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과거의 유산을 일단 소화해 버린 다음, 오페라는 이성과 빛의 세기의 새로운 관심사를 반영하게 된다. 18세기는 계몽주의가 그 도덕 연극을 규정하게 되는 자유사상가의 세기이며 혼돈된 상황을 밖으로 끌어내면서 스스로를 묶어 버리는 합리주의의 세기이다. 또한 향락적인 미학의 세기이기도 하며 그러한 점에서는 세기말에 이르러 모짜르트만이 종교적인 고조가 다시 일어날 것을 예감하였다. 마지막으로 이 세기는 민중적인 희극의 리얼리즘과 인간미를 잃은 비극이 굳어진 서식으로 차츰 승리해 가는 세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크의 과잉된 풍요가 로코코의 지나친 장식으로 변해가는 세기이다. 오페라에 관한 논의가 풍부해진다. 철학자가 대본의 장르에 대해서 논하지만, 문제를 해결한 것은 언제나 음악가들이었다. 단순히 윤리나 구성의 원리를 넘어선 음악적 천분으로서 비발디, 헨델, 글룩 등이 새로운 서법을 찾았으며, 라모나 모짜르트가 모든 문제를 엄밀한 음악적, 극적 의식의 지휘 아래 둠으로써 해결하게 되었다.
1. 1750년 이전의 이탈리아 오페라
18세기가 되자 이탈리아 오페라는 나폴리나 런던에서, 나아가서는 볼로냐로부터 베네치아,빈을 거쳐 페테스부르크에 이르기까지를 중심축으로 하여 압도적 승리를 거둔다. <황제파>라고 일컬어지는 오페라 시인들이 자리를 잡는 한편, 가장 많은 작곡가나 연주가들이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고 찾아온 곳은 빈이었다. 이러한 국제성의 한복판에서 두 세계의 이음매와 같은 요긴한 위치에 있던 몇 명의 음악가들, 스테파니나 스카를라티, 헨델, 푹스 혹은 칼다라 같은 사람들을 분류하는 것은 어렵다. 아고스티노 스테파니(1654-1728)는 뮌헨에서 레그렌치에게서 배운 양식을 넓혔고(<테베의 여왕 니오베 Niobe, regina di Thebe>[1688]),이어서 <용사 엔리코 Henrico il Leone>(1689)를 비롯하여 <타실로네 Tassilone>(1709)에 이르는 작품으로 하노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헨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안토니오 칼다라(1670-1736)도 코스모폴리탄 음악가이며 베네치아 양식을 빈에 보급하였다.
끝으로,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1660-1725)를 나폴리 악파라는 그 파악하기 어려운 악파의 창시자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로마에서 만들어진 스카를라티의 초기 작품(<사랑의 진실>[1680])은 낡은 대위법 양식에 따른 것이며 스트라델라의 걸작에는 견줄 바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재능을 나타내어 베네치아파의 호화로움(<미트리다테 에우파토레 Mitridate Eupatore>[1707])이나 희극(<명예의 승리 Il Trionfo dell'onore>[1718 나폴리]) 혹은 단순한 가곡의 리사이틀에 지나지 않게 된 오페라도 마음대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오페라로는 <티그라네 Il Tigrane>(1715 나폴리)나 <그리젤다 La Griselda>(1721 로마) 등의 아름다운 작품이 남아 있다.
(가)베네치아
4개의 음악원이 나폴리의 음악원과 힘을 겨루고 있던 베네치아에서는 카스트라토는 절대적인 권력을 잡고 있지 않았으며 아직도 비이성적 요소가 지배하는, 시각과 청각의 호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목소리와 악기가 잘 조화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오페라는 장르 구분이나 구성의 도식화에 무관심하며 아직도 낡은 양식에 속해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이 도시의 지리적 위치로 인해 북쪽 세계와의 교류가 쉬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1668-1727)에게 있어서 레치타티보를 받쳐주고 있는 것은 쳄발로보다는 오케스트라였다. 가스파리니는 볼로냐에서 코렐리로 부터 교육을 받은 뒤에 베네데토 마르첼로의 스승이 되었다. 레그렌치의 전통은 매우 뛰어난 작곡가 안토니오 로티(1666/67-1740)에 의해서 되살아났다. 로티의 콜로라투라는 이미 표현력이 풍부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알비노니의 오페라의 멋은 역시 감미로운 선율의 감흥이다. 알비노니는 비발디와 마찬가지로 형식에 별로 얽매이지 않았다. 비발디는 1713년부터 1739년에 걸쳐서 베네치아와 베로나에서 오페라의 작곡활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비발디에게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음악의 질이 앞서 있었다. 목소리의 성격화의 시도가 보이는 <티토 만리오 Tito Manlio>가 이전의 작품의 파스티초(잡탕)밖에 안 되는 것은 의미깊은 일이다. 또한 헨델이 베네치아에서 아그리피나(1709)에 의하여 거둔 승리는 전례를 볼 수없을 만한 것이었는데 이 독일 음악가의 어법이 생겨난 것도 이 토양에서였다. 그 어법은 함부르크에서 카이저에 의해, 이어 로마, 나폴리에서 스테파노에 의해, 그리고 하노버에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헨델은 전통주의적인 귀족을 위하여 런던에서 일했는데(<리날도>[1711]), 그때 그의 눈부신 재능을 이미 죽음을 앞에 둔 장르에 적용하는 것만으로 만족해버렸다. 그러한 작품은 많은 돈으로 인기를 모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교를 가진 가수들이 그 재능을 발휘함으로써 유지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착오에도 불구하고 헨델의 오페라가 오랫동안 버려진 뒤에 오늘날에도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대규모 악기편성과 아리아 다 카포의 다양성에 따른 음악적 풍요 때문이다. 그의 서법은 그 뒤 오히려 오라토리오에 맞춘 것이 되었다. 특히 그의 라이벌이며 근대적인 양식의 지지자인 나폴리인 포르포라가 거둔 어김없는 성공을 앞에 놓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
(나)나폴리
오페라는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었고 오페라에는 공통의 윤리적, 미학적 원칙이 있었다. 1737년 나폴리에 거대한 산 카를로 극장이 개관되었으나, 선율적인 매력에 바탕을 두고 있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여러 법칙이 바뀌지는 않는다. 카스트라토와 아리아 다 카포가 그 매듭점이 되고 이야기의 줄거리 전체를 받치고 있는 장대한 레치타티보에 감정을 표현하는 여러 타입의 아리아는 서로 마주하고 있다. 이들 아리아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추상이다.
그 추상은 목소리의 유형에 의해 성립된다. 가장 높은 봉급을 받는 가수에게 그 긴 밤 공연 가운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아리아를 배당하기 위하여 줄거리 속에서 아리아의 위치를 바꿀 수도 있었다.
로마에서 아르카디아의 시인 그라비나 Gravina에게 배운 메타스타지오는 나폴리에서 첫 성공을 거두었다. 나폴리에서 그는 포르포라의 가르침 그리고 가수 마리안나 벤티 불가렐리Marianna Benti Bulgarelli와의 관계에 의하여 노래와 작곡의 실천의 초보를 배웠던 것이다.
그의 최초의 극작품 <버려진 디도네>는 1724년 나폴리에서 도메니코 사로 Domenico Sarro에 의해서 곡이 붙여졌다. 나폴리의 오페라 혹은 메타스타지오의 오페라라는 두 관념의 동일시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작센 사람 아돌프 핫세(1699-1783)에 의해서 더욱 잘 구현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메타스타지오의 오페라(불가피한 개혁 이전의)는 외국의 작곡가나 위대한 카스트라토(그가 흥미깊은 서한을 주고 받은 파리넬리도 그 중 한사람)로 밖에는 이어지지 않았으며 요절하여 전설적 인물이 된 페르골레지를 제외하면 이탈리아의 위대한 음악가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작품을 이용하려고 하지 않았다. 메타스타지오 오페라의 가장 큰 결점은, 아리아의 연속에 지나지 않으며 2중창도 앙상블도 합창도 없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이야기로 이어지는 연극에 대한 오페라의 중요한 강점이었다.
나폴리에서는 프란체스코 만치니 Francesco Mancini(1672-1737)가 두 시대를 잇는 역할을 한 거의 유일한 존재였다. 또한 그는 보논치니와 함께 그 작품이 최초로 런던에서 상연(1710)된 이탈리아의 작곡가였다. 그 후 나폴리 악파의 모든 작곡가가 오페라 세리아, 인테르메쪼, 오페라 부파에서 각기 빠지지 않는 눈부신 작품을 썼는데 특히 사로(1679-1744)가 한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사로의 양식은 처음부터 바로크를 거부하고 서정적, 감정적 맥을 잡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냈으며 이것은 후에 페르골레지가 이어받게 된다. 1737년의 산 카를로 극장의 낙성식에 선택된 것도 사로의 <시로스의 아킬레우스 Achille in Siro>이다. 니콜라 포르포라(1686-1768)는 성악 교사로서 역사상 가장 이름이 높으며 기악 부분을 성악과 동등하게 다루었다. 사로나 포르포라와 마찬가지로 피치니와 요멜리의 스승이었던, 레오나르도 레오(1694-1744)도 <감정과다 Empfindsamkeit>의 시대의 성두주자였다. 레오나르도 빈치(1690/96-1730)는 그 너무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핫세를 앞서서 이 새로운 양식을 완벽의 정도까지 높여 유럽 전역에 두루 퍼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저마다 결정적으로 근대적인 선율감각을 보여주는 다비데 페레스 Davide Perez, 도메니코 테라델랴스 Domenico Terradellas 및 리날도 다 카푸아 Rinaldo da Capua(1705경-80경)와 함께 그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의 최초의 양식을 무대에 올렸다. 여기에 개혁파의 흐름과 오페라 부파의 유행이 더하여 오페라는 새로운 방향을 찾게 된다.
2. 인테르메쪼와 오페라 부파
기원은 서로 상당히 다르지만 이들 두 가지 형태는 오페라 세리아가 이미 인정하지 않고 있던 희극적 요소를 관객에게 되찾아준다는 공통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같은 목적이 오페라 부파에 나타난다. 그 촉매가 된 것은 나폴리에서 나타난 사투리의 희극적 사용이었다. 음악은 처음에는 그 보조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레오, 빈치, 핫세, 포르포라 같은 작곡가의 힘으로 2중창이나 3중창, 그리고 이름이 알려진 합주 피날레를 쓸 수 있게 해 준 이 장르는 이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페르골레지의 인테르메쪼 <마님이 된 하녀>(1733)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분명하지만, 그는 3막의 오페라 부파 <사랑에 빠진 수도사>에서 그 이상의 재능을 발휘했다. 1732년에 상연된 이 작품은 풍부한 오케스트라와 아름다운 합주 피날레를 포함하고 있다. 니콜라 로그로시노는 이 합주 피날레를 더욱 발전시켰고 후에 모짜르트도 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오페라 부파가 갑자기 희극으로 전개되어 간 것은 베네치아에서였다. 거기에는 특히 골도니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다. 골도니는 순수한 대본 작가로서 비발디나 글룩(예를 들면 <티그라네>[1743])에게 협력한 뒤에 이전의 자기의 작품을 대본으로 번안하는가 하면 처음부터 곡이 붙여지는 것을 목적으로 희극을 쓰곤 하였다. 그는 평판높은 쳄발로 주자 발다사레 갈루피(170685)에게서 <우스꽝스런 극>을 위한 이상적인 협력자를 찾아냈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주제의 선택이 좋았으며 시골의 소극(笑劇)을 출발점으로 하였다. 그러면서도 브렌타 강의<아르카디아>(1749)나 <시골의 철학자>(1754)에서는 풍자성을 띠게 되고 후에 하이든도 작곡하게 될 <달의 세계>(1750)에서는 사랑스런 환상성에 이르렀으며, 특히 두니의 <예쁜 아가씨>(1756)에서는 감상적인 분위기를 빚는 데 성공했다. 한편, 그 주인공은 이제는 하인이나 시녀가 아니라 마리보의 연극에서 보는 것 같은 시민이나 귀족이 된다
1760년에 피치니가 이 <예쁜 아가씨>(리차드슨 Richardson의 <파멜라>에 의한 작품)를 다시 다루었을 때 오페라는 결정적으로 감상적 혹은 <눈물짜기 희극>으로 향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의 음악가들은 그러한 희극에 오페라 세리아의 모든 기교, 즉 콜로라투라나 카스트라토를 구사하게 되고, 이리하여 이탈리아 오페라의 새 시대가 열리게 된다. 프랑스의 영향도 있었다. 1730년 이후의 프랑스 오페라 음악가로서도 이론가로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이고 있던 장 필립 라모(1683-1764)는 50세가 되어 오페라에 손을 대면서 곧 전통을 뒤엎었다. 그 뒤 라모는 캉프라가 그 속에서 열개의 오페라 소재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 음악극 <이폴리트와 아리시>(1733) 및 오페라 발레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1735)에서 깊이를 더해가다가 마침내 놀라운 <아바리스, 또는 북풍의 신들>(1764, 미완성)에 이르게 되는데 그 전에 이미 중요한 것은 다 말해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연주상의 어려움 때문에 이 두 작품은 완전한 형태로는 상연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후 라모는 조심스러워지고 전보다 대담하지 못하게 되었다.
라모의 작품에서 청중이 본능적으로 당혹함을 느끼고 평안이 깨지게 된 것은 그의 오케스트라의 전례없는 시끄러움과 이탈리아주의라고 불리우는 화성적 섬세함 때문이었다. 초연 때에는 <이폴리트와 아리시>에서의 파르크의 3중창도 <우아한 인도>의 지진 장면도 연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라모가 행한 개혁은 그러한 겉모습을 넘어서 어법의 풍요로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풍요로움은 비극적인 장면에서나 양치기 소녀의 순진한 아리에타에서나 똑같이 많이 사용되고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주변의 경쾌함과 타협할 수 있었다.
3. 부퐁 논쟁과 오페라 코미크의 탄생
1752년에 밤비니 Bambini의 부퐁 악단이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다 카푸아 Da Capua, 라틸라 Latilla, 요멜리의 인테르메쪼와 페르골레지의 <마님이 된 하녀>를 상연하였다. 6년 전 파리의 코메디 이탈리엔에서 상연했을 때는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 페르골레지의 작품은 근본적인 오해로 인한 유명한 문학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자연스러움>을 라모의 오페라의 <기교성>에 대립시킬 수 있다고 믿은 팜플렛 필자들은 프랑스 음악 전반을 폄하하면서 이탈리아 음악을 찬미했다. 그러나 논쟁은 주제의 선택에 국한된 것이었다. 만일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와 프랑스의 노래에 의한 통속 희극을 대립시켜 비교했다면, 결론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음악적 야망이 꺾이고 라모의 예술적/사교적 성공을 시기하고 있던 루소는 백과전서(百科全書)의 음악의 전문가로서의 명예롭지 못한 논쟁을 시작했다. 평상시 오페라 극장에서 형편없는 수준의 연주를 듣고 있었기 때문에 양식있는 관객은 완성의 수준에 이른 이탈리아인에 공연에 감동할 수 밖에 없던다는 사실을 루소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논쟁이 어리석은 논쟁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백과전서파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인기를 회복시켰고 나아가서 양질의 참다운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를 만들어낼 필요성을 밝히는데 공헌하게 된다.
부퐁 논쟁의 결과로 참다운 오페라 코미크가 생겨났다. 사실 프랑스에 음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열악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글을 쓴 뒤에 루소는 프랑스어 대본으로 <마을의 점쟁이>(1752)를 작곡했다. 이것은 줄거리를 전개하는 대화를 말로 하지 않고 이탈리아의 레치타티보식으로 노래한다는 차이 외에는 바로 오페라 코미크이고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퐁텐블로 궁에서 라모의 가장 뛰어난 가수들에 의해 상연되었다. 이후 오페라 극장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의 파스티쪼(이것 저것 섞은 오페라)를 상연하여 성공을 거두게 된다. 모네는 다시 1753년에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훗날 이 극장의 지배인이 되는 앙투안 도베르뉴(1713-97)의 <물물교환을 하는 사람들>을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번역물로써 상연할 착상을 얻었다. 이 작품은 큰 갈채를 받았다. 이리하여 프랑스어로 노래하는 프랑스 음악이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762년 오페라 코미크 극장과 코메디 이탈리엔 극장이 합병했다. 이에 따라 작곡가들은 두 극단의 가장 뛰어난 배우와 가수들을 얻게 되었고 콜로라투라를 곁들인 어려운 아리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나아가 그들은 스덴의 협력도 얻게 되었다. 스덴은 이탈리아의 단순한 희극 대본이 아니라 참다운 극작품적을 대본으로 제공했다. 1769년에 스덴과 몽시니의 손에 의한 <탈주자>(이 작품은 미국에서도 상연되었다)가 등장했을 때 루소가 추천한 시골 목가극은 종말을 고했다. 오페라 코미크는 이제 조금도 웃기는 것이 아닌 눈물을 자아내는 극또는 <구원으로 끝나는 극>으로 바뀌고, 전 유럽이 오페라 코미크에 환호하게 된다. 같은 해, 즉 라모가 죽은 지 5년 뒤에 그레트리가 파리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얼마 뒤 글룩이 파리에 왔다. 이제 프랑스 오페라의 새 장이 열릴 준비가 된 것이다.
4. 개혁의 시대
(가) 오페라 세리아의 개혁
파르마에서 프랑스 오페라가 보여준 현실이 메타스타지오의 미학적 주장에 대해 다시 따져묻는 촉매의 역할을 한다. 메타스타지오의 주장에 대한 추궁은 이미 1740년 이후 이탈리아의 여러 작곡가, 비평가에 의해 행해지고 있었다. 감독관 뒤 틸로 du Tillot가 파르마의 프랑스 궁전으로 두니를 고용해 파바르의 대본을 주었고, 이어서 골도니를 초청하여 두니를 위해 <파멜라>를 번안시켰다. 1757년에 이미 그는 루벨이나 프랑쾨르, 그리고 라모의 오페라를 상연시켰는데 이들 작품은 이탈리아어로 번역되고, 이어서 같은 착상을 바탕으로 한 오리지널한 번안도 생겨났다. 그런데 몇 년 전의 요멜리와 마찬가지로 트라에타도 이 부흥의 필요성을 예언하고 있었다.
트라에타(1727-79)나 요멜리(1714-74) 외에도 이탈리아의 몇 사람의 음악가들이 이 부흥에 나서게 되었다. P. A. 굴리엘미, 안포시, 사키니 및 피치니, 다비데 페레스(1710/11-78), 그리고 페르골레지의 뛰어난 제자의 한 사람이며 특히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중시한 도메니코 테라델라스(1713-51) 등의 이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테라델라스의 <벨레로폰 Bellerofonte>(1747)에서는 이미 크레셴도의 수법이 보인다. 잔 프란체스코 디 마요 Gian Francesco Di Majo(1732-70)는 나폴리 사람이며 종교음악과 오페라 세리아를 작곡가로서,그 작품은 빈에서도 연주되었다. 그의 양식은 글룩과 모짜르트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몇 가지 혁신이 이 오페라 세리아의 개혁을 보충하게 된다. 이 개혁은 청중에 의해 계속 거부된 구성들로서, 결말에서의 파국의 재도입, 드라마 세리아의 2막 구성법,그리고 특히 전통이 되고 있는 솔리스트의 아리아의 연속을 대신하여 2중창, 3중창, 앙상블 및 합창을 사용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몇 개의 중창이 잘 통합된 작품으로는 예를 들면 트라에타의 <안티고네>(1772 페테스부르크)가 있다. 여기서 트라에타는 눈부신 기교를 가지고 대화 형식의 레치타티보 및 2부 또는 3부 형식의 아리아를 다루고 있다.
(나)글룩의 개혁
밀라노에서 배운 독일인 글룩은 이미 1741년에 메타스타지오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윽고 그 <시끄러운 독자성>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이탈리아 양식에 길들어 있었으나 바로 오케스트라와 독일 취미의 전형인 고성음의 콜로라투라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글룩은 빈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파바르의 텍스트에,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음악가들과는 아주 다른 모양의 스케일이 큰 음악을 붙였다. 또 그는 빈에서 1761년에 라니에로 데 칼차비지(1714-95)를 만났다. 이 아르카디아의 시인은 파리에서 부풍 논쟁을 체험하고 그런 종류의 문학 논쟁을 야유한 풍자적 작품 라 륄리아데를 발표하고 있었다. 1755년에는 메타스타지오를 찬양하는 에세이를 쓰고(20년 뒤에 그의 시구의 끊는 법만을 비판한다), 또 카사노바와 함께 수상쩍은 복권판매소를 경영한 후 파리에서 추방된 칼차비지는 빈에서 트라에타의 오페라를 통하여 개혁파의 움직임을 알았다. 그는 이미 알가로티 Algarotti가 요약해 놓은 규범을 자기가 쓴 것처럼 보여서 고스란히 그대로 유명한 알세스트 서문으로서 조심스럽게도 글룩으로 하여금 서명하게 한 것이다. 칼차비지는 글룩을 이상적인 협력자로 찾아냈으며 그들은 함께 가수의 남용에 맹렬하게 반대했고 발레나 무대장치, 합창에 붙일 중요성 등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공동작품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1762)의 중요한 장점은 이야기에서 조역을 모두 배제하고 지옥의 장면에서는 독창과 합창 및 시각적 효과를 완전히 상호 침투시킴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다) 드라마 지오코소와 오페라 세미세리아
18세기에 있어서의 오페라 세리아에 대한 오페라 부파의 승리는 등장인물의 자연스러움에 따른다고 여겨졌다. 멋있고도 비장한 새로운 양식은 거드름을 피우는 비극의 영웅보다 희극적인 마을 사람이나 후작에게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구성의 유연성과 다양성이 낡아 빠진 오페라 세리아의 굳어버린 형식을 이겨냈다는 점이다. 콜로라투라에 의한 아리아나 카스트라토가 서정적 희극에서 시민권을 얻게 되자 순식간에 귀족의 관중까지도 중창이나 발랄한 피날레로 더욱 매력이 넘치는 이 형식을 좋아하게 된다.
< 드라마daram>와 <유쾌한giocoso>이라는 두 형용어의 대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잘못이다. 드라마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에서는 어떠한 비극적인 뜻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문학적 야망이나 등장인물의 사회적 신분을 강조하고 귀족에게는 아직 믿을 수 없는 것으로비치고 있던 오페라 부파보다도 높은 품위를 나타내려고 한 대본이 드라마라고 정의되었다. 그러나 오페라 부파가 유산으로 남긴 것은 레치타티보 세코와 중창을 포함하는 그 구성이었다. 그 결과 오페라 부파라는 용어는 총칭으로써 오랫동안 코메디나 드라마 지오코소, 오페라 세미세리아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1789년의 파이지엘로의 <니나>를 모델로서 정의되는 오페라 세미세리아라는 장르는 특별한 사회적 문맥의 뜻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나폴리 양식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는 조반니 파이지엘로(1740-1816)와 도메니코 치마로사(1749-1801)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남부 출신으로 오페라 세리아와 기악작곡의 교육을 받았다. 또 두 사람 모두 빈과 페테스부르크에 초빙되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1782 페테스부르크)와 <라 몰리나라>(1788)로 오늘날까지 이름높은 파이지엘로는 <니나 또는 사랑에 의한 광기>에 의하여 광기의 장면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만들어내고 오페라 세리아 <페드라 Fedra>(1788)에서는 2막 구성법에 동조하였으며, 칼차비지의 대본에 따른 <엘프리다 Elfrida>(1792 나폴리)에서는 최초로 비극적 결말을 가지는 중세극을 작곡했다. 또한 카스티 Casti 신부의 대본에 따른 베네치아의 <테오도로 왕>(1784 빈)에 의하여 에로이코미코(영웅 희극)의 장르에서 그 자신의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치마로사는 오늘날 파아지엘로보다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이름도 코메디에 이어져 있다. 그 하나인 <비밀결혼>(1792 빈)은 실제로는 멜로드라마(즉 오페라)라는 제목이 붙여졌고 그 구성에 매우 가까운 작품이다.
그러나 오페라의 활동이 가장 화려하게 전개된 것은 모짜르트가 있었던 빈에서였다. 최고의 시인과 음악가가 빈에 모여 서로 대립하고 표절했던 것이다. 그리고 <연극 속의 극>이라는 피란델로를 앞선 듯한 미학적 유희에 열중하였다. 이 연극 속의 연극이라는 구성은 모짜르트나 치마로사, 그밖의 많은 흥행사들에게 착상을 주고 마침내 1814년에는 로마니 Romani 와 롯시니에 의한 매우 해학적인 작품 이탈리아의 터키인이 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 칼차비지는 1769년에 플로리안 L. 가스만(1729-74)을 위하여 <오페라 세리아 L'opera seria>를 썼는데 거기에서 지배인은 이름이 파산(破産), 시인은 광기(狂氣), 카스트라토는 리토르넬로, 그리고 프리마돈나는 빗나간 사람이었다. 이 놀이는 다시 콜텔리니나 카스티 신부(1724-1803)에 의해서 발전된다. 카스티 신부는 <음악이 첫째, 말은 둘째 Prima la musicae poi le parole>(1786)를 썼으며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가 작곡했다. 모짜르트의 맞수이자 뛰어난 기악 작곡가이기도 했던 살리에리는 1778년에 밀라노 스칼라 극장의 낙성식을 위해서 <발견된 에우로파>를 썼고, 이어 파리에서 글룩의 뒤를 잇고 보마르셰의 <타라르>(1787)에 작곡했으며 나아가 셰익스피어의 <팔스타프>(1799 빈)에 작곡했다. 살리에리는다 폰테의 협력자의 한 사람이기도 했다. 다 폰테는 모짜르트나 마르틴 이 솔레르(1754-1806), 스토라스 등의 대본을 쓴 인물이지만 당시의 가장 독창적인 오페라 시인의 하나인 조반니 베르타티 Giovanni Bertati(1735-1815)와 대립하여 그의 <비밀 결혼>을 자기작품이라고 하는가 하면 <석상(石像)의 손님 Convitato di pietra>으로부터 <돈 조반니>를 위해서 적지 않게 차용하기도 했다. <석상의 손님>은 1787년에 베르타티가 주제페 가차니가(1743-1818)를 위해서 썼던 대본이다.
5. 징슈필의 탄생
민족이나 종교는 달라도 게르만 제국의 왕후들은 모두 독일어에 의한 예술의 모든 민족적인 시도를 한결같이 의심의 눈길로 보고 있었다. 왕후들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고 있었다. 드레스덴의 핫세, 베를린의 그라운, 슈투트가르트의 이그나츠 홀츠바우어(1711-83) 등은 모두 이탈리아파의 작곡가였고 빈의 가스만, 글룩, 바겐자일(1715-77)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사르티나 나우만은 덴마크나 스웨덴 혹은 러시아로 활동의 무대를 넓혀 나갔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하이든의 오페라가 당시의 오페라 세리아나 세미세리아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독일어에 의한 최초의 몇 가지 시도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상연된 사적인 환경이 그러한 작품이 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역사적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징슈필(Singspiel, 노래로 하는 연극)이라는 말은, 오케스트라의 비중은 두드러져 있었으나 아직 오페라 코미크와 대등한 말로 정의되기 이전에는 바로크 오페라나 북부 지방의 발라드 오페라를 이어받은 국민적 오페라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북부에서는 고트셰트 Gottsched가 오페라라는 장르 고유의 허구성을 물리치고 대본의 절대적인 우위성을 주장했고, 요한 아돌프 샤이베(1708-76)는 1749년에 이미 대본과 음악 모두 자기가 쓴 작품을 징슈필이라고 불렀다. 1750년경 빈에서 징슈필이라는 용어는 유명한 베르나르돈 Bernardon의 일종의 코메디아 델라르체적 연극에 대해서 쓰이고 있었다. 또 하이든은 <곱추 악마>(1751-53경, 상실)를 작곡했다. 이곳에서는 요제프 슈타르처 Josef Starzer나 프란츠 아스펠마이어 FranzAspelmeyer 등의 서정적인 희극이 상연되었다. 다른 유형의 독일 오페라도 등장했다. 슈바이쳐 A. Schweitzer(1735-87)는 빌란트 Wieland의 <알체스테 Alceste>에서 라모적인 도식으로 작곡(1773)했으나 모짜르트의 의견에 따라 노래를 아주 무시했다.
한편, 라이하르트가 괴테의 <클라우디네 폰 빌라벨라>(1773)에 곡을 붙여 1789년에 초연하게 된 작품에서 우세한 것은 대사쪽이었다. 징슈필에서 음악이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게오르크 안톤 벤다(1722-95)의 힘에 의해서였다. 벤다는 <마을의 큰 장>(1775)에서 풍부한 오케스트라 소리를 사용했고 나아가 다 카포 아리아를 감상적인 쿠플레나 브라부라 혹은 민중적인 합창곡과 뒤섞어 놓았다(베버는 1821년의 작품 <마탄의 사수>에서 이 착상을 빌리게 된다). 벤다는 매우 다양한 제재를 이용(<줄리엣과 로미오>[1776], <초부>[1778])하는 동시에 멜로드라마 형식으로 <메데아>(1775)와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1775)를 썼다. 그리고 브레츠너 Bretzner의 대본을 바탕으로 1781년에 베를린에서 상연된 요한 안드레의 <벨몬트와 콘스탄체 Belmont und Constanze>는 요제프 2세가 빈에서 징슈필 국민극장을 개관했을 때 모짜르트의 본보기가 된다(<후궁으로부터의 유괴>[1782]). 이 극작품은 1778년에 이그나츠 움라우프(1746-96)의 <갱부>로 개관 공연을 갖게 되는데, 이 움라우프의 작품을 본보기로 삼아 모짜르트는 오스민이나 파파게노 같은 자신의 징슈필의 등장인물을 빚어냈던 것이다. 모짜르트와 마찬가지로 프란츠 타이버 Franz Teyber(1758-1810)나 요제프 바이글(1766-1846) 등도 역시 어려운 콜로라투라의 아리아를 써서 이탈리아 오페라나 프랑스 오페라만 상연하고 있는 궁정 극장에서 여성 가수를 끌어내려고 했다.
징슈필 극장이 반체제의 혐의로 폐쇄되자 케른트나토르 극장이 빈에서 디터스도르프(1739-99)의 이탈리아 취미가 매우 강한 징슈필을 상연했다. 그와는 반대로 소극장의 흥행주 시카네더는 대중적인 관중을 상대로 민중의 노래에 몽환성을 가미한 작품을 썼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빌란트와 브라니츠키 Wranitsky(1756-1808)의 오베론 Oberon(1789)이나 모짜르트의 <마적>(1791)이 있다. 그러나 요제프 2세 및 레오폴트 2세의 사후에 외국의 모델이 새로 세력을 되찾게 되자 징슈필의 작곡가들은 다시금 궁정 극장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모짜르트가 여러 장르의 통합에 성공한 것은 요제프 2세 치하의 일이었다.
6. 라모 이후의 프랑스
1764년에 라모가 죽음으로써 몽동빌(그에 관해서는 1754년에 오크어로 쓴 <다프니스와 알시마뒤로 Daphnis et Alcimaduro>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한다)이나 오페라 코미크의 작곡가들을 오페라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서는 글룩이 다른 양식으로 인기를 모았고 그의 활동을 이어받도록 의뢰받은 것은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이었다. 피치니는 <롤랑>(1778)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이어 <아티스 Atys>(1780), <토리드의 이피제니>(1781), 그리고 뛰어난 작품인 <디도>(1783)를 썼다. 요한 크리스찬 바흐가 런던에서 와서 키노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작품 <골의 아마디스>(1779)를 작곡했다. 또 안포시는 프랑스의 가수를 위해서 쓰기를 포기했고, 안토니오 사키니(1730-86)는 <르노>, <시멘 Chimene>, 그리고 <다르다누스>(1784)를 작곡했으나 이탈리아적인 것과 프랑스 적인 것을 완벽하게 융합시킨 작품 <콜론의 오이디푸스>가 거두게 될 성공을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살리에리의 <다나오스의 아가씨들>(1784)과 <타라르>(1787)가 상연된 뒤에 그의 라이벌이었던 케루비니가 1788년에 파리로 오게 되자 프랑스 오페라는 새로 되살아나게 된다.
오페라 코미크는 이미 1769년에 완전히 성숙한 장르가 되어 있었고 단순히 오페라에 걸 맞는 것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문화를 대표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 무렵 오페라를 경시했던 그레트리(1741-1813)는 로마에서 갈고 닦은 참다운 재능을 오페라 코미크에 바쳤다. 그는 <제미르와 아조르>(1771), <거짓 마술 La Fausse magie>(1775)에서 코메디 이탈리엔 극장의 여가수를 위하여 기교적인 참다운 아리아를 썼으며, 이어서 역시 스덴의 협력 아래 다른 주제들을 다루었다(<푸른 수염의 라울 Raoul BarbeBleue>[1789]). 그리고 <사자왕 리샤르>(1784), <기욤 텔>(1791), 그리고 <레오노르 Leonore>의 작가 부이이 Bouilly의 대본을 바탕으로 한 <피에르 대제 Pierre le Grand>(1790) 등의 역사적 테마를 다룬 작품을 썼다. 이러한 야망에 대하여 니콜라 달레라크(1753-1809)는 마르솔리에 Marsollier의 구원으로 끝나는 작품 <니나, 또는 사랑에 의한 광기 Nina, folle par amour>(1786)의 감상성을 대치시켰다.
오페라 극장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이야기와 노래를 교대로 등장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된 오페라 코미크라는 장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의 다른 극장에서도 많이 상연되고 그 분야도 넓혀 나갔다. 즉, 구원으로 끝나는 작품(가보, 파에르, 베토벤, 마이어 등에 의해서 작곡된 부이이의 <레오노르>)은 이국 취미를 원용하고(여러 작곡가에 의한 로도이스카 Lodoiska) 혹은 신화에 자리를 내주었다. 케루비니의 메데 Medee(1797)가 그러한 예인데, 이 작품의 대본은 호프만 Fr. B. Hoffman이 쓴 것이다. 호프만은 또 아리오스토 Ariosto에서도 착상을 얻고 있다(메윌의 <아리오당 Ariodant>[1798]). 그러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게 되는 노르망디 출신의 부아엘디외(1775-1834)에 의해서 그 주인공들은 세련된 말로 쓴 전통적인 오페라 코미크로 돌아가게 된다. 30년에 이르는 성공을 거둔 뒤에 부아엘디외는 <백의의 부인 La Dame blanche>에 의해서 이 장르에 낭만주의를 끌어들였다. 백의의 부인은 월터 스코트 Walter Scott에게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며 <마을의 점쟁이>가 상연목록에서 밀려난 해인 1825년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외젠 스크리브가 쓴 그 대본은 이미 오베르나 에롤의 최초의 성공으로 열려지고 있었던 오페라 코미크의 새로운 시대에 속하는 것이었다.
7. 모짜르트에 의한 통합
모짜르트의 오페라는 오늘날에야 당시의 전 작품의 정상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형식적인 혁신을 가져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당시에는 오늘날 상상하는 만큼의 충격은 주지 못했다. 대본이 너무 복잡한 것이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고, 아주 새로운 대본에 따른 <피가로의 결혼>은 제외하면 이야기의 줄거리는 모두 이미 다른 음악가들이 다룬 것이었다. 또 징슈필의 작자들이나 트라에타, 살리에리, 파이지엘로, 달레라크 등으로부터 차용한 부분은 관례를 따르고만 있었다. <리에토 피네 lieto fine[I](해피엔드)>의 전통이나 오페라 세리아의 카스트라토의 사용을 충실히 지키고 있었던 모짜르트는 그 오페라 부파의 전통적인 구성이라는 점에서는 몇몇 선배들보다도 후퇴하고 있었다. 레치타티보는 좀처럼 반주되는 일이 없었고(특별히 중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리아와는 분리되어 있었으며 그 아리아도 장식이 달린 다 카포 형식 또는 카바티나 아니면 합창이 삽입되지 않은 3부 형식의 아리아였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미 그 터무니 없이 긴 피날레나 <돈 조반니>의 잔치 장면의 환상성 혹은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의 음악적 표현의 부드러움, <황제 티토>의 자비의 최초의 놀라운 피날레, 그리고 마적과 같은 징슈필에서의 무거운 가락 등에 불안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짜르트는 내부에서부터, 더 미묘한 방식으로 그때까지의 오페라의 양식을 의심해 나갔다. 그는 14세에 이미 대본을 스스로 선택하려고 했고(원숙기에는 대본의 실질적인 공동 작가가 된다), 또 그때까지는 문학상의 무익한 논쟁거리밖에 안 되었던 문제를 음악으로 참다운 의미에서 해결하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 사람들이 알아차릴 수 없었던 어떤 사고의 통일성을 확립하게 되었다.
시를 돕는다는 유일한 기능만을 갖도록 음악을 억제한다는 글룩의 제안에 모짜르트는 시는 음악에 순종하는 딸이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말과 음을 서로 침투시키는 일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음악은 대본의 내적인 템포와 일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을 글룩이나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부흥의 시도는 당초부터 실패할 운명에 있었던 것이다. 성공을 노린 모짜르트는 처음에 모든 장르에 손을 댔다. 징슈필에서 세레나데까지, 오페라 코미크에서 오페라 세리아까지, 오페라 부파에서 드라마 지오코소 혹은 코메디까지 다방면으로 써 보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도메네오>에 의해서 오페라 세리아의 여러 구조에 최초의 통합을 가져왔다. 이 작품에서 모짜르트는 앙상블을 빈번하게 사용했고 또 합창을 이야기의 전개에 참가시켰는데 그것은 글룩의 방법을 물리치고 트라에타가 옳다고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도메네오>에서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그는 본능적으로 그런 내용이 공허한 고대 신화를 거부하고 <우리 새대의 신화>라는 훨씬 절박한 길로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모짜르트가 말한대로 "나는 독일 오페라를 창조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열중한" 징슈필이나 오페라 부파 같은 한결 접근하기 쉬운 어법을 택하여 그 여러 요소로 하여금 그의 이념에 따르게 하였다. 그것은 모짜르트로서는 그러한 안이한 형식에 비극적인 무게를 들여와 이야기 전개 장면의 격조와 아리아의 격조 사이에 감정적인 연결을 만들어내기 위한 하나의 도박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매우 전통적인 콜로라투라를 그장면의 상황에 어울리는 것으로 끌어들이거나 오페라 부파 속에 오페라 세리아 성격을 삽입시키고(돈나 안나와 돈나 엘비라), 놀라운 강도로 반주되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레치타티보를 도입하기 위한 도박이었다.
모짜르트가 <마적>의 마니교적 세계를 강조한 것도 거의 무해무덕한 음악적 기법, 즉 말과 노래를 대립시킴으로서 이루어진다. 그는 선과 악을 사람의 목소리의 양립 불가능한 대립항인 말과 음악으로 대치시키는 기법를 사용하였다. 한편, 그의 이탈리아어의 극에서는 가곡의 여러 양상의 양의성이, 동일한 세계의 상호 보완적인 두 측면으로 본 선과 악의 무서운 착잡함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는 부파의 어법이 비극적인 것의 가면으로 나타나고, 또한 비극적인 현실로부터의 거리라는 점에서는 <코지 판 투테>의 의도적인 미학의 완벽함쪽이 <돈 조반니> 그것보다 거리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오페라는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영웅으로서 인간의 해방을 위해 싸워온 모짜르트의 활동의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이후 개인의 권리 요구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비길 데 없는 고백을 계속했다. 그 문제를 세 개의 이탈리아어 오페라의 폭풍 뒤에서 해결하고, 다시 1791년의 마적의 양의적인 지혜로서 독일어 오페라에서도 해결했던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같은 해 35세의 생애를 마치기 직전에 모짜르트는 <황제 티토>의 자비에 의해서 오페라 세리아의 낡은 구조를 파괴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 놀라운 통합으로 인해 윤리나 미학의 문제를 이겨내는 것이 비록 가장 전통적인 구성에 의한다 할지라도 우선적으로 음악에 속하는 점이라는 것을 새삼 우리에게 깨우친다.
8. 그밖의 유럽 중심지에서의 오페라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본보기가 모든 궁정에서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어느 궁정에서나 먼저 번역 작품이 상연되고 다음에 토착의 참다운 창조가 이루어졌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프랑스 독일형의 문화를 강요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배우들이 이미 1729년에 페테스부르크에 등장했다. 또 1731년에는 독일에서 온 핫세 극단의 한 이탈리아인 리스토리 Ristori가 오페라 부파 <칼란드로 La Calandro>를 페테스부르크에서 상연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인테르메쪼가 독일어와 러시아어로 번역되게 되었다. 그러나 1735년에 나폴리인 프란체스코 아라야 Francesco Araja(1709경-70)가 페테스부르크에 자리를 잡고 먼저 <사랑과 미움의 힘 Forza dell'amore e dell'odio>을 상연하여 갈채를 받았다. 이어서 1737년에 <가짜 니노 Il Finto Nino>를 작곡하고, 또 메타스타지오식 오페라와 프랑스 발레에 전념하였다. 이들 작품은 바로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프랑스어의 신작과 교대로 상연되었다. 1755년 그는 마침내 미리 번역해 둔 대본을 바탕으로 직접 러시아어로 <체팔과 프로크리스 Tsefal i Prokris>를 썼다. 한편, 로카텔리 G. B. Locatelli는 1757년에 새로운 이탈리아 극단을 결성했고, 또 라우파흐 Raupach는 1758년에 러시아어로 <알세스트>를 상연하였으며 1762년에 다시 찾아온 프랑스인들은 여전히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최고의 음악가들이 이후 계속 페테스부르크의 공적인 임무를 차지하게 된다. 즉, 빈첸초 만프레디니가 1758년부터 1769년에 걸쳐서, 갈루피가 1765년부터 1768년까지, 트라에타가 1775년까지, 파이지엘로는 1783년까지, 치마로사는 1787년부터 1791년에 걸쳐서, 마르틴 이 솔레르는 1788년부터 1794년에 걸쳐 그러한 임무를 맡았다. 한편, 주제페 사르티(1729-1802)는 1784년에 페테스부르크에 자리를 잡았다. 사르티는 볼로냐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치아와 로마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코펜하겐에서 20년간 머물면서 풍부한 고전 교육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이리하여 베네치아 사람 카보스가 활약할 수 있는 발판을 다졌던 것이다. 카보스는 1797년부터 최초의 위대한 소위 러시아 작곡가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귀족적인 문화와 아울러 징슈필이나 필리도르, 두니, 그레트리, 달레라크, 드제드Dezede 등의 오페라 코미크도 번역되었다. 러시아의 가수들도 그레트리 작품의 유명한 해석자인 프랑스인 클레르발 Clairval이 거느리는 극단에 가담했고, 또 모스크바에서는 영국인 마이클 매독스 Michael Maddox가 1776년에 오페라 상연 모임을 조직했고 1780년에는 페트로프스키 극장을 설립하였다. 거기서는 러시아의 작품이 널리 상연되었고, 마치 독일에서 헤르더가 했던 것처럼 예로부터 전해오는 러시아 국민의 이교적 배경의 탐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확실히 페테스부르크에서는 오페라 부파가 승리를 거두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운동이 시작된 것은 모스크바였다. 말하자면 지난날의 러시아가 그 운동의 척발점이 된 것이다. 즉, 앞으로 30년간 러시아의 음악가들에게 이따금 외국의 영향이 뒤섞이기기는 하지만, 유명한 민중의 리프레인(후렴)으로 된 보드빌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이러한 작품은 흔히 여러요소가 합성되어 이루어지고 끊임없이 변형되고 번안되어 갔다. 볼코프 Volkov의 보드빌 <타뉴사>(1756?)를 둘러싸고 수수께끼가 끊이지 않는다. 또한 포포프 M. Popov의 1막의 <아뉴타>(1772 차르스코예 셀로)의 악보를 어느 음악가(드미트리예프스키 Dmitrievskii, 파슈케비치 Pashkevich)가 썼는지도 단정할 수 없다. 이 작품은 러시아의 소재로 된, 러시아의 작자에 의한 최초의 오페라로 꼽히고 있다.
결국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가 인기를 가로채고 케르젤리 Kerzelli나 조리네 Zorine에 의한 파스티쪼나 모작이 나오는 한편, 최초의 성공작은 <방앗간 주인은 마법사>였다. 이 작품은 아블레시모프 Ablesimov의 대본 소콜로프스키 Sokolovskii가 편곡한 쿠플레에 의한 것으로 모스크바에서 1779년에 상연되고 이어서 페테스부르크에서도 상연되었다. 그리고 1784년에는 매우 성실한 포민에 의해서 다시 다루어졌다. 그밖에도 수많은 보드빌이 2개의 수도에 등장하였다. 특히 미하일 마틴스키 Mikhail Matinski(해방된 농노로서 이탈리아에서 배웠다)의 3막의 <페테스부르크의 시장>(초연 1782)이 있다. 또 좀더 시대가 흐르면 에카테리나 2세가 역사적인 소재와 일상적인 테마가 교대로 나타나는 대본을 몇 개 썼다. 그 대본에는 사르티, 카노비오 Cannobio, 마르틴 이 솔레르, 마틴스키, 그 중에서도 특히 파슈케비치(1742경-97)의 음악이 때때로 뒤섞여 붙여졌다. 파슈케비치는 에카테리나 2세의 최초의 대본 페베이를 위하여 1786년에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나 특히 페테스부르크에서는 프랑스 취미가 여전히 지배적이고 먼저 프랑스어로 몇 개의 오페라 코미크가 작곡되었다. <파슈케베치의 수전노>(1782)도 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볼로냐나 베네치아에서 받은 교육 덕분에 3인의 러시아 음악가가 강력한 개성을 띠고 나오게 되었다. 먼저 막심 베레조프스키(1745-77)로서, 그는 메타스타지오의 오페라에 작곡을 한 뒤에 황실 합창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모국으로 돌아왔다. 다음은 베레조프스키의 후계자 드미트리 보르트냔스키(1751-1825)이며, 그는 코스모폴리탄적인 7개의 오페라를 썼다(1786년의 <매 Le Faucon> 및 1787년의 <라이벌이 된 아들 Le Fils rival>은 프랑스어의 대본을 바탕으로 작곡한 것이다). 세 번째는 에프게니 포민(1761-1800)이다. 그는 1786년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역시 여제(女帝)의 대본에 곡을 붙여 모짜르트나 살리에리, 글룩 등을 방불케 하는 어법으로 합창이 따른 멜로드라마의 악식을 따랐다(<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초연 1792]). 그 뒤 <미국인들>(1800)과 참다운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금사과>(유작)에 의해서 진정한 국민적 감정을 주장했다. 그리고 1798년에 파울 1세가 이탈리아 오페라를 금지하기에 이르러 교체는 확실한 것이 된 것처럼 보였다.
(가) 영국
영국은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먼저 국민적 유산을 지워 버리는 과정을 겪는다. 1705년 인테르메쪼의 번역물을 상연하게 되고, 그로부터 차츰 진짜 이탈리아 오페라가 이탈리아의 극단에 의해 불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보논치니나 만치니 Mancini(<정숙한 이다스페 Idaspe fedele>[1710])의 낡은 작품이 찬미되고, 이윽고 헨델(<리날도>[1711])과 포르포라의 오리지널 작품이 초연을 보게 되었다. 1728년에 요한 크리스토프 페푸슈(1667-1752)가 발라드 오페라의 형식을 따라서 쓴 상당히 강렬한 풍자극 <거지 오페라>가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런던의 부패한 귀족 계급과 이탈리아 오페라였다. 이 성공은 영국 오페라의 잠재력을 확증하는 것이었지만 헨델은 여기에서 배워 오라토리오를 썼고 이어 토머스 안(1710-78)이 마스크(가면)의 전통을 부활시켰다(<알프레드 Alfred>[1740]에는 유명한 <룰 브리타니아! Rule,Britannia!>가 들어 있다). 그는 메타스타지오를 번역하거나 헨델의 방법을 써보는가 하면(<아르타크세르크세스>[1762]), 파스티쪼의 방식을 <마을의 연애 Love in a Village>(1762)에 채용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찰스 디브딘 Charles Dibdin(1745-1814)이나 새뮤얼 아놀드Samuel Arnold(1740-1802), 마이클 안, 윌리엄 실드(1748-1829) 등의 오페라 코미크, 모짜르트의 친구였던 스테판 스토라스가 1787년에 런던에 와서 그의 이탈리아어 작품에 영어의 대사를 붙여서 상연한 일, 그리고 19세기에는 코스모폴리탄적인 교양을 몸에 익힌 비숍 H.Bishop이나 롯시니의 아류인 M. 발프의 오페라 등이 있다. 그러나 18세기 말의 런던에서 중심적인 존재는 요한 크리스찬 바흐(1735-82)였다. 그는 밀라노에서 교육을 받은 뒤 뛰어난 지도자가 되었으며, 런던을 여행중이던 모짜르트를 알게 되었다. 영어로 쓰는 일은 적었으나 뛰어난 이탈리아 오페라로 런던을 휩쓸었다.
(나)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도메니코 스카를라티, 그리고 정치 고문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창시자가 된 카스트라토 파리넬리의 존재가 큰 소리를 치고 있던 나라이지만 이윽고 메타스타지오의 시작품이 번역되어 나오게 되었다(나폴리에서 교육을 받은 호세 두란 Jose Duran은 1760년에 안티고노<Antigono>를 썼다). 그리고 라몬 데 라 크루스 Ramon de la Cruz는 파블로 에스테베나 마누엘 플라 Manuel Pla, 안토니오 로드리게스 데 이타 Antonio Rodriguez de Hita(1704-87)등을 위해서 골도니의 작품을 고쳐 썼다. <귀여운 아가씨 La Buona figlinola>가 <La Buena hija>(에스테베)가 되고 <거짓말쟁이들 Gli Uccellatori>이 사르수엘라 또는 토나딜랴 에스세니카(무대의 토나딜랴)인 <남편들 Los Casadores>이 되었다. 이타는 1763년에 사르수엘라 에로이카(영웅적 사르수엘라) <브리세이다 Briseida>를 상연하였고, 크루스와 이타의 협력으로 <발레카스의 수확인 Las Segadores de Vallecas>(1768)이 태어났다. 이 작품은 루트의 전설에서 발췌한 익살스런 사르수엘라이다. 1769년의 <무르시아의 여자 농부Las Labradoras de Murcia>도 마찬가지이며, 이들 곡에서는 탬버린이나 캐스터네츠를 사용하여 호타나 세기딜랴를 노래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인테르메쪼도 하나의 자율적인 장르가 되었다. 이러한 인테르메쪼는 1758년(루이스 미손 Luis Mison의 <장님들 Los Ciegos>을 참조) 이탈리아 오페라의 막간에 상연되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여전히 이들 소품에 까딱도 하지 않고 득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품이 모델이 되어 후에 프랑스 오페라의 스페인적 회화성이 생겨나게 된다.
포르투갈에서는 주로 두 사람의 인물에 의해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도입되었다. 이탈리아인 다비데 페레즈 Davide Perez(1710/11-78?)와 포르투갈인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 알메이다이다. 알메이다는 로마에서 공부하고 1733년에 리스본으로 돌아와 <드라마 코미코 dramma comico[I]>(익살스런 드라마) <소크라테스의 인내>를 상연했다. 이어서 1735년에는 <거짓으로 미친 여자 La Finta pazza>를, 그리고 특히 1739년에는 <드라마 지오코소 dramma giocoso[I]>(명랑한 드라마)를 예견한 놀라운 작품 <스피날바>를 상연했다. 한편, 페레즈는 나폴리와 팔레르모에서 얻은 것을 활용하여 1752년 이후 <포르투갈식 오페레타>를 썼고,1755년에는 리스본에 오페라 극장을 세웠다. 그러나 이 극장은 곧 지진으로 무너져 버렸다.
토착의 뛰어난 음악가로는 조안 데 수자 카르발료 Joao de Sousa Carvalho(1745-98)가 있다. 그는 나폴리에서 공부하고 이탈리아어로 작곡했으며(<L'Amore industrio>[1769]) 페레즈의 뒤를 이었다. 반대로 마르코스 안토니오 다 폰세카 포르투갈 Marcos Antonio da Fonseca Portugal은 1784년에 먼저 포르투갈어로 뛰어난 희극작품을 쓴 뒤 포르토갈로Portogallo라는 이름으로 이탈리아로 건너가 성공을 거두게 된다.
(다) 스칸디나비아 제국
덴마크에서는 일찍부터 프랑스 오페라가 인기를 모았고, 또 카이저의 바로크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사르티가 1753년부터 1775년에 걸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도입했고, 이어서 볼로냐에서 배운 빈의 요한 고트리프 나우만(1741-1801)이 덴마크어로 메타스타지오의 오페라를 썼다. 그 뒤 발터 T. C. Walter(1749-88), J. E. 하르트만(1726-93) 및 덴마크인 홀거 Holger Danske(1789)의 작곡자 쿤센 F. L. A. Kunzen(1761-1817) 등에 의하여 국민적 주제가 개발되었다.
스웨덴은 구스타브 3세 치하에서 이탈리아 오페라가 푸짐하게 무대에 올려졌다. 드로팅홀름궁전의 극장이 1754년에 우티니 F. Uttini(172395)의 감독하에 세워졌다. 우티니는 처음에는 이탈리아어로 작곡했으나 그 뒤 국왕(프레드릭 2세그도 역시 대본을 즐겨 썼다의 숙부)의 손으로 만들어진 대본을 바탕으로 스웨덴어로 <테티스와 펠레우스 Thetis och Pelee>(1773)를 작곡했다. 덴마크를 떠나 스웨덴으로 이주한 나우만은 왕립 오페라 극장의 낙성 축하를 위해 1782년에 <코라와 알론소>를, 이어서 <구스타프 바사>(1786)를 썼다. 그러나 이윽고 스웨덴 작곡가가 세상의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글쓴이 : 베토벨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