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은 자신이 쓴 피아노곡들을 상당수 오케스트라곡으로 편곡하여 원곡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899년에 피아노곡으로 작곡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도 그 중의 하나로서, 그 우아하고 기픔 있는 선율미는 라벨의 음악이라고 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매력에 넘쳐 있습니다.
이 피아노곡은 원래 라벨이 에드몽 드 폴리냑(Edmondde Pollignac) 공작 부인을 위해서 작곡되어 그녀에게 헌정한 곡입니다. 전체 연주시간 약6분 정도의 짤막한 소품에 불과하지만, 원곡의 아름다움과 기품은 각별합니다.
이 피아노곡은 1902년 4월에 국민음악협의회 연주회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1910년에 라벨 스스로가 편곡한 관현악용 파반느는 12월 25일 성탄절날 초연되어 피아노곡보다 더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라벨 자신은 이 음악에 매우 엄격한 비판을 가하여 여러 가지 결점을 지적해 놓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감미롭고 정감어린 선율로 가득찬 이 파반느에 특별한 문학적 표현은 없습니다. 다만 곡의 분위기를 이 우아한 춤곡의 이름으로 대신하고 있을 뿐입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라벨의 서정시
“라벨이 서민인 자기 신분과는 다른 왕녀를 영원한 사랑의 대상으로 삼은 것도 하나의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그는 그림 속 왕녀의 기품있는 얼굴이며 몸의 아름다움에서 남몰래 새로운 짝사랑의 대상을 발견했다.”
모리스 라벨(Maurice Joseph Ravel)의 피아노 음악의 세계
모리스 조세프 라벨은 150Cm의 단신이었지만 단아하고 산뜻한 옷을 즐겨입던 타고난 멋쟁이로 독신으로 일생을 살았으며 미식가였t습니다. 그는 서양 골돌품부터 동양의 도자기와 서화, 다기, 고가구 등 작고 세련된 장식품을 모으는 귀족적 취미의 소유자였습니다. 파리에서 한 시간가량 떨어진 몽포르 라모리에는 라벨의 저택, 르 벨베데르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저택의 베란다 앞에는 고대 로마 폐허를 연상시키는 유적지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라벨은 고요하면서도 고독한 말년을 보냈습니다. 밤을 지새우며 작업을 하고 새벽이 밝아오면 유적지로 산책을 나갔으며 산책길에서 돌아오면 곧장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고상하며 목가적인 저택에서 밤낮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그의 삶은 은둔자 혹은 이방인의 삶과 같았습니다.
라벨의 음악에는 숲속에서 날개치는 새, 광대, 밤의 환상 등 밤의 풍경과 꿈속에서 배태되어지는 황홀경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음으로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던, 색채간의 극대화를 꿈꾸었던 수많은 음악가들의 오래된 숙원이 라벨의 품위 높은 음악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근대 프랑스 음악의 두 기둥 중 하나로 평가되는 라벨은 1875년 3월 7일 스페인 국경에 위치한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또한 바스크 출신이었으며 아버지는 스위스 국적을 가진 철도 기관사로 평생 음악가의 꿈을 간직하고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라벨의 음악은 프랑스 음악으로 단정짓기에는 사실상 보삽한 코스모폴리탄적 에스프리가 느껴집니다. 예술의 관심이 깊었던 그의 아버지는 지식의 재능을 발견하자마자 좋은 음악 교사와 학교가 있는 파리로 이주하였습니다. 라벨은 7세에 당대의 최고의 피아노 선생이었던 앙리 지스에게 레슨을 받았고, 이후 에밀 드 콩브를 사사하였으며 약관의 나이 14세에 파리 음악원 피아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는 피아니스트로서 매우 작은 손을 가지고 있어서 옥타브 연타의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같은 난점을 지녔던 라벨의 피아노 곡들이 쇼팽, 리스트로 이어지는 난해한 레퍼토리 계보를 잇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닉합니다. 하지만 테크닉적인 난이도나 음향의 찬란함에 있어서 오케스트라를 방불케하는 <거울>과 <밤의 가스파르> 같은 곡을 라벨은 전혀 무리없이 연주해냈다고 합니다. 피아노로 출발한 작곡가답게 그의 첫 작품은 피아노곡인 <그로테스트한 세레나데>였고, 처음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획득한 작품도 <죽은 왕녀를위한 파반느>였습니다. 또한 왕성한 창작 활동을 보이던 20대 청년기에 이미 대표적인 피아노곡인 <물의 희롱>, <소나티네>, <거울>을 발표하였습니다.
그는 20c화성의 대가였으나, 화성학 과목에서 3년 연속 낙제하고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입상하지 못해 피아노 시간에 쫓겨나면서 진급도 못한 채 음악원을 잠시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몇 년후, 재수강 코스를 등록하였을 때 그는 이미 자신의 음악적 신념을 지닌 한 사람의 음악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16년간 음악원에 적을 두고 있었던 셈이다) 1879년 파리 음악원에 재입학 하였을 당시 라벨은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마친 가브리엘 포레에게 작곡 수업을 받게 되었고 앙드레 제달스에게 대위법과 관현악 작곡법을 사사하였습니다. 라벨은 자신의 재능의 값진 보석들은 모두 이 두 선생 덕분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파리 음악원에 있는 동안 라벨은 국제 사회의 중심이었던 파리의 다국적인 문화 지양분을 충분히 흡수하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피아니스트 겸 음악학자인 비네스와 샤브리에게서 음악적 상상력과 조언을 얻었으며 (스페인 음악은 라벨의 어머니의 고향이자 정신적 안식처이기도 했습니다), 림스키-코르샤프와 보로딘을 통해 배운 러시아 음악의 충실하고 화려한 관현악법을 자신의 무기로 삼아 빼어난 관현악법을 작곡하였고,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가뮬란 음악에 충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로테스트한 세레나데>와 <고풍스러운 미뉴에트>는 샤브리에의 영향을 받아 작곡하였으며, 사티의 영항을 받아 <사랑을 위해 죽은 여왕의 노래>(가곡)를 작곡하였습니다. 작품 속에서 그는 미해결된 7도와 9도 화음의 애용, 고풍스러운 효과를 내는 반음 내린 2도와 7도 화음 그리고 '미뉴에트'라는 오래된 형식의 차용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기에 쓰여진 관현악 편곡 <세레나데 서곡>(림스키-코르샤코프 원작), <목신의 오후 전주곡>(드뷔시 원작)은 젊은 나이에 이미 관현악법의 달인이 된 라벨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당대의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라벨은 그 무렵 예술가들이 모이는 살롱을 드나들면서 상류사회나 예술인들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위해 작곡하였으며 그 속에서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라벨은 그가 다니던 살롱의 여주인이었던 폴리냑 대공 부인을 위해 <죽은 왕녀를위한 파반느>를 작곡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맘에 들어 하지 않았고 피아니스트들이 작품을 연주하면서도 과도한 센티멘탈리즘에 빠지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습니다. 후일 그는 <죽은 왕녀를위한 파반느>를 소관현악 악보로 편곡하였는데, 이는 피아노 원곡의 분위기를 더 풍성하게 살려주고 있습니다.
25세에 새로운 20c를 맞이하게 된 라벨은 로마 대상 콩쿨에서 연속 낙방하는 일련의 사태(?)속에서도 새로운 작법, 즉 <물의 희롱>에서 새로운 움악 질서를 자신감있게 펼쳐나갔습니다. <물의 희롱>에 대해 라벨은 '이 곡에는 앞으로 내 작품에서 나타날 피아노 작곡법상의 모든 아이디어들이 들어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물의 희롱>은 라벨의 피아니스틱한 새로운 작품에로의 출발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곡의 제목은 리스트의 <빌 데스테의 물의 희롱>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듯한 물의 이미지를 폭넓은 음역에 걸쳐 퍼지는 아르페지오와 세밀한 리듬, 음색으로 성공적으로 묘사해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