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이민 2기 419. 탈출하듯 (2)
공항 내에서도 티케팅을 하기 전에 너무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므로 크리스티나가 싸 준 샌드위치라도 좀 먹어 볼 생각으로 어깨에 멨던 가방을 열었다. 물이라도 한 병 샀으면 좋겠는데 어느 한 곳, 문을 연 곳도 없고, 겨우 얻은 자리나마 고마워서 그냥 먹어야겠다.
그런데 막상 샌드위치가 없다. 치즈 두 개랑 삶은 계란 두 개, 샌드위치를 몽땅 테이블에 놓고 그만 깜박 잊고 그냥 왔나보다.
허탈해서 앉아 있는데 여기저기 줄을 선다.
제주항공, 아시아나 항공, 대한한공만 비행기가 있다고 전광판에 떠 있고 나머지 모든 비행기는 다 캔슬이란다.
얼른 일어나 대한항공을 찾아서 짧은 줄을 서는데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내게 묻는다. "Are you morning calm?"
'......? morning? 아침에 가느냐는 뜻인가?' 나는 대답했다. " 노우, 일레븐 퉨티 에어플레인"
"모닝 캄?" 그가 또 묻는다. "일레븐 퉨티" 나는 똑 같은 대답을 반복한다.
"Economic?" 그가 다시 묻는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까 "Over there" 긴 줄을 가리킨다.
그제야 알아듣고 나는 웃으며 "Long line?" 하고 물어본다. 그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morning calm은 비지니스나 특별좌석인가 보다. 내 영어가 짧으니 참!
그로부터 그 긴 줄은 내 뒤로도 그만큼 늘어났고 좀체로 줄어들지 않았다. 창구도 여러 개 있지만 어떤 창구는 손님 한 팀이 줄곧 물고 늘어지고 나머지도 너무너무 일처리가 늦다.
세 시간을 그러고 서 있다가 겨우 좀 앞쪽으로 나갔다 싶은데 갑자기 내 머릿속에 불이 켜진다. "여보, 내 크로스백 어디 있어요?"
그러고 보니 여권과 휴대폰만 넣은 작은 주머니 가방은 목에 걸려 있는데, 그리고 부쳐야 하는 큰 가방과 기내 가방은 잘 있는데 내 보라섹 크로스백이 내 어깨에 없다. 샌드위치 먹으려고 내려서 열었었는데.
"나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내 가방은 어떻게 된 거야?" 죠셉도 당황한 표정이다.
"거기 뭐가 들었어?" 뭐가 들었는지 머릿속이 하얗다. "거기,...뻥튀기 과자랑.....," "빨리 찾아봐. 아까 앉았던 자리에 가 봐."
벌써 세 시간째 불평을 하며 이러고 서 있었는데 그게 과연 잘 있을까? 우리가 앉았던 자리로 걸어가는데 이미 나는 절망감에 캄캄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앉아 있는 사이에 보라색 내 가방이 의자를 지키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그걸 들고 돌아서는데 안도감으로 마구마구 행복해진다. "뭐가 들었어? 그 속에."
그제야 다 생각이 난다. 미처 못 낸 골프장 연회비, 몇 달치 생활비, 그 전 같으면 집에 깊이 두고 왔을 현금. 페소며 달러를 모두 그 속에 넣었다. 아마 우리 돈으로 치자면 4백만원쯤은 될 듯하다. 그리고 신용카드며, 보안카드, 귀중품들... 나는 왜 그 와중에 뻥튀기 과자만 생각이 났을까? 흐흐흐.
티케팅이 늦어지자 거듭 사과 방송이 나오고 비행기는 한 시간 이상 딜레이된다.
배는 고프고 지쳐가는데 나는 그래도 큰일 날 뻔 했다는 안도감에 오히려 모든 게 감사하고 밝은 얼굴로 기다린다.
첫댓글 정말 운이 좋으셨네요.
횡재 하신 기분 이었겠네요
나이 때문인지 수시로 깜빡깜빡 합니다.
세상은
항상 울퉁 불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