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199호 마당 쓸 듯 부정을 매일 쓸어버려라 (마13:24~29)
“마당쇠야, 마당 좀 쓸어라.”
사극을 보면 양반이 머슴에게 틈만 나면 마당을 쓸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면 마당쇠는 ‘네이~~’ 하고 빗자루를 들긴 하지만, 깨끗하기만 한 마당을 자꾸 쓸라 하는 것에 심통이 나서 괜히 돌부리를 발로 차곤 합니다.
그런데 옆집 양반님은 어딜 가셨는지 마당쇠 녀석이 유유자적하기만 합니다. 전혀 마당을 쓸지 않습니다. 내심 부러워하고 있는데, 그게 한 달 정도 지나니깐 마당에 잡초가 나더니만 급격히 무성해졌고, 주인마님이 오신다는 말을 들어서인지 마당쇠는 잡초를 제거하느라 진땀을 빼는 모습입니다.
왜 마님은 마당쇠에게 허구한 날 마당을 쓸라고 했을까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풀씨가 날아와 터를 잡을까봐 그런 겁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풀씨가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리면 감당할 수 없기에 미리 조치를 시킨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부정을 쓸어버리라고 하실까요? 부정이 뿌리를 내릴까봐서입니다. 요즘 사방에서 부정이 날아옵니다. 매스컴은 물론이고, SNS, 그리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부정이 쏟아집니다. 그걸 방치하면 우리 인생에 부정이 쑥쑥 자라 열매를 맺기에 미리미리, 매일매일 쓸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뿌린 적은 없지만, 풀씨처럼 그 씨가 사방에서 날아오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이 농사를 지을 때 모판에 싹을 틔워 모내기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좋은 볍씨로 싹을 틔웠건만 모내기를 해보면 꼭 피가 자랐습니다. 안 심었는데 난 겁니다. 그 피를 방치해놓으면 나중에는 벼를 칭칭 감기에 빨리 뽑아야 했었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주인이 좋은 씨를 뿌렸는데, 가라지가 난 것을 보고 하인이 왜 가라지가 났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마13:25)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생도 잠시 방심하면, 늘 빗자루질을 하지 않으면 어디서부터인지 몰라도 부정의 씨가 뿌려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부정은 동의하기가 참 쉽습니다.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무의식 속에서 부정은 받아들여집니다. 그런데 긍정은 의식적으로 동의해야 할 만큼 편안치 않습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지, 긍정적인 말을 해야지.’ 이렇게 의식해야 받아들여진단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근본 죄성이 있어서입니다. 선천적으로 우리 안에는 죄성이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라서 그렇습니다. 아담이 마귀가 와서 부정을 뿌릴 때 빗자루로 쓸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되레 아내와도 부정의 씨를 나눴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씨가 아예 우리 안에 터를 잡은 것입니다.
민수기 13장에 보면 가나안을 탐지하러 간 12명의 정탐꾼들 중에 10명은 ‘가나안 사람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아서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을 뿌린 겁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가나안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에 동조했습니까? 부정에 동조, 동의했습니다. 다수의 말이라 믿었다기보다 원래 부정을 동조하는 본성 때문입니다. 부정의 씨를 뿌렸으니 그대로 되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셨으니, 또 본시 거짓말을 못하시는 분이시니(히6:18) 말한 대로 이뤄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누가복음 1장에 하나님이 무자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에게 아이를 허락하십니다. 사가랴가 반열의 차례대로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할 때 천사가 나타나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눅1:13)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사갸랴가 대뜸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눅1:18)라고 대답합니다. ‘내 나이가 몇인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천사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사가랴를 벙어리 되게 하셨습니다. 왜요? 입을 열면 계속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것이고, 그게 하나님 귀에 들리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 사가랴 대신 요한을 보낼 다른 방도, 다른 사람을 취하셔야 하기에 입을 닫게 함으로 부정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은 아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난, 다시 태어난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부정이란 죄성이 없습니다. 불가능, 부정이란 단어가 없으신 하나님처럼 우리에게 불가능, 부정이란 없습니다. 그 생각이 존재할 뿐입니다. 자고로 말 (言)은 길들이기가 어렵습니다(약3:8). 그러나 생각을 길들이면 말은 길들일 수 있습니다. 생각대로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언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했고, “생각이 결과라”(렘6:19)고 한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마세요. 그리고 혹 입에서 ‘안 된다, 못한다’는 말이 자주 언급된다면 자신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지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어느 장로님이 초소형 녹음기를 하나 사주길래 테스트 겸 목사인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자가 진단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밤에 집에 돌아와 녹음된 제 말을 들어보니 정말이지 부정적인 말 하나 없이 다 긍정적인 말, 남을 살리는 말, 하나님의 말씀으로 녹음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일부러 뿌린 씨도 나지만, 모르고 뿌린 씨도, 억지로 뿌린 씨도 납니다. 오래전, 우리 성도 한 분이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남편이 자꾸 때린다는 겁니다. 그 성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인 제공자는 바로 자신이었더라고요. 그 성도가 조장인데, 자기 구역의 성도가 남편에게 자주 맞았나 봅니다. 그래서 위로한답시고 ‘남자들 다 그래. 우리 남편도 어떨 땐 그러는데 뭐.’라고 했답니다.
그 후로 안 그러던 남편이 손찌검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정에 동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여 친구가, 구역 식구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걸랑 얼른 내보내세요. 그것은 마치 쓰레기를 잔뜩 가지고 와 내 집 거실에 풀어놓는 격입니다. 그게 계속되면 내 집이 쓰레기 더미가 되는 겁니다. 냄새가 가득하고, 벌레가 득실거리는 쓰레기장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열왕기하 7장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사마리아 성이 아람 군대에 포위되었을 때 먹을 것이 없어 서로 자식을 잡아먹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때 왕이 하나님께 그 모든 책임이 있다고 하자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풀어주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내일이면 식량이 평상시보다 훨씬 싼 가격에 거래될 것이라고 말해준 겁니다. 그런데 한 장관이 이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치며,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죠. 엘리사가 그에게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너는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고 예언했는데, 정말 엘리사의 예언대로 하나님이 아람군대로 하여금 병거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심으로 그들이 짐을 꾸릴 여유도 없이 퇴각하는 바람에 그것들이 다 이스라엘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장관은 어찌 되었을까요? 그는 성문을 지키다가 백성들에게 밟혀서 죽고 말았습니다.
좋은 말을 합시다. 긍정적인 말, 아름다운 말, 희망적인 말, 선한 말을 하고, 그 말에 동의합시다. 나쁜 말, 악한 말, 부정적인 말은 하지도 말고, 동의하지도 맙시다. 그러면 복 있는 자가 되고 온전한 자가 됩니다(약3:2).
“마당쇠야~ 마당 좀 매일 쓸어라.”
“얘들아~ 부정을 매일 쓸어버려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벧전3:10~11).
할렐루야!
잘못된 인식의 변화가 없이는 기적을 맛볼 수 없다
생사화복이 네 혀에 달려있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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