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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실험적으로 써 본 것이라 생각하여 제가 관여하는 수필 모임 '수필아카데미' 방에 올렸더니
조회수가 많이 올라가네요.
'어, 이글이 재미있나. 싶어서 여기에도 올려 봅니다.
그 보다는 실험적으로 쓴 글이라서, 길게 쓴 글로 ---
*동네 오빠의 자전거 뒤에 타고
이동민
문학에서 사람이 살아온 일생을 다루면 응당 소설이려니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살고있는 인간의 삶을 그리는 글은 소설이기보다는 수필에 가깝다. 소설은 허구이고, 수필은 사실은 아니더라도 진실을 찾아가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여인의 삶을 소재로 글을 써본다. 나는 수필이라면서 써본다.
산언덕은 경사가 완만하고 산 비탈에 초가 여러 채가 비비듯이 붙어있다. 동네의 끄트머리 쯤에는 칙칙한 지붕의 와가도 한 채 있다. 마을에서 내려다보면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이 산 계곡을 빠져나와 구불텅거리면서 점점 넓어지는 들녘의 가운데로 흘러간다. 개울의 둑이 길이다. 자동차가 다니기에는 비좁아도 자전거는 쌩쌩 달릴 수 있다. 둑 아래로는 비니루 하우스도 보이고, 움막인지, 농막인지, 헛간채도 보인다. 산골짜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개울도, 들녘도 골짜기 안으로 빨려들어가서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들녘은 청보리의 푸른 색에 묻혀서 비단결처럼 윤이 난다. 물감을 칠한 듯 맑고 깨끗하고, 아름답기만 한다. 개울을 따라 눈길을 아래로 보내면 저 멀리 시멘트 다리가 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꽁무니에 먼지를 달고 달려오던 버스가 하루에 서너 번씩 다리를 넘는다. 더 아래로, 더 멀리멀리 뻗어있는 신작로는 마을 처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해준다. 종일, 동네는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고, 버스가 다리를 건느는 하루의 몇 번 쯤은 처녀들이 한껏 상상을 펼치는 시간이기도 하다. 버스의 종착역이 바로 그들의 꿈이 달려가서 머무는 곳이다.
우리 모임은 10년도 더 오래 이 식당에서 월례회를 하였다. 식당의 여사장은 고향 이야기를 할 때는 그냥 평범한 아줌마이다. 10년 너머 이 집에서 모임을 하다 보니 우리는 이 집의 여사장과도 친구처럼 가까워져서, 그녀는 우리 앞에서 별별 이야기들을 다 털어 놓는다. 우리가 손님이기보다는 뭐 오빠들 같다나. 우리 모임의 회원들이 바로 시골 출신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
그러나 저쪽 구석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가 술주정을 하느라 식탁을 치면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를 때면, 아줌마는 사각 링 안의 격투기 선수처럼 투사로 돌변한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도 쌍스러워진다. 나는 그럴 때마다 포효하는 한 마리 늑대를 본다. 두려움마저 느낀다. 내 친구는 ‘이 장사를 해서 아이를 대학까지 보내려면 성질이 더러워야 한데.’라며 대수롭잖아 하였다.
그래도 우리들의 모임에 끼어들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눌 때는 영락없이 시골 아줌마이다. 모임의 회원들도 아줌마의 이야기 듣기를 좋아한다. 아무리 시골 아줌마 티가 난다고 해도 정숙한 부인네들의 말씨와는 다르다. 말투가 약간 쌍스러우니까 더 재미있다고 한다. ‘모임에는 여자가 끼어야 재밌데이, 남자들끼리만 모이면 재미가 없잖아.’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었다.
아줌마의 이야기라고 해야할까. 넉두리라고 해야할까. 시시때때로 시골에서 살던 시절의 일을 꺼낸다. 아마도 지금의 고단한 도시 생활을 탈출하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골은 향수가 되어서 생각이 더 간절해지나 보다. 향수에 젖을 때라야 지금의 고달픔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나더러 왜 대구로 나와서 이 고생이냐고들 하는 사람이 많아. 농촌생활이 너무 지루해서. 시골에서 살아보라지, 얼마나 갑갑한지. 숨이 턱턱 막힌데이------,.”
그건 농촌 마을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나도 느꼈던 일이다. 시골은 침묵이고 정적이다. 천길 물속처럼 소리가 없다. 물론 바람소리, 개울물소리는 들려오지만 고요 속에 착 가라앉아 있어, 햇총각, 어린 처녀의 마음을 깨워내지는 못한다.
“재미라고는, 개울 둑 아래의 농막에서 마을 처녀, 총각들이 어른들 모르게 만나서 키득키득거리는 일 뿐이야.”
우리의 아줌마 사장님이 깔깔대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잠시 침묵했다. 아마도 옛 그때가 그의 미릿 속을 스쳐가는 지 모르겠다.
초갓집의 얕은 담너머로 들녘을 내려다보면 유독 그 농막이 뚜렷하게 보였다. 동네 오빠들이 나름대로 멋을 내면서 모여들고,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집에만 들이박혀 지루한 시간을 죽이는 어린 시골처녀는 농막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공상에 젖어보는 것이 즐거움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움막이나 다름없던 그 농막이 더 또렷한 모습으로 떠오른지도 모른다.
그때, 자전거를 가진 동네 오빠가 자전거를 타고 개울둑길을 따라 쌩생 달라면 정말 멋있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우리도 농삼아서 ‘그 오빠 좋아했구나’ 말을 건네본다. ‘놓아하긴-’ 인지, 아닌지가 애매하게 말한다. 정말 무슨 뜻인지 짐작이 안 되지만 우리도 굳이 알 필요가 없었다.
‘시골에 살아보면 정말 재미가 없어. 지루하고, 지루하고, 지루하고---, 어휴, 숨이 꽉꽉 막힌다. 그 때의 생각은 시골만 벗어나면 세상이 환하게 밝이진다고 믿었다니. 그래서 버스가 먼지를 날리면서 사라질 때마다 멍하니 바라보면서, 멋진 다른 세계를 그려보았단다.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없지만, 하여간에 지금보다는 더 좋은 세상이리라 믿었단다.
시골서 학교를 다닐 때의 내 단짝 친구가 영업 때문에 아줌마의 식당을 자주 드나들었다. 그래서 시골 학교 모임의 회원인 우리들이 만나는 장소로 소개해주었다. 나는 회징직을 맡고 있었으므로 식당 주인과, 아니 사장이라고 하자. 사장님과 말을 나눌 기회가 많았다. 더러 신세 한탄이랄 수도 있는 넉두리도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길게 타령조로 늘어놓는 성격이 아니어서, 그의 삶을 세세히 알 수는 없었다. 내가 아줌마의 이야기를 쓸려니 군데군데에 내 상상력으로 땜질을 하여 이야기를 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내 이야기가 거짓투성이인 소설은 아니다. 왜냐면 내 글에는 사실과는 좀 다르더라도 그녀가 말하고 싶어하는 진실을 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말도 그 아줌마는 깔깔 웃으면서 하였다.
“매일 우리 동네 앞으로 먼지를 날리면서 달리는 버스를 타고 우리 마을을 벗어나니, 글쎄 대구에다 내려주지 않겠어.”
“단봇짐을 쌌구나.”
“단봇짐은 아니고, 그때는 시골의 앳된 처녀아이들이 도시에 돈벌러 간다고 하여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도시로 나왔어요.”
대구 변두리의 베짜는 공장에 가니, 또래 아이들이 많더라면서, 그 중에서 충청도에서 온 아이와, 강원도에서 온 아이와 친해졌다. 맨날 셋이서 어울려 다녔다고 했다. 여중을 졸업하고, 시골에서 박혀 있으려니 할 일도 없고, 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도 강하였고---. 그래서 자기처럼 도시로 나가는 버스를 탄 애들이라고 하였다.
꿈 많은 처녀 시절을 섬유공장의 덜거덕거리는 소리 속에 묻어버렸단다. 간혹 맞이하는 휴일이면 셋이서 극장에도 가고, 동성로도 거닐어보았지만 백마를 탄 왕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다고 돈이 모이는 것도 아니고, 아줌마 말대로 꽃다운 청춘이 의미 있는 흔적의 점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햇살 속의 안개처럼 녹아버렸다.
나이가 많아지자 뿔뿔이 자기의 길을 찾아 흩어졌지만, 그래도 셋은 지금도 만나는 친한 친구로 남아 있단다. 그러고 보니 식당에서 친구라면서 인사시켜주던 여인이 생각난다. 그 여자가 셋 중의 한 사람이었었나 보다. 여 사장에 대해서 훤할 정도로 알고 있는 친구에게 사장의 친구라는 여자를 만났는데, 야, 어마어마하게 이쁘더라, 라고 했더니 씨익 웃더니 얼굴 값을 톡톡히 한다고 했다. 식당 아줌마에 의히면 처녀시절에 넘보는 남자들이 줄을 이었다나. 그 중에 돈 많은 남자를 선택하였는데, 글쎄다. 본 부인이 있더라지 않는가. 머슴아 하나만 덜렁 낳고, 샛방으로 밀려나 생활비라면 조금씩 주는 돈으로 아이와 함께 산단다. 재미있는게 작은 돈으로 살면서도 편하고 좋다면서 만족한단다. 내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성격 탓이겠지만 거, 참!’ 이라고 했다.
‘셋 중의 또 한 명은?’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아, 강원도에서 왔다는 친구 말이지. 평범한 근로자 청년을 만나 결혼했는데, 형편이 어려우니 조그만 구멍가게도 내고 하였는데, 장사가 안 되어서 그것도 문 닫았다 하더라.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살지 뭐, 공녀가 어떻게 공주가 되겠어. 식당 아줌마의 말이라고 했다.
나는 친구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산업화를 겪으면서 우리 또한 시대의 변화라는 회오리속을 어떻게 오늘까지 걸어왔는지를, 어떻게 오늘의 우리가 되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세 여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멋진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그냥 나의 꿈이었고, 자금까지 시도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식당의 여사장을 모델로 긴 수필을 쓰려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의 주인공인 식당 사장 아줌마 이야기를 하다가 옆길로 빠진 듯하다. 적극적인 성격인 탓에 백마 탄 왕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발벗고 신랑감을 찾아 나셨다. 근로자가 아니고, 사무실에 앉아서 근무하는 월급쟁이를 찾아냈다. 아이도 낳고, 정말 평범한 아줌마로 만족하면서 살았었다. 그런데 30대 초반에 신랑이 덜컥 죽어버렸다.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는 나도 듣지 못했다. 하여간에 셋 친구 중에 제일 앞서서 나갔는데, 하루 아침에 꼴찌로 미끄러져 버렸단다.
엄마만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밟히고, 그것보다는 내가 살기 위해서,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한 압박으로 생활전선으로 나서면서 선택한 것이 자그마한 식당이었다. 그러면서 한 말이 돈버는 재주라고는 일도 없다보니, 생각나는 게 식당밖에 없더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 친구를 단골 고객으로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그 친구 때문에 이 집을 모임의 장소로 정하였다. 정말 오래 동안 이 집은 우리들의 모임터가 되었고, 시간이 흐르니 모임터는 안방처럼 편안함을 주었다. 이런 것이 아줌마 사장이 하나도 없다는 바로 그의 재주이리라. 이제는 장성한 아들이 대학에 들어간다는 말도 들었다. 어쩌면 대학을 다닐 즈음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아줌마의 아들에게까지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 동기 친구들은 개인 모임의 자리도 아줌마네 식당을 이용하였나 보다. 어느 덧 음식을 팔기 보다는 술을 더 많이 파는 가게가 되어 있었다. 술을 더 많이 팔고부터는 숨어 있던 걸걸한 성격이 밖으로 튀어 나와서, 내가 더러 훔칠 놀랐었나 보다. 우리 동기 친구들과는 더 가까워져서 스스럼없이 농담도 나눌 만큼 친숙해졌다.
모임의 장소를 새로 정해야 했다. 아줌마가 식당을 접고 노래방 사장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 그 식당에서 더 이상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다.
아줌마를 잘 아는 내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돈 많은 사람이 뒷돈을 대주어서 노래방 사업을 시작한다더라. 그러자 입이 거친 친구가 ’아따, 돈 많은 남자를 하나 물었구나.‘ 우리와 그 여 사장과의 맺어온 인간 관계로 아줌마 사장 앞에서는 그런 말까지는 꺼내지 못했지만, 입이 거친 친구가 한 말이 사실일 것이다. 나는 그냥 미소나 지으면서 듣기나 했지만 그 말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나와 가까웠던 친구는 어떤 남자가 돈을 대준 것이 맞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남자와 수시로 잠자리도 같이 한다는 말도 했다. 그랬었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장사, 술장사를 하면서 살아오느라. 푸른 보리가 출렁거리는 들녁을 바라보던 시절의 앳된 소녀가 이때까지 살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윙윙거리는 기계소리와 덜거덕거리는 배틀의 소음 속에서 백마 탄 왕자를 꿈꾸던 처녀는 아니지 않는가. 음식과 술을 팔면서 세상의 온갖 풍상를 겪으면서 살아온 아줌마인데, 비도 오고, 눈도 오는 세상 풍파에 때묻고 닳아빠진 아줌마로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길었는데---. 그래도 간간이 시골 동네를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삶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해주었다. 우리는 월례회 모임의 장소는 옮겼지만 더러더러 노래방도 찾아갔다. 그럴 때마다 여전히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그날은 노래방을 모임의 장소로 정해놓고, 내가 너무 일찍 나갔었는지, 아니면 노래방에서 모임이 끝난 뒤였는지는 기억에 삼삼하다, 하여간에 테이블에서 아줌마 사장과 나는 마주 앉아 있었다. 맥주 잔을 홀짝이면서, 자기가 자랐던 시골마을 이야기를 했다. 나는 글의 앞에 표현한 시골의 정경은 이때 그녀가 한 말을 그림으로 그려본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농막에 나타나는 동네 오빠가 있었어. 그날은, 보리가 우리의 허리까지 자라서 온 들녘을 덮고 있던 그날에, 오빠가 자전거를 태워주겠다고 하더라. 날이 어둑해오는데도, 나는 겁 없이 뒷자리에 걸터 앉았어. 오빠는 개울 둑 길을 신나게 달려서 산 골짜기 쪽으로 마구 달려가더라. 나도 신이 났고 ------. 골짜기 입구에는 보리밭 가운데에 바위들도 군데군데 있고, 기분이 이상하게 달아오르면서 싫지 않더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다아 알면서.“
그리고는 깔깔 웃더니 맥주잔을 들고 한모금 들이켰다.
그 이야기가 내게는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자란 시골마을을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은 넓디 넓은 들녘의 한 가운데여서 내 상상력이 그녀의 말을 따라는 갔지만 더 이상 넓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아 알면서‘라는 말의 뜻은 알고 있었다, 지금껏 그 말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나의 상상력이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로 느꼈는지 모르겠다.
아줌마 사장도 왜 그 말을 하였을까. 우리는 누구나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어린 시절의 고향 마을을 생각한다지 않는가. 그랬을까. 아줌마 사장은 우리끼리 나누었던 말처럼 돈 많은 남자를 만났더라도 허한 마음의 구석은 메워지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는 우리 모임이 노래방을 찾아가는 일도 뜨음해지면서, 아줌마 사장의 소식도 나에게서 멀어졌다.
여러 해가 지났다. 이 소식도 내 친구가 전해 주었다.
”그 여사장이 가든 급의 고깃집을 차려서 손님이 바글바글한데. 돈을 엄청 벌어서 이제는 갑부급이래.“
나는 잊고 있었던 아줌마 사장의 소식을 친구로부터 들었다. 골프장으로 가는 길목이고, 팔공산으로 가려면 지나쳐아 함으로 골프치는 사람들과 산행을 하는 사람을 고객으로 하여 돈을 엄청 많이 벌었다는 소식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음식장사에는 소질이 있어‘ 하였다. 예전의 동기회 회장님이 잘 지내느냐면 내 안부를 묻더라면서 나더러 ’시간이 나면 같이 한 번 가보자고 했다. 그러자고 했지만 나는 아직 식사를 하려 멀리까지 나가는데는 익숙하지 않아서 차일피일 하기만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팔공산을 열심히 찾아다니던 때였지만, 혼자서 식사를 하러 가는 일이 몸에 익지 않아서 버스 차창너머로 눈길만 주곤했다. 마음 속으로는 한 번 쯤 들려보고 싶었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았다.
돈을 벌기는 많이 벌었었나 보다. 수필을 쓰는 어떤 여자분이 그 여사장 이야기를 하였다. 예전의 삭당 아줌마라면 여자 수필가님이 절대로 알 수 없는 아줌마의 이름이다. 요즘 골프도 치러다니면서 상류층 행세를 한다나, 수필가 님의 말투가 아니꼽다는 투여서 나는 아예 아는 척 하지 않고 듣기만 했다. 그 여사장이 살아온 행로를 생각해보면 말투며 행동거지가 뻔할 것이다. 교양이 베어있는 말씨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고향 오빠의 자전거 이야기가 떠올랐다. 말투는 거칠더라도,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아오느라 때가 묻었지만 내가 자란 고향 마을에서 자전거를 탔던 일을 잊지 못하는 여린 마음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한 번은 친구의 차를 타고 모처럼 멀리 아줌마 사장네의 고기집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내 눈에는 진짜로 반가워하면서 나를 맞아주었다. 홀이 빽빽하도록 손님들이 가득 찼는데, 그 중에서도 유독 우리 곁에 와서 온갖 친절을 베풀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더러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이렇게 맞아주는 걸 보니, 소문처럼 나쁜 여자는 아닌 것 같다고 하니, 그 친구 왈 ’이 순진한 친구야 이것이 이집 사장의 장사 수법이잖아. 너처럼 세상사는 법을 모르는 넘한테 감동 먹이고---, 이런 친절 때문에 손님이 와글와글 하잖아‘ 했다. 이 친구는 평소에도 나더러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른다고 핀잔을 주곤하는 친구이다.
친절하구나 하는 나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여전히 흉흉한 소문들이 떠돌았다. 이번에는 우 몰려서 커피집이나 찾아다니는 대구의 웬만한 유한녀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다고 하니, 소문의 내용이 신문에 나도 될 만큼 흥미로운 것이거나. 아니면 돈을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질시의 대상이 되었거나 일 것이다.
이번에 떠도는 소문은 ’예술가와 눈이 맞아서, 용돈까지 대어준다나. 팔공산 자락에서 그림을 그린다고 예술가로 불린다고 했다. 그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아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예술가는 무슨 똥통에 빠져죽을 예술가냐.‘ 소문을 전해주는 사람이 입을 비쭉하면서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소문이 더욱 슬프게 들리는 것은 그 예술가라는 남자의 부인도 어엿이 있다나 남편이 돈을 뜯어오니 마누라도 모른 척 한다더라. 별 희얀한 일도 있제.’
정말 소문이 가관인 것은 여사장이 그 사실을 눈치채고, 이제는 만나지 말자면서 용돈을 안주니까. 예술가가 주먹을 얼마나 휘둘렀는지 눈두덩이 퉁퉁 붓고, 얼굴은 온통 멍투성이가 되어서 한참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를 못 하였단다.‘ 나에게 말을 전하는 수필가님도 그 집 부근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들었는 말이라고 하니 믿어야 할 지는 모를 일이리라. 그래도 이런 소문이 떠돈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돈만 많다 뿐이지 저질 중의 저질 인간이라는 혐오성 폄하가 담긴 말이다. 그래도 그쪽 소식은 어느 만큼 정통하다는 내 친구더러 내가 들은 말을 물어 보았더니, 허허, 웃으면서 요즘은 자기도 그집에 가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하였다.
세월이 지나가니 그런 소문도 잠잠해졌다. 여사장을 잊고 지내면서 다시 몇 년을 흘러보냈다. 나는 흉한 소문이 돌 때마다 이상하리만치 동네 오빠의 자전거 뒤에 탔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일말의 동정심이라고 할까. 철 없던 시골 여자애가 이처럼 악녀로 변신해버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민중들이 자기 만족을 얻으려고 들려주는 한 토막의 민담처럼 들렸다. 그래서 ’뭐 그랬을라구.‘라며 반신반의 했다.
살아가기 고달픈 서민들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한다. 돈이 많거나 성공한 사람이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야기를 듣기 좋아한다. 들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할 때는 더 많은 악담을 보태서 전한다. 나에게까지 이야기가 전해올 때는 많이 부풀려진 것이 아닐까라고도 생각해보지만, 나도 들은 사실로만 알 수밖에 없다.
내 친구는 자기도 놀랐다면서 말했다.
”고깃집 여사장이 치매로 요양병원에 깄데.“
”무슨 소리이고, 그 사장 나이가 얼만데, 우리보다 저 아래인데.“
”몰라, 하여간에 아들이 요양병원에 입원시켜 버렸데“
”진짜 치매가 왔어,“
”나도 몰라, 고깃집 운영권을 아들에게 넘겼는데, 이것저것 자꾸 간섭한다고 그랬다나 뭐.“
나는 친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한참 동안 멍한 기분이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그 여사장을 알 때는 정말 아줌마 사장일 때다. 중년 나이이었으리라. 많은 세월이 흘렀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온갖 풍상을 겪었겠지만, 치매라서 요양병원이라니------, 그것도 아들이 보내버렸다니. 인생이 갑자기 서글퍼진다. 인생이 아무리 서글프더라도 이 또한 내 일이 아니니 쉬이 잊어버렸다.
얼마 전에 친구는 다시 이런 말을 전해주었다. 나는 친구의 말은 사실이라고 믿는다.
주변에서 아무리 그래도 엄마를 치매로 몰아 요양병원에 보낸 것은 아들로서 할 짓이 아니다 라고 하여, 지금은 다시 퇴원하여 집에 있다더라. 이 말도 들은 지가 1-2년은 지난 듯하다. 다음에는 또 어떤 소문이 들려올지 모르겠다.
이런 것을 무엇이라고 해야할까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해야할까.
인생이긴 하지만, 나는 아줌마 사장의 삶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이것이 인생이다‘ 라는 한 마디에 인생 전부를 구겨넣어 버린다면 인생이 너무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
시골처녀가 공녀 생활을 거치고, 남편마저 일찍 죽어서, 밑바닥 인생부터 쌓아올린 것이 그의 인생이다. 그의 가슴에 무슨 욕망이 꿈틀거렸을까. 그의 삶의 행보를 보면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하였으리라.
돈을 많이 벌었다고 욕망이 채워졌을까. 욕망을 처리하기에는 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 메우지 못하였기 때문에 메우지 못한 자리를 메꾸려 동네 오빠의 자전거를 기억하는 것이 아닐까. 사는 일은 복잡하다, 따라서 인생을 꾸리기란 복잡하고 어렵다. 사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이것이 인생이다.‘라고 말하는 것일게다.