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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궤(ARK) 그리고 속죄소(Mercy of Seat)
출 25: 10-22
이 세상에서 지을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미소로 옆 사람에게 말합시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당신은 지금도 그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내가 너를 사랑한다, L love You"입니다. 우리는 가끔씩 내가 부모님에게 조금 잘하니까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는 줄 착각합니다. 그런 것 아닙니다. 내가 뭘 잘해서 내 아버지와 내 어머니가 사랑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님이 여러분을 사랑합니까? 그것은 내 부모님이기에, 내 아버지이기에, 내 어머니이기에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냥 무조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부모님의 은혜(Grace)라고 합니다.
우리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에요.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일조를 많이 드려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오랫동안 예수 믿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람들을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 주었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할까요? 부모님의 은혜인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한번 아름다운 미소로 옆사람에게 말하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계실 때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신 분입니다. 참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어요. 또한 은혜와 사랑을 통하여 그분은 우리에게 이 세상사람들이 할 수 없는 능력 있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 예로 예수님의 행적에 보면 병도 고치고 기적도 일으키시고 능력을 펼치시는데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들어가셨을 때,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예수님께 나아왔지만,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어갈 수가 없어서 그들은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그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어요.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전하시다가 지붕에서 중풍병자가 내려오는 것을 보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고 말씀하신 이야기가 마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바람을 잔잔케하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뚤어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능력은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성막 강해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지성소에 있는 법궤(법이 들어있는 궤)와 시은소(영어로는 Mercy of Seat)를 살펴봅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장소, 죄를 사해 주는 장소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기를 원해요. 죄 사함은 누굴 통하여 일어나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깨닫기 원합니다. 2달 성막 강해를 통하여 우리는 성경을 배우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통하여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살피는 것입니다. 성막을 통하여 어떻게 죄 씻음을 받는가? 성막을 통하여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지요. 첫날부터 지금까지 문, 번제단, 물두멍, 등대, 떡상, 향단을 살펴보고 오늘은 지성소에 있는 법궤와 시은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잘 들으십시오. 지금까지 여러 물건들을 설명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막을 말씀하실 때 가장 처음 만들라고 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말씀 법궤와 시은소(속죄소)입니다. 문도 아니고, 번제단도 아니고 물두멍, 등대, 떡상 향단도 아니에요. 바로 법궤와 시은소를 처음에 말씀했습니다. 성막출발점은 오늘 말씀 출애굽기 25장에서부터입니다. 왜 문부터, 왜 번제단부터, 왜 물두멍부터, 왜 등대, 떡상 향단부터 만들라고 하지 않고 법궤와 속죄소를 말합니까? 저는 한가지라고 봅니다. 가장 중요하기에... 가장 우리의 삶에 절실한 것이기에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대화함(Engage the Word)
한번 그림을 보십시오.
1. 법궤가 있습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10절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요 아래부분인데 조각목,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었고 이 궤를 정금으로 둘러 싼 것입니다. 그리고 양편 고리에다가 궤를 만들어서 운반할 수 있도록 채를 만들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법궤를 운반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로 이것이 법궤입니다. 이 법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다고 했지요? 십계명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있다고 했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오늘 말씀에도 나옵니다만 바로 증거판을 두라고 했어요. 바로 십계명을 두라고 한 것입니다.
2. 자 속죄소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속죄하는곳, 죄를 사해주는 곳이지요. 그게 어디에 있는가요? 바로 법궤 위에 있습니다.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법궤 위에다가 속죄소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죄소라는 것은 성막 법궤를 덮는 뚜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뚜껑을 가리켜 ‘속죄소’ 또는 ‘자비의 자리’, ‘시은좌’라고 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은 이 뚜껑 위에다가 그룹 둘을 만들어서 한 덩이가 되게 하라고 하셨어요. 이것은 천사의 날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로 천사의 날개를 펴서 속죄소를 덮고, 그 얼굴은 속죄소를 향하게 하라고 명하셨어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받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말씀은 하나님은 성막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디에다가 두었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핵심이 여기에 나옵니다. 바로 법궤를 만들어서 그 곳에다가 두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법 아래에 삽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법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요" 법 없이 산다는 것은 그가 죄를 범하지 않아서 법률에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지 법 없이도, 법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살수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도 법이 있지만 성경에서도 법을 말합니다. 바로 율법이에요. 십계명입니다.
지난번 총리서리에서 떨어졌던 이대총장이었던 장상씨가 있지요. 청문회도 했잖아요. 신문에서 대서특필했잖아요. 어디에서 그렇게 추적했는지 아들부터, 부동산 아주 조밀조밀하게 죄를 늘어놓았어요. 이번에도 새로운 총리서리인 장대환씨인가요? 지금 또 그 사람이 총리로서 적격인가 아닌가 또 다 조사하고 있어요. 제가 느낀 것은 야 정말 조금마한 것까지도 다 가리는구나. 저 분은 신학자요, 남편은 목사요 교수요 그런데도 야, 이 세상에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경에 로마서 3장 10절이 생각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아무리 자신만만하게 산 인생이라 할지라도 여론의 심판보다 더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정말이지 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청문회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이 더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사람을 청문하는 사람도 "너도 별수 없이 털면 나와" 이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맞아요. 죄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그가 총리 아니 대통령 아들이라도, 아니 대통령이라도, 청문하는 당사자도 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차를 몰면 좀 스피드를 내는 편입니다. 저도 스피드는 좀 낸다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더 내는 분도 있더라구요. 스피드 때문에 이번주 티켓을 끊겼어요. 달리지 말아야 하는 곳에서 스피드를 내가지고 삐용, 삐용 경찰에 걸렸습니다. 제가 경험인데요 보통, 경찰이 오면 그래도 체면치레로 How are you doing 이라고 묻기도 하는데 이 경찰은 그것이 없어요. 그냥 와서 "Drive Licence, and Registration Please." 이것만 딱 말해요. 이게 무슨 말입니까? "야, 너 법에 걸렸어, 너 딱지 끊겼어" "빨리 내놔"라는 것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법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옆에 아내가 앉았는데 "당신은 내가 그래서 항상 좀 천천히 다니라고 했잖냐고. 왜 스피드를 내냐고"핀잔을 줍니다. 아내에게 씩 웃으면서 그랬어요. "여보 그래도 나 이번해에 스피드 티켓이 처음이야. 하나님께 감사해야돼"
여러분, 법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화배우 찰스 헤스턴 아십니까? 벤허와 십계명에 주연으로 나왔던 배우 있잖아요. 이번주 USA Time 지에 그가 인터뷰를 기자와 했는데 이분은 지금 나이가 많아서 치매현상이 있다고 합니다. 기억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치매이면서 말한 내용이 무엇인가면 "I go to church. I believe in God,.. God wanted me to make 'Ben-Hur' in the first place, or make 'The Ten Commandments' 비록 치매이지만 그가 나는 교회에 간다, 난 하나님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은 자기가 벤허에 출연했다는 것, 십계에 출연했다는 것을 감사하고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치매임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를 보신 분이 있습니까? 굉장히 유명한 영화인데 영화배우 찰스 헤스턴이 주연했어요. 성경에 있는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이니까 좀 리얼하잖아요. 성경에는 그런 묘사가 없지만 영화이니까 가능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시내산에서 내려와요. 하나님의 법, 율법을 가지고 내려오는데 하늘에서 먹구름이 있고 바람이 불기 시작해요. 바람이 휘날리니까 그의 모세의 수염이 휘날려요. 모세가 양쪽 팔에 잡고 있는 이 십계, 증거궤라고 하는데 구름 같은 것이 일어납니다. 찬란한 광채가 납니다. 왜요?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법이니까요? 이 십계, 율법, 계명이 딱 마주치는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우상숭배였어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 종에서 탈출시켜주고 광야에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 주셨는데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급기야는 모세가 없어지고 나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어 가지고 야, 이것에다가 섬기자, 우상을 섬깁니다. 간음하는 죄를 범합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계명이 그것을 보고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 날 하나님이 출애굽기 32장에 보시면 삼천 명을 죽이는 무서운 저주가 임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곳이 없어요. 십계명으로 인하여 다 죽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율법이 우리에게 정면으로 탁 비추면 어떻게 됩니까? 삼천 명이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것처럼 우리도 그 자리에서 죽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율법을 범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요. "에이 목사님, 그래도 난 그 십계명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따른 사람의 이야기예요 목사님" 여러분, 왜 그러세요! 십계명을 보면 전부가 나를 향한 계명이요, 수동적인 것이 없고 모두가 다 적극적으로 준행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해라, 하지 마라 둘 중에 하나입니다. 중간이 없어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리에게 해당이 안됩니까? 우리에게 돈을 사랑하는 모습이 없었나요? 우리에게 탐심이 없었습니까? 탐심이라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 우리의 우상이 되지 안았어요.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이 해석해 주셨어요. 형제를 보고 미워하는 자는 다 살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인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미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지요.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지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우리 가운데 간음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있냐고요? 십계명이 그냥 딱 펴져 있으면 죽습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 이 증거판을 어디에 담으라고 했다고요? 바로 궤 안에다가 담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법궤냐면 법이 들어있으니까 법궤라고 말하는 거예요. 법을 담았어요. 후유! 하나님의 계명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법궤가 보여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과연 이 법궤라는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법궤를 만들라고 하셨나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말씀입니다.
혹시 영어를 아시는 분은 법궤라는 이 단어가 영어로 무엇인지 아세요? ARK입니다. 왜 이것이 ARK가 되었는지 저도 몰라요. 이것은 원어 히브리어에서 나온 것인데 ARK 이란 단어는 성경에 딱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창세기에 나오는데 노아의 방주입니다. 하나님이 물로 세상을 심판할 때 노아를 통해서 방주, 큰배를 만들라고 했잖아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었던 장소를 만들어 주셨는데 바로 안팎으로 역청이 칠해진 방주였습니다. 바로 이 방주가 Ark’라고 되어 있어요. 두 번째는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모세를 담은 갈 상자도 ‘Ark’라고 되어 있다. 바로가 모든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죽이려고 했을 때, 모세의 부모가 모세를 숨겨 키우다가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서 나일 강에 버려야 했는데, 이 아이를 담은 상자는 역청을 칠한 갈 상자였어요.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건져냄’, 곧 ‘구원’이라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하나님의 말씀, 법궤를 만들라고 했을 때 이 법, 하나님의 증거판, 십계명을 두었던 것이 법궤가 ARK입니다. 다 생각해 보세요. ARK은 모두가 다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ARK 법궤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법궤 속에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러분, 율법이라는 것은 세상 끝날 까지 있습니다. 율법이 죽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막을 통하여 말씀하는 것은 율법을 무엇으로 덮어 버렸습니까? 바로 궤로 덮어 버렸어요. 예수 그리스도로 덮어 버렸어요. 십계명을 통하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대면할 수가 없습니다. 율법을 통하여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요!
성경은 의인이 없고 하나도 없다고 했어요. 모두가 다 죄인이에요. 그러면서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6장 14절을 다 찾아서 한번 보십시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이것이 로마서 중에서도 제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에요. 예수를 믿는 사람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다는 말씀이지요. 성도의 원래 법의 지배아래 있어야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난 다음에는 은혜의 지배아래 놓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요. 그냥 로마서의 말씀을 글로만은 이해하기 힘들지요. 자 성막의 그림을 통해서 보십시오. 하나님이 법을 어디에다가 두었어요. ARK 안에다가, 법궤 안에다가 두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은소, 속죄소가 법궤 위에 있습니다. 시은소라는 자비의 거처, 은혜의 거처라는 말이에요. 성막이 무엇을 보여 주고 있습니까? 우리는 율법으로는 아무도 구원을 못 받습니다. 율법으로는 아무리 해도 하나님 앞에 용서가 안됩니다. 속죄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법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어서 그 위에서 은혜와 자비로 우리를 죄가 주관치 못하도록 은혜로 덮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제일 많이 사용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따른 것이 아닙니다. "주여, 은혜로 덮어 주소서"입니다. "당신 이것 잘못했지, 너 그것 잘못했잖아. 너 왜 그거 안했어...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기보다도 "하나님, 은혜의 날개로 나를 덮어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 성도님, 우리 집사님, 우리 권사님, 우리 교회의 성도들 하나님이여, 은혜로 덮어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주여 은혜로 덮어 주소서"
누구의 은혜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인하여 은혜를 받은것입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 나아와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들은 "내가 다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자들이 아니에요.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를 깨 닫아야 합니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간음한 여자, 사마리아 여자, 십자가의 강도, 삭개오, 38년 된 병자… 이들은 "내가 할 수 있다"에서 무엇으로 변합니까? "주님 나에게 은혜를 부어 주소서"라고 고백하는 자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나의 믿음이 부족함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를 은혜의 날개로 덮어주시길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진정한 치유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실 분은 누구십니까?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덮을 수 있는 분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많이 지으면 지옥에 가고, 죄를 지어도 착한 일을 더 많이 행하면 천국에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은 착각 중에 착각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종교는 우리에게 ‘죄를 짓지 말고 선을 행하라.’이런 것을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사람들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고,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물로써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내리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먼저 노아에게 “너는 방주를 만들라.”고 하셔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생물을 암수로 쌍을 지어 방주로 이끌어 들였는데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방주로 이끌어 들이셨어요. 에이 하나님은 왜 정한 짐승만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도 방주 안에 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인간이 구별하는, 인간이 보기에 악하고 선한 것이 하나님께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예수님의 좌편과 우편에 달려 있었던 두 명의 행악자 중에 한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을 보면, 인간적으로 비록 악한 자라고 해서 다 멸망을 받고, 모두가 다 선한 자라고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어요. 그냥 인간이 구별하는, 인간이 보기에 악하고 선한 것이 하나님께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무엇인가? 네가 방주 속에 있느냐? 없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다만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를 구별하실 뿐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가 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장중에 있길 간절히 원합니다.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귀한 성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귀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으로 응답함(Response the Word)
여러분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법 법 법 그렇게 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법으로 구원받은 것 아니에요. 무엇으로요? 은혜로 성소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가는 곳곳마다 법이 아니라 은혜가 풍겨야 합니다. 은혜가 지배하는 곳에는 충만한 복이 임하고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게 되어 있어요. 교회에는 반듯이 은혜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교회는 저는 교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은혜 없는 교회를 본적이 있습니까? 교회가 목사가 성도가 법 들고 설치고 그럽니다. "이게 법인데, 저게 법인데" 법이 지배하는 곳에는 무엇만이 있습니까? 싸움과 분쟁만이 있어요. 교회가 왜 씨글씨글하는지 아세요? 자꾸 자꾸 법이 지배하기 때문에 그래요. 법이 지배하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냥 정죄하고 내가 잘했니 네가 잘했니 그런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무엇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까?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어요. 은혜가 허다한 죄를 덮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으시면 크게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에요. 말씀이 은혜가운데 역사해야지 되지 그냥 말씀을 법대로 하면 싸움만 있어요. 남편이 아내에게 "하나님 말씀에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는데 왜 순종하지 않고 떠들어" 이런 식으로 하면 아내가 말합니다. "성경에 보니까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사랑은 안하고 소리만 질러" 싸우는 거예요. 분쟁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법이 가정을 통치하니까 맨날 싸움을 합니다. 집안이 전쟁이에요. 그러나 남편이 아내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사랑하고 했는데 내가 사랑하지 못했군요. 미안해"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내는 "아니에요. 순종하라고 했는데 순종하지 못했던 내가 잘못이에요" 무엇이 이 가정을 지배합니까? 은혜가 지배하는 가정입니다.
여러분, 은혜의 삶이란 무엇일까요? 내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나도 많은 사람을 품어주고 은혜를 베푸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는 성도를 더욱더 많은 것으로 채워주시고 귀하게 사용합니다.
영화 쉰들러리스트를 보셨어요. 나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유태인을 쉰들러가 살려냅니다. 그때 독일군 친위대 장교에게 묻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힘입니까? 죽일수 있으면서도 죽이지 않고, 때릴 수 있으면서도 때리지 않는 것, 은혜를 베푸는 것, 그것이 진정한 힘입니다. 죽일 수 있다고 곧장 죽이고 때릴 수 있다고 때리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하고 싶다고 해서, 비판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하는 것 아닙니다. 복수할 힘이 있다고 내리치는 것은 힘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뿌리채 뒤흔들 수 있는 것은 참고 용서하며 품어주는 것이 진정한 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되길 원합니다. 은혜가 지배하는 귀한 내쉬빌 연합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말씀으로 나감(Go with the Word)
지성소의 법궤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덮여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속에서 살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로 법궤, 은혜 위에 무엇이 있습니까? 출애굽기 25장 21, 22절에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성막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에서 만나겠다고 하십니까? 속죄소에서 만나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성막의 가장 중심에 법궤와 속죄소가 있었어요. 그 곳에서 은혜로 덮이고 또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도를 받았던 것처럼, 오늘 이 시대에도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반드시 그 교회 안에 속죄소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속죄소가 있어야 죄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만날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속죄소는 우리가 만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덮어졌고, 그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어느 교회든지 간에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이론이 아니에요. 천주교는 속죄소를 만들어 놓고 신부에게 말하면 속죄한다고 그러는데 아니에요.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속죄소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속죄소가 교회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더러운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교회에 나왔을 때, 그들이 속죄소를 통해 죄에서 해방을 받고, “기쁜 날, 기쁜 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하고 찬송하면서 정말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교회에 나가고 있을지라도 그 마음 속에 있는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지지 못하고 그냥 남아 있다면, 그는 죄와 씨름하느라고 영광스럽고, 빛된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궤라고 말씀하셨고, 법궤의 중심에 속죄소를 두셔서 그 속죄소에서 죄를 씻음 받게 하셨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교회에 열심히 다녔었지만, 죄 때문에 갈등하고 고통하며 살아왔었어요. 세월이 흐르면서 죄는 점점 더 심각해졌고, 내 마음을 누르는 죄의 짐들은 날마다 더 커져갔어요. 그런데도 아무리 죄 때문에 고통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해도 죄의 짐은 벗겨지지 않았어요. 몸부림을 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성경을 읽는 가운데 속죄소를 발견했습니다. 내 모든 죄가 눈처럼 희게 씻어지는 속죄의 비밀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에요.
저는 담대히 말합니다. 성막 강해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성막을 통해서 주시는 것은 성막 중심에 법궤가 있고, 법궤 한가운데 속죄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은혜이고 두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했던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교회 안의 속죄소를 통해 우리의 더러운 죄를 눈처럼 희게 씻음 받는, 귀한 복을 얻게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성막 가운데의 법궤 속에 속죄소를 만들게 하셔서 이 속죄소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 속죄소는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해결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속죄소 위에서 우리를 만나기 원하시고, 속죄소 앞에서 우리에게 명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속죄소가 바로 여러분이 앉아 있는 그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앞쪽 강대상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뒤편에서 부르짖는 모습일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반듯이 속죄소가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유롭게 나와서 자기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막을 통하여 간절히 배우는 것은 저희 교회를 통하여 죄씻음을 받는 귀한 지체들이 더욱 많아지길 축원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고 싶습니다. 법보다도 은혜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우리 귀한 지체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오직 말씀
25: 10-22
10.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 고가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1. 너는 정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대로 두고 빼어내지 말찌며
16.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17. 정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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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성막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성소는 외소와 내소로 나눌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깥들인 외소에는 맨 먼저 번제단이 있었지요? 희생제물을 드리는 번제단에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을 받고 나면,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어야 했는데, 이는 구원받은 성도들이라도 영혼의 거울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회개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했습니다.
외소에서 내소인 성소로 들어서면 좌측 중앙에 금촛대가 있었다고 했지요? 창문 하나 없는 성소는 이 금촛대에서 비취는 빛으로 말미암아 금빛이 찬란하다고 했습니다. 이 촛대는 죄악으로 어두운 세상에 참빛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천국 시민된 그리스도인의 사명으로서 우리는 어둔 죄악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금촛대의 반대편에는 진설병을 항상 진설해 놓은 떡상이 있었다고 했지요? 이 떡상의 진설병은 곧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죽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생존경쟁을 하고, 죽지 않으려고 하루 세끼 꼬박 꼬박 밥을 챙겨 먹지만 그러나 그 밥을 먹고 영원히 산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늘로부터 내려 온 산 떡이요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소 안에 있는 세 번째 성구는 분향단이었습니다. 분향단은 제사장들이 향을 사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저절로 풍기는 소합향 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던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기도의 갈급함에서 우러나온 기도이어야 하고, 조개껍질을 부수어서 만든 나감향 같이 자아가 완전히 깨어지고 부수어진 기도라야 하고, 소독제로 쓰였던 풍자향처럼 영혼의 독소를 제거하는 회개의 기도라야 하며, 유향처럼 우리에게 닥친 재난과 불행을 제거해달라는 얍복강가의 야곱과 같은 간청의 기도라야 하며, 이 모든 기도에 언약의 상징이었던 소금처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향같은 기도라야 하늘 보좌에까지 올라가는 응답받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기도하는 성도들 곧 진실하게 기도하는 성도를 가까이 하시고, 그리스도인의 신랑 되신 예수님 역시 기도의 향이 있는 신부를 더욱 사랑하시므로 기도의 향이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성막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지성소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제사장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바로 지성소였습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 번 곧 칠월 십일 대속죄일에 들어가던 곳이 바로 지성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세계의 중심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고, 예루살렘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의 중심은 지성소이고, 지성소의 중심은 법궤이다.” 지성소가 그토록 중요한 것도 다름 아닌 법궤 가 그곳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법궤에 담긴 진리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법궤의 이름
구약 성경에 보면 법궤에 대한 이름이 아주 다양하게 나옵니다. 곧 1)법궤 2)궤 3)증거궤 4)하나님의 궤 5)여호와의 궤 6)거룩한 궤 7)권능의 궤 8)이스라엘 신의 궤 9)여호와의 언약 궤 10)나무 궤 등으로 그 이름이 다양합니다.
2. 법궤의 귀중성
몸이 10냥이면 눈은 8냥이라고 말합니다. 성막이 10냥이라면 법궤가 8냥이라고 할 정도로 법궤는 중요합니다. 법궤는 몇 가지 면에서 귀중합니다.
1)금이 가장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귀중합니다.
법궤위에는 두 천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금덩어리여야 합니다. 조그만 아이만한 금덩어리가 둘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2)하나님께서 계신 자리이기에 귀중합니다.
민 9:15-16에 “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며, 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모양이 있었는데”라고 하였는데, 이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리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법궤에 임재 하셨습니다. 그 증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언제나 법궤 위에 떠올랐습니다.
3)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이기에 귀중합니다.
출 25:21-22에 “속죄소는 궤 위에 얹고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법궤 “거기서 너와 만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는 가장 귀중한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역사상 가장 귀중품은 법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나실 때에는 반드시 법궤 거기서 만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4)하나님의 말씀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귀중합니다.
오늘 본문 21절에 “내가 네게 줄 증거 판을 궤 속에 넣으라.”고 했는데, 이는 곧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을 법궤에 넣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법궤에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이 새겨진 돌비가 들어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한 성물이었습니다.
3. 법궤의 재료
법궤의 재료로서는 조각목을 사용했습니다. 원문에는 ‘쉬띰’나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자라나는 가시나무의 일종이라고 합니다. 이 나무는 광야지대에 흔히 있는 나무로서 천하게 사용되는 재료였다고 합니다. 영어에는 종종 이 나무가 아카시아로 번역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히 쓰는 목재로는 백향목과 상수리나무와 잣나무들이 있습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백향목으로 지어졌고, 노아의 방주는 잣나무를 사용했습니다. 이런 점을 놓고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그 존귀한 법궤 한 개를 만드는데 백향목이나 잣나무로 만들도록 하시지 않고, 그렇게 흔하고도 천한 쉬띰 나무를 사용하도록 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도저히 백향목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었을까요? 꼭 그렇게만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이사야 선자자의 예언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 53:2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오는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이 법궤 자체도 궁극적으로는 구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사막의 마른 땅에서 고운 모양도 없고 아무런 풍채도 없이 자라난 천한 쉬띰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예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쉬띰’이라는 가시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험악한 고난을 예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 가시나무에는 많은 진액이 흘러 그것은 아라비아인들의 약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역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구속을 예표 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그 나무의 특징은 썩지 않는데 있다고 합니다. 70인역 성경에는 썩지 않는 나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때의 그 필자들은 이 나무의 썩지 않는 특성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특성도 그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고 하면, 그것은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무죄성과 영원성을 예표 함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쉬띰 나무의 안과 밖을 정금으로 쌌다고 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라한 인성과 영화로운 신성을 동시에 표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궤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구약 시대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법궤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과 만나 교제하셨듯이, 오늘날 하나님은 오직 법궤가 예표 하는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와 교제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문이요 통로가 되십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께서는 친히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분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자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중심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분은 지금 우리의 마음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엽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오시고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나눔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4. 법궤가 주는 교훈
1)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더 귀합니다.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기록하여 주신 증거 판을 넣어 둘 법궤를 만들 때 먼저 조각목으로 만든 다음 그 안팎을 정금으로 싸게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귀중하다는 것을 교훈해 줍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만들 때 그 안팎을 금으로 싸서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증거판을 넣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금이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노래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고 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으로 여기는 금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영혼의 생명을 살리는 법이요, 구원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금은 이 세상이 지나가기까지 잠시 동안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요, 아무리 많은 금으로도 죽은 생명을 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영혼을 살리고 구원을 얻게 하는 주의 말씀의 가치는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닫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물론 황금만능주의와 배금주의 사상이 팽배해져 있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금으로 대표되는 세상의 재물보다 더 소중히 여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재물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쉽게 넘어지곤 합니다. 예수님께 찾아왔던 부자 청년도 그런 갈등 속에서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정녕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깨달음으로 자신의 모든 금은을 다 팔아서라도 그것을 얻는 일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2)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12-15절을 보면 금고리 넷을 만들어 법궤의 네 발에 달고 또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그 고리에 꿰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법궤에 고리와 채를 만든 것은 물론 법궤 운반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깊은 의미가 들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법궤를 만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으로 사람이 그 법궤를 만지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할 때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를 불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궤를 그들의 신당에 두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크게 징계하신 사실과, 다윗이 기럇여아림에 있던 법궤를 다윗 성으로 옮길 당시 웃사가 하나님의 법궤를 손으로 만짐으로 즉시 죽게 된 사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리와 채를 만들어서 사람들이 법궤를 손으로 만지지 않고도 운반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고리에 한번 맨 채에 대해서는 지성소에 안치할 때에라도 다시 빼지 못하게 하셨는데, 이 역시 사람들이 혹시 법궤의 고리라도 만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이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거룩하심을 침해하는 때에는 지체하지 않고 진노하심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활 가운데서 고의적으로 혹은 부주의하여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침해하지 않도록 늘 주의하며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늘 깨어 경건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항상 죄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만 방심해도 우리는 죄를 범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거룩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경건의 연습을 쉬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인 경건의 연습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5. 법궤 속의 내용물
법궤 속에 담긴 내용물로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성구들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히브리서 9:4절에는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했는데, 왕상 8:9에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성구의 차이는 법궤가 광야에 있을 때와, 법궤가 가나안에 입성한 후 솔로몬의 성전에 안치되었을 때와의 차이 때문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법궤를 모시게 되었을 때는 오직 두 돌비의 계명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의 만나가 아무리 귀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가치뿐이요,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아무리 신비스러워도 그 역시 영원한 것이 될 수 없음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만나가 얼마나 신비한 양식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전혀 농사를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날마다 내려주시는 하늘 양식 만나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인 길갈에 도착하자 만나가 그치고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의 소산물을 먹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만나를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금항아리에 담아서 법궤 안에 보관하였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레위인만 제사를 드려야 하며 왜 아론만 대제사장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하면서 원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족장들에게 지팡이를 하나씩 가져오게 하고, 그 위에 각기 이름을 쓰는데 레위 지파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들을 법궤 앞에 두도록 하고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게 할 터인데,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의 원망을 그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법궤 앞에 가져다가 간직하여 패역한 자의 표징이 되게 하여 하나님께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만나도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매우 신비한 물건들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일에는 이렇듯 신비한 만나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사라지고 법궤 안에는 오직 십계명을 기록한 두 돌판 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그것은 영원히 남아야 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언약궤요, 하나님의 말씀뿐임을 가르쳐 줍니다. 이는 곧 “여호와의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하신 말씀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말씀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그래서 종교 개혁가들의 모토는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성소의 분향단은 지성소의 법궤와 마주 대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도가 중요하지만 기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연결되어야 올바른 기도가 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 여러분의 신앙이 어떠한 신비 체험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건강한 신앙이 되시기를, 영원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