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평 시
변용의 시학, 윤회의 미학
에세이문예 24년 여름호 시를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시인들은 문인의 왕이다. 자연, 인생 등 여러 현상을 작가의 주관적이고 독특한 시각으로 관찰하여 시적 어구로 기록하여 전달한다. 삶이 한복판인 도시보다는 자연을 더욱 존중한 시인의 시론은 일상인들이 갖는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일상인이 관심을 잘 안 가지는 자연의 발신음을 듣는 데서 꽃을 피운다. 삶의 의미, 즉 사물의 형상 속에서 진리를 추구하려 한다는 점에 있어서 시인은 철학자와 가깝다. 시의 본질은 철학적 사명에 상당히 접근해 있다.
이번 시 계간평은 노옥분, 이애정의 시가 지니고 있는 개별성과 보편성의 정체를 탐색하고, 이 양자가 어떻게 예술적으로 합일되는지를 객관적으로 확인해 봄으로써 서성시의 참모습에 다가설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해 보고자 한다. 평자는 문학평론가로서, 지금까지 DBC 동양방송 미래일보의 <시가 있는 아침> 연재시에서 시인들에 시 해설을 맡아왔고, 부산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시창작론을 강의하고 있다. 두 시인의 시 속에서 시인들이 생성해낸 미의식은 대부분 사물이 듣고 싶은 소리를 전하는 것이었다. 시인이 주제로 형상화해낸 정서의 빛깔이자, 심오한 관조 속에서 획득한 철학적 울림은 인문학적 가치와 잘 매치됨으로써 문학적 성취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는 시적 태도가 기본을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라 하겠다.
가을호에 실린 모든 시에 대해 한 편 한 편 감상하고 한 편 한 편에 대한 시평을 써서 계간평에 발표하면 좋겠지만, 여러 사정상 그럴 수 없음은 매우 유감이다. 시는 시인과의 가장 인간적인 만남의 장을 열어주는 통로라는 점에서, 평자는 어느새 시인들이 다듬고 있는 삶의 진실성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들 두 시인은 행위소로부터 얻어내는 의미, 가치, 생명의 소리, 향을 맡고 느낄 수 있는 뛰어난 감수성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치환이나 전이, 변용의 미학을 구축하여 현상학적으로 인식하는, 다시 말해 비유를 통해 시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상은 우리에게 풍성한 감동을 선사한다. 노옥분의 <개불>이나 이애정의 <숲이 전하는 말>을 통해 우리는 시가 주는 감동을 맛볼 수 있다. 그 감동의 고지에 오르기 위해, 평자는 시의 숲을 창조적으로 헤맬 수밖에 없었다.
Ⅱ.
시는 서정시학의 힘을 업고 문학형식으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으로 엄청난 가치를 지닌다. 시와의 치밀한 감상적 조우라는 이 두 시의 해설을 통해서 서정시의 정체와 시적 울림의 메카니즘에 접근해 볼 수 있으리라 본다. 자연에 대한 사랑 없이 지구가 어떻게 건강할 수 있는가. 한 사람은 바다 속에 있는 개불을, 다른 한 사람을 산 속에 있는 숲을 시적 등가물로 생각하고 노래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문학사의 큰 줄기를 독자들의 가슴에 심어놓는 데 크게 기여한 시인이라 하겠다. 살아있는 시인의 문학작품은 간단한 해설만으로 시적 성과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이지만, 이들의 시가 자연주의와 생태주의의 변증법적 완성을 통해서 한국시의 전통과 품격을 격조 있게 계승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으리라 본다.
참 희안하게 생겼다
눈코 비늘 마디도 없이
울통불퉁 길쑴한
맨송맨송 요상한 생김새
살빛도 민망하다
맥없이 흐물흐물 홀로 낭창대다
슬쩍 닿기만 해도
빳빳하게 오그라드는
붉은 피 가득한 저 몸뚱어리
물상 없이 잘도 살랑거린다
들숨 날숨 두 개의 구먼만으로도
걸림없이 넘나드는 운율
연출없이 빛나는 무대
홀가분히 파도를 잠재우는
네가 진정 뻘 속의 부처
바다를 품은 성자다
노옥분 <개불> 전문
이 작품은 하나같이 비가시성의 가시화, 인식과 형상의 복합체, 비유의 존재론적 형상화라는 시학적 측면과 복합적 통일성이라는 형식적 성질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반대의 이유가 없는 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성질은 미의 징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의 문학성은 형상화에 의해 현실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문학은 ‘무엇’이란 주제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어떻게’라는 형상에 방점을 찍는다. 따라서 가치평가의 대상이 된 이 시는 이러한 관점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봐도 좋다. ‘맥없이 흐물흐물 홀로 낭창대다/ 슬쩍 닿기만 해도/ 빳빳하게 오그라드는/ 붉은 피 가득한 저 몸뚱어리’로 표현은 시적 화자의 에로틱한 시선을 보여준다. ‘슬쩍 닿기만 해도 빳빳하게’에서 상승된 성적 판타지는 ‘오그라드는’에서 하강하고 만다.
그렇게 이어지겠거니 생각하면 오산이다. ‘붉은 피 가득한 저 몸뚱어리’에서 다시 성적 판타지는 상승곡선을 그린다. 문학의 원리 즉 ‘이것’에서 ‘저것’으로의 치환이란 ‘메타포원리’와 형상적 체험이라는 ‘표현술’의 차원에서 이 시는 문학적 성취를 지니면서, 시의 재료인 인식과 형상으로 빚어낸 작품이라 하겠다. 이 시의 압권은 뭐니뭐니 해도, ‘네가 진정 뻘 속의 부처/ 바다를 품은 성자다’라는 마지막의 지배적 정황이다. 시적 화자는 여성이다. 이는 ‘요상한 생김새/ 살빛도 민망하다’는 시행에 잘 드러나 있다. ‘요상’ ‘민망’에서 객체를 보는 시선이 포착된다. 작품이란 이러한 재료의 어떤 특수하고 유일한 조직일 것이며, 이렇게 조직된 구조가 아름다움을 갖는 것이다. 형상적 체험 즉 ‘이것’을 ‘저것’으로 치환하지 않으면 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고 가진 게 없어 쓸쓸하다면
숲으로 갈 일이다
나의 인생도 그처럼 떳떳했던가
또한 넉넉했던가
산다는 것은 무르익는 일
너와 나를 잊고 우리를 생각해 보자
정지된 시간을
씨앗처럼 묻으면
참으로 삶은 종교와도 같은 것
나무는 말한다
사라지는 모든 것 위에
살아있는 것이 있다고
이애정의 <숲의 말> 전문
이애정의 <숲의 말>은 좋은 시다. 왜냐하면 원래 좋은 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사물의 소리를 듣는 데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최고 압권은 시적 화자가 들리지 않는 나무의 소리를 들리게 청각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생태적 상상력의 절박함을 극대화시키는 촉매로 작용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나무의 소리는 ‘진리’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는 충격적 경험인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생멸의 방정식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한다. 이 시의 ‘기’, ‘언제고 가진 게 없어 쓸쓸하다면/ 숲으로 갈 일이다’라는 언술은 전개예고 기능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 삶이 힘들면 시장을 가보라는 말과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무르익는 일’이 라거나 ‘ 너와 나를 잊고 우리를 생각해 보자’ 등은 ‘결’의 의미화를 위해 더없이 효과적인 장치다. ‘정지된 시간을/ 씨앗처럼 묻으면/ 참으로 삶은 종교와도 같은 것’이란 ‘전’의 명제는 ‘결’의 증폭제 역할을 하다. 삶에 대한 성찰은 물론 삶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바꾸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진리의 전제다.
시적 화자는 ‘결’에 가서 ‘나무는 말한다/ 사라지는 모든 것 위에/ 살아있는 것이 있다’고 설파한다. 나무의 말을 통해서 생태문제를 정조준하고 있어서, 담론적 차원에서 저항성도 확보하고 있다. 에코필리아적가치의 중요성을 표명하면서, 기존의 상식을 깨는 인식을 시의 결말부에 놓음으로써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의 쾌미는 아무래도 ‘전’과 ‘결’ 부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독자인 나 역시 이런저런 삶의 환경에 부딪히면서 어깨에 자꾸만 무게가 얹힌다. 그 무거움이 온몸을 짓누르면 요즘에는 숲으로 떠난다. 숲은 이리로 와서 몸과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라고 은근히 압박해온다. 시적 화자는 문제 안의 갈등에 몸부림치며 갇혀있는 우리를 자연으로 내보내고자 하는지도 모른다. ‘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삶’의 의미를 ‘종교’로 치환함으로써 <사>에서 <생>을 얹어, 불교적인 윤회의 미학을 다시 치환해냄으로써 죽음에서 삶의 희망을 건져 올리는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시를 썼다. 시로 자연의 이법을 노래하여, 설득과 공명의 울림통을 직조해내었다고 하겠다.
Ⅲ.
우선 문학이 되어야 한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성향의 문제는 그 다음이다. 동시에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므로 좋고 싫음의 판단이 있을 뿐 우열의 기준이 될 수 없다. 시인이 시학을 무시하고 목청만 잔뜩 높이게 되면 그것은 한때 대학가에 요란스레 나붙었던 대자보나 근엄한 목회자의 설교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웅변이나 설교를 시의 형식을 빌어 듣고 싶은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는 결코 관념의 퇴적장이어서는 안 된다. 또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몽환적 어휘의 나열이나 이미지의 배합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것은 혹세무민의 연금술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분의 시는 한마디로 이상적이다. 두 분은 시작에 임하여 본성 차원에서의 인간 존재해명의 문제는 물론 역사적 환경 속에서의 바람직한 삶을 위한 순수의식에 천착함으로써 통시적이면서 공시적이고,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그리고 초월적이면서 당대적인 미의식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사상과 형상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통해 세계를 자아화하는 것이 바로 서정시학의 특성이며, 예술시학의 전개다. 하나의 압축된 서정시로서 심상과 상징을 그려내었는가 하면 풍경화 같은 시적 화자의 행위소를 보는 시선, 비인간 행위소가 인간을 보는 응시의 세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기에 삶의 진리를 환기시켜 준다. 따라서 이들의 시가 환기하는 언어들은 그대로 우리를 미적 사유로 몰아넣는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