의식을 느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그 마음을 걷어내고, 예수님을 호산나라고 부르며 뒤따랐던 순수한 군중들의 마음을 우리가 간직하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본받으며, 그 옛날의 그 함성과 기쁨을 새기면서 우리도 같은 소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② 마르코의 수난기 읽고.
주제 : 우리가 갖출 자세는....?
우리는 지금 아주 길게 마르코복음사가가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주일미사를 봉헌하는 날이지만, 수난기의 시간적인 배경은, 빠스카 축제일의 이틀 전, 즉 성주간 목요일부터 금요일 해가 질 때까지 만 하루나 혹은 날짜로는 이틀 안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수난기에 나온 내용들을 간단히 요약해보겠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이 산헤드린의회의 일부 사람들에게 가서 스승을 팔아넘길 모의를 꾸미는 얘기, 막달라여자 마리아의 향유사건, 과월절 음식준비에 대한 얘기, 과월절음식을 먹는 얘기와 올리브산으로 가서 예수님은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졸고 있었다는 사건얘기, 예수님을 납치(!)하여 의회로 끌고 온 사람들의 얘기와 심문, 베드로의 배반과 빌라도의 사형선고, 그리고 십자가 사건으로 예수님이 무덤에 모셔지는 얘기까지 우리가 아는 아주 극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난기를 몇 사람이 앞에 나와서 읽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선채로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들으면서 여러분은 어떤 느낌을 받으셨습니까? 사실은 이렇게 묻는 것 자체가 잘못된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거나 들으면서 우리가 가질법한 자세는 개인적인 것이지,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그 느낌을 반드시 남에게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신앙은 개인의 것이라고 말하기도 쉬워집니다. 쉽거나 어려운 것을 따지는 것이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이지만, 적어도 예수님은 개인만의 선택으로 이 수난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드러내기 쉬운 자세처럼, 개인적인 자세로 세상에 오신 삶이었다면, 그분은 오늘 우리가 읽고 들은 것과 같은 수난기에 나오는 일을 일부러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삶의 자세를 개인적인 것을 우선으로 하지 않으셨기에, 우리 신앙인들을 이 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고, 찾아온 것이니 이 자리에 모인 우리라면, 예수님이 삶을 통해서 뭔가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도 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개인으로 사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힘겨운 일에 대해서 모른척하기가 아주 쉽습니다. 다른 사람의 사정을 알아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다른 사람이 겪는 힘겨운 일을 포함한 고통은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고 쉽게 말할 것입니다. 이론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주 쉬운 방법이기에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개인으로 오셨지만, 개인으로 살지 않으신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결과를 이루신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을 해도, 제가 말씀드리는 것과 같은 마음을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갖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정도쯤 되면 사람이 머리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로 몸이 부딪혀 배워야 할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을 익히며 실천해야 할 것을 몸으로 드러내는 일은 서로 다른 것이 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러 세상에 오신 분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삶의 목적을 생각하는 방법에 따라 우리가 갖는 삶의 실천방법도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고통은 내가 피한다고 해서 나를 무서워하여 내게서 달아나지 않습니다. 부딪혀서 이겨야 할 것이 있고 피해도 좋은 것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어떤 기준으로 대하느냐는 차이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 하느님이셨지만 사람으로 오신 분, 기적을 베풀 듯이 사람들의 마음을 한꺼번에 하느님께로 돌리지 않으시고, 그들 앞에서 고통을 받아들이고 수난을 겪으신 예수님의 본보기를 생각할 시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행적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노력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하느님 앞에 조금씩 다가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다가선다는 것은 그만큼 축복에 가까워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잠시 마음과 생각을 모아,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기억할 시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