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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9일(추수감사주일)
누가복음 17:11~19
오늘도 우리는 “할렐루야”입니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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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은 성경 본문에는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셨을 때,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절).”
구약성경에 의하면,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 취급되었습니다. 때문에 나병환자는 사회와 철저히 격리되어, 진영 밖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민 5:2-3). 나병 환자 열 명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지 못하고, 그저 멀리 서서 소리 높여 외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처사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질병을 치유받기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제사장에게 보낸 것은 이미 치유를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구약 율법에 따르면, 나병 환자의 치유를 진찰하고, 선포하는 일은 오직 제사장에게 맡겨진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은 나병 환자의 몸을 진찰한 후, 회복의 기미가 보이면 여드레 동안 경과를 살펴보아야 했습니다.
여드레 후에 상처 부위가 완전히 나았다고 판단되면,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 나병이 완전히 치유되었음을 공동체에 선포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치유를 섣불리 판단하지 못하게 함으로, 공동체 전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병 환자가 제사장에 의해 완전한 치유를 선포 받은 후에는 공동체로 복귀해서 일상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사장들에게 가던 중에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은 치유가 즉시로 일어났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질병이 치유 받은 것으로 인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17~18절).”
자,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그중 한 명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물론 나머지 아홉 명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자신의 몸을 제사장에게 보여주기 위해 길을 걷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왜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왔던 한 사람은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마리아 사람을 가리켜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고 회의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서두(序頭)에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사마리아와 갈길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아마 열 명의 나병 환자들 중에는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을 이방인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아마도 누가복음의 관심사가 이방인 선교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머지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질문하셨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나머지 아홉 명에게 감사 인사를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 서운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님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의도를 가지고 그런 질문을 던지셨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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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는 주로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중에 예수님을 신실하게 잘 믿는 한 마부(馬夫)가 자신이 모시고 있던 왕손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그 마부가 왕손을 모시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된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부가 왕손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리, 예수님을 믿으시지요.” 그랬더니 왕손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마부를 바라보며 이렇게 비아냥거렸습니다.
“야, 이놈아, 네까짓 상놈이 예수 잘 믿으면 누가 양반이라도 시켜 준다 더냐?” -출처: 이찬수, 「보호하심」(규장, 2011); 「생명의 삶」(두란노, 2012년 8월호), p 101에서 재인용.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마부를 보고 비아냥거렸던 왕손 이야기는 우리가 듣기에 거북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닙니다. 상놈이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서 누가 양반이라도 시켜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극심한 가난을 겪고 있던 성도가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서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공부를 못하던 학생이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서 학교에서 우등생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 앞에 나아왔던 열 명의 나병 환자들은 정말 운이 좋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차피 치유의 가능성이 희박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축복 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셨을 때, 그들에게는 믿음이 요구되었습니다. 어차피 다른 방법으로는 그들이 치유될 가능성이 없었기에,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한 번 시도해 볼 만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은 “가다가” 깨끗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잘 믿던 상놈이 양반이 되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처했던 성도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공부 못하던 학생이 우등생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측면에서는 모두 일맥상통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태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물론 병을 고침 받은 것이 귀한 일이고, 빈곤이 퇴치되고, 신분 상승을 경험하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이유는 그들에게 아직 감사 인사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의 상태가 아직 불안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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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에 한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고 감사했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길거리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발로 차이고, 먹지 못해 굶주리고, 몸 구석구석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이 가엾은 고양이는 그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무실 뒤편에서 울고 있던 이 고양이를 한 친절한 남자가 발견했습니다. 그는 고양이에게 따뜻한 우유를 먹이고, 아이들이 예뻐하는 것을 알고는 자기 집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는 동물병원에서 진료도 받게 해 주었고, 고양이에게 예쁜 이름도 지어 주었습니다.
그전까지 사람들을 경계하며 날카로운 발톱을 세우던 고양이는 자신을 받아주고, 돌봐주는 주인을 만나 점차 안정을 찾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는, 고양이가 주인의 가랑이 사이에 안겨 있었습니다. 고양이는 주인에게 감사라도 표현하듯이 얼굴을 비비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 고양이가 예수님 앞에 돌아왔던 한 사마리아인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물론 이 사람도 다른 아홉 사람처럼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아홉 사람과 다르게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며 감사했습니다. 마치 자기 주인에게 얼굴을 비비며 애정을 표현하는 고양이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병이 고침을 받는 것도 귀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상놈이 양반 되는 것도 귀하고,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것도 귀하며, 지혜를 받아 우등생이 되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여전히 조건적이고, 불안합니다.
더 항구적이고, 더 안전한 일은 주인의 품에 안긴 고양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아래에 엎드려 감사하는 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 동일합니다. 다른 아홉 명의 나병 환자들은 자신들의 병이 치유 받은 것을 보고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치유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치유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 앞에 엎드려 감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사의 반대말은 불평이 아닙니다. 감사의 반대말은 '예수 없음'입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마부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마부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왕손에게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왕손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마부를 바라보았습니다. “네까짓 상놈이 예수를 잘 믿으면 누가 양반이라도 시켜 주더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마부의 대답이 평생 잊을 수 없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마부는 겸손하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리, 예수님을 믿는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을 더 잘 믿으면 마부 노릇을 더 잘해야 합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께 투정하듯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제가 이렇게 예수님을 잘 믿는데 언제 왕손 시켜 줄 것입니까?”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믿음의 도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마부 노릇을 더 잘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부 노릇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의 깊은 위로가 우리에게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마부 노릇을 잘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왕손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과 아내가, 여러분의 이웃이 왕손 대접을 받게 될 것입니다(위의 책, p. 101).
과연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아래에 엎드려 감사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어떤 복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는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19절).”
다른 아홉 명은 예수님으로부터 육신의 치유를 경험하였지만, 예수님께 돌아왔던 한 사마리아 사람은 육신의 치유와 함께 영혼의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항구적이고, 안전한 은혜입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 여러분이 치유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 앞에 나아와, 그분의 발아래에 엎드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리는 전인적인 치유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께 더욱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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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저는 여러분에게 한 분의 묵상 나눔 글을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매일 밤 8시부터 다니엘기도회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느 성도님이 나와서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동안 다른 강사들도 좋았지만, 오늘은 특히 저에게 공감이 되고, 마음이 아프며, 같이 기도하는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환경이 낯설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증하신 성도와 그의 딸 이야기는 바로 저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저희는 아들에게 투여할 수 있는 약 가운데 가장 센 약을 투여하고, 중환자실에서 죽을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눈물로, 눈물로, 호소하던 저희의 기도가 응답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기적이 일어나 일반병실로, 그리고 퇴원을 강행해, 산소 호흡기를 달고 집으로 돌아 온 그날부터, 기도로, 눈물로, 지새운 지 16년째입니다.
진짜 기적은 우리 아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비록 90%의 뇌세포가 죽어 앞을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며, 누워서 지내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이 “오늘 우리가 주님 안에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위로하시는 주님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습니다. 어제도 아들의 상태가 안 좋았던지, 아들이 새벽에 피를 토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아멘”합니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였기에, 우린 오늘도 이 아이를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 아들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낮에 큰아들 면접 보는 대학에 다녀왔습니다. 딴에는 우리 가족의 경제 상황이 그리 좋지 않기에, 장학금 받을 수 있는 대학으로 하향지원을 한 눈치입니다. 이번 대학은 너무 하향지원을 했나 봅니다. 자기 생각에는 4년 장학금을 노렸었나 봅니다. 대학 근처를 가면서, “휴” 합니다. 면접을 보고 나온 이후, 여기는 아닌 것 같다고 다른 대학을 가야겠다고 말합니다.
동생 문제로, 네 살 때부터 응급실을 다니는 부모 때문에 많은 것을 포기하였던 큰애가, 대학도 부모의 가정형편을 먼저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왜!”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복음을 통해 여러분을 부르셨으니…” 하나님의 부르심은 다양합니다. 우리 가족은 고통으로 본다면, 매우 강한 강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너무나 동일합니다.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제가 성경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습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위로는 나의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때는 아무리 좋은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지시고, 또 만지시고, 벗기고, 또 벗긴 영혼은 하나님의 신음에도 바로 반응이 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의 은혜 안에 거합니다. 주님만이 소망 되십니다. 주님만이 위로자 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할렐루야!” 합니다. 오늘도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비롯한 많은 분이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만납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의 끝자락에서,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오늘도 “할렐루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감사 생활은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에게 감사할 수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입니까? 환경입니까, 문제입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마부가 왕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이고, 불안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처해 진 상황과는 무관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치유의 근원 되시는 예수님께 돌아와, 그분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이것만이 항구적이고, 안전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육신을 치료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을 선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구원자요, 위로자가 되십니다. 우리 모두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께 근원적 감사를 드립시다. 오늘도 우리는 “할렐루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