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서 김억이 소월을 추모하는 글이 있네요.
김억의 ‘소월의 추억’
이제 소월이 돌아가고 말았으니 여기에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돌아볼 길 없는 옛날의 추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한창 젊은 몸으로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재능을 보여줄 수 있었거늘, 그만 그대의 검은 운명의 손은 아닌 밤에 돌개바람 모양으로 우리의 기대 많은 시인 김정식(소월의 이름)군을 꺾어버리고 말았으니, 우리이 설움은 이곳에 있는 것이다.
生을 좋아하고 死를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금할 수 없는 인정이외다. 그러하거늘 하물며 재능있는 사람이 그 재능을 발휘치 못하고 돌아갔음이겠습니까? 이 우리들의 소월으 요절을 마음 깊이 안타까워하는 所以이외다. 그러나, 생사는 사람의 할 수 없는 운명이외다.어떠한 힘으로든지 면할 수가 없는지라, 우리느 엄정한 사실에 대하여 한갓 머리를 숙이고, 가장 엄정하고 진실하게 자기와 모든 주위를 살펴보는 것이외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사랑하는, 기대 많던 이 돌아간 이 날에 과연 나는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나는 저 아일랜드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와 함께 ‘내 세상에 아름답던 모든 것은 물처럼 자취없이 하나하나 스러지지 - ’하면서 혼자 한숨이나 쉴 것인가? 그렇지 아니하면 어스름 저녁에 어두워지는 무덤가를 혼자 휘돌면서 설운 노래나 마음껏 부를 것인가? 또는,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돌아오지 못할 그 옛날의 귀여운 기억을 고요히 가슴에 안고 , 언제든지 그러한 심정을 가질 수 있을 것이외다.
제 무심한 세월은 혼자서 기억을 지워놓으며 끝없이 흘러갑니다. 달아납니다. 사람의 마음도 흘러가는 물이외다. 저 맑은 하늘을 떠도는 구름이외다. 물이요, 구름인지라 이 아침에도 기슭을 돌고 이 저녁에는 북녘 하늘을 헤매지 않을 수 없고 보니 곳에 따라. 때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변하는 것이외다. 이리하여 아무리 안타까와하는 심정이 깊고 간절하여도, 언제까지든지 우리는 같은 그 심정을 가질 수가 없는 것이외다. 설운 일이언마는 이 또한 사람의 마음의 힘으로 어찌 할 수는 없는 일이외다. 한껏 취하여 무어라고 노상 떠들던 심정도 언제 한 번은 반드시 깨는 법이외다. 깨고 나면, 지나간 일은 모두 다 자취 없는 뜬 구름 이외다. 누구라서 맑은 달빛 아래서 깊이깊이 맺은 언약이 변하지 아니하리라고 굳이 믿고 그것을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소월의 요절을 가장 섧게 흐느끼는 우리 이 마음도 하루 이틀 지나는 동안에는 자기도 모르게 잊어버릴 것이외다. 소월을 잃어버린 이날에 나의 설워하는 점은 이곳에 있는 것이외다. 사람은 어찌하여 잊지 말자던 마음이 언제든지 사랑스러운 기억을 그대로 가슴에 지니자던 마음이 언제든 한 번은 무심한 세월에 따라 그것조차 잊어버리게 되는강? - 이것이 나의 가장 설워하는 바다. 지나가는 세월은 물이라 어름어름하다가는 그 기억조차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더구나 중앙 문단에 자기가 적은 소월이외다. 비록 작품에 나타난 이 불행한 시인의 사랑스러운 자취는 있을망정, 자기로의 기억이나 사람으로의 소월의 자취는 그야말로 찾아볼 길이 드물 것이외다. 일찍이 소월의 노래한 ‘못 잊어’의 한 편을, 나는 이날 와서 생각 아니 할 수가 없는 일이외다. 그것은 아니 잊으려고 하여도, 결국 세월이 지나가 버리면 잊어버린다는 것이외다.
못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데로 한 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잊을 날이 있으리다.
모 잊어 생각이 나겠지요.
그런데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 잊어 더러는 잊히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렇지요
‘그리워 알뜰히 못 잊는데
어쩌면 생각이 떠지나요?
소월 자신도 이렇게 노래했던 것이외다. 들고 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씩 하나씩 기억까지 잊어 버리는 것이외다.
生別도 섧거늘 死別이리까? 사별의 불행을 들을 때에 나는 참을 수 없는 안타까운 애석을 소월에게 가지게 되니 이것은 소월이 읊은 바 설운 심정이외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처다 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것이외다. 이 詩의 작자인 소월을 잃은 이날에, 이 시의 작자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아득한 예전날로 돌아가서, 이 작자의 이 시에서 나의 안타까운 심정을 하소하게 되니, 이것도 무슨 소월과의 뜻하지 아니한 숙연인가 보외다. 더구나, 생각하면 이 시는 소월의 십 팔 구 세 전후의 作으로, 이 시에 대하여 토론하였을 뿐아니라 그때에는 하루 같이 만나서 동서 시인들의 시가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써 일과를 삼다시피 하였으니, 시의 작자가 불행하게도 요절해버린 이 날에, 나의 심정이 어떻게 어두워지지 아니 할 가 있을 것입니까? 생각하면 기나 긴 꿈이외다.
*김억(1896-6.25때 납북)
안서 김억이라고 하며, 평북 곽산군 출신
오산고 출신으로, 오산고 교사로, 소월의 스승이다.
민요 등, 한국의 전통 정서에 관심을 가진 시인이다.
첫댓글 소월의 추억은 역시 학창시절입니다...
그의 시를 밤새워 외웠던 기억이 새록새록 살아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