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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는 형제교회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형제교회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형제교회는 브레드린에 의해서 영국에서 시작되었으나 지방교회는 웟치만 니에 의해서 중국에서 적은 무리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두 교회는 사실은 다른 교회입니다. 그렇지만 지방교회는 형제교회와 매우 유사합니다. 그것은 웟치만 니가 형제교회와의 접촉이 있었으며, 그의 제자요 동역자인 윗트니스 리 또한 형제교회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은 가운데서 그 영향이 지방교회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 지방교회는 많이 알려져 있기에 이제는 그리 생소하게 들리지 않습니다.그렇지만 지방교회는 통합측 교단에서 1976년 총회에 문제가 있는 교단으로 지목되고 이단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지방교회가 교회관이 잘못되었다는 정도를 알고 있으나 그 외에도 신론, 기독론, 인간론 등에서도 문제가 있음이 제기되고 있는데 "지방교회의 가르침은 무엇이며, 그들의 어떤 부분이 잘못 되었는지,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개혁주의신앙공동체의 질문과 답에 올려진 글을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기에 목사님의 허락을 받아서 이곳에 올려 소개합니다. 하오니 본 글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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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교회에 대하여
1. 지방교회(회복교회)
(1)웟치만 니
웟치만 니(Watchman Nee : 1903. 11. 4.∼1972. 5. 30)의 사상에 의한 신앙을 따르는 자들의 교회를 일명 '지방교회'라고 부릅니다(*지방교회는 '회복교회'라고도 불리운다). 그러니까 웟치만 니는 지방교회의 창시자인 것입니다. 이 지방교회는 1976년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총회에서 신론, 기독론, 인간론, 교회론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하여 총회에서 이단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웟치만 니는 이 이름으로 인해서 서양인으로 알기 쉬우나 실은 중국인입니다. 그는 1903년 11월 4일 중국 광동성 산두시에서 출생하였는데 '니 웽슈'의 아홉 남매 중 세 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원이름은 '니 쑤쭈'이고 후에 '니 투오썽'으로 개명했는데 영문이 '윗치만 니'(Watchman Nee)입니다.
웟치만 니는 어렸을 적부터 조부에 의해서 회중교회의 신앙을 갖고 자랐습니다. 이런 그는 열강의 선교사들과 관계를 가졌으며 영국을 포함하여 유럽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서구의 여러 교회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중국선교사들의 선교정책에 관하여 비판하기 시작하다가 1922년 복주의 자신의 집에서 교회 모임을 가져나가면서 적은 무리 운동을 펼쳐 나가기 시작한 중에 1926년 1월에는 중국 상해 서쪽 합동로 문덕리에 집회소를 마련하고 따로 모이기 시작했는데 이런 이들의 무리는 적은 무리의 교회란 '小群敎會'(또는 小會)로 불려졌습니다.
웟치만 니가 이렇게 적은 무리의 운동인 소군교회를 가져나간 것은 영국 성공회 선교사인 마가렛 바버(Miss Margret E. Barber)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영의 세계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졌으며 바버가 소개한 책을 읽고 '서구 신학 사상'과 '영국의 형제운동'을 발견했으며, 코더즈(C. A. Coates) 와 다비(J. N. Darby)에게 매료당해 형제단과 교제를 가져나갔으나 1933년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고서는 실망을 느끼고 '적은 무리의 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민족주의적 반항 또는 반식민지화된 중국의 내부적인 상황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웟치만 니에 의해서 전개된 적은 무리의 운동은 채 10년도 못되어 중국 각 지방에 600교회가 세워졌으며, 공산당 치하에서 2,000여 신도가 순교했고, 1949년에 이르렀을 때는 중국 내륙 전역에 700교회 7만 신도로 확장되었습니다. 웟치만 니는 50세 되던 해인 1952년 2월 3일 중공 공산당 국가 안전보장부에 체포되어 1956년 6월 21일 중공 대법원에서 15년 감금형을 받고 옥살이를 하던 중 1972년 5월 30일에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2)윗트니스 리
그런가 하면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서 윗치만 니의 제자이며 동역자인 윗트니스 리(Witness Lee : 이상수, 1905∼ )가 대만으로 건너가면서 오늘날의 지방교회 형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윗트니스 리는 누구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1905년 치프에서 출생하였으며 미국인 남침례회 선교사가 세운 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한 새사람' 과 '장로훈련Ⅳ- 주의 회복의 실행에 관한 몇 가지 중점들'에서, 그리고 중국의 남침례회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중국어로 된 「천로역정」을 교과서로 공부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는 20세가 되는 해인 1925년 2월 어느 날에 왕패진(汪佩眞-25세) 이라는 자매의 집회 설교를 듣고 그 날 오후에 구원받은 확신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미국장로교도들에 의해 설립된 영어로 말하는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윗트니스 리가 웟치만 니의 제자가 되고 지방교회를 세워 가게 된 데에는 '형제교회'(또는 형제회)와의 관계가 밀접한 데 있습니다. 그는 고향 치프의 형제교회의 멤버가 되어서 7년 반 동안 매주 다섯 번 그들의 집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윗트니스 리는 "과거에 나는 형제회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형제회는 말씀을 쪼개는 데 아주 뛰어 났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 영향에 의해서 윗트니스 리가 쓴 이십 칠 권의 주석은 위와 같은 원칙 하에 쓰여졌습니다. 그에 따라서 다분히 알레고리 성격을 띱니다.
윗트니스 리는 웟치만 니를 스승으로 모시면서 극진히 아끼고 따랐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웟치만 니의 요청을 받고 41세인 1946년에 중국 푸초로 가서 웟치만 니와 합류해 20년 이상을 동역했는데, 그는 모든 면에서 웟치만 니를 닮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비평가들의 주장과 같이 동작이나 표현 방식과 사용 용어 등 심지어 억양과 말하는 속도와 모든 면에서 웟치만 니와 똑 같았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웟치만 니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던지라 자기의 침실에는 오직 웟치만 니의 사진만을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둘의 관계를 페이스 장이라는 여인은 말하기를, "꼭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는 것과 같다."고 간증했으며 윗트니스 리 또한 말하기를, "나는 웟치만 니 형제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철저하게 내려놓았다. 무엇이든 그가 말하는 것을 나도 말했고, 그가 가르치는 것을 나도 가르쳤으며, 그가 전하는 것을 나도 전했다. 나는 백퍼센트 그와의 동역 안에 있었다.… 항상 웟치만 니 형제님의 분야를 연구했다. 그는 나의 교수였고, 나는 그의 학생이었다." 라고 말했는가 하면, "내가 말하는 것등 이 웟치만 니와 다르다고 생각할 만한 허점을 남기지 않았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웟트니스 리가 중국 본토 밖으로 나가게 된 것은 웟치만 니가 중국 본토의 공산화에 대비한 계속적인 선교대책의 일환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이 공산화되자 대만으로 건너가 이곳에서 주로 '가정교회'(House Church) 전도방식을 통해서 지방교회를 세워갔는데 1979년의 대만 교세는 대만 장로회 다음가는 교세인 4만 5천명에 이르렀습니다. 그후 위트니스 리는 1962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로 건너가 이곳에서도 지방교회를 세웠는데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 교인 수는 중국 내륙을 제외한 대만, 필리핀, 미국, 카나다, 일본, 브라질, 영국 호주, 뉴질랜드,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폴, 서독, 홍콩, 스위스, 그리고 한국 등 전세계에 1,100여 교회에 110,000명 정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3)한국에 지방교회를 세운 웟치만 니의 제자 권익원
지방교회가 우리 나라에 들어와 세워지게 된 때는 중국의 공산화 이후 웟치만 니의 직계 제자라고 자칭하는 왕중생(한국 본명:권익원)씨의 지도로 1966년에 시작되면서입니다. 그러나 권위주의적이고 폐쇄적인 성향을 띠었던 한국의 지방교회는 위트니스 리와는 교류가 거의 없다가 권씨가 사망한 것을 계기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현재 서울의 15개 집회소와 부산의 2개 집회소를 위시하여 전국에 60∼70개의 집회소에 4,000여 정도의 신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국 지방교회는 서울 서초구 서초2동 491에 본부 교회에 해당하는 서울교회 집회소를 두고 있으며, '한국복음서원'(대표 이희득)을 통해서 지방교회의 출판물을 보급해 나가고 있습니다.
2. 지방교회 가르침의 문제점
지방교회는 웟치만 니에 이어서 위트니스 리로 이어지고 있으며, 지방교회의 가르침은 이 두 사람의 가르침에 따르고 있는데 이 두 사람이 한국 교회에 해악을 끼친 영향은 실로 큽니다. 그것은 한국교회에 많은 이단들(김기동, 권신찬, 이명범 등)을 낳게 하는 모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웟치만 니와 위트니스의 가르침을 좇는 지방교회 가르침에서 무엇이 문제되는 잘못이 있는 것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선언하게 된 장로교회 통합측의 76회 총회(1991년)에서 보고된 내용에 나와 있습니다. 장로교회 통합측 경북노회는 '지방교회(회복교회)의 정체에 대한 질의'를 제출했고 그에 따라서 연구되었습니다. 그리고 연구결과 '이단'으로 밝혀졌다고 총회(제 76회, 1991년)에 보고했고 그대로 가결되었습니다. 장로교회의 모든 교단을 비롯하여서 각 교파의 교단이 지방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선포한 것은 아니지만 통상 한 교단에서 이단성을 연구하고 이를 총회에서 규정하고 선포하면 타교단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타교단이 지방교회에 대한 별도의 연구와 더불어서 이단이 아님을 공식적으로 규정하고 선포한 것이 없음으로 해서 통합측의 입장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에 지방교회가 어떤 문제점으로 인해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과연 그러한지를 살피고 이에 대한 바른 판단에 의해서 대처해 가야 하겠습니다.
(1) 신론의 문제점
가) 윗트니스 리는 '신인합일주의'를 가르치고 있다 : 윗트니스 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 하나님 자신을 사람 속에 넣어서 사람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같게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윗트니스 리, [내주하는 그리스도], pp.10∼ 11). "하나님 자신을 대량으로 생산할 것을 계획"(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p.10) "자신을 제품으로 생산"(같은책, p.10)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닌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똑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내주하는 그리스도], p.10., [하나님의 경륜], p.244). 윗트니스 리의 사상은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에 뛰어 넘을 수 없고 엄격한 차이를 인정해야하는 우리의 신앙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나) 윗트니스 리의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이다. : 윗트니스 리는 구약에서의 하나님에게는 신성만 있었으나(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p.15) 성육신의 과정을 통과하여 '사람과 함께한 하나님' 즉 '하나님-사람'이 되었다가 부활을 통하여 인성을 포함한 영으로 변형되므로써(윗트니스 리, [그 영과 몸], pp.105∼107) "하나님의 세 인격은 세 영들이 아닌 하나의 영"([하나님의 경륜], p.16)으로 세 인격이 한 영 안에 있는 '삼일(三一)하나님'이 되었다고 한다. '삼일 하나님'이란 하나님은 성육신의 과정을 거치는 단계를 통해 세 인격이 하나로 발전된 것이라는 말이다(같은 책, p.110). 윗트니스 리가 비록 양태론적 삼위일체관을 변형된 형태로 표현하고는 있지만 명백한 양태론으로서, 그의 사상은 하나님의 전능성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또한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불변성과 영원성을 무너뜨리는 잘못된 것이다.
(2) 기독론의 문제점
예수님의 인성에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예수) 인성이 아들의 명분으로 태어나기 위하여 부활이 필요했다. 부활 이전에 그리스도는 그의 신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의 인성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윗트니스 리, [그 영과 몸], p.73)고 하여, 인성을 입은 그리스도는 거룩하게 될 필요가 있었는데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다(같은책, p.76)고 한다. 윗트니스 리의 기독론은 결국 사람이 하나님과 똑 같이 될 수 있다는 신인합일 사상에서 나온 것으로서 예수님이 나실 때부터 승천하시기까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양성교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3) 인간론의 문제점
영, 혼, 육 삼분설을 취하면서 인간의 타락은 육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이 되어 전인적인 타락이 부정된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아담이 '하나님 자신인 생명나무'를 취하지 않고 '사탄인 선과 악과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음으로 사탄을 몸 속에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윗트니스 리, [하나님의 경륜], p.130., 윗트니스 리, [사람의 영], p.45).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이라는 세부분으로 창조되었다는([하나님의 경륜], p.136) 삼분설을 주장하면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순수한 사람은 중립이었으며(같은책, p.127) 몸도 아주 선한 것이었으나 사탄을 몸에 받아들이므로 몸이 사탄의 거처가 되었고 따라서 부패되어 흉하고 악마같은 육이 되었다고 한다(같은책, pp.129∼130). 이 사탄은 육신에 거처를 정하고 혼에 영향을 준다음 혼을 통해 영을 죽이려 하기 때문에(같은책, p.138), 성령이 사람의 영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과 사탄이 매일매일 우리 안에서 싸우고 있다고 한다(같은책, p.139).
인간의 타락은 전인적인 것인데 비해 그것을 육체적인 것으로만 봄으로 몸만 타락하고 영은 타락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범죄하는 영은 죽을지라"(겔 18;20)는 성경말씀과 다르다. 또한 생명나무가 하나님이요 선악과는 사탄이라는 등 잘못된 주장을 함으로 결국 윗트니스 리의 주장은 성경적으로 지지될 수 없는 허황된 사변과 논리일 뿐이다.
(4) 교회론의 문제점
기성교회를 바벨론 음녀라고 하며 기성교회 목사와 예배 등 대부분의 제도를 부정한다.
기독교를 바벨론이요 음녀라고 보아 기성교회는 타락해 죽어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지도 않고 불태워질 것이라고 한다(윗트니스 리, [주의 회복에 관하여], pp.12∼13., 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pp.94∼97, p.103., 윗트니스 리, [그리스도냐 종교냐], pp.210∼211., 윗트니스 리, [일곱영], pp.10∼11, p.49).
기성교회의 목사와 예배를 부정하고(웟치만 니, [사역의 재고], pp.240∼244, p.251, pp.257∼269), 침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으며(웟치만 니, [그리스도인 50 필수과정 1], pp.7∼18., 윗트니스 리, [진리공과-제1단계-제3권], pp.86∼89., [진리시리즈2-구원이란 무엇인가?]), 성령 충만을 위해 '오 주 예수여!'를 반복적으로 주문처럼 외우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윗트니스 리, [성경의 핵심], p.138., 윗트니스 리, [그 영과 몸], pp.27∼28, pp.55∼61, p.83, p.93, p.110, p.115., 윗트니스 리, [일곱영], p.117).
(5) 연 구 결 과
윗트니스 리 사상은 웟치만 니 사상과 함께 한국교회의 많은 이단들을 낳게 하는(김기동, 권신찬, 이명범 등) 모태가 되는 명백한 이단이다.
이상은 통합측 76회 총회에서 보고된 지방교회의 가르침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보고 형식이기 때문에 지방교회의 가르침이 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되고 있지는 않기에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상당히 많은 분량의 내용을 기술해 나가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보고에서 말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도 지방교회의 가르침이 어떤 내용에서 잘못되었기에 이단으로 규정되었는지를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3. 보충-지방교회의 교회론과 신학 및 성경 해석의 관점 비평
다만, 지방교회의 가르침에서 '교회론' 부분만은 여기서 좀 더 추가하여 보충적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그것은 지방교회의 교회론 부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되는 점을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이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지방교회의 신학 및 성경 해석의 관점 문제도 보충 설명으로 언급하고자 합니다.
(1) 지방교회의 교회론 비평
지방 교회는 "지방교회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방교회란 한 도시에 한 교회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며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나타남을 말한다. 최초의 지방적인 교회는 예루살렘교회이며, 예루살렘 안에는 사도, 장로, 집사, 오순절, 방언, 침례, 복음전파, 떡떼는 모임, 병고침 등도 있었지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한 교회로 모였다. 성경에서 교회는 한도시, 즉 한 지방에서 한 교회로 나타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의 간증을 나타내기를 추구하기 때문에 어떠한 교파로 통합하지 않고, 다만 피로 씻음받고, 거듭나고, 성령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들로서 각 지방에서 함께 하나로 모이고 있다. 우리는 모든 참된 믿는이들을 환영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인 그들과의 교통을 추구한다. 이 땅 위의 주님의 간증이 확대되고, 그분의 신부가 그분의 곧 다시 오심을 위해 예비되도록 그 간증이 더욱 강화되는 것이 우리의 참되고도 간절한 갈망이다. 주님이 오늘날 이 땅 위의 그분 자신의 사역을 존귀케 하고 옹호하시기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입장' 4항에서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의 하나 됨의 입장 위에 선다(마 16:18, 계 1:1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피로 구속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모든 믿는 이들이 각 도시에 있는 교회의 지체들임을 인정한다(고전 1:2, 12:23-26)."라고 천명되고 있으며, '우리의 사명' 3항에서 "믿는 이들이 각 지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스도를 단체로 나타낼 수 있도록 각 도시에 교회를 세운다(행 8:1, 13:1, 20:17, 고전 1:2, 계 1:11, 2:1, 8, 12, 3:1, 7, 14, 행 15:41, 고전 16:1, 갈 1:2, 고전 16:19, 고후 8:1)."에서 자신들이 어떻게 교회를 세워 나갈 것인지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두에서 두드러지는 지방교회의 교회에 대한 이해와 관점은 윗트니스 리가 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내용에서 잘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다', '어떤 조직체가 아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나님의 집이다'를 말합니다.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해지고 지방교회의 교회론은 지극히 성경적인 이해요 관점입니다.
문제는 교회의 출현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교회의 출현은 지방인 것과 이 지방교회의 특성이 '우주적'인 것을 들면서 지방교회의 행정을 언급하고 있는데 "각개 지방 교회를 단위로 독립적이다"는 것입니다. 요지는 각개 지방 교회는 행정적인 독립성을 띤다고 하는 것으로 각지방 교회가 독립적 단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지역에 하나의 지방교회만이 존재하는 것이요 각개 지방의 교회는 독립적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교회의 지방성을 유지하고 보존해 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정면에서 지방적이어야 하고 또한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독립성은 분명히 그렇습니다. 모든 지교회(Local Church)는 한분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따라서 한분 그리스도의 지시와 명령을 따릅니다. 그러기에 A교회가 B교회를 간섭할 수가 없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교단은 당회가 노회와의 관계 속에서 상하, 계급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만 이는 교회 정치의 원리 면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행정적인 독립성을 띠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방교회가 교회론에서 큰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교회는 '지방적'이어야 한다는 것에서 '교회는 어느 지방에서든 하나이다'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한 지방에 단 하나의 교회가 있을 뿐 결코 두 개나 그 이상의 교회가 있을 수 없다. 한 지방에 두 개 이상의 교회가 있게 되는 순간 곧 교회의 일원성은 파괴되고 만다"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윗트니스 리는 어떤 뜻에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지상에 이런 저런 이름으로의 교회, 곧 교파가 존재한데 대한 반발로서였습니다. 윗트니스 리는 이를 교회의 일원성을 역행하는 '교회 다원화 경향'으로 봤습니다. 한 도시 안에서 장로교회가 있는가 하면 감리교회도 있고 성결교회도 있고, 침례교회도 있고 루터교회도 있고 구세군도 있고, 카톨릭교회도 있고 말이죠.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인데 무엇 때문에 '칼빈'의 간판을 걸고, '루터'의 간판을 걸고, '웨슬레'의 간판을 걸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영적 음란이라고 보았습니다. 한 여인이 여러 명의 남편의 이름을 갖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윗트니스 리는 각 지방에 여러 개의 교회가 있으나 여러 종류의 교회일 수는 없으니 단 한 종류의 교회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교회의 수는 많을지언정 많은 종류의 교회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종류별로 나누이는 것을 그리스도의 몸이 나누이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누일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물을 근거로, 인도자나 은혜를 끼친 자를 근거로, 받은 바 은혜를 이유로, 성경 해석의 견해 차이 등으로 나누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서 교회는 모든 입장을 버리고 지방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분열교회에서 회복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회복교회'라고도 부릅니다.
윗트니스 리의 이러한 교회관, 곧 지방교회의 이러한 교회관은 첫째,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서 나누일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데 따른 것으로 그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어떤 교파로의 이름으로 있든지 간에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어떤 교파로의 이름으로 있든지 간에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인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또는 루터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웨슬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이든지간에 그 교회가 참된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참된 교회라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입니다. 즉 '보편교회'입니다. 그러나 칼빈주의 신학과 신앙을 말하더라도 참된 신앙에 의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참된 교회를 이루고 있지를 않다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이지를 못합니다. 즉 '보편교회'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카톨릭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 교회가 '카톨릭'(Catholic)이어서가 아닙니다. 'Catholic'이란 말은 '보편의'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말하지 않는 것은 그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인데 그것은 예배를 비롯한 그릇된 교리의 신학 사상과 제도와 정치 때문입니다. 하지만 웨슬레 신학 사상과 신앙을 말하는 교파의 교회인데 그 교회가 올바른 신학과 신앙에 서서 나간다면 그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가령 감리교회의 교단 교회이고 성결교회의 교단 교회인데도 불구하고 개혁교회의 신앙으로 교회를 이루어 가는 교회가 있는데 그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인 것입니다. 하지만 장로교회의 교단 교회로서 개혁주의 교회임을 말하는 고신을 말하고 합동을 말하고 이런 저런 교파를 말할지라도 개혁교회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가령 순복음교회식의 신앙을 말하고 성시화 운동을 해 나가고 영성훈련을 강조하며 개혁교회의 신앙에서 이탈하여 있다면, 이러한 교회는 어떤 교파의 장로교회일지언정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는 아닙니다.
지방교회는 장로교회이니 감리교회이니 하는 이런 저런 여타의 교회의 또 다른 이름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비록 '회복교회'라는 의미를 부여하고서 분열교회와의 차이를 가지며 차별을 둘지라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울교회, 부산교회 등 등 지방교회의 이름으로 말할지라도 소위 웟치만 니와 윗트니스 리를 따르는 '지방교회'로서의 이런 저런 이름의 지방교회가 아닌가요? 이렇게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는 교회가 지방교회[회복교회]입니다.
무엇보다도 지방교회는 자신들을 회복교회로 말하면서 다른 교회들은 '분열교회'로 몰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서 분열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나누어져 있는 교회이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있는 생명 없는 죽은 교회이니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인 교회들마저 부정하고 거부하는 잘못을 행하고 있습니다.
둘째로는, 아울러 지방교회는 각 지방에 오직 하나의 지방교회가 존재할 뿐임을 말합니다. 가령 초대 교회에서의 예루살렘교회, 안디옥교회, 고린도교회, 데살로니가교회, 갈라디아교회...이렇게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하여 가는 사도의 교회 설립 시기에 있어서는 성령께서 각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워 나가심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온 땅에 충만케 하여 나가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각 지역[지방]에 세워진 교회에 그 지역[지방]의 이름으로 교회가 불려지는 것 외에는 달리 다른 이름으로 불려질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늘날처럼의 조직적인 교회의 형태도 아니었습니다. 각 지역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지역[지방]교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각 개교회는 지교회로 불려집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서이며 또한 오직 한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지역 교회로서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 교회가 단지 지방의 이름으로만 교회 이름을 할 수 없는 실정에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지방의 이름을 포함해서 이런 저런 명사의 이름으로 교회를 부른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보편교회'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의 다원주의'처럼 '교회의 다원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방교회가 서울, 부산, 대구 등 한 지방에 있는 여러 집회소를 서울, 부산, 대구 등 하나의 지방교회로 부르면서 제1집회소, 제2집회소 등으로 명명한다면 이것이 한 지역에 있는 여러 교회가 이런 저런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한편, 지방교회의 교회론에서 문제되는 점은 교회의 직분에서 목사직을 세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지방교회는 목사직를 두지 않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는 자와 회중 간에 아무런 구별이 없이 단지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부릅니다. 이는 소위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제도권적 담임목사 제도를 결코 용납치 않는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말씀 증거의 사역이 모든 형제들에게 동일하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말씀 증거의 사역은 실질적으로는 몇 몇 형제들에게 제한적으로 편중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점은 성경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워나가시는 일을 위해 교회에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 목사를, 그리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 나갈 수 있도록 하며 거짓된 진리로부터 신자를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다스리는 장로를,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의 자비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일을 위해서 돕는 집사의 삼직을 원리적으로 두셨기 때문입니다.
지방교회가 교회에 목사직을 두지 않는 것은 사실은 성직제도를 부인하는 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인데 이는 지방교회가 형제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데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방교회와 형제교회는 모두가 제도권 교회를 교파 교회라고 부르며 혐오할 정도로 격하시켜 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목사직을 세우지 않게 된 배경은 처음부터 성경의 원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원래 형제교회를 체계화시킨 대표적 신학자인 J.N. 다비라는 영국 성공회 목사가 스스로 목사직을 사임하고 영국의 플리머스 지역에서 일단의 무리들과 더불어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형제교회의 시발을 플리머스 형제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웟치만 니는 영국으로 건너갔을 때 이런 형제교회의 교회운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곧 지방교회를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2) 지방교회의 신학 및 성경 해석의 관점 비평
지방교회는 형제교회의 신학과도 유사합니다. 이는 모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방교회와 형제교회 모두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함에 있어서 소위 영해적 해석(알레고리적 해석)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계시록의 빌라델비아교회가 다름 아닌 형제교회요, 나아가 지방교회를 가리킨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방교회를 흠 없는 교회, 가장 이상적인 교회, 가장 성경적인 교회로 지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이 두 교회는 제도권 교회는 아예 교회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도권 교회는 다 죽은 교회요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교회처럼 여깁니다. 또 하나의 다른 예를 들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상처받은 자는 죄인이요,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요, 레위와 제사장들은 타 종교지도자들이요, 주막은 교회요, 사마리안인이 다시 갖다 돌아오겠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비유한다고 해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영해적 해석은 참으로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성경 해석으로서 성경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추고 있습니다.
4.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지방교회는 성경적 원리에 의한 교회를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의 정체성과 그 형태에 있어서는 심각히 왜곡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니라 신론에 있어서도, 기독론에 있어서도, 구원론에 있어서도, 인간론에 있어서도, 그리고 이것 외에도 세대주의 신학에서 보듯이 신앙고백에 위배되는 다른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도......, 이렇게 기독교의 교리 전반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개혁주의]의 신앙으로 있는 교회는 신자들을 지방교회[회복교회]에 참여시킬 수가 없습니다.
님이여!, 님은 님의 부인께서 과거 결혼 전에 지방교회 사람들과 알고 지냈다가 님과 결혼 후에는 거리를 두었었는데 최근 집안 일로 인해 그 분들과 다시 접촉하는 기회가 있어 식사 초대를 받기도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지방교회가 잘못된 것은 알기는 아는데, 그들과 거리를 두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아예 그들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접촉의 기회가 주어지면 접촉을 해야하겠습니까?
나는 이 문제에 있어서 지혜가 필요할 것이라고 여깁니다만,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나는, 만일 지방교회의 신앙관이 개입이 되는 만남이 된다면 단호히 거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러나 이것이 이웃도 필요하지 않고 다른 신앙이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과는 일절 대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현명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과연 지방교회 신도들의 식사 초대가 아무런 조건 없이 단순히 전에 알고 지냈던 관계로서 정(情)이 그리워 정을 나누고자 해서일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 설사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식사 초대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과거에 가졌던 지방교회 신자간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고 거론하지 않고 아무런 이야기를 주고받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님의 부인이 그들과 어떤 자리를 가질지라도 과연 무릇 주께 가진 참된 신앙과 교회에 대한 인식을 견고히 가져나갈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해서, 이 점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이에 따라서 만일 문제될 수 있는 점이 있으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지혜롭게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잘 지켜 나갈만한 믿음에 있다면 그 자리에 임해서도 지혜롭게 잘 대처해 나가겠지요. 먼저 님께서 부인과 이 문제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 봄이 좋을 듯 합니다.
이상으로 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마치겠습니다.
부디, 본 답변이 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올바른 판단과 주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기를 위해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럼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첫댓글 한아름님 올려주신 자료 잘 봤습니다. 유사한 경우라 주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 눈을 가린 들보를 빼고 본다면 아마도 지방교회 형제들을 향한 정죄만큼이나 개혁주의 교회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위 글과 같은 선입관과 편견은 개혁주의신앙공동체 목회자 한사람만으로 제한되기를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화!!"
마디사이님이 보시기에는 선입관과 편견일 수 있겠으나..그곳에 대하여 좀 더 이해를 돕기위해 올리셨을 것으로 봅니다. 마디사이님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시는 것 같습니다^^ 요즘 예향에서 열심이시던데 많이 터프해 지신 느낌이네요..."주 안에서 평화!!" 복창합니다.ㅎㅎ
마리안느님께 //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는 일입니다. -> 주 안에서 평화(우리 성경에서는 주로 평안으로 번역하죠.)를 빈다는 말을 쓰면서 형제를 이단으로 말하는 자를 가만히 보고 있어야 합니까? =>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위해 이단이라는 정죄아래서도 형제사랑을 놓치지 않는 이들은 오히려 이단이라고 정죄받은 형제들입니다.
마리안느님께, "그곳에 대하여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 올리셨을 것으로 봅니다."라는 말씀은 위 글을 썼다는 분과 같은 관점이심을 의미하시는 것 같습니다. 혹 웟치만 니 형제님이나, 위트니스 리 형제에 대해서 충분히 아시면서도 그러한 생각이시라면 좀 들어보고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개인적인 관점은 니형제님과, 리형제는 꽤 다르고 니형제님에 대해서는 많이 긍정적이고 그분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믿고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리 형제의 경우에는 많이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마리안느 님의 다른 관점이 있으시면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ㅎㅎ 마디사이님과 순례자님은 지방교회에 소속해 보신적 있으시지요? 저는 지방교회를 이단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구원론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순례자님은 한때 그곳에 소속해 보셨다고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단순한 지식으로만 그치고 있는데 순례자님께서 경험해 보셨으니 그곳의 장단점을 잘 아실텐데 좀 가르쳐 주실래요? 왜 그곳을 나오셨는지 ...? 이 참에 좀 더 자세히 배워보지요^^
마리안느님께 // 저는 소속해 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개혁주의신앙공동체 목회자와 그의 신학과 견해를 따르거나 긍정하는 이들에게 형제를 정죄하고 이단으로 가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를 경고한 것입니다. 권면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한아름님의 답변 글을 읽고 어느 한 부분이나마 배울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제가 대학 1학년때 감동으로 읽은 것이 웥치만 니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생명의말씀사)였습니다. 치밀하고 분석적인 책을 읽으면서 복음에 눈이 떴습니다. 저는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런 책을 한번쯤은 읽었으면 합니다.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갇힌 웥치만니는 나이 69세에 세상을 떠나기 전에 베개 밑에 종이 한 장을 남기고 갔는데 그 위에는 매우 떨리는 손으로 적은 몇 줄의 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속량하기 위해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가장 놀라운 사실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죽노라."
웥치만 니는 생전에 두 가지 책을 썼는데, 하나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고, 하나는 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외의 책들은 모두 웥치만니의 강의를 노트한 것을 나중에 정리한 것입니다.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사실관계이기 때문에 밝히는 것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만 니형제께서 직접 쓰신 책입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1938년-1939년까지 영국 런런과 유럽 몇 곳에서 전하신 니 형제님의 설교 기록이라고 그 책에서 밝히고 있습니다.(복음서원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다른 책들이 위트니스 리의 영향을 받았다는 부분은, 개인적으로 절대 그렇지 않다 할만한 근거는 없지만 두 사람의 책의 성질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니형제님의 책들은 아마 거의 니형제님 적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아~그렇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잡지에 웥치만 니가 기고한 글로 알고 있었는데요.
문제는 거기에서 생겼습니다. 오늘날 많은 책들이 웥치만니의 이름으로 나오는데, 실상은 위트니스리가 편집한 것이기 때문에 위트니스리의 사상이 많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웥치만니의 초기 사상과 다른 글들을 종종 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혼란스럽게 됩니다.
저는 지방교회 사람들을 만난 적이 거의 없어서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그들의 책을 미루어 볼 때, 그들이 폐쇄적이고 극단적인 것은 사실일 수 있으나, 그들을 이단으로 모는 것은 곤란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음 그렇군요...
지방교회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현대 기존교회 모두를 이단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지방교회 사람들은 기존교회와 어떤 차이점이 있어서 기존교회를 인정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봐야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한아름님께 // 님이 아래 풀러 신학 대학 글을 개혁주의 신앙공동체 목회자에 보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찬가지로 풀러(Fuller) 신학 대학을 분석하고 비판하여, 이단으로 정죄하여야 할지, 아니면 지방교회가 정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과 교단이 정죄한 말들을 모두 철회하고, 잘못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구하여야 할지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