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55/191226]“우린 너무 몰랐다”라는 책
『우린 너무 몰랐다-해방, 제주 4·3과 여순민중항쟁』(도올 김용옥 지음, 399쪽, 1만8000원, 통나무 2019년 1월 펴냄)을 사흘에 걸쳐, 즐겁게, 아니 고통스럽게 통독했다. 지은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어렵고 심오한 동양고전, 특히『논어』『맹자』『중용』『노자』『장자』등의 세계를 특유의 쇳소리와 듣기 싫을 정도의 강조어법으로, 자유자재自由自在, 천의무봉天衣無縫, 마치 ‘닥치고 강의’식으로 우리의 귀와 머리 속에 들이붓는, 이 시대 최고의 인문 대중철학자. 검정·하얀 두루마기 차림에 한복을 입은 폼새부터 예사롭지 않은 대한민국 석학 중의 석학. 애증愛憎이 엇갈린 사람들이 많으리라. 아니, 어쩌면 거북해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혁혁한 업적은 동양철학을 민중 속으로 파고들게 한 고전의 대중화가 아닐까. 나는 누가 뭐래도 그의 팬이라 할 수 있다. 나라고 ‘지겹고 짜증난’ 부분이 왜 없으랴. 허나, 그분이 논어의 결론이자 공자의 장점이 무조건 ‘호학好學’이라고 결론짓듯이, 나도 순전히 그분의 호학정신이 좋아 그분의 저작을 자주 씹어 읽는 편이다. 올해초 출간된 책을 이제야 본 것은 순전히 나의 게으름 때문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엔 꼭 읽으려 작정하고, 통톡을 한 게 그나마 다행 중의 다행.
어떤 책인데, 이렇게 너스레를 떠는가? 그는 책 중간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책을 보는 제현들은,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지사라고 한다면, 단 10권이라도 사서 주변 사람들에게 선물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책은 역사서술이 아니라 우리 의식에 던져지는 방할棒喝이다.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얻은 깨달음을 만세 만민에게 전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런 글을 책 중간에 쓴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다. 아마도 전무후무前無後無하지 않을까 싶다. 오바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되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이미 이 책을 읽으면서, 솔직히 저자가 쓴 그대로 그 느낌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단 10권이라도 사서 주변 사람에게 선물을 하라’고까지 했을까? 이 부분은 차라리 쓰지 않았다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기가 쓰면서도 흥분되는 것을 누가 말리랴. 책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의도로 쓰지 않았음을 확신한다. 이렇게 자신만만, 드러내놓고 자기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200자 원고지에 위에 만년필로 일일이 쓴 저자의 수고로움(수십 권 아닌 수백 권의 관련도서를 독파한 다음)을 헤아려 보시라. 그 누가 ‘돌대가리(도올) 철학박사’를 비난할 수 있으랴. 단연코 없다. 그래도 욕을 한다면, 그는 분명 호학은커녕 금수禽獸라 할 수 있을 터.
우리는 왜 이 책을 정독해야 하는가? 정답은 우리가 겪지는 않았을망정 우리의 현대사現代史에 대해 아예 ‘전혀’ ‘깡그리’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을 터. 그러나, 그래도 되는 것일까? 우리가 겪었던 광주민주화항쟁, 6월항쟁, 천안함과 세월호의 진실, 그리고 가까이는 촛불항쟁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거대 언론들의 ‘언론범죄’로 인하여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코는 혹시 마비되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자. 불과 1세기 전도 아닌, 70년 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겪었던 현대사적 사건들에 대해 우리는 몰라도 되는 것일까? 또한 우리의 자식과 손자들도 아무것도 모른 채, 허장성세虛張聲勢 속에서 풍요豐饒만을 누리면서, 언제까지 모르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대저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그 역사 속에서 아무런 교훈敎訓을 얻지 못한다면 기록記錄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고전학자古典學者인 저자가 언제부터 현대사 전공학자가 되었을까? 제주 4·3사건으로 통칭되던 게, 어느날 특별법이 제정되고 진상규명위원회가 생기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침통하게 공식사과를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제주는 항쟁으로 승화되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여전히 반란으로 규정되는 여순반란사건은 어느 때에나 저자가 ‘정답용어’라고 주장하는 ‘여순민중항쟁’으로 기록될 것인가? 그것이야말로 최우선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이 시대 당면과제라는데 쌍수를 들어 반긴다. 우리는 왜 베트남 박항서 감독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는가? 국민(민중)들은 이미 우리 군인들이 베트남 전쟁에서 저지른 범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우리 축구감독으로 인하여 연전연승하는 베트남 축구를 빌미로 속죄하고 싶은 마음이 충만해서가 아닐까? 그럴 것이다. 우리는 왜 아베 일본총리를 미워하는가? 태평양전쟁에서 우리 부녀자들을 상대로 천인공노할 범죄를 버젓이 저질러놓고도, 시대착오적인 제국주의자인 그가 “그런 사실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있을 수 없는 일은, 있으면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에 그렇게 아픈 역사적인 사건과 사실이 비일비재했던 게 비극 중의 비극이다. 제주 인구의 3분의 1 가까이를 무차별 학살한 우리의 국군과 미군들의 만행, 여주·순천의 민중을 빨갱이로 몰아대며 도대체 몇 천명, 아니 몇 만명을 희생양으로 삼았던가. 오직 한 사람의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을, 그것도 국가를 위해서라는 미명하여 미쳐 날뛰던 충견忠犬들은 과연 누구누구였던가? 응답하라!
어떠한 사건이든 그 사건에는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이 있게 마련. 그것을 알지 못하고, 혹은 못본 체 하며, 근시안적으로 그 현상과 사건만을 기술하는 ‘기술자 사가史家’들의 죄는 어찌할 것인가? 문호 조정래의『태백산맥』을 읽으셨으리라. 순박한 민중들이 왜 산속으로 들어갔던가? 한국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일. 구빨치산, 신빨치산, 모두 7만명이 넘었다던가? 이념理念 때문이라고? 그것은 단견短見 중의 단견. ‘먹고 사는 문제’만큼 엄연한 게 어디 있을까? ‘목구멍이 포도청’은 고래적부터 진리이다. 그 진리를 애써 무시한 위정자와 정부(왕조)의 범죄는 민중들의 분노한 봉기로부터 불거진다. 그런데도 ‘권력이 총구’이므로, 죄없는, 애꿎는 민중만 한을 품은 채 죽어간다. 대체 언제까지 이런 ‘악순환’은 계속될 것인가?
첨단 과학문명을 자랑하는 21세기이다. 이 책을 보시라. 왜 박진경이라는 경찰의 충혼비와 동상이 철거되어야 하고, 왜 그를 죽이고 20대초에 의연히 죽어간 문상길 중위를 추모해야 하는지가 다 나와 있다. 아니, 그보다, 여운형과 김구를 누가 왜 죽였는지, 그리고 죽어간 그분들의 한계는 무엇이었는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우리가 젊은 시절『해방전후사의 인식(약칭 해전사)』이나 수정주의 입장에서 쓴 브루스 커밍스의『한국전쟁의 기원』등을 읽어, 대충은 짐작하거나 인정하는 부분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확인사살’을 할 필요가 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다. 제주사건이 항쟁이듯이, 여순사건도 너무나 당연히 항쟁이어야 한다. 그것도 민중항쟁 말이다. 아픈 상처라고 들쑤지지 않아야 할까? 그럼 고름이 살이 될까? 외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 조정래의『천년의 질문』은 어쨌든 소설이다. 그것은 팩션을 가장한 픽션이지만, 도올이 열변을 토하는, 거침없이 써내려간 이것은 사실事實의 역사歷史, 그 자체인 것을. 우리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으므로. 활발하게, 거리낌없이 말하자. 토론도 마다하지 말자. 죄없이 죽어간 우리의 할아버지뻘 선배님들의 영혼을 위하여. 도올의 책을 들자.
첫댓글 재주가 덕을 앞선다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의 덕을 반면교사로 삼으며 그의 재주를 취하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