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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욕되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知 : 알 지(矢/3)
足 : 발 족(足/0)
不 : 아닐 불(一/3)
辱 : 욕될 욕(辰/3)
출전 : 노자(老子) 第44章
모자람이 없이 넉넉하여 마음에 차면 만족한다. 여기에 도달해도 잠시 옆과 비교하면 만족감은 눈 녹듯 사라진다. 자기의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는 바라던 것을 얻어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은 만족하는 자에게 온다며 동서의 철인이 저마다 강조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만족을 알기가 쉽지 않다. 10년 정진하여 생불(生佛)의 경지에 오른 지족선사(知足禪師)도 황진이(黃眞伊)의 하룻밤 유혹에 넘어가 도로아미타불이 된다.
현재의 것으로 만족함을 안다면(知足) 욕되지 않는다(不辱)는 가르침은 말은 쉬워도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이 성어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나왔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도교(道敎)의 창시자인 노자(老子)의 책이다. 조금 뒤에 태어난 유가(儒家)의 공자(孔子)와 모든 면에서 대립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를 중시하고 현실참여를 택하는 유가에 비해 도가(道家)는 드러나지 않게 자연 그대로의 무위(無爲)를 주장한다. 만족함을 알라는 깨우침도 명리(名利)의 가치관을 배격하는 노자의 특징을 드러낸다. 이 성어가 나오는 44장의 내용을 보자.
명성과 생명 어느 것이 더 중하며, 신체와 재산 중 어느 것이 귀한가 묻고, 지나치게 아끼면 큰 낭비가 따르고 쌓아두기만 하면 더 잃게 된다며 이어진다. '만족을 알면 욕되지 않고, 적당히 그칠 줄 알면 오래도록 편할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비슷한 내용은 곳곳에 있다. 46장에는 '만족을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화가 없고, 욕심을 내어 탐하는 것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禍莫大於不知足 咎莫大於欲得)'로 가르친다.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라는 '지족자부(知足者富)'는 33장에 나오는 성어다.
명심보감(明心寶鑑)도 빠질 수 없다. '항상 만족함을 알면 평생 욕됨이 없고, 항상 그칠 줄 알면 종신토록 부끄러움이 없다(知足常足 終身不辱 知止常止 終身無恥).' 안분(安分)편에 실려 있다.
김영란법 영향으로 높은 자리 사람들은 평시에 넘쳐나던 선물이 급감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물론 인정에서 나온 것은 변함이 없더라도 다른 마음이 든 선물은 주고받는 손이 법을 인식했음이 틀림없다.
작금 법조계를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만족함을 모르고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명성에 치욕의 칠갑을 하는 것을 보고 이제라도 고마운 마음을 주고받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다.
지족불욕(知足不辱)
세상사, 어디 매사 만족할 수만 있을까. 웬만하면 만족함을 알아야 삶이 여유롭다. 작은 행복도 느낄 수 있다. 아니 불행을 막는다. ‘노자(老子)’에 “족한 줄 아는 이는 욕을 당하지 않는다(知足不辱)”와 “족한 줄 아는 이는 부자이다(知足者富)”란 말이 뒷받침한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이란 뜻이다.
그런데 인간은 왜 만족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 부질없는 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며 불평과 불만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평생을 두고 마음속에 번민과 갈등을 느낄 터이니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또 오죽하겠는가. 그런 생지옥 속에서 어서 벗어나라는 것이 현인들의 교훈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 내가 앉은 이 자리가 꽃자리”라는 시어(詩語)를 되새겨볼 일이다.
그렇다. 공연히 욕심을 부리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상향이다. ‘채근담’에 “눈앞의 일을 만족하면 그것이 곧 선경이요, 만족할 줄을 모르면 그것이 곧 속세(都來眼前事 知足者仙境 不知足者凡境)”라며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원인을 잘 쓰면 살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잘못 쓰면 죽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總出世上因 善用者生機 不善用者殺機)”고 한 바도 궤를 같이한다.
물론 사람들의 삶이 언제나 편한 것만은 아니다. 살다보면 갖고 싶은 것, 친구와 이성 문제,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직장 문제 등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게 많다. 짜증, 절망, 분노가 수시로 생겨나는 게 우리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삶을 긍정할 수만은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생각 나름이다. 하루 세 끼 식사할 수 있다면 그것도 감사한 일이다. 이 세상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지 않는가. 내려놓아야 한다. “마음을 수양하기로는 욕심을 줄이는 것만 한 게 없다(養心莫善於寡欲)!” '맹자'가 주는 가르침이다.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만족할 줄 알면 치욕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사람의 움직임은 선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 노란선 밖에서 기차를 기다린다. 차를 몰더라도 차선을 지켜야 하고 횡단보도 정지선 앞에서 서야 한다. 모두 안전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므로 선을 지키라고 요구하게 된다.
문서 작업을 하면 선을 그을 때도 반듯해야 모양도 좋고 내용도 편하게 눈에 들어온다. 머리 손질을 할 때도 라인이 살아야 예쁘게 보인다. 라인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면 왠지 불편하고 머리를 손질해도 손질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렇게 보면 선은 아름다움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살면서 선 안에 머물 수만은 없다. 철도에 사람이 떨어질 경우 선 안에만 있으면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할 수 없으므로 선을 넘어 사람을 구하게 된다.
처음 만난 사람이 반말부터 하거나 사람 사이에서 상식을 지키지 않으면 평소 자제하던 감정의 선을 넘어서 항의를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면 사람을 쉬운 사람으로 여겨 바보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선의 안 밖을 넘나들며 인간으로서 품위를 지키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체적으로 5,000여 글자에 지나지 않지만 노자의 ‘도덕경’을 보면 자주 되풀이 되는 말이 있다.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멈출 곳을 알아야 한다.” 이 말도 따지고 보면 선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족과 멈춤은 어떤 기준을 정해놓고 그 안에 있어서 밖으로 넘어서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친 김에 선을 지키자는 노자의 말을 더 들어보자. “만족할 줄 알면 치욕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다(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
사람은 누구나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를 바란다. 그 노력이 실패로 귀결되면 좌절하고 성공으로 귀결되면 환호하게 된다. 여기서 노자는 우리에게 성공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주목하게 만든다. 사람이 하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면 힘들게 이끌어온 노력이 평소에도 발휘될 수 있는 실력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여기서 일의 속도를 높이고 포부를 더 크게 가지게 된다. 노력과 실력이 새로운 도전을 수용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나는 분명 이전과 다른 더 큰 나로 성장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아도취에 빠져 상황을 안이하게 인식한다면 지금 시도하려는 도전은 내가 가진 것이 보잘 것없으며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모는 것처럼 위험을 가져오게 될 뿐이다. 그래서 노자는 자신의 능력과 한계가 어디인지 선을 모르고 자꾸 그 선을 넘으려고 시도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노자는 선이 뒤죽박죽된 세상을 말에 비유해서 생생하게 설명을 시도한다. 세상에 상식과 원칙이 통용되고 있으면 전쟁을 대비해서 기르던 말이 더 이상 전쟁터를 달리지 않고 논밭에서 농사를 짓게 된다. 반면 세상에 상식과 원칙이 통용되지 않으면 논밭을 갈고 짐을 실어 나르던 말이 전부 전쟁터로 내몰리게 되고 전장에서 새끼를 낳게 된다. 상식과 원칙이 통용되느냐 되지 않느냐에 따라 말은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한다.
노자는 말만이 아니라 사람이 안전하고 평온한 삶을 살려면 만족과 멈춤의 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죄 중에 만족을 모르는 것보다 더 큰 죄가 없다”는 말을 통해 만족하는 삶의 가치를 되풀이해서 강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어지는 촛불집회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촛불집회는 분명 시민이 평소 하던 일상과 되풀이되던 생업의 활동을 접고 광장에 나왔으니 선을 넘어선 것이다. 일상과 생업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경계를 넘어서는 월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월경은 치욕과 위험을 가져오는 사건이 아니다.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소수의 사람들이 헌법에 보장된 공과 선을 마구잡이로 넘나들며 일으킨 치욕과 위험을 제대로 돌리게 하는 복원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선을 유쾌하고 발랄하게 넘나들면 만족하고 멈춰야 하는 선이 확장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은” 노자의 선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넘어야 하는 선의 의미를 창조적으로 이해한다면 민주주의가 더 공고하고 정의가 더 확실해지리라.
멈출 줄 알아야 행복하다
지족불욕(知足不辱)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아무리 큰 부자라 해도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많은 재물을 탐한다면 행복은커녕 욕을 듣거나 모욕을 당하게 된다.
비단 재물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권력을 바라고 무리한 행보를 하면 반드시 큰 불행에 빠지거나 욕됨을 자초한다. 명예 또한 마찬가지다. 더 큰 명예를 탐하여 끝 모르게 가게 되면 그 결과는 자명하다.
노자 제44장에 수록된 ‘지족불욕’은 어찌 보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나 중용(中庸)과도 그 맥을 같이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인간의 본능적인 측면에서 보면 맞지만 이성적으로는 받아들여서 안 되는 말이다.
아무리 고성능 자동차라 해도 브레이크가 없으면 달릴 수가 없듯 끝없는 욕심이나 욕망을 적당한 선에서 참고 제어할 수 있을 때 ‘지족불욕’은 찬란히 빛날 것이다. 스스로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아야 진정한 행복이 찾아온다는 의미다.
서양에도 ‘행복은 만족에 있다(Happiness is cotentment)’는 속담이 있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권력이 높아도, 아무리 명예로워도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그 것은 만족이나 행복하고는 거리가 먼 것이다. 부족감을 느낀 나머지 도를 넘치거나 지나친 목표 달성을 위해 자칫 무리수를 쓴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평범한 사람이 소박한 꿈을 위하여 또는 적당한 목표를 설정해 놓고 그 꿈이나 목표의 실현 또는 성취를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꿈과 희망이 있으며 그 꿈과 희망은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활력소가 되고 스스로 노력하고자 하는 모티브로 작동한다.
그런데 그 꿈과 희망을 실현하고도, 제 분수를 모르고 허황된 환상이나 무지개를 계속 좇아, 이성을 잃고 본능에 따라 브레이크 없는 탱크처럼 무리하게 앞만 보고 멈추지 못할 때 불행이나 욕됨의 싹이 움트는 것이다.
사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는 일반론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과거 대한민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에도 못 미치는 나라였다. 보릿고개에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하던 그 시절 우리 모두의 소원은 하루하루 그저 굶지 않고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넘는 세계 7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런데도 우리 국민의 행복지수를 조사해 보면 그렇게 높지 않다. 오히려 욕구불만이나 부족함 또는 허전함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다.
왜 그럴까. 인간의 속성은 배가 고플 때는 배불리 먹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그러다가 먹는 것이 풍족하게 해결되면 그 다음에는 입는 옷에 대한, 그것도 좋은 옷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아울러 생활하는 집의 수준에 대한 욕구가 팽배해진다. 그렇게 의식주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면 다음은 문화적 욕구가 강해진다.
부엌을 현대식으로 개량하고, 좋은 가구나 최신의 첨단 가전제품을 새로 들이고 싶고, 해외여행에 눈을 돌리게 되고, 그럴듯한 승용차를 타고 멋진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바라게 된다. 홈바를 만들고 홈시어터에 대중가요나 오케스트라를 원음으로 들을 수 있는 멋진 오디오 시스템을 가지고 싶다.
아파트의 평수가 올라가서 최고급 복층이 되고, 승용차는 최고급 외제차로, 여행은 이왕이면 호화 크루즈로 하고 싶고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이나 콘도나 펜션을 가지고 싶어 한다. 다이아몬드나 루비 같은 보석에다가 억대가 넘는 고급 시계를 차고 싶고, 최고의 골프장 회원권을 갖고 싶고, 호화 요트를 갖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욕망들을 채우기 위해서는 처음 수십억 원이 어느 새 부족하고 다음은 수백 억 원도 부족하고 그 다음은 수천 억 원도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이 끝도 한도 없는 욕망의 질주에 이성적인 브레이크가 필요하다. 욕망의 무한 질주를 적절히 제어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욕망은 끝이 없다는 일반론에 빠져 자기 합리화를 하려 들거나 세속적인 욕심에 그냥 함몰되지 말고 나 스스로를 위해 ‘지족불욕’의 교훈을 꼭 가슴에 새겨야 한다.
홍콩의 거부 리커싱은 자기의 사무실에 ‘지지(知止)’라는 글을 걸어놓고 항상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멈출 줄을 알아라’는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 더 풍요로운 부자이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이 더욱 지혜롭고 행복하다는 의미다. “복은 겸손과 검소함에서 나오고, 화는 교만함과 탐욕에서 나온다”는 진리를 늘 가슴에 새기자.
▶️ 知(알 지)는 ❶회의문자로 口(구; 말)와 矢(시; 화살)의 합자(合字)이다.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말한다. 많이 알고 있으면 화살(矢)처럼 말(口)이 빨리 나간다는 뜻을 합(合)하여 알다를 뜻한다. 또 화살이 꿰뚫듯이 마음속에 확실히 결정한 일이나, 말은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알다, 알리다, 지식 등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知자는 '알다'나 '나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知자는 矢(화살 시)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知자는 소전에서야 등장한 글자로 금문에서는 智(지혜 지)자가 '알다'나 '지혜'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슬기로운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智자는 '지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知자는 '알다'라는 뜻으로 분리되었다. 智자는 아는 것이 많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말을 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知자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知(지)는 (1)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정신의 작용하는 힘. 깨닫는 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알다 ②알리다, 알게 하다 ③나타내다, 드러내다 ④맡다, 주재하다 ⑤주관하다 ⑥대접하다 ⑦사귀다 ⑧병이 낫다 ⑨사귐 ⑩친한 친구 ⑪나를 알아주는 사람 ⑫짝, 배우자(配偶者) ⑬대접(待接), 대우(待遇) ⑭슬기, 지혜(智慧) ⑮지식(知識), 앎 ⑯지사(知事) ⑰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인(認), 살펴 알 량/양(諒), 알 식(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나 사물을 지식(知識),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知慧), 지적 활동의 능력을 지능(知能),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지식이 있는 것 또는 지식에 관한 것을 지적(知的),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 능력을 지각(知覺), 지식과 도덕을 지덕(知德), 아는 사람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봄을 지인(知人),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은혜를 앎을 지은(知恩), 지식이 많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사람을 지자(知者),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한 줄을 앎을 지족(知足), 자기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앎을 지지(知止),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어떤 일을 느끼어 아는 것을 감지(感知),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지(朋知), 기별하여 알림을 통지(通知), 인정하여 앎을 인지(認知), 아는 것이 없음을 무지(無知), 고하여 알림을 고지(告知), 더듬어 살펴 알아냄을 탐지(探知),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거나 알게 함을 공지(公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지(親知),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를 일컫는 말을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말을 지피지기(知彼知己), 참 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행합일(知行合一),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한다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등에 쓰인다.
▶️ 足(발 족, 지나칠 주)은 ❶상형문자로 무릎에서 발끝까지의 모양을 본뜬 글자로 발을 뜻한다. 한자(漢字)의 부수(部首)로 되어 그 글자가 발에 관한 것임을 나타낸다. ❷상형문자로 足자는 ‘발’이나 ‘뿌리’, ‘만족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足자는 止(발 지)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것이다. 그러나 足자에 쓰인 口자는 성(城)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止자가 더해진 足자는 성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사실 足자는 正(바를 정)자와 같은 글자였다. 그러나 금문에서부터는 글자가 분리되면서 正자는 ‘바르다’나 ‘정복하다’를 뜻하게 되었고 足자는 단순히 ‘발’과 관련된 뜻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래서 足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발의 동작’이나 ‘가다’라는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래서 足(족, 주)은 소, 돼지, 양, 개 따위 짐승의 무릎 아랫 부분이, 식용(食用)으로 될 때의 일컬음으로 ①발 ②뿌리, 근본(根本) ③산기슭 ④그치다, 머무르다 ⑤가다, 달리다 ⑥넉넉하다, 충족(充足)하다 ⑦족하다, 분수를 지키다 ⑧물리다, 싫증나다 ⑨채우다, 충분(充分)하게 하다 ⑩만족(滿足)하게 여기다 ⑪이루다, 되게 하다 ⑫밟다, 디디다 그리고 ⓐ지나치다(주) ⓑ과도(過度)하다(주) ⓒ더하다, 보태다(주) ⓓ북(식물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을 돋우다(도드라지거나 높아지게 하다)(주) ⓔ배양(培養)하다(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두터울 후(厚), 짙을 농(濃), 도타울 돈(敦), 넉넉할 유(裕), 풍년 풍(豊), 발 지(趾), 남을 여(餘), 넉넉할 요(饒),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손 수(手)이다. 용례로는 죄인의 발에 채우는 쇠사슬을 족쇄(足鎖), 발자국으로 걸어오거나 지내 온 자취를 족적(足跡), 발바닥이 부르틈을 족견(足繭), 바쳐야 할 것을 죄다 바침을 족납(足納), 무덤 앞의 상석 밑에 받쳐 놓는 돌을 족석(足石), 발바닥을 때림 또는 그런 형벌을 족장(足杖), 발뒤꿈치로 땅을 눌러 구덩이를 만들고 씨를 심음을 족종(足種), 발을 이루고 있는 뼈를 족골(足骨), 발자국 소리를 족음(足音), 발가락으로 발 앞쪽의 갈라진 부분을 족지(足指), 발의 모양 발의 생김새를 족형(足形), 발로 밟아서 디딤 또는 걸어서 두루 다님을 족답(足踏),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마음에 모자람이 없어 흐뭇함을 만족(滿足), 일정한 분량에 차거나 채움을 충족(充足), 손과 발로 손발과 같이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을 수족(手足), 기관이나 단체 따위가 첫 일을 시작함을 발족(發足), 아주 넉넉함으로 두루 퍼져서 조금도 모자람이 없음을 흡족(洽足), 매우 넉넉하여서 모자람이 없음을 풍족(豐足),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을 자족(自足),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한 줄을 앎을 지족(知足), 충분히 갖추어 있음을 구족(具足), 보태서 넉넉하게 함을 보족(補足), 어떤 장소나 자리에 발을 들여 놓음을 측족(廁足),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공경하는 일을 예족(禮足), 머리와 발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수족(首足), 발 가는 대로 걸음을 맡김을 신족(信足), 발을 잘못 디딤을 실족(失足), 발 벗고 뛰어도 따라 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능력이나 재질 등의 차이가 두드러짐을 이르는 말을 족탈불급(足脫不及), 흡족하게 아주 넉넉함을 족차족의(足且足矣), 넉넉하여 모자람이 없든지 모자라든지 간에를 족부족간(足不足間), 발이 위에 있다는 뜻으로 사물이 거꾸로 된 것을 이르는 말을 족반거상(足反居上), 발이 땅을 밟지 않는다는 뜻으로 매우 급히 달아남을 이르는 말을 족불리지(足不履地), 자기 자신이나 또는 자기의 행위에 스스로 만족하는 일을 자기만족(自己滿足), 발과 같고 손과 같다는 뜻으로 형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사이임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여족여수(如足如手)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辱(욕될 욕)은 ❶회의문자로 辰(진; 농경에 좋은 시절)과 寸(촌; 법도)의 합자(合字)이다. 옛날 농사의 때를 어긴 자를 죽이고 욕보인 일로부터 욕보이다, 부끄럼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辱자는 '욕되다'나 '더럽히다', '모욕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辱자는 辰(별 진)자와 寸(마디 촌)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辰자는 농기구의 일종을 그린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손을 그린 寸자가 결합해 있으니 辱자는 밭일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 할 수 있다. 辱자의 갑골문을 보면 농기구를 손에 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농기구 주위로 점이 찍혀있다. 이것은 농기구로 풀을 베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辱자의 본래 의미는 '풀을 베다'나 '일을 한다'였다. 그러나 일이 고되다는 뜻이 확대되면서 후에 '욕되다'나 '더럽히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辱(욕)은 (1)욕설(辱說) (2)꾸지람 (3)인격(人格) 상(上)으로 받는 몹시 부끄러운 일. 치욕적인 일 (4)몹시 수고롭거나 고생스러운 일 등의 뜻으로 ①욕(辱)되다, 수치(羞恥)스럽다 ②더럽히다, 욕(辱)되게 하다 ③모욕(侮辱)을 당하다 ④욕(辱)보이다 ⑤무덥다 ⑥황공(惶恐)하다 ⑦거스르다 ⑧치욕(恥辱), 수치(羞恥)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영화 영(榮)이다. 용례로는 남을 저주하거나 미워하는 말을 욕설(辱說), 장사지낼 때 무덤 속에 시체와 함께 묻은 금은 패물 따위의 부장품을 욕금(辱金), 상대편을 높이어 그가 자기에게 쓴 답장을 욕답(辱答), 대관을 욕되게 함을 욕대(辱臺), 욕되게 하여 배척함을 욕척(辱斥), 남을 높이어 그가 자기에게 찾아 옴을 욕황(辱況), 자기를 알게 된 것이 그 사람에게 욕이 된다는 욕교(辱交), 자기와 교제하게 된 것이 그 사람에게는 욕이 된다는 욕지(辱知), 자기를 알게 된 것이 그 사람에게 욕이 된다는 욕우(辱友), 깔보고 욕보임을 모욕(侮辱), 남의 이름을 더럽히고 욕되게 함을 오욕(汚辱), 부끄럽고 욕됨을 치욕(恥辱), 남에게 눌리어 업신여김을 받음을 굴욕(屈辱), 괴로움과 모욕을 당함을 곤욕(困辱), 상대를 이김으로써 지난번 패배의 부끄러움을 씻고 명예를 되찾는 것을 설욕(雪辱), 남을 업신여기어 욕보임 또는 여자를 강간하여 욕보임을 능욕(凌辱), 꾸짖고 욕함을 후욕(詬辱), 견디기 어려운 불명예스러운 일을 고욕(苦辱), 사람을 앞에 두고 욕설을 하거나 또는 치욕을 당하게 함을 면욕(面辱), 무고한 사람을 붙잡아서 욕을 보임을 집욕(執辱), 욕설과 악담을 욕악담(辱惡談), 한 번에 많이 하는 욕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욕사발(辱沙鉢), 욕이 조상에게까지 미침을 일컫는 말을 욕급선조(辱及先祖), 자제의 잘못이 부형에게까지 욕되게 함을 이르는 말을 욕급부형(辱及父兄), 오래 살면 욕됨이 많다는 뜻으로 오래 살수록 고생이나 망신이 많음을 이르는 말을 수즉다욕(壽則多辱), 모든 일에 분수를 알고 만족하게 생각하면 모욕을 받지 않음을 일컫는 말을 지족불욕(知足不辱), 나라의 수치와 국민의 욕됨을 이르는 말을 국치민욕(國恥民辱), 중생에게 자비하고 온갖 욕됨을 스스로 굳게 참음을 이르는 말을 자비인욕(慈悲忍辱), 총애를 받는다고 욕된 일을 하면 머지 않아 위태함과 치욕이 옴을 일컫는 말을 태욕근치(殆辱近恥),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는다는 뜻으로 임금과 신하는 생사고락을 함께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군욕신사(君辱臣死)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