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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넘어 실상으로
히브리서 3:1~6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그림자(Shadow)는 물체나 사람이 빚을 가릴 때 사람이나 물체 뒤의 어두운 형체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림자가 있다는 말은 빚이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실상을 보이기에 앞서 그림자를 드리우므로 빛의 존재를 밝히 드러내려는 의도를 지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오늘 본문에서는 모세라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실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직접 자신을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간접적으로 드러내실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 사람은 창조주와 피조물로 차원이 전혀 다르므로 하나님을 직접 드러내어 알리시면 사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람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완벽한 거룩함을 지닌 하나님을 만나면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 자신을 알리셨습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살 수 없습니다. 햇볕과 공기와 물 그리고 딛고 있는 땅 어는 하나 떠나서 살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하고 있다면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빛이 없으면 그림자도 없는 이유와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나는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려 주셨습니다.
지난 시간에 히 1:1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계시(啓示)는 영어로 ‘revelation’이라는 말은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는데 ‘드러나다, 나타나다’의 의미이며,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로는 ‘덮개를 벗어 버리는 것’ 신약의 헬라어로는 ‘감추인 것이 보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계시는 사람이 스스로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감춰진 것을 드러내므로 알리시는 것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 뜻을 사람에게 여러 모양과 부분으로 알리셨습니다.
이 계시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뤄집니다.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잠시도 쉬지 않고 흘러갑니다. 그 종착 지점에 이르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을 통하여 이뤄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는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 즉 구원받은 사람에 대한 표현에 대하여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이는 것처럼 땅에 속한 사람 중에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은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뤄지는 것이요 이 뜻이 온전하게 성취하는 것이 ‘모든 날 마지막’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는 시간대에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는 예수님에 대하여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은 ‘깊이 생각하다’는 헬라어 단어는 ‘카타노에오’입니다. 이것은 ‘지나가면서 슬쩍 보는 것’(casual glance)이 아니라 집중하여 응시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하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의 틀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채우고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행동과 습관과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사람이지만, 완벽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우리가 '작은 예수'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인 모세를 통하여 이 땅에 완전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분명하게 보이시려고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제사장이란 그림자를 언급하므로 우리의 영원한 대제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들어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계명과 제사법을 따라 아론을 첫 번째 대제사장으로 세운 이후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 가운데서 제사장을 세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매년 한 번씩 대속죄일에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희생 제물을 드림으로 모든 백성의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일을 맡은 대제사장은 그만큼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히브리서를 쓴 사람이 강조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되심과 그분이 드린 새 언약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은 레위 지파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은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 독특한 제사장 직분입니다. 사람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유다 지파에 속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으니 근본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 없는 혈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대제사장, 그것도 큰 대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히4:14).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단 번에 희생제물로 드림으로 피 흘리는 제사를 완성하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신실성을 돋보이려고 모세를 그림자로 이용하였습니다.
히 3:2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특징에 대하여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원문상 ‘온유’란 ‘자기를 낮춤’, ‘괴롭힘을 당함’, ‘겸손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온유했다는 말은 자신을 비방하는 소리에 대항치 않고 감정을 억제하며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고 묵묵히 참아 하나님의 뜻을 기다렸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는 지도자로서 온유함을 잃지 않았던 중요한 동기는 그들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모세를 향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돌멩이를 들어 치려 하였고, 지도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려고도 하였습니다.
이런 혹독한 시련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당하면서 모세는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민 11: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라고 말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품는 데 사람의 한계를 뛰어넘는 인내를 가지고 품었습니다.
이런 모세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히 3:3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집’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는 ‘가족’, ‘가문’ 혹은 ‘재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한 가족으로 생각하여 그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충성하였습니다. 모세가 섬긴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이며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이 있는 동안 한시적으로 충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을 위하여 자신을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뿐 아니라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서도 변함없이 택하신 자녀를 위하여 보살피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 더 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고 갖은 모욕과 아픔을 가져다주었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께 나오면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요 19:37“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지난 세대나 현세대와 오는 세대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주님이라 고백하면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마 11:28~29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품은 우주보다 넓고 그의 보혈의 능력은 무엇으로도 감소할 수 없는 신기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온유는 모세를 능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나타내기 위하여 충성하였다면 예수님의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을 드렸습니다.
히 3: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역할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될 복음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는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전하는 소개자였다는 말입니다. 이 모세를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종이란 자기의 결정권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종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라는 말씀에는 모세가 철저하게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였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신실함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인생을 돌아보면 자기를 위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전혀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생을 드렸습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이 담긴 율법을 베풀어 주셨고, 모세는 그 말씀을 자신의 생명과 같이 지켰습니다. 스스로 지키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이 율법을 온 이스라엘 백성이 철저하게 따르도록 독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성령으로 잉태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모세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돌비에 새겨서 주셨다면 예수님은 그의 온 영혼육에 말씀을 담아 이 땅에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히 3:6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했지만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하였습니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자는 모세에게는 전치사 ‘엔’(’ … 안에서’)을 사용하여 ‘집에서’ 충성하였다고 묘사한 반면에 그리스도에게는 ‘에피’(’위에’)를 사용하여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음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모세보다 그리스도께서 질적으로 우월하심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 탁월한 존재이긴 하였으나 본질에서는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자이며 아들로서 질적인 우월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으로 확연하게 드러나기 위하여 그림자 역할로 모세를 내세웠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림자에 매이는 것이 아닌 실상인 예수님에게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그림자를 넘어 실상으로 오려면 더는 우리에게 죄를 사함받는 육신의 대제사장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하신 속죄의 제사를 지낸 분으로 그분의 살과 피를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을 때 내 안에 오신 성령을 날마다 수시로 인정할 때 우리는 죄의 영향력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이 중요한 것이 아닌 믿음이 절대적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하더라도 그리스도의 품성이 내 안에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품성인 온유를 내 안에 맺을 수 있을까요?
저에게는 고약한 성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내에게 벌컥 화내고 짜증 내는 저의 모습입니다. 안에 담겨 있는 화를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 것이 상대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그렇게 해 왔습니다. 돌아서면 후회하며 금세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다 되는 줄 알았던 철이 없는 모습들, 그리고 스스로 뒤끝이 없는 자신을 남자답다고 여긴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후회막급(後悔莫及)입니다.
그런 제가 부끄러워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나의 힘으로 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 죄를 하나님께 내놓고 회개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죄라는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님을 내 안에 모셔 들이고 그분의 도움으로 온유해지기 원했습니다.
그러때 점차 내 안에서 조급함이 사라지고 짜증 내고 화를 내는 것이 걷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런 부분들이 하나씩 내 안에서 이뤄지면서 흔들림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정치 경제 문화와 모든 영역에서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는 것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 60:1~2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어둠과 캄캄함이 땅을 덮고 사람의 마음에 혼돈을 가져올 때 인류역사의 시계는 멈추고 만왕의 왕 예수님이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깃들어 있은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근심과 염려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회개하여 주께로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끌어 가는데 수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양식이 없으면 하늘에서 만나를 내렸고, 물이 떨어지면 반석에서 샘이 솟게 하였습니다. 대적과 싸움에서는 해와 달을 멈추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모든 기적과 이사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어떤 것이라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이를 이루시기 위하여 그림자가 아닌 실체이신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그 성령 안에서 실상의 천국을 맛 보고 그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고 전진하도록 우리를 초정하여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